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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써본 역사 이야기
1. 당나라 여인들은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았다.성세천하 속 여인들은 모두 크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귀걸이를 착용한 채로 등장한다.하지만 풍속화 등을 통해 드러나는 당나라 여성들의 모습을 보면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당나라는 한족 + 선비족 계열의 국가지만, 문화적으로는 한화(漢化)가 된 상태라 몸에 상처를 내는 방식은 꾸미기는 예법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재밌게도 한반도에서는 중국과는 달리 조선 시대 중기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귀걸이를 차는 게 유행했다.같은 의미에서 문신 등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마에 그리는 연꽃 모양의 그림은 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화점(花鈿)이라고 해서 주사(朱砂, 도장 찍을 때 묻히는 그 빨간 거를 만드는 광물)가 들어간 물감으로 그리는 거였고, 당연히 손이나 손수건 등으로 박박 문지르면 지워졌다.2. 매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위귀비이름은 위규(韋珪). 위귀비는 이세민(당태종)의 4비(귀비, 숙비, 덕비, 현비) 중 으뜸이었고 장손황후가 사망한 후, 그 자리를 대신해 후궁을 이끈 인물이었는데 아름답고 현명했으며 의외로 별 문제 없이 후궁을 이끌고 나갔으며 슬하엔 2명의 딸과 1명의 아들도 두었다. 이세민이 사망한 후에는 '기국태비(奇國太妃)'로 임명되고 봉토가 주어져서 거기서 살았고, 종종 이치(당고종)가 이세민의 묘에 참배하는 걸 따라가곤 했다. 그러다가 이치가 태산에 봉산제를 드리러 갔을 때 그만 노환으로 병이 나 앓았고, 결국 자신의 집에서 69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즉, 아주 평안하게 잘 살았고 오래 살았다. 근데 무미랑전기나 성세천하 같은 매체에서 계속 악독한 역할만 부여되고 있다.또 위귀비는 수나라의 민부상서였던 '이자웅(李子雄)'의 아들인 이효민(李孝珉)과 결혼했으나, 시아버지가 수양제에 대항하는 양현감의 반란에 동참하는 바람에 시댁이 박살났고, 나중에 이세민이 '명문가와 혼인한다'는 명분으로 데려가 아내로 삼았다. 위귀비와 전남편 사이에는 딸도 있었는데 이세민은 이 딸을 황실의 딸로 인정해 '정양현주(定襄縣主)'로 삼고 나중에 군인인 아사나충(阿史那忠)에게 시집보냈다. (게임 속 월아는 아마도 정양현주의 존재에서 가져온 듯)3. 이세민은 언제 고구려를 공격했을까?성세천하에서 이세민은 '내 편 안 들어주고 관심도 안 가지는 황제'에 불과하지만 한국사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 인물로 유명하다. 근데 성세천하에서는 시점이 무원조의 궁중 생활로 맞춰져 있기에 고구려 원정의 언급이 사실상 없다. 그래서 이세민이 언제 장안을 비우고 떠났는지 유추하기가 어려운데...이세민은 칭심과의 일은 물론이고, 하는 짓이 안하무인 격이었던 태자 이승건을 643년 4월 1일 폐위한 뒤 검주(黔州)로 유배 보냈고, 그 후 유배지로 떠났던 이승건은 2년 후인 645년 1월에 사망했으며 곧바로 이치가 태자가 되었다. 즉, 이세민은 맏아들이 사망하고 1개월 뒤인 645년 2월에 군사를 일으켰고, 이치는 그 때 태자로 책봉되어 장안에 남아 국사를 처리했다.그래서, 사실 성세천하에서의 태자 이승건의 몰락은 시기적으로 너무 빨리 나온 셈이다. 643년에 이승건이 폐위되고 645년에 태종이 원정을 떠난 후 부상으로 649년에 사망(제 16장 운명의 새 장)하기 때문에, 무원조와 고양공주와의 만남(제 5장 냉궁의 혼), 이태와 이치의 경쟁(제 6장 권력 싸움), 여주무씨 예언 사건(제 8장 위험한 예언), 위귀비의 몰락(제 10장 귀비의 연회), 고양공주와 편기의 사건(제 12장 군주의 총애), 양숙비 제거(제 14장 생사의 갈림길)가 고작 2년 만에 전부 순차적으로 발생해야 하기 때문이다.4. 성세천하는 '궁녀가 살아남아 황제가 되는 스토리'다?스트리머들이 게임할 때 으레 영상 제목에 '궁녀'라고 써 놓는데 아니다. 무원조는 아예 들어올 때부터 재인(才人)의 자격으로 들어오는데, 재인은 5품에 해당하며, 궁녀가 아니라 후궁, 즉 황제의 부인 자격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궁녀라고 볼 수 없다. 애초에 궁녀는 보통 이름 그대로 궁녀(宮女) 내지는 여관(女官)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후궁이 아니기에 품계가 없다.사족으로, 무원조가 처음 입궁할 때, 한 줄 당 4명 씩, 총 12명의 새로운 재인들이 들어오는데 황제의 후궁 중 27세부(世婦), 즉 첩여(婕妤), 미인(美人), 재인(才人)은 각 직책에 따라 9명 씩, 총 '27명'이 한계였다. 따라서 다른 품계의 인원이 섞인 게 아닌 재인만 12명 들어오는 건 사실 오류라고 볼 수 있다.5. 이순풍은 정말로 예언을 빌미로 무씨들을 죽이려 들었나?의외로 아니며 오히려 반대였다. 신당서(新唐書)에 나와 있는 해당 예언 관련 내용을 보면 타임 라인이 아래와 같다.===이세민이 어느 날 비밀스러운 예언서(秘讖)를 얻었음. 거기엔 『당이 약해지면 무씨 여인이 왕이 된다(唐中弱,有女武代王)』 라고 적혀 있었음↓이세민은 이순풍에게 물었고 이순풍은 "그 징조는 이미 이뤄져 (왕이 될 무씨는) 궁중에 있고, 40년 후에 왕이 되어 당 황실의 자손을 거의 없앨 것입니다" 라고 말함↓놀란 이세민은 "내가 그 인물을 죽이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음↓이순풍은 "하늘이 정한 운수는 바꿀 수 없어서 그 사람을 죽이는데 실패하면 엄한 사람만 죽이게 되는 거고, 폐하께서 총애 하는 그 여인의 성품은 40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많이 너그러워져서 나라를 바꿔도 당의 후손들을 살려두겠지만, 만약 죽이면 또 다른 젊은 무씨가 등장할 거고 그 땐 정말로 씨가 말리게 된다" 며 이세민을 말렸음.===성세천하에서는 "특정 예언을 깨려고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그 예언의 실현을 앞당긴다" 는 일종의 예언 관련 클리셰를 예시로 들어 설득하는 장면을 넣어 무원조가 이순풍을 납득 시켜 이세민을 말리게 한 거라는 일종의 창작 스토리를 슬쩍 끼워 넣었다.6. 태자 이승건은 왜 쫓겨났나?게임 속에서는 뭔가 칭심만 바라보는 로맨티스트처럼 그려놨지만, 실제 이승건은 조선의 양녕대군(이방원의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형)과 비슷했다. 술도 좋아하고, 풍류를 좋아하고 특히나 사냥을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641년에는 돌궐(튀르크)인들을 대거 동궁에 들이면서 동궁이 사람들과 술판으로 엉망이 되기도 했고 돌궐인들의 변발을 따라하고, 돌궐의 복장을 입으며 5개의 늑대 머리가 그려진 돌궐 깃발을 꽂고 천막에서 양고기와 말고기를 뜯으면서 "나는 곧 천가한(북방민족이 왕을 부르는 칭호)이 될 거고, 그러면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에 토를 달려는 자가 있다면 죽일 것이고, 한 500명 정도 죽고 나서도 누가 또 토를 달지 지켜보겠다" 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즉, 칭심과의 연분은 이승건이 일으킨 수많은 사건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게임 속 순애에 속지 말자. (ㅋㅋ)7. 음현비의 전 남편 및 반역 스토리는 사실인가?아니다. 하지만 음비(陰妃)의 원래 스토리도 게임 속 스토리만큼이나 비참하긴 하다. 음씨 가문은 전 왕조였던 수나라의 공신 가문이었다. 음비의 아버지인 음세사(陰世師)는 표기장군으로서 대흥성(大興城), 훗날 장안성으로 불리는 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李淵)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연의 다섯째 아들인 이지운(李智雲)을 살해하고 이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를 파헤치는 등 원한을 차곡차곡 쌓았다. 결국 당나라가 세워지면서 음세사는 처형되었고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 딸인 음씨는 이세민의 아내가 되어 '음비'로 불렸다.※ 음씨는 귀비, 숙비, 덕비, 현비 중 어디에 속했는지 알 수 없다.(무미랑전기에 등장하는 제왕 이우)그러나 이세민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우(李祐)와 음비의 남동생인 음홍지(陰弘智)가 이우의 봉토인 제주(濟州, 오늘날의 산둥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군을 이끌고 나타난 이적(이세적)에게 진압되었다. 음홍지는 처형되고, 이우는 장안으로 끌려와 자결했으며 음비는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비(妃)에서 빈(嬪)으로 강등되었다.※ 이우는 이세민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즉, 이태의 이복동생이고, 이치의 이복형인 셈.그럼 여기서 드는 의문점, 이세민이 자기가 죽인 형의 아내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건 날조인가?(무미랑전기에 등장한 양숙비)아니다. 의외지만, 정말로 있었던 일이다. 이세민은 공이 많은 자신이 태자가 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역으로 제거될 것으로 보이자 결국 현무문에서 태자였던 이건성과 형님인 제왕(濟王) 이원길을 죽였고, 아버지 고조(이연)를 강제로 태상황으로 올린 뒤 자신이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이세민은 이원길의 아내였던 '양씨'는 물론이고 이원길이 낳은 딸들을 모두 궁으로 데려와 살게 했고, 양씨와의 사이에선 14번째 아들인 '이명(李明)'이 태어났다. 태종이 나름 아낀 여인이었는지, 문덕황후가 죽은 이후 양씨를 황후로 삼으려 했지만 조정의 반대를 받아 무산되었다. 나중에 죽은 옛 남편인 이원길이 초왕(巢王)으로 봉해지자 덩달아 초왕비(巢王妃)로 불렸지만 진짜로 비로 임명된 건 아니라서 그냥 궁녀나 낮은 후궁처럼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들인 이명도 분명 이세민과 양씨 사이의 아들이지만 '이원길'의 양자로 입적되었던 걸 보면 입지가 형편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이 초왕비 양씨의 이미지가 드라마 <무미랑전기>에서는 양숙비로, <성세천하>에서는 음현비에게 부여된 것이다.8. 그럼 4비 중에서 덕비는 어디로 갔나?성세천하: 양첩여(훗날의 양숙비)가 이세민을 위해 직접 향낭을 만들었는데 이세민은 그걸 '덕비'에게 줘버렸다. 결국 열받은 양첩여는 덕비에게 그걸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던 중에 가위로 덕비의 복부를 찔러 살해했고, 양첩여의 쌍둥이 동생이 언니를 도와 덕비의 시체를 호수에 던져 넣어 덕비가 호수에서 익사한 것으로 조작했다.실제: '덕비 연씨(燕氏)'라는 인물이 존재하는데 이세민과 혼인한 뒤 현비가 되었고, 이세민의 11번째 아들인 이정(李貞)을 낳은 후 승급해 덕비가 되었다. 이세민이 죽고난 후 아들 이정이 월왕(越王)이 되고 자신은 월국태비(越國太妃)가 되자 아들의 봉토로 이동해 살다가, 황제 이치(당고종)가 태산에 제사를 지내러 갔을 때, 기국태비(위귀비)와 함께 참석했다. 이후 기국태비처럼 곧 세상을 떠났다.
작성자 : 성갤러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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