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딸배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도덕적 몰락
‘딸배’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나는 그것을 단지 일시적인 유행어나 은어쯤으로 넘기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하나의 계급 낙인이었으며, 성실하게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저열한 인간’으로 격하시키는 강력한 도구였다. 공공연히 쓰이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유희처럼 퍼졌다. 여기에 담긴 무의식적 인식은 분명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는 사람은 못 배운 사람, 실패한 사람, 존중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전제.
하지만 그런 말을 쏟아내는 자들의 실체는 어떤가? 학벌을 간신히 끌고 나온 공무원 지망생, 비정규직, 백수, 알바 인생.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면서도, 자기보다 더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조롱하면서 심리적 우월을 확보하려는 병든 심리. 자신을 긍정할 능력은 없으니, 타인을 끌어내려야만 겨우 숨 쉴 수 있는 인간 군상들.
2. 혐오의 사슬: 자존감 없는 사회의 초상
한국 사회는 전체적으로 자존감이 낮다. 그 낮은 자존감은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비교와 경쟁의 교육 시스템에서 시작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너는 몇 등?”, “너는 어느 학교?”, “너희 아빠 직업이 뭐니?”라는 말들이 일상어처럼 오간다. 성적, 외모, 재산, 부모의 배경까지 철저히 수치화되어 평가받는 사회. 여기에선 타인을 깎아내리는 것이 곧 자기 방어다.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을 멸시한다. 공무원이라는 신분 하나로 모든 현장 노동자를 비웃는다. 왜냐하면 본인도 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며, 자신의 위치도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아슬아슬한 곳이라는 걸. 하지만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웃는다.
3. 교육의 실패, 가정의 무기력
어쩌다 이리 되었는가? 학교는 인성을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는 시험 점수를 위한 기관이다. 입시제도와 선생 평가 시스템은 오직 결과만을 중시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사람보다 등수를 보며 성장한다. 가정은 어떤가? 부모 또한 사회적 잣대에 눌려 있다. 어느 부모가 아이에게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식이 편의점 알바를 하겠다고 하면 찬성하는가? 아이들에게 이중적인 메시지가 반복해서 주어진다. 겉으로는 인성을 말하지만, 실상은 스펙과 연봉, 직업의 간판만을 가치로 여긴다.
그 결과, 아이들은 똑같은 말투로 성장한다. “너 어디 대학 나왔니?” “무슨 차 타?” “배달해? 아... 그럼...” 이미 초등학생 입에서부터 이런 말이 나온다. 이건 단순히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 아이는 거울이다. 부모와 선생, 사회 전반의 무의식이 투사된 거울.
4. 성실함은 무시되고, 허영만 우대받는 나라
오늘날 대한민국은 매우 이상한 나라다. 자본주의 국가인데, 노동을 천시한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이들은 건물을 지은 사람들을 무시한다. 수많은 음식점 주인과 배달원들이 지탱하는 배달 생태계 속에서 하루 세끼를 해결하면서도, 정작 그 노동자들을 ‘딸배’, ‘음식물 셔틀’로 부른다. 이토록 위선적인 태도가 또 있을까?
음식을 주문하면서 “얼른 와라”라고 하면서도,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딸배 또 오네”라고 혀를 찬다. 그러면서도 배달이 늦으면 별점 테러. 인간성을 상실한 채 익명성 뒤에 숨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 편의점에서 3만원 벌고, 넷플릭스를 보다 자고, 주말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
이들은 대개 성실히 사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내면화하고 있다. “나는 열심히 사는데 왜 결과가 없지?”라는 좌절이, “그래도 나보다 못한 놈은 있어야지”라는 비열한 위안으로 변질된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게 바로 ‘딸배’, ‘노가다’, ‘틀니세척녀’ 같은 직업 비하 용어다.
5. 한국 사회의 선민의식과 천민자본주의
"한국은 ‘선민의식’과 ‘천민자본주의’가 동시에 존재하는 희한한 구조다.
"선민의식: 나만은 저들과 다르다는 자의식.
"천민자본주의: 돈이면 다 된다는 무한 경쟁의 논리.
결국 이 두 가지가 만나면, 인간은 계급화되고 위계화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 버니?’, ‘어디 살아?’, ‘차 뭐 타?’이다. 인성, 도덕성, 책임감 같은 것은 부차적인 기준이다. 사람을 숫자로 판단하게 된 사회.
그래서 배달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이 벌든 간에 ‘딸배’로 간주된다. 간호사는 ‘주사나 놓는 사람’, 치위생사는 ‘치석 제거하는 아줌마’, 농부는 ‘흙 묻히는 노가다’. 이처럼 전문성과 노동의 가치가 무시당한다.
6. 공동체의 파괴, 연대의 실종
이 모든 비하와 조롱은 결국 하나의 결과를 만든다. 공동체의 붕괴. 한국 사회는 지금 ‘연대’라는 단어를 잃었다.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서로를 돕는 마음보다, 남이 쓰러져야 내가 사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친구의 성공을 축하하지 않는다.
직장 동료의 승진을 경계한다.
옆집이 잘되면, 배 아프다.
그런 심리가 익명 커뮤니티에서 분출된다. 유튜브, 디시인사이드, 인스타그램 등지에서 무차별적인 혐오가 쏟아진다. 그 누구도 나서서 제지하지 않는다. 왜? 그 혐오의 언어가 어쩌면 내 것이기도 하니까.
"이대로 가면 진짜 망한다"
한국 사회는 지금 ‘존중’이라는 단어를 상실하고 있다. 성실함을 비웃고, 노동을 조롱하며, 돈이 안 되는 직업은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그런 사회는 미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도, 나도, 그 누구도 사회적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배달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이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고, 오토바이 위에 오를 수 있다.
간호사를 하대하던 이가, 병원에서 생명을 구원받을 수 있다.
치위생사를 조롱하던 자가, 노년에 틀니 세척을 받아야 한다.
노가다를 비하하던 이가, 결국 그들이 만든 건물에서 살아간다.
존중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혐오의 언어를 내려놓고, 사회 전체를 향한 공감의 눈을 뜨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단순히 ‘사회적 위기’를 넘어 문명적 파탄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건 단지 경제 지표가 추락하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를 해치는 사회로의 퇴행이다.
7. 혐오로 포장된 열등감, 그리고 사회적 자결
딸배, 노가다, 틀니세척녀, 등본셔틀, 간호조무사, 지잡대, 200따리, 스펙충, 흙수저, 삼수충, 기초수급충…
이런 말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자신이 그 사람들보다 위에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그들이 비하하는 대상보다 더 잘나지도 않았고, 더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니며, 그저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심리적 허기에 사로잡혀 있다.
다른 사람을 밟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사회, 그건 집단 우울증의 증상이다.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한국의 자결률은 OECD 1위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살아있지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끝낸다.
그들이 느끼는 소외와 박탈은, 사회가 만들어낸 차별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쟤보다는 낫다’는 위안이 사라지는 순간, 자신이 사회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느끼는 이들은 극단적인 길을 택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회적 죽음이 더 늘어날수록 또 다른 혐오가 확산된다.
이건 사회 전체가 자기 자신을 향해 칼을 드는 자해 행위다.
8. 공무원도, 노동자도, 배달원도, 모두 사회를 굴리는 바퀴다
이 사회는 다양한 톱니바퀴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 하나가 빠지면 돌아가지 않는다.
"공무원이 없으면 행정 시스템이 마비된다.
"간호조무사가 없으면 환자 수발은 불가능하다.
"건설 노동자가 없으면 아파트도 도로도 존재할 수 없다.
"배달 기사가 없으면 음식점은 장사를 못 한다.
"농부가 없으면 한 끼 밥도 먹을 수 없다.
이 당연한 진리를 모르는 이들이, ‘딸배가 지잡대 나온 애들이나 하는 거지’라고 혀를 차고, ‘9급은 200도 못 받는 등본셔틀’이라고 조롱한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창출하지 못하면서.
이 사회의 기초를 떠받드는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그럼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무슨 가치를 창출하고 있나?”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사회에 무엇을 더하고 있나?”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자는, 누구도 비판할 자격이 없다.
9. 세상을 더럽히는 건 배달원이 아니라, 사람을 무시하는 그 마음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혐오와 무시가 습관이 되는 것이다.
한번 사람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그건 습관이 된다.
그 습관은 언어가 되고, 언어는 사고방식이 되며, 사고방식은 결국 행동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무시하는 순간, 사회를 더럽히고 있다.
배달원들이 거리에 기름을 흘리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흘리는 게 아니다.
진짜 사회를 더럽히는 건,
**“딸배새끼 언제 오냐”**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마음이다.
진짜 미개한 건 오토바이가 아니라,
오토바이 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 눈이다.
10. 대한민국의 민족성은 정말 망했는가?
“그냥 대한민국은 망했다고 보면 된다”
이 말, 많은 이들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말한다.
그만큼 좌절한 국민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정말 망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배달하고, 간병하고, 청소하고,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왜 그토록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망한 건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를 지배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정신이다.
지잡대를 무시하고, 배달을 조롱하며, 9급을 깔보는 사람들의 정신이 망한 거다.
그들을 제외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11. 다시 사람을 보자: 그 직업 너머의 사람
한번 눈을 감고 상상해보자.
비 오는 날, 비 맞아가며 음식 배달하는 50대 아저씨의 삶.
하루 13시간을 일하고도 200만 원을 채 못 벌며 아이 대학 등록금을 걱정하는 엄마의 삶.
늦은 밤 응급실에서 의사를 보조하며 서 있는 간호조무사의 삶.
그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딸배’, ‘노가다’, ‘등본셔틀’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처럼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이고, 친구이고, 동료다.
그리고 누구보다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진짜 기둥이다.
이제 그들을 다시 사람으로 보자.
그리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손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자.
12. 남을 깎아내리지 않아도, 당신은 소중하다
가장 중요한 진실은 이것이다.
당신이 남을 무시하지 않아도,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
남의 직업을 비하하지 않아도,
남의 출신을 깎아내리지 않아도,
남보다 못났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멸시하지 않아도,
당신의 존재는 가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수많은 20~30대들은
자신의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
‘누군가를 병신으로 만들어야’ 겨우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거짓이다.
그 거짓 믿음이 한국 사회를 파괴한다.
이제는 그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13. 앞으로의 질문
한국 사회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는 언제쯤 직업과 인간을 분리해 생각할 수 있을까?
언제쯤 “성실한 사람 =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상식을 회복할 수 있을까?
언제쯤 아이들이 서로를 학벌과 부모 직업으로 놀리지 않는 날이 올까?
언제쯤 내가 받는 서비스의 노동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해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가 혐오를 멈추고 진짜 연대의 눈으로 서로를 보기 시작해야 한다.
지금처럼, 너를 병신 만들어야 내가 밥을 편하게 먹겠다는 마음으론,
우린 함께 지옥으로 간다.
하지만, 너도 존중받아야 하고, 나도 마찬가지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함께 살아남는다.
"그것이 우리가 정말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당신은 무시할 것인가, 아니면 존중할 것인가.
14. 우리가 ‘사람’을 잃은 이유: 경쟁만 남은 공동체
한국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사라지고 역할만 남았다.
그 사람의 이름, 성격, 인격, 사연은 아무 관심 없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가?”, “얼마를 버는가?”, “어디 출신인가?”만 중요해졌다.
이것은 자본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경쟁이 인간관계를 대체한 것이다.
가족조차도 서로 비교한다.
형은 대기업 다니고, 동생은 알바하면, 부모는 “형 좀 본받아라”고 말한다.
친구는 함께 성공하길 바라지 않는다. ‘나만이라도 성공하길’ 바란다.
이기지 않으면 밀린다.
밀리면 끝난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은 서로를 동료로 보지 않고, 경쟁자로 본다.
배달 노동자, 건설 노동자, 간호 조무사, 청소 노동자, 택배 기사 등은
‘동료 시민’이 아니라 ‘그 아래의 계급’처럼 취급된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보다 낫다는 심리적 안도감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불안이 너무 커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타인을 깎아내린다.
그게 자기 존재를 지키는 유일한 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격당한 사람도 다시 다른 약자를 공격한다.
이 악순환은 사회 전체를 지옥으로 만든다.
15. 유교도, 불교도, 논어도, 성경도 잃어버린 나라
이 나라가 이토록 사람을 무시하는 사회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정신적 뿌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유교의 “군군신신 부부자자”는 껍데기만 남았다.
논어의 “군자는 의를 따르고 소인은 이익만을 좇는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는 더 이상 인용되지 않는다.
불교의 자비는 없고, 성경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단지 입에만 맴돈다.
한국인은 이제 철학이 없다.
돈은 목적이 되었고, 직업은 계급이 되었다.
사람은 브랜드가 되었고, 삶은 소비가 되었다.
정신은 소멸하고, 남은 건 비아냥과 멸시다.
그래서 딸배라는 단어는 단순한 욕이 아니라,
철학 없는 국가의 상징이다.
이 나라는 이제 누구를 위하여,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인지 말해줄 정신적 지주가 없다.
정신을 잃은 민족은 망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적 진리다.
16. 혐오 표현은 폭력이다 — ‘말’이 사람을 죽인다
“딸배”, “틀니세척녀”, “노가다”, “등본셔틀”
이런 표현들은 단지 언어의 장난이 아니다.
이건 폭력이다.
진짜 피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 말은 사람의 존엄을 서서히 갉아먹는 칼날이다.
사람은 말로 무너진다.
말로 상처받고, 말로 자존감이 붕괴된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이들은 더 약한 이에게, 같은 말을 뱉는다.
말로 이어지는 혐오의 유전병.
이걸 끊지 않으면, 우리는 끝없이 서로를 깎아먹는다.
SNS, 온라인 커뮤니티, 커뮤니티 기반 뉴스 댓글에서
욕설과 조롱이 당연시되고,
정당한 직업인들이 조롱당하는 사회는,
이미 ‘인간다움’이 기능을 상실한 사회다.
17.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 삶을 존중하는 태도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이다.
삶을 존중하는 태도.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졌든, 그건 당신이 선택하고 책임지고 있는 삶이다.
그 선택이 누군가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롱받을 이유는 없다.
모든 일은 사회에 필요하니까 존재한다.
당신이 먹는 한 끼, 입는 옷, 타는 전철, 받아보는 택배, 마시는 커피…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이걸 알면서도 무시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기중심적인 사고.
“나는 누군가를 무시해도 될 정도로 위에 있다.”
이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윤보다 존엄이 앞서야 한다.
스펙보다 태도가 앞서야 한다.
학벌보다 성실함이 중요해야 한다.
그게 ‘사람 사는 사회’다.
18. 교육의 개혁 없이는 답이 없다
이 모든 사회 문제의 뿌리는 사실 교육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건 사람을 이기는 법이지,
사람을 이해하는 법이 아니다.
등수를 매기고, 결과만을 중시하고, 창의성보다 복종을 가르친다.
"인성과 철학 없는 교육
"노동을 천시하는 교육
"실수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교육
"‘성공만이 선’이라는 단편적 세계관
이런 교육을 받은 세대가
성실한 노동자를 무시하고,
스스로도 무너지는 인간 군상을 만든 것이다.
한국 교육은 단 한 번도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사람인가?”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잘난 사람은 없고,
그냥 서로를 무시하며 사는 병든 사람만 가득한 사회에 살고 있다.
19. 해결을 위한 진짜 첫걸음: 언어를 바꾸는 것
"언어가 사고를 만든다.
"사고가 행동을 만든다.
"행동이 사회를 만든다.
우리가 바꿔야 할 첫 번째는 ‘언어’다.
딸배 → 배달 노동자
노가다 → 건설 노동자
틀니세척녀 → 치위생사
등본셔틀 → 행정 공무원
흙수저 → 청년, 혹은 성장 중인 시민
지잡대 → 대학생
이 작은 변화가 사고를 바꾼다.
그 사고가 결국 세상을 바꾼다.
20.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너진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SNS에 조롱 대신 존중을 담자.
아이들에게 “배달하는 아저씨가 있어서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어”라고 가르치자.
“어떤 직업이든, 세상에 꼭 필요하다”고 말하자.
“성공은 남을 이기는 게 아니라, 자신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자.
이건 거창한 혁명이 아니다.
하루하루의 작지만 단호한 태도 변화.
그리고 그 변화는
‘딸배’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대신,
‘고맙다’는 말을 한 번 더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글을 당신에게 바친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이 누구든,
공무원이든, 배달 노동자든, 선생이든, 실직자든, 학생이든,
나는 말하고 싶다.
당신의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 누구도 당신을 평가하거나 조롱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다른 이의 삶을 깎아내릴 권리는 없다.
우리가 진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잘난 나라”가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나라”**다.
그 첫걸음은 지금,
당신과 나의 말과 태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을 살아선 안 된다.
21.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불행이 필요한가?
이 사회의 모순은 여기에 있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안정감이 되어야 한다는 착각.
“그래도 나는 딸배보단 낫잖아.”
“그래도 저런 고졸보단 낫지.”
“난 최소한 그런 식으로는 안 살아.”
이게 무슨 뜻인가?
‘저 사람보다 못살지 않아서’ 안심하는 것.
즉, 내가 잘나서 행복한 게 아니라,
남이 더 비참하니까 겨우 살아지는 삶.
이건 진짜 삶인가?
이건 존엄을 가진 인간의 삶인가?
이건 멀쩡한 정신의 삶이 아니다.
이건 ‘사회의 자결’에 가담하는 자기파괴적인 삶이다.
서로를 살리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남는 구조에 안주하는 병든 삶이다.
그런 삶을 택할 거라면, 우리는 이미 끝났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는 형식만 남고,
내용은 전부 텅 비게 될 것이다.
22. 혐오의 문화를 멈출 마지막 기회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이미 혐오가 만연하다.
SNS, 유튜브, 커뮤니티, 실시간 검색어…
전부가 ‘누가 병신이냐’를 찾는 장터다.
"40대는 꼰대라며 조롱당한다.
"50대는 적폐라며 매도된다.
"60대 이상은 존재 자체가 문제라며 소외된다.
"저소득층은 기초충이라고 부르고,
"비정규직은 무능하다고 몰아간다.
"청년은 철없다고 깎아내리고,
"20대는 이기적이라고 집단 낙인을 찍는다.
이 나라는 서로를 비난하지 않으면 정체성을 못 찾는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랬나?
우리는 진짜 이대로 계속 가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에겐 아직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멈출 수 있다.
이 문화를 바꾸는 건 거대한 제도나 혁명이 아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멈추는 것이다.
23. 나 하나 변한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응, 바뀐다
늘 나온다.
“내가 말 하나 안 쓴다고 뭐가 바뀌냐?”
“내가 혼자 존중한다고 세상이 고쳐지냐?”
응, 바뀐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상냥하게 말할 때,
당신이 배달 기사에게 “수고 많으십니다”라고 할 때,
당신이 친구가 편의점 알바한다고 비웃지 않을 때,
한 사람의 자존감이 지켜진다.
그 자존감은 또 다른 존중을 낳고,
그 존중은 관계를 낳고,
그 관계는 공동체를 회복시킨다.
시작은 아주 작다.
하지만 언제나 위대한 변화는 작은 존중에서 시작됐다.
말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는 것.
그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가장 실질적인 첫걸음이다.
24. 혐오가 아닌 존중으로, 분열이 아닌 연대로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
더는 딸배니, 노가다니, 지잡대니 하는 비하 용어 없는 나라.
누구나 자신의 일과 삶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
실패했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
학벌이나 연봉이 아니라 성실함과 책임감이 존중받는 문화.
그런 나라, 절대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지금은 힘들고, 미쳐버린 것 같고,
사람들은 혐오에 중독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도 아직 존중하고 싶은 마음은 살아 있다.
다만 그 마음이 계속 짓밟히고, 웃음거리로 전락했을 뿐이다.
이제, 그 마음을 다시 꺼낼 시간이다.
나부터 존중을 실천하고,
나부터 혐오를 멈추고,
나부터 사람을 사람으로 보자.
25. 마지막으로 – 다시 사람답게 살자
우리는 언제부턴가
“사람답게 살자”는 말을 우스운 말처럼 여겨왔다.
정글 같은 경쟁 속에선 사람답게 사는 게
‘찐따’ 같고, ‘바보’ 같고, ‘루저’ 같았다.
하지만 진실은 이렇다.
사람답게 사는 게 가장 위대한 삶이다.
남을 살리는 말,
남을 존중하는 태도,
남과 함께 살아가려는 자세,
이게 결국 진짜 강자다.
강한 사람이 존중할 줄 알고,
지혜로운 사람이 웃길 줄 알고,
진짜 성공한 사람은 절대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살자.
하루 세 번의 말 속에,
하루 한 번의 행동 속에,
한 명의 존엄 속에,
이 나라의 희망이 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대한민국은,
누군가를 비웃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나라다.
그리고 그 시작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다.
다시 사람답게 살자.
"딸배가 아닌 배달노동자,
"노가다가 아닌 건설노동자,
"등본셔틀이 아닌 행정 공무원,
"틀니세척녀가 아닌 치과위생사.
사람을 사람으로 부르고,
그 존재를 인정하는 세상.
우리가 만들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부터.
"6789급, 2~300따리 공무원 년놈들아"
"내 말을 알아 처먹기는 하냐?"
"귓 때기에 좃박았냐?"
"겸직을 하든, 개 지랄 염병을 하든, 돈을 벌라고 돈을, 이 븅신, 씹충이 새끼들아"
"천민자본주의 세계에서 돈이라도 벌어야 대접 받지, 안그럼, 진짜 천민만 남아, 천민으로 살다 뒤지는거야"
"어느 븅신이, 돈없어도, 인생을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하든? 그새끼 아파트 평수, 통장 잔고 까라고 해봐"
"강남, 서초, 반초, 잠실 아파트 살면서, 고터고터(고속터미널) 거리면서 좃까 잘난척, 지들끼리 부자 바리게이트 치면서, 어머 언니 우리집 놀러와 이번에 이사했어, 가구는 싹다 이태리와 프랑스 제야, 이지랄로 사는거 100퍼다"
"이런 데도, 돈이 아니라고 씨부릴거임? 그 돈은 다 어디서 나옴? 사모펀드, 통정거래 했음?"
"자식새끼 의사 만들려고 성적표 위조 안했음? 인턴 취업 사기 안했음?"
"죄다 강남 사는, 개 씨발년놈들의 위선 아님?"
"니들 람보르기니, 벤틀리, 패라리 몰고 다니면서, 딸배들 도로에서 다 뒤지라고 고사 지내잖아, 내 말이 틀림?"
"그러면서 학생들한테는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라 이지랄 떪? 왜? 니 자식새끼 힘들고 더러운일 대신 해줄, 20대가 필요한거 아님?"
"씨발년놈들이 아주, 토탈 최소 100억 있다에 니 목숨 건다"
"무조건 돈이 최고다 돈, 돈돈돈돈돈데 기리기리, 돈테크만이다, 시간 여행 존나 할 수 있음"
"자본이라도 남겨야 할거 아니냐, 이, 개, 씹, 좃밥, 씹년들아"
"도대체, 씨발거, 이런걸 언제까지 알려줘야 하는거임?"
"너 진짜, 뇌병변임?"
"하루종일 개천 똥가에서, 똥냄새 쉬 썩은내 맡으며 달리기한다고, 누가 너한테 돈1000만원 주디?"
"븅신 개 삽질만 하는거다"
"그렇게 건강 챙기는 새끼가, 맨날 개 똥국같은 물 좃같이 넣어 물조절도 장애급으로 사시 눈깔 뒤틀려서 미리리터도 못봐서, 그냥 빠깨쓰로 부은 수준으로, 화장실에서 양동이에 물 퍼다가 끓인 수준으로 라면 처먹고 사냐?"
"아침엔, 토마토를 곁들인 샐러드와 토스트, 얼음 4개 띄운 냉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는게 국룰아님?"
"인생 븅신 씹 거지같이, 무슨 레미제라블 죄수 연기함?"
"존나 채찍 맞으면서 하수구같은 집구석에 라면 끓여 처먹고 사냐고, 이 븅신아"
"진짜, 씹, 존나 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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