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유튜브를 켰다. TV를 켜듯이. 무슨 대단한 철학을 가지고, 세상을 바꿀 열정으로, 아니면 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유튜브를 켠 게 아니었다. 그냥 퇴근 후, 공부 끝나고, 밥 먹으면서, 뭐라도 틀어놓고 싶어서. 시끄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그런 일상 속에서 네 방송이 걸렸던 것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너는 마치 내게 빚이라도 진 사람인 양 화를 낸다. "왜 채팅 안 치냐", "보기만 하면 뭐하냐", "고스트 시청자 극혐", "이럴 거면 보지 마라". 순간 화면 속 네 얼굴은 스트리머가 아니라, 고객에게 욕하는 점원, 아니면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삿대질하는 배우 같았다.
"잠깐, 이게 대체 무슨 코미디지?"
1. 유튜브는 ‘양방향 소통 플랫폼’이 아니다
스트리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여긴 TV가 아니라 유튜브라고, 양방향 소통을 하라고.” 그럴 수도 있겠다. 물론 유튜브나 트위치는 기술적으로 채팅이 가능하고, 도네이션도 가능하고, 슈퍼챗도 가능하다. 그런데, 잠깐만, 그 기능이 "의무"가 된 적은 없었다. 시청자가 '무조건' 채팅을 치고, '반드시' 도네를 해야 하는 룰은 없었다. 플랫폼 자체가 시청자에게 그렇게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 태도는 마치 "입장료를 안 내면 나가라"고 말하는 무대 주인 같다. 시청자를 ‘소통의 주체’가 아니라, ‘내 말에 박수치고 반응해주는 도구’로 본다. 네가 원하는 건 진짜 소통이 아니라, 반응이다. 그것도 네가 원하는 타이밍에,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네 입장에서는 ‘가만히 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야 할 유령 같은 존재지. 이건 아주 유치하고 이기적인 착각이다. 유튜브나 트위치가 '생방송 플랫폼'이라고 해서, 그게 곧 ‘공연 강요 플랫폼’이 되는 건 아니거든.
2. 시청자 = 소비자 = 고객이다
기억해야 할 사실 하나. 네 방송을 ‘본다’는 행위 자체가 시청자 입장에서는 소비다. 시간이라는 자원을 써서 너를 ‘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본다는 건, 그 콘텐츠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 받았다는 건, 이미 일차적인 성과다. 그런데 너는 “봐주는 건 아무 의미 없다”는 식으로 시청자의 시간을 조롱한다. 오히려 시간을 써서 네 방송을 보는 사람에게 “왜 채팅을 안 치냐”며 반문한다.
그럼 묻겠다. 너는 TV 보면서 MC한테 실시간으로 코멘트 다냐? 뉴스 앵커에게 “힘내세요”라고 실시간 댓글 쓰면서 보냐? 예능 보면서 “형 오늘 개웃겨요” 채팅창에 올리냐고. 안 하지. 우리는 그저 본다. 그게 ‘정상’이다. 방송을 본다는 건 시청자의 주권이고 선택이다. 그런데 왜 너는 그것조차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나?
그 이유는 간단하다. 너는 시청자를 ‘잠재적 도네이션 기계’로만 보기 때문이다. 채팅을 안 치면 돈도 안 쓰니까, 존재가치가 없다는 거다. 얼마나 비루한 철학인가. 네가 입에 달고 사는 ‘소통’은 결국 '슈퍼챗 유도용 문장 구조'일 뿐이다.
3. 너는 스트리머이기 전에 서비스 제공자다
스트리머라는 직업을 뭐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국 본질은 서비스 제공자다. 영상 콘텐츠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시청자의 관심과 후원을 받는 구조. 그런데 너는 이 기본적인 경제 논리조차 무시한 채, 갑자기 고용주 행세를 한다. "채팅 쳐라", "리액션 해라", "도네 안 하면 나가라".
와, 진짜로 대단한 착각이야. 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뭘 요구하는 거지?
네가 내 시간과 집중력을 필요로 해서 방송하는 거지, 내가 너한테 간청해서 보여달라고 한 적은 없거든. 채팅을 강요하는 순간, 그건 소통이 아니라 지시다. 권유가 아니라 갑질이다. 그 말투는 이미 “나는 시청자 위에 있다”는 교만에서 출발한 거다.
4. 채팅이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안 치는 거다
여기서 좀 현실적인 얘기를 해보자. 왜 채팅이 없는가? 왜 시청자들은 조용한가?
간단하다. 재미가 없어서다.
채팅을 칠 만큼 매력적인 포인트가 없어서다.
할 말이 없어서다.
아니, 예를 들어보자. 누가 진짜 웃기고 흥미롭고, 공감되는 얘기를 하면 채팅창은 터진다. 실시간 반응이 쏟아진다. 그게 자연스럽고 건강한 구조다. 그런데 너는 반응이 없으면 “시청자 탓”을 한다. 너의 콘텐츠가 망한 게 아니라, 시청자가 “비협조적”이라는 식으로. 이 얼마나 무책임한 화법인가?
아무 반응도 없다는 건, 무관심이라는 거다. 무관심은 증오보다 무섭다. 적어도 증오에는 감정이 남아 있지만, 무관심은 아예 관심이 끊긴 거니까. 그런데 이 무관심의 원인을 ‘시청자 탓’으로 돌리는 건, 정말이지 초보도 안 할 변명이야.
5. “방종 선언”이라는 감정적 도박
결국 너는 참지 못하고 말하더라. “아, 나 진짜 화나니까 꺼버릴게요. 방송 종료할게요.” … 이게 뭐야? 협박이야? 감정 호소야? 일종의 자해공갈인가?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이렇게 불안정한 감정 상태로 어떻게 ‘프로 방송인’이라고 자칭할 수 있나?
시청자는 너의 심리 상담사가 아니다. 감정 쓰레기통도 아니고, 그날그날 네 기분에 따라 끌려다닐 이유도 없다. 방송을 한다는 건 일정 부분 감정을 조율하고, 프로답게 상황을 관리할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네가 보여준 건? 그냥 어린애 같은 투정이다.
“나 삐졌으니까 꺼버릴게.”
이런 식의 방송 종료는 일종의 감정적 도박이다. “내가 꺼버리면 너희가 붙잡겠지”라는 계산. 정말 유치하고 뻔한 시도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제는 다들 그걸 안다. 시청자들은 예전처럼 감정적으로 연루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다른 방송으로 옮겨갈 뿐이다. 그리고 너는 점점 잊힌다.
6. 결국 너는 네 인성 그대로 망해가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의 본질은 하나다.
"인성"
네가 아무리 웃는 얼굴로 방송하고, 밝은 톤으로 말하고, 화면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놔도… 네가 가진 태도, 시청자에 대한 시선,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건 가식으로 감출 수 없다. 시청자를 **‘수단’**으로 보느냐, **‘존재’**로 보느냐. 그 차이는 시간 지나면 다 드러난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났을 뿐이다. 너는 그렇게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단지 그 무너짐을 남 탓으로 돌리고 싶어서, 막판에 채팅창에 분노를 쏟아내고, 시청자를 협박하며 자폭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있다. 그 모든 선택이 네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시청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시청자의 권리다.
7. 침묵은 거절이다 – 넌 이미 선택받지 못했다
이제 정리하자.
너는 "왜 채팅 안 쳐요?"라는 말로 시청자의 침묵을 문제 삼았지만, 사실 그 침묵은 곧 거절의 언어였다. “별로야, 더 이상 하고 싶은 말 없어, 그냥 틀어놓는 수준이야”라는 냉정한 메시지였던 것이다. 그건 시청자들이 아무 감정도 없이 보낸 투명한 거절의 방식이었고, 너는 그걸 감지하지 못하거나 외면했다.
"관심이 없다는 걸 말로 하는 사람은 없다."
침묵은 가장 무서운 피드백이다. 입으로 욕하는 건 아직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다는 건… 아예 기대 자체를 버렸다는 거다. 그게 무서운 거다.
그런데 너는 그 침묵 앞에서 ‘왜 반응 안 해!’라고 짜증 냈고, ‘이럴 거면 나가라’며 자폭했고, 결국 ‘방종’이라는 자해성 선택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렸다. 시청자는 널 망하게 만든 게 아니라, 너 스스로가 너를 망가뜨린 것이다.
8. 잘 되던 시절은 왜 존재했을까?
생각해봐. 한때는 채팅도 많았고, 도네도 활발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보고 웃었고, 반응도 해줬겠지. 그건 왜일까? 단순하다. 그땐 네가 겸손했기 때문이고,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며,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반복되며 당연해졌고, 결국 너는 착각하기 시작했지.
"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니까 이건 계속될 거야."
천만에. 스트리머의 매력은 유지되는 게 아니라, 매번 갱신되는 것이다.
한 번 웃겼다고 다음에도 웃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한 번 따뜻했다고 계속 사랑받을 수 있다는 법은 없다.
시청자는 바보가 아니다. 너의 태도, 말투, 감정 변화, 그리고 시청자를 ‘돈 내는 손님’이 아닌 ‘내 말을 듣는 하급 존재’처럼 대하는 자세까지, 다 본다. 심지어 말 한 마디 안 하고 보던 유령 시청자조차 다 느끼고 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가장 냉정한 재판관이다.
9. ‘망함’은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 – 지금 그 과정을 보고 있을 뿐
지금 너는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상하게 채팅이 줄고, 도네가 줄고, 시청자가 줄어든다.
그리고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기 시작한다.
“요즘 트위치가 망했대”, “알고리즘이 이상해졌어”, “경쟁자가 많아졌어.”
아니, 그게 아니다.
그냥 너 하나만 달라졌을 뿐이야.
사람들이 네 말투를 듣고, 반응을 보고, 갑질하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 둘 마음을 거둔 거다.
그리고 그게 쌓인 거다.
망함이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매일 계단 한 칸씩 내려가는 것이다.
지금 너는 그 계단 중간쯤에 서 있다. 그런데 자꾸만 “계단이 문제야!”라고 소리 지르고 있다.
아니야. 네가 내려가고 있는 거야.
10. ‘끝났다’는 건 타인의 말이 아니라 너의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
많은 스트리머들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안 끝났어. 아직 가능성 있어. 진짜 팬들이 남아줄 거야.”
그건 그럴 수 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너 자신이 변해야 한다.
하지만 너는 시청자의 침묵을 비난했고,
자신의 재미없음을 반성하지 않았고,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명령했고,
사과 대신 방종이라는 감정 배설로 도망쳤다.
그 순간 이미 끝난 거다.
네 방송의 정체성도, 네 직업으로서의 책임도, 네가 받던 신뢰도.
네가 입으로 “아직 안 끝났어”라고 말하는 그 순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이미 ‘끝났다’고 느끼고 있다.
그건 말이 아니라, 감정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11. 이제는 네가 사라질 시간이다
모든 커뮤니티는 무너진다.
모든 유튜브 채널은 언젠가 쇠락한다.
하지만 그 속도와 방식은 스트리머의 인성이 결정한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마무리한다.
어떤 사람은 웃으며 떠난다.
하지만 너는 비난하며 끝내고 있다.
“왜 채팅 안 쳐?”
“이럴 거면 보지 마.”
“시청자들이 문제야.”
“나 화나니까 꺼버릴게.”
이 말들 속에는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려는 본질이 담겨 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그런 사람을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사라지는 것이다.
천천히,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지막으로 – 시청자의 자리는 네 발 아래가 아니다
너는 그동안 시청자를 그렇게 대해왔다.
돈을 쓰지 않으면 의미 없는 존재로,
채팅을 안 하면 무성의한 유령으로,
리액션이 없으면 태업하는 직원처럼.
하지만 기억해라.
시청자는 너의 상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너의 부하직원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관객이다.
돈을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다.
채팅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웃을 수도 있고, 조용히 떠날 수도 있다.
그 모든 행동이 시청자의 권리이며,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바로 프로다.
너는 그걸 견디지 못했고,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너는 끝났고, 이제는 사라지는 거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조용히, 아무 말 없이, 다른 방송을 트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아무 감정 없이, 다만 그 ‘조용함’으로 너를 심판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지금의 현실이다."
"Welcome to your downfal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