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중년이라는 단어의 출현과 그 함의"
"은둔중년." 이 단어는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관찰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시선과 구조적 권력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 단어가 갖는 상징성은 한국 사회가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통해 개인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단어 하나로 한 사람의 삶의 총체를 압축하고 판단해버리는 무자비한 언어 폭력. 그 대상은 바로, ‘일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중년 남성’이다.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 니트족… 일본에서 시작된 이 분류적 언어들이 이제는 한국에서도 ‘사회 문제’로 수입되고, 기사화되고, 다큐멘터리화되고 있다. 문제는 그 언어들이 ‘개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단어는 "이들은 일하지 않는다", "기여하지 않는다", "게으르고 무능하다", "이대로 두면 위험하다"는 식의 비정상-위험-관리-치료라는 네 단계를 밟게 만든다.
‘은둔중년’이라는 낱말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10년대 중반 즈음이다. 그 시기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중년 남성들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IMF 이후 정리해고의 상시화, 장기 실업, 비정규직화의 물결이 밀려들며,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신화는 점차 해체되었다. 그렇게 무너진 신화를 사회는 ‘비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병리화시켰다. 그것이 바로 은둔중년이라는 단어의 탄생 배경이다.
이 단어는 단순한 묘사나 현실 반영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정상성 기준의 산물이며, 이탈자에게 던져지는 비가시적 처벌이다.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인간, 더 이상 경쟁하지 않는 인간, 더 이상 관계를 맺지 않는 인간. 그런 인간은 사회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선언이, 바로 이 단어 안에 녹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둔중년”이라는 말은 단지 상태를 설명하는 용어가 아니라, 특정한 계층을 낙인찍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조용히 혼자서 살아간다는 이유로 병리화되고, 그 삶이 사회적 담론의 도마 위에 올라간다. 방송국은 그들을 카메라 앞에 세우고, 거칠고 편협한 내레이션을 덧입힌다. "혼자 사는 그들", "은둔의 끝에서", "중년의 고립, 사회의 적신호." 시청자는 그 장면을 보며 ‘그래도 나는 저들보다는 낫다’며 안도한다. 타인의 고통과 고립을, 자기 존재의 확신을 위해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은 잔인한 동시에, 아주 익숙한 패턴이다.
중요한 것은 은둔중년 본인이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 좀 살려달라” 외친 적이 없다. 사회에 무언가를 구걸한 적도 없다. 단지 조용히 혼자서, 자기 식대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회는 "왜 너는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느냐", "왜 결혼도, 취업도, 사교도 하지 않느냐"며 시선을 꽂는다. ‘사회성’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은둔중년이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감시와 개입의 전조다.
언어는 세계를 만든다. 특정한 언어가 사회에 유포되면, 그 언어는 곧 현실을 구성한다. “은둔중년”이라는 단어가 널리 퍼진다는 것은 곧 그러한 사람들이 ‘문제적 존재’로 분류된다는 뜻이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정상적이고 병리적인 것으로 고정된다는 뜻이다. 그 단어 하나로 인해, 한 사람의 존재는 ‘기능적 가치’만으로 재단되고, 그의 고유한 삶의 의미는 완전히 삭제된다.
이 사회는 너무 쉽게 이름을 붙인다. 무직자, 패배자, 찐따, 루저, 은둔형 외톨이. 그러나 그 이름 뒤에 숨은 인간의 고통과 선택, 배경과 맥락은 결코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는 개별적 고통을 감당할 능력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조는 개인의 문제로 덮는다. "네가 게을러서", "네가 이기적이라서", "너는 사회성이 부족해서."
그러나 아니다. ‘은둔중년’이란 그 어떤 비정상도, 실패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일 뿐이다. 경쟁하지 않는 삶, 군집하지 않는 삶, 예측되지 않는 삶. 그러한 삶이 불안한 건 사회의 문제이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정상이라 주장하는 기준이 좁고 폭력적이기에, 그 기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자꾸만 문제화하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질문을 다시 해야 한다.
“왜 그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똑같은 것은 아닌가?”
"한국 사회의 ‘정상’ 강박과 근대화 트라우마"
대한민국은 ‘정상’이라는 이름의 교도소 안에서 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 교도소는 쇠창살로 갇힌 것도 아니고, 물리적으로 구속하는 구조도 아니다. 더 강력한 감옥은 언제나 사회적 통념과 인식이다. '정상적인 삶'은 고등학교 → 대학 → 직장 → 결혼 → 출산 → 퇴직 → 손주 보기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포장된다. 이 선형적인 생애주기를 벗어나는 순간, 사람은 불안정한 존재로 규정된다. 그 강박은 어디서 왔을까?
가장 직접적인 뿌리는 근대화 트라우마에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 속도가 전 세계에서 유례없을 만큼 빨랐던 대한민국은 집단적 상처와 경쟁의식 속에서 ‘다 똑같아야 안전하다’는 믿음을 내면화해왔다. 그 신화는 개인의 자유보다 집단의 안정을 중시했고, 다양성보다 통일성을 추구했다. 그 결과, ‘다른 삶의 방식’은 허용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인생 코스’를 따르지 않으면, 교육 시스템에서부터 직장 문화까지, 온 사회가 그 사람을 배제하고 가르친다.
더불어 유교적 문화는 “가정에 기여하지 않는 남성은 쓸모없다”는 편견을 더욱 강화시켰다. 생산하지 않으면 존재할 자격이 없다는 식의 계산은 인간을 기계로 보는 사상이다. 존재 자체가 존엄하다는 기본 인권의 전제를 무너뜨리는 발상이다. 은둔중년은 이 집단적 강박의 희생양이자,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온’ 존재다. 하지만 이탈자는 언제나 ‘정상 사회’에 위협이 된다. 그들이 괴상하게 보이는 건 그들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비정상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의 함정과 타인의 고통을 통한 자기위안"
은둔중년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카메라는 어두운 방을 비추고, 침대에 앉아 인터넷을 하는 중년 남성을 보여준다. “OO세, 집에만 있는 중년 남자”라는 자막과 함께. 화면은 그들의 일상—아침에 늦게 일어나 라면을 끓이고, 온라인 커뮤니티를 돌아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보는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그 위로 ‘전문가’의 음성이 겹쳐진다. “사회와의 단절은 정서적 퇴행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묻고 싶다. 그 장면에 왜 그렇게 서늘한 BGM이 깔리는가? 왜 혼자 밥을 먹는 모습이 마치 병적인 상태처럼 묘사되는가? 다큐멘터리는 스스로를 ‘관찰자’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편집된 현실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상업물에 가깝다. 그 안에서 은둔중년은 서사적 장치로만 존재한다. 그들의 복잡한 감정, 그 삶을 선택하게 된 맥락, 그 나름대로의 질서와 의미는 몽땅 편집되고 삭제된다.
시청자는 이 장면들을 보며 안도한다. ‘적어도 나는 저러지는 않지.’ 이 안도감은 비교를 통해 자기 삶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다. 더 아래에 있는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을 덜 비참하다고 느끼는 심리. 이런 위로는 언제나 타인의 고통을 타자화함으로써 얻는 자기 우월감이다.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는 자존감이 떨어진 대중에게 ‘이만하면 잘 살고 있다’는 착각을 제공하는 감정의 자위기구다.
정작 은둔중년 당사자들은 자신의 삶을 그렇게 소비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그들은 다만 혼자 있는 것이다.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침묵은 결코 외면받아야 할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삶에 대한 의연한 방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는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 침묵을 ‘고장’으로 오해한다. 그리고 말한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거야.”
"사회적 관심이 아닌 통제 욕망으로서의 시선"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을 다시 사회로 복귀시켜야 합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언뜻 보면 따뜻한 말이다. 그러나 그 말 뒤에 숨은 진짜 욕망은 복귀시키고 싶은 욕망, 다시 말해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다. 은둔중년이란 존재는 사회의 일관된 질서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존재다. 질서란 언제나 관리 가능한 대상이어야 안정을 유지한다. 따라서 사회는 이들을 불러내 ‘정상으로 회귀’시키려 한다. 그것이 마치 의무인 것처럼.
그러나 개인은 국가나 사회의 부속품이 아니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철저히 개인의 몫이어야 한다. 그는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사람들과 관계 맺지 않아도, 충분히 온전한 인간이다. 다만 우리 사회는 타인의 선택을 불편해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재편하려 한다.
왜 그런가? 이유는 단순하다. 정상이라는 말은 언제나 다수를 정당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97%가 한 방향으로 살아갈 때, 나머지 3%는 그들의 불안을 자극한다. “혹시 나도 저렇게 될까?”라는 공포. 그리고 그 공포는 곧 증오로 변한다. 증오가 생기면, 이해는 사라진다. 사회는 더 이상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냥 ‘치료’하고 ‘교정’하려 한다.
‘피해 안 주는 삶’이라는 존재론적 선언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들은 누구에게 피해를 주었는가?"
은둔중년은 대다수가 그저 자기 공간에서 자기 삶을 살아갈 뿐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세금도 낸다. 누군가의 재산을 훔친 것도, 타인을 해한 것도 아니다. 단지 사회가 정해준 길에서 이탈했을 뿐이다. 그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이들에게 설명을 요구한다. 왜 이렇게 살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은둔했는지, 어떤 심리적 문제가 있었는지. 그러나 왜 그들이 일일이 자신을 해명해야 하는가?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정상처럼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진짜 성숙한 사회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삶’을 존중하는 사회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양한 방식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다. 그 삶이 생산하지 않아도, 이윤을 창출하지 않아도, 사회적 지위를 가지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의미가 있는 사람. 그것이 사람이다.
"사회의 병리: 무차별적 시선과 수직적 인간관"
대한민국은 끊임없이 인간을 줄 세운다. 경쟁과 비교를 통한 서열화는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학벌, 외모, 재산, 직업, 결혼 여부, 자녀 수, 연봉, 차종, 부동산 소유 여부까지. 이 사회는 인간을 수평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잃어버렸다. 대신 모든 인간관계는 수직적으로 정렬된다. '나보다 위냐 아래냐'의 눈금으로 타인을 평가한다.
이런 수직적 인간관은 특정 집단에 우월감을 제공한다. 누군가는 무직자를 ‘게으른 인간’으로 보고, 누군가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불완전한 인간’으로 보며, 누군가는 은둔중년을 ‘패배자’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 시선은 타인의 삶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 아니라, 자기 삶의 초라함을 덮기 위한 방어기제다.
현대 한국 사회는 집단적 열등감과 불안 위에 세워져 있다. 끊임없이 자신보다 못한 타인을 찾아내야 안심하는 구조. 그러니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못한다. 은둔중년은 이 사회가 만든 줄 세우기 게임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난 이 게임에서 뛰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선언이야말로 가장 큰 위협이 된다. 게임에서 빠진 사람은, 게임의 규칙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을주의’와 공동체의 왜곡"
한국은 공동체를 중시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공동체란 말은 종종 폭력적인 감시 체계로 작동한다. “우리 마을”, “우리 가족”, “우리 사회”라는 말은 다정한 포장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깔린 진짜 뜻은 이것이다. “너는 우리와 같아야 한다.”
사람들은 다른 삶을 보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동질성을 강요한다. 은둔중년이라는 삶의 방식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난 존재이기에 배척당한다. “왜 혼자 살아?”, “왜 일 안 해?”, “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 이 질문들은 걱정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동화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배제와 불쾌감의 표현이다.
진짜 공동체는 다양한 방식의 삶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어울리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 나와 다르게 살아도 괜찮은 공동체. 그러나 한국의 마을주의는 그런 성숙함을 가지지 못했다. 남의 인생을 집단적으로 감시하고, 교정하고, 비웃고, 처벌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감시의 종착역은 늘 ‘정상화’라는 이름의 동화다.
에스키모는 왜 죽지 않아도 되는가?
“그럼 에스키모는 다 죽어야 하냐?”
에스키모는 물고기 잡아먹고, 눈으로 만든 집에서 살고, 자연에 순응하며 산다. 누가 보기엔 원시적일 수 있고, 비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간다.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고요히 존재한다. 그들의 삶을 ‘정상’이라고도, ‘비정상’이라고도 부를 수 없다. 단지 존재의 한 방식일 뿐이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에서 혼자 사는 중년은 병리적 존재로 취급받는가? 왜 집에 있는 사람은 치료 대상인가? 왜 자발적으로 은둔한 사람은 ‘구제’의 대상이 되는가?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사회가 정한 ‘유일한 경로’ 외의 삶은 모두 실패인가?
다시 묻자.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리는 왜 이토록 집착하는가?
에스키모는 죽지 않아도 된다. 혼자 사는 중년도, 라면 먹고 혼잣말하는 사람도, 인터넷으로 세상을 만나는 이도 죽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원형일 수 있다.
"은둔은 병이 아니라 저항이다"
은둔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강박과 폭력, 통제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다. 더 이상 이 질서 안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다. 그 어떤 외침보다 단단한 말 없는 거부. 그것이 은둔이다.
자기 삶을 스스로 구성하고, 자기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삶은 위대한 것이다. 그것이 회사에 다니든, 집에서 혼자 있든, 숲에서 불을 피우든, 이글루에서 물고기를 구워먹든 상관없다. 인간의 위대함은 어떤 집단 속에서 ‘무엇을 해내는가’보다, 어떻게 자기 삶을 책임지고 살아내는가에 달려 있다.
은둔중년은 우리 사회의 가장 예민한 거울이다. 그들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회는 불안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의 존재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는 그들을 치워버리려 한다. 낙인을 찍고, 방송으로 소비하고, 이상한 통계로 수치화하고, 정책의 대상화로 비인간화한다.
하지만 잊지 말라. 세상에는 조용한 삶도 필요하고, 고립된 평화도 소중하다. 인간은 동일하지 않으며, 사회가 정한 틀에 맞춰 살아야만 건강한 것도 아니다. 은둔이란 존재 방식은 그 자체로 유효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들은 병든 게 아니라, 병든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이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은둔중년은 병들었다”는 사회적 프레임이 아니라,
“그들이 드러낸 이 사회야말로 병들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무엇이 인간다운가?
무엇이 건강한 삶인가?
그 기준은 누가, 어떻게, 어떤 권리로 정할 수 있는가?
그 답은 언제나 개인에게 있다. 사회는 조력자여야 하지, 통제자가 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타인의 고요함을 불편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다름에 대해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삶의 수많은 방식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은둔중년은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했고, 견뎠고, 삶을 살아냈다.
그 사실 하나로 이미 그들은 위대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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