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늙는다는 것’의 실체와 허상"
“존나 추하다”는 말의 폭력성과 진실성
"늙어서 혼자 살면 존나 추하다"는 문장은 대놓고 거칠며, 동시에 어딘가 묘하게 설득력 있는 감각을 전달한다. 욕설의 힘은 그 자체로 감정의 축적을 의미한다. 단지 추하다고 하지 않고 "존나 추하다"고 하는 그 감정의 세기는, 우리 사회가 ‘늙음’과 ‘고독’을 바라보는 시선의 본심을 드러낸다. 이 말에는 무지와 냉소, 두려움과 자기혐오가 섞여 있다. 동시에, 그것은 사실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 발화된 감정일지도 모른다. 이 글은 그 문장의 타당성과 문제의식을 뜯어보며, 인간의 노년과 고독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그것을 ‘추하다고’ 느끼는가를 철저히 파헤친다.
1. 늙음과 혼자 살아감의 사회적 코드
우리는 늙음을 혐오한다. 정확히는 ‘혼자 늙는 것’을 혐오한다. 그 혐오의 감정은 사회적 코드로 학습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통해 삶의 이상을 설정한다. 청년기에는 좋은 직장, 중년기에는 결혼과 자녀, 노년기에는 가족의 곁에서 존경받는 삶.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람은 ‘비정상’이 된다. 혼자 늙는다는 것은 바로 그 공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삶이다.
혼자 사는 노인은 사회적 실패자로 간주된다. 그는 사랑받지 못했고,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자립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가장 강력한 낙인은 바로 ‘쓸모 없음’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성 없는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기기 때문에, 노동에서 은퇴한 인간은 그 자체로 퇴물이다. 그가 혼자 산다면? 더욱 추하다. 혼자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 ‘추함’이라는 감정의 근원: 거울 앞의 자기 공포
늙은 사람을 보며 추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이다. 누구나 늙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노년이 ‘사랑받지 못한 모습’, ‘누추한 옷차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올 때,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보고 고개를 돌린다. 이것은 거울 효과다. 늙은 사람을 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을 직감한다. 그러므로 그 추함은 대상의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것이다.
"우리가 혐오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타인 속에서 발견한 나의 잠재적 모습이다." 늙은 독거노인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것은 우리의 미래다. 그러니 그것을 외면하려는 감정은 이기적인 동시에 인간적이다.
3. 동양적 공동체 환상과 서양적 개인주의의 충돌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유교적 가치관, 즉 ‘효’와 ‘공동체’를 중시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서구적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깊이 뿌리내렸다. 그 결과, 늙은 부모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자녀들이 늘어났고, 요양 시설과 실버타운이 부흥했다. 그러나 이런 개인주의는 아직 ‘정서적 문화’로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사는 노인을 보면 우리는 ‘비정상’이라 느낀다.
이중성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함께 살기는 싫지만, 혼자 사는 건 추하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모순이다. 그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늙어서 혼자 산다는 것은 항상 어떤 ‘실패’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4. 랍비의 아이러니: 고독은 죄가 아니다
고대 유대교 랍비들은 외로움과 고독을 ‘깨달음의 조건’으로 보았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의 고독은 신과의 대화였고, 자기 성찰의 시간이었으며, 세속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 고독은 능동적이며, 선택된 것이었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의 고독은 ‘버려진 것’이다. 우리는 혼자인 사람을 보면 ‘쓸쓸하다’고 느끼고, 그가 그것을 선택했을 리 없다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혼자 살아가는 노인은 때로는 자기만의 삶을 설계한 사람일 수 있다. 그들은 타인의 기대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의지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랍비의 눈으로 보면, 늙어서 혼자 사는 사람은 오히려 인간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상태에 가까운 자일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 없이도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자, 즉 '내면의 완결성'을 이룬 자다. 그러므로 혼자 사는 노인을 '존나 추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도달한 고요와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 자의 무지일 수도 있다.
5. 그러나 고독은 실제로 괴롭다
이쯤에서 현실을 직시하자. 늙어서 혼자 사는 것은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매우 어렵다. 외로움은 실제로 사람을 병들게 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며, 누군가와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는 생존의 위협으로 이어진다. 이 고통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의 문제다.
특히 한국에서는 노인 빈곤율이 높고, 고령층 자결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지표는 ‘혼자 사는 노년’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니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존나 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혐오가 아니라, 구조적 비극에 대한 날것의 감상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진실을 비하와 조롱으로 소비하는 방식이다.
"존엄한 고독을 위한 조건"
우리는 고독한 노년을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은 필연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혼자 사는 삶’을 추하지 않게 만드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사회 복지가 그 조건이고, 문화적 인식의 전환이 그 조건이며, 무엇보다 스스로 혼자 있는 삶을 훈련하고 긍정하는 정신적 체력이 필요하다.
늙어서 혼자 살면 존나 추할 수 있다. 그 말은 감정적으로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추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도 분명히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추함은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얼마나 내면의 질서를 지키고 있는가에 달린 문제다.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두 개의 방을 주셨다. 하나는 침묵의 방, 하나는 만남의 방. 현자는 그 순서를 안다.”
늙어서 혼자 사는 삶이 ‘침묵의 방’에 머물러 있는 삶이라면, 그것은 결코 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그 방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무시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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