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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스시녀 2명이 17세 여고생 살해 혐의로 체포... SNS가 발단
일본 홋카이도에서 여성 2명이 여고생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져 충격을 주고 있음 피해자인 17세 여고생 무라야마 루나(村山 月)는 올헤 4월부터 행방불명 상태였는데 지난 5월 하순 경 이시카리가와의 하류에서 유체로 발견됨 이게 발견 당시 유체를 수습하던 현장의 사진 같음 범인으로 체포된 것은 여성 2명 21세의 우치다 리코(무직)와 19세의 여성(무직)이었음 경찰에 이들이 범행을 저지르게 된 계기는 SNS 피해자가 SNS에 우치다 용의자의 사진을 무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다투다가 살해했다는 게 용의자들의 주장임 4월 중순, 우치다 용의자는 19세 무직녀와 16세 남녀까지 총 4명에서 피해자 무라야마에게 접근했고 무라야마를 자신들의 차에 강제로 탑승시켜 감금하고 아사히카와시내로 데리고 다니다가 최종적으로는 문제의 다리에 데리고 가 떨어뜨린 것으로 보임 이곳이 우치다 용의자 등이 피해자를 떨어뜨려 익사시킨 카무이코탄 다리임 (카무이코탄은 아이누어로 신의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함) 16세 남녀는 살인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는지 살인혐의로 채포된 것은 일단 얘네 둘 뿐임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음 4월 18일, 우치다가 16세 소년과 함께 피해자로부터 금품을 갈취 4월 18일~19일, 우치다 등 4명이 피해자를 차량에 감금하고 데리고 다님 4월 19일, 무라야마와 19세 무직녀가 피해자를 키무이코탄 다리에서 떨어뜨려 살해 더 충격적인 건 무라야마와 피해자는 살해 전날에 처음 본 사이었다는 점임 구체적으로 무슨 시비가 어떻게 붙었는지는 몰라도 처음 본 사람을 만나자마자 하루만에 죽였다는 건 아주 작정하고 불러냈다는 거 아닐까 우치다와 같은 초중학교에 아이가 다녔다는 사람을 인터뷰했다는데 학생 시절에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나 봄 [우치다 동급생의 부모] 우치다는 이지메를 할 것 같은 타입의 아이였어요 우치다 때문에 등교를 거부할 정도까지 된 아이들은 몇 명밖에 없었지만 어른들이 모르게 여러가지로 이지메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을 듣고나서 아~ 역시나... 걔라면 충분히 죽였겠구나 싶더라고요 이게 주범 우치다 리코(21세, 무직)라고 함 댓글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아사히카와 중학교 사건이 뭐냐면 2021년 2월, 위 사진 속 여학생(히로세 사야)이 집을 뛰쳐나가 실종된 뒤 영하 17도의 추위 속에서 얼어죽은 사건임 (3월 23일 동사한 상태로 발견) 히로세는 2019년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 시립 호쿠세이 중학교 입학한 뒤 다수의 남학생에게 성적 폭행(SNS로 나체 사진과 영상을 보내게 하거나 남학생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강요당하는 등)을 당하는 등 심각한 이지메 피해를 겪었는데 담임교사에게 상담해도 그건 이지메가 아니라는 식의 황당한 답만 듣고 아무런 대처를 해주지 않았다고 함 참다 못한 히로세는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구해졌고 결국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다고 함 하지만 그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PTSD에 시달리면서 히키코모리로 변했고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은 채 방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결국 저런 참변을 당한 거임 두 사건 모두 하필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에서 발생한 사건이라서 사람들이 엮어서 보는 것 같음 진짜 무섭다 일본... 이지메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어
작성자 : 난징대파티고정닉
흥선대원군은 과연 전통건축의 구세주인가?
요즘 글을 거의 안쓰고 있는데, 경복궁 관련해서 말들이 많길래 경복궁을 중건한 인물인 흥선대원군에 대해 말해보려 함.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흥선대원군에 대해 별 악감정이 없으며 오히려 그가 시행한 여러 개혁정책들은 꽤나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함. 하지만 그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큰 실수를 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으로 인해 고종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되었음. [광화문과 북악산] 다만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오로지 문화재와 건축에 국한된 부분이지 이것으로 흥선대원군에 대한 비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님. 역사에 가정은 없기에 그가 집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문화재들이 지금 남아 있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음. 다만, 흥선대원군에 대해 경복궁을 중건했다는 사실만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함. [안동 호계서원, 산청 덕천서원, 안동 묵계서원, 밀양 칠탄서원. 사진 : 문화재청]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서원철폐령이었음. 서원은 조선시대에 지방권력을 틀어쥐고 갖은 횡포를 부리고 있어 지방 관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놔두고 있었음. 특히나 세도정치기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궁핍해져 가고 있던 상황에, 서원의 악행은 묵과할 수 없던 부분이었음.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47개소의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훼철시킴. 정책적 측면을 떠나 문화재적 가치로만 접근하자면,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에서 서원은 궁궐 다음으로 권위 있는 건축물이었고, 또한 그 수도 많았기에 당시에 1000개소가 넘던 서원을 극소수만 남기고 모조리 없앴다는 것은 조선 건축의 한 뿌리가 사라진 것과도 같음. 훼철 이후 여러 서원들이 재건되었는데, 그 면모를 살펴보면 입지나 배치가 훌륭한 곳들이 많아 대원군에 정책에는 수긍하면서도 50년만 더 버티지 하는 생각도 들긴 함. 특히나 한국전쟁 중 서울 근교의 우저서원, 파산서원, 사충서원 등 남아있던 47곳 중에서도 소실된 것이 많은 점은 더욱 안타까움. [경복궁 흥례문]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복궁임. 경복궁은 1592년 소실된 이후 몇몇 왕들이 찾기는 했으나 270년간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음. 반대로 말하자면 조선 초기 궁궐의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었음을 뜻함. 조선 초기는 경복궁-창덕궁 양궁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태종의 경우에는 창덕궁에서 주로 머물렀으나 세종 등의 경우에는 경복궁을 선호하였음. 따라서 경복궁에는 조선 초기, 특히 세종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음. 세종조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많은 과학적 성과들의 흔적이 1865년까지 경복궁에 남아 있었는데, 옥루, 앙부일구 등이 설치되어 있던 흠경각과 일영대, 천문관측을 하는 장소였던 간의대 등이 남아 있었음. 그러나 경복궁 공사가 시작되며 이것들은 모조리 헐리고 말았음. 이를테면 간의대 옥석의 경우에는 근정전 뜰의 품계석으로 쓰였음. 또한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가 "(전략) 우리 나라에서 제일 웅장한 건축인데 지금껏 우뚝 솟아 있어 마치 영광전과 흡사하다."고 하였으며 같은 기록에서 경복궁 터를 다녀온 호조판서 심이지가 보루각 터를 둘러보았으며 흠경각은 들보와 서까래가 썩었다고 했는데, 이는 1794년의 기록임. 이 흠경각은 광해군 때인 1613년 재건한 것인데, 당시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임. 다만 효종조 잠시 언급되었다가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 같음. 물론 정조 때에도 이미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던 것 같지만, 중건 시점이 이로부터 70년 뒤이니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있음. [경복궁 경회루] 흔히 조선 초기 경회루에 대해서는 돌기둥에 용 조각이 있었음에 주목함. 성종조에 조각된 이 돌기둥은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다가, 중건 시점에는 48개 중 3개만 서 있고 나머지는 무너져 있었다고 함. 중건 시점에서 용 조각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돌기둥들이 화재로 상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서 계체석으로 썼다고 적혀 있음. 아마도 경회루 기단의 돌들이 검게 변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돌기둥들을 깎아 재사용한 것으로 보임. 물론 불에 탔다고 하더라도 조각은 분명 남아 있었을 것임.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다른 용도로 재사용되었기에 그 모습을 알 길이 없음. 현재의 돌기둥들은 삼청동과 송계별업 등지에서 새로 떼어 와 제작한 것들임. 가끔 가다 용 조각은 오래되서 지워진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임. 한편, 경복궁을 재건하던 당시 근정전과 경회루의 기단과 월대는 다시 제작되었음. 당시 기록을 보면 외형은 약간 손상이 있었으나 돌을 뜯어내니 안쪽은 물이 스민 흔적이 없이 완벽했다고 함. 기단 안쪽을 채우던 돌들은 그대로 사용했다고는 하나 월대와 기단은 새롭게 조성한 것으로, 조선 전기의 흔적이 아님. [경희궁 흥화문과 숭정전. 사진 : e뮤지엄]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손실은 바로 경희궁임. 경희궁은 비록 직전 왕들인 헌종-철종조(1834-1864)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헌종 이전의 순조를 비롯하여 인조, 숙종, 영조 등 많은 임금들이 애용하던 궁궐이었음. 지금은 터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과 경희궁 두 궁궐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남아있었다면 큰 역사적 가치를 가졌을 것임.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하며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경희궁이 헐리게 되었음. 따라서 경희궁은 위 사진과 같이 5개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사라졌음. 막상 헐고 나니 상한 목재가 많아 대부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함. 경희궁은 이후 망국 이전까지 이따금 군사를 사열하는 등의 장소로 쓰이다가 망국 이후 남은 건물들은 모조리 팔려나가고 그 터에는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음. 숭정전은 일본 사찰에 팔렸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고, 정문인 흥화문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신사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쓰이다가 해방 이후 그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의 정문으로도 오래 서 있었음. 흥화문은 1988년이 되어서야 경희궁으로 되돌아왔으나, 옛 터에 구세군 건물이 들어서 있어 원래 자리는 되찾지 못했음. 참고로 박석 갖고도 시끄러운 거 같은데, 내 추정으로는 임란 이전까지는 박석이 없었을 것으로 보임. 현재 경복궁 내에서 박석이 사용된 장소는 근정전 앞마당뿐임. 그런데 영건일기에 따르면 경희궁과 안현(안국동고개. 현재 광화문에서 안국역으로 넘어가는 길)에 깔려 있던 박석들을 싸그리 철거해서 들고 왔고, 그것도 모자라 강화에서 새로 떼어 왔다고 함. 애초에 박석은 바닥에 까는 돌이니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한들 굳이 철거한 후 다시 깔 필요는 없어 보임. 중건 이후 고종은 30년도 안되는 경복궁 생활 동안 멀쩡한 침전 놔두고 구석에 들어가서 살다가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은 이후 또 다시 폐허가 되었음. 군주의 위상을 세우겠다고 엄포한 고종은 또 다시 궁궐 공사를 시작했고, 여기에 더불어 평양의 풍경궁이나 안동별궁을 비롯해 각종 토목공사를 벌였음. 경운궁은 완공된 지 1년만에 전소되어 중층 중화전 건물을 단층으로 재건하는 촌극을 벌였고, 풍경궁은 완공도 못 한 상태에서 일본군이 러일전쟁 중 점거하여 돈낭비로 그쳤음. 언젠가 고종의 토목공사 욕심에 대하여 제대로 다루게 된다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음. 어쨌든 이번 글에서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역사를 벌인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보았음.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경복궁이 없는 서울을 상상하기 어려움.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원군을 찬양하는 것은 동전의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이 아닐 수 없음. 더군다나 그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봤을 때, 경복궁 중건은 결과적으로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끈 시발점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경복궁이 갖는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19세기 조선에 그대로 대입하여 흥선대원군을 평가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임. - dc official App
작성자 : BABO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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