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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시장에 도전한 특이한 고전 게임기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겜 이야기다.인간은 수집하기 좋아하는 동물이다..라떼 얼라들이 많이 했던 수집 취미 하면 야구카드 수집..사실 이것도 아무나 못하는 취미였음 한장에 꽤나 비쌋던 걸루 기억하는데 그외 우표수집을 들수 있다 이 취미는 부지런하게 우체국에 들락날락 해야 할수 있었던 걸루 안다 이런 취미는 나랑은 거리가 먼게 넉넉한 집안형편이지만 부모님 교육방침상 용돈을 많이 못받았음...용돈이 궁한 관계로 교통비나 참고서 삥땅치기를 많이 했었음..한번은 생일날 사촌형이 자신의 우표 컬렉션 북을 선물로 준적 있었다 소중하게 간직해서 가족 아무에게도 보여준적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삿날 쓰레기통행이 되어버렸음. 소유욕이 아닌 승부욕때문에 수집욕을 자극하던 게임기가 출시된적 있었는데에폭사의 91년 바코드 배틀러 라는 게임기였다. 나오는 화면은 아군측과 적의 공격력 방어력 HP 랑 전사인지 법사인지 클래스 표시되는게 전부이다.졸라 단순하지? 서로 수치 비교해서 전투하는 형태인데 게임기에 바코드 입력 방식은 주변에 있는 아무 바코드나 게임기 카드나 혹은 마분지에 부착해서 신용카드 긁듯이 긁으면 입력되었다.바코드 배틀러의 화면 구성현재는 까발려진 바코드의 비밀..어떤식으로 전투력 수치가 공식화해서 반영되는지 분석당하고 다 까발려진듯....1차원 바코드라 분석하기도 쉬웠을 것이다.. 저 공식대로라면 한국상품 바코드는 hp가 상급이고 미국상품 바코드 국가코드 00-39인데 hp가 낮아서 최약체급에 속한다는 당시의 소문이 사실인듯.>>흔하지만 강력했다던 신라면 바코드우리주변에 널린게 상품 바코드였고 신상품이 출시되면 이는 새로운 바코드가 나오는것임..게임기 유저라면 강력한 바코드를 수집 발굴해야 했었다몇평 안되는 동네 편의점도 작아서 얼마 안되 보여도 진열된 상품종류가 무려 3천가지는 된다고 한다 편의점이라면 바코드도 가격표에 있었으니..아마 애들이 다녀온후 가격표가 사라졌다는 곳도 많았으리라..93년 게임챔프 광고 8만원 사실 당시 저정도 가격이면 애매한게 클론 패미컴에 게임팩 한두개 정도는 살수 있거나 아님 돈 좀 보태서 겜보이 살수 있었지 그래서 전혀 안팔릴거 같음에도 92년까지 국내에서 3만대 팔렸었다 한다.어린이날 행사 대회에서는 라면과 과자 그리고 구두까지 치열한 접전끝에 해태제과의 초컬릿이 우승했다고 함.덕분에 해당제품은 입소문 타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고..전설로는 신라면과 안성탕면도 강력한 바코드 였다고 한다. 갑자기 특정회사 과자가 잘팔리는건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본고장인 일본에서 나름의 히트쳤다는 기록만 있을뿐 어느정도 팔려나갔는지는 알수없었다 다만 제작사가 90년대는 이거 하나로 먹고 살았다고 한다.. 바코드 배틀러 게임기 메커니즘이 복잡한것도 아니고 상품관련 잠재성도 있었고 당시 국내 제과업체도 게임기 유통하던 시대였으니 관심 가지고 자체개발도 할만한데 일부 회사가 행사 후원 정도 할뿐 큰관심은 없었던거 같더라.발전형으로 반다이에서 제작한 바코드 지원게임 장치인 데이텍 저 장치를 기존 패미컴 게임기에 장착해서 플레이 하는 방식이였음드래곤볼 Z 격투 천하무도회공백 카드인건 주변에 널린 야생 바코드 찾아서 채워 내라는 거겠지 기존 카드보다 더 강력하거나 아님 잡캐릭이 나올수도 있었다고 한다..드래곤볼 외에 SD건담 게임도 있나 보더라고,,카드 퀄리티 보소 캬 갖고 싶네 ㄷㄷ 드래곤볼 카드 워리어즈 요즘은 종이 카드가 아닌 디지털화 카드 수집하는 형태로 바뀐듯...하지만 이런건 손으로 만질수가 없쟌오...편하긴 하지만 뭔가 잊혀져 가는.. 몇년간 틈새시장에서 반짝 성공했었지만 당시 1차원 바코드라 한계가 이었고 오늘날 QR바코드는 담을수 있는 정보량이 1차원바코드랑 비교 불가로 많으므로 오늘날 나왔으면 더욱 흥미진진한 게임기가 되었을 것이다. 리메이킹 해서 출시 될 일은 아마 없으려나??
작성자 : 아틀라스K형고정닉
[전쟁사 기행] 카라바흐를 가다
카라바흐.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오랜 세월 카프카스의 뇌관 중 하나였다. 카프카스가 워낙 비범한 동네라 카라바흐 뿐만 아니라 체첸, 남오셰티아, 쿠르디스탄 등 세계적인 충돌 지역이 넘쳐나다보니 잘 부각되지 않을 뿐 카프카스의 소국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서로의 피를 끓는 싸움을 지속해왔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 동네 피칠갑 사유 1위인 종교, 2위인 민족이다.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계와 이슬람을 믿는 아제르바이잔계는 본래 상업 활동이나 수피즘의 영향으로 안정적이고 타 종교에 포용적이던 이들이지만 민족주의와 종교적 극단주의에 빠진 후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세계사에서 보통 문제가 발생하면 영국을 찍으라고 하지만 이 곳만큼은 오스만, 러시아, 그 후신인 튀르키예와 소련의 영향이 훨씬 크며 이들은 각자의 강역과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미승인국, 괴뢰국, 자기식으로 그어놓은 국경선 등을 마구 활용해왔다. 아제르바이잔의 땅을 밟고 있기에 이곳에서는 아르메니아의 잔혹한 행위를 부각하지만 아르메니아에 가면 아제르바이잔의 잔혹 행위를 부각하는 동네이다. 그 충돌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일어났고 이곳은 서로의 월경지들이 얽혀있어 더욱 복잡하다. 당장 아제르바이잔의 공식 영토는 아르메니아에 의해 갈라져 있고 아르메니아도 카라바흐 지역이 아제르바이잔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카프카스의 산맥을 따라가기에 고도 역시 높아 쉽고 빼앗고 되찾기 힘든 곳이다. 그러나 2020년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이 승기를 잡고 2022년과 2023년 지속적인 전투와 봉쇄로 이 지역은 이제 아제르바이잔이 통제하고 있다. 20세기에 벌어진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아르메니아가 우세했지만 오일머니에 의한 경제적 격차와 주변국과의 외교, 군사적 역량이 이 격차를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각설하고, 그래서 이곳은 분쟁지대였고 전쟁지역이었기에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허나 아르메니아가 사실상 항복하며 괴뢰국가 아르차흐 공화국의 호멸을 받아들였고 모든 땅이 아제르바이잔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8월 10일 양국간 평화협정이 타결되어 더이상의 충돌은 (당분간, 아마도) 없다. 그래서 아제르바이잔은 가이드 동행 하에 이곳을 투어할 수 있게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내린 뒤 찾아본 가이드 투어는 회사 자체는 다양한 투어로 검증되어 있고 심지어 한국어 가이드까지 있었다. 그런데 막상 리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어찌보면 베타테스터가 되어야 하는 상황. 심지어 투어도 14시간에 이동시간이 10시간 정도, 점심시간 등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투어는 2,3시간 남짓한 투어. 일반적인 투어나 관광객이라면 당연히 망설였거나 안했을 투어다. 하지만 밀덕이면 하지. 신청했다. 집결지는 바쿠 시내였고 큰 승합차를 타고 다같이 출발했다. 튀르키예에서 온 이들이 많았다. 양국은 형제국가를 자처하고 있고 언어, 사회, 문화적 연관성과 교류가 많아서 이곳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바쿠 시내에서 약 5시간을 달려 과거 카라바흐 칸국과 아르차흐 공화국의 수도였던 한캔디, 그 바로 옆 전략적 요충지인 슈샤로 가게 된다. 오랜 시간 이동이다보니 충분한 수면이 필요하다. 서쪽으로 쭈욱 달리던 차량은 예블라흐에서 남쪽으로 꺾어 내려가고 그때부터는 유정이 가득한 석유단지가 아닌 군사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저기서 아제르바이잔 깃발과 대통령의 모습, 군인 포스터가 눈에 들어오게 되며 전사자 혹은 지역 영웅으로 보이는 이들의 포스터도 보이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검문소가 나온다. 검문소에는 "You are entering the liberated territories."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여기서부터는 전후 수복한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이드는 미리 여권을 챙겨오라 고지하지 않았지만 여권을 달라고 했다. 모두 다 여권을 갖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갑자기 길을 몇 시간 달려놓고 여권 얘기를 꺼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알고보니 가이드 역시 이곳에 처음 왔다. 듣자하니 내가 한국어 가이드가 있다해서 한국어 가이드를 신청하다보니 능통한 사람이 한 명 뿐이라 그가 처음 왔다고 한다. 정작 와서는 영어로 하는 설명으로도 다 해결되었지만, 덕분에 가이드도 초행, 여행자도 초행인 투어가 검문소부터 흥미진진하게 넘어갔다. 검문소를 지나면 평야가 펼쳐지는데 그냥 평야가 아니다. 폐건물 혹은 버려진 벽들이 있는 평야다. 가이드는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흔적이라 했다. 1차 때는 아르메이나가 더 유리했고 아르메니아가 이쪽까지 치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곳에 살던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동쪽으로 이주해서 살아야 했다. 버려진 집과 벽들은 드넓은 평야에서 방어벽이나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을지 모른다. 그 버려진 흔적들을 지나가니 산등성이에 하얀색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수백 채가 위치하고 주변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이드는 이제 아제르바이잔이 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게 됐으니 정착할 수 있도록 정착지를 만드는 작업 중이라 했다. 학교와 공공기관들이 먼저 지어졌고 그 다음에 수십 채의 건물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족히 수 만 명은 거주할 수 있는 도시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분명 아제르바이잔도 전쟁으로 많은 이재민이 생겼을거고 그들이 사회 문제를 일으켰을테다. 그들을 위한 집을 마련해주는 건 전쟁 승리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수단이 되어줄 터였다. 조금 더 지나가니 호잘리 마을이 나온다. 한캔디와 슈샤 북동쪽에 위치한 호잘리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묘비들이었다.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군이 인종청소를 자행한 곳이다. 바로 옆의 호잘리 공항도 아르메니아군의 관문이었고 아제르바이잔이 탈환했음에도 여건상 개항을 하기 어려운 사실상의 군사 요새처럼 활용되고 있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 길가에는 오래된 성벽이 있지만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한 것 같다. 이곳을 지날 때 운전기사의 선곡이 조금 달라진다. 방금 전까지는 팝송이나 흥겨운 음악이었다면 여기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애국심을 자극하는듯한 노래들이 나온다. 아제르바이잔어는 잘 모르지만 계속해서 가사에 아제르바이잔이 나오는걸로 보면 이 지역 군가 혹은 선전가 아니었을까. 아제르바이잔 멸공의 횃불일지도 모른다. 호잘디 마을에서 아주 조금만 더 가면 아까까지의 비포장도로가 끝나고 포장도로가 나온다. 한캔디의 초입이다. 한캔디로 들어가려면 한 번 더 차량 및 탑승자 확인이 필요하다. 이곳을 지키는 이들이 군이 아니라 경찰이라는 건 그만큼 평화로운 지역이란 뜻이지만 완전하게 정착하지는 못하고 사소한 잡음이나 침입은 계속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타지키스탄의 아프간 접경지에서 타지키스탄 내륙으로 들어갈 때는 무장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곳은 그보다는 더 평화로운 곳이다. 검문소에서 딱 1분만 달리면 '우리는 우리의 산' 기념비가 나온다. 한캔디의 제대로 된 랜드마크이자 이들에겐 미움의 대상. 소련이 통치하던 1967년 아르메니아 조각가가 아르메니아인 노부부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우리는 우리의 산 기념비는 지극히 가족적으로 생긴 것과 달리 지극히 정치적인 기념비다. 아르차흐 공화국은 우리는 우리의 산 기념비를 민족적인 기념비로 부각시켜왔고 한캔디를 내려다보듯 높이 위치한 기념비는 그들에게 자부심을,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분노를 심어주었다. 가이드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이 기념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가 설명하는 바로 옆에는 총알 자국들이 나 있는 땅이 있었다. 크기를 보면 50구경은 되어보이는 구멍은 이 주변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아제르바이잔군도 이를 없애고 싶어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기념비로 올라가기 전 아마 아르메니아어로 기념비를 설명했을 간판은 떼어지고 자리만 남아있었다. 기념비 바로 뒤를 보면 아르메니아 문자가 적혀있어 더더욱 싫어할만 하다. 그러나 동시에 1967년, 소련 시절의 작품이라는 것도 명확하게 알려주기에 아제르바이잔은 승자의 여유, 일부 관용을 보여주기로 한 것 같다. 가이드는 우선 기념비를 존치시키되 처분을 다각도로 고려한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지만 그냥 파괴해버릴 수는 없는 존재다. 만약 이를 파괴해서 아제르바이잔 내 아르메니아계, 혹은 아르메니아를 자극하면 평화협정까지 끝낸 마당에 다시 교전이 시작될 수 있으니까. 대신 아르차흐 공화국의 건물들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다. 도시는 흡사 포템킨 하우스 같아서 대로를 따라서는 은행, 식당, 카페, 뭐든지 다 있지만 그 안은 아르메니아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한창이며 도시 중앙의 아르차흐 공공건물들은 완전히 파괴하고 그 자리에 대학교를 건설하고 있다. 우리들이 점심을 위해 도착한 식당도 엄청 커다랗지만 손님은 우리 뿐이었고 개업한지 한달 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곳이다. 한캔디에서 조금만 더 외곽으로 빠져나가면 슈샤가 나온다. 이곳 역시 과거 카라바흐 칸국의 수도였으며 역사적으로 더 상징성이 높고 복합적인 지역이다. 산 높이 위치한 슈샤는 해발고도 2천 미터에 있다. 한라산보다 높은 이곳은 아르메니아계와 아제르바이잔계가 모여 살던 곳이고 약 100년 전 아제르바이잔계가 아르메니아계를 축출하고 그 다음에는 아르메니아계가 아제르바이잔계를 축출한 악연의 지역이다.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때도 중요한 전장이었다. 슈샤에서 가장 먼저 본 건 슈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공원이다. 탁 트여있는 공원은 아르메니아계가 지배할 때 대통령과 아르메니아계들이 모여 춤을 추고 축제를 열던 곳이다. 이제는 아제르바이잔이 똑같이 대통령이 방문하고 춤을 추고 축제를 여는 곳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절경이 따로없다. 험한 산세, 자주 바뀌는 날씨, 질퍽이는 흙과 돌출되어 있는 기암괴석. 이곳이 왜 전략적 요충지였는지 알 것 같다. 가이드는 아까 전에 한캔디에서 오던 길이 바로 저 아래 있다고 소개했다. 이곳에 야포를 올려놓으면 한캔디와 주변을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고 반대로 공성하는 입장에서는 죽어나는 것이다. 어찌보면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드론이 부각될 수 밖에 없다. 카라바흐로 진격하는 길은 평야라 시야가 너무 탁 트여있고 슈샤와 전략적 요충지들은 고도가 높고 산세가 험하다. 기갑부대나 포병대, 혹은 공중강습부대와 공군력이 받쳐진다고 해도 공략하기 어려운 곳이다. 흡사 체첸과 같다. 아무리 아제르바이잔이 석유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러시아제, 이스라엘제 무기로 무장해도 아르차흐 공화국군이 이미 요새화한 지역을 뚫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드론은 그 요새를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수단이 된 것이다. 전통적인 방공망의 틈새를 노리고, 산세에 막히지 않고, 설사 손실되더라도 무인이라 인명손실도 없다. 전투에서는 보병과 기갑부대가 큰 역할을 했지만 드론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더 빨리 평정할 수 있는 열쇠가 된 것이다. 아제르바이잔군은 슈샤를 점령하기 위해 이곳을 포위하고 정예부대를 등산시키며 공성전을 펼쳤다. 추위와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갔을테고 그 위는 어떨지 감도 안 왔을테지만 드론이 눈이 되어줬을 거다. 여유롭게 관광하러 온 입장에서도 이곳은 환경이 보통이 아니다. 과거 페르시아의 샤가 이곳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지쳐서 포기했을만한 이유가 있다. 공원에서 내려가 천천히 슈샤 시내를 구경하였다. 사실 구경이라 할 것도 없다. 파괴된 도시는 복구되고 있거나 선전을 위한 곳들로 가득했다. 그래도 발빠르게 움직이는지 호텔, 공공기관, 은행 뿐 아니라 관광객센터와 기념품 가게도 눈에 보였다. 도시의 랜드마크인 슈샤 성채와 유하르 괴브해르 아가 모스크는 슈사를 지탱하고 대표하는 기둥이 되어주고 있고 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곳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흐차흐 공화국과 아르메니아를 연결하던 아주 좁은 라츤 회랑을 따라 아르메니아로 떠났다. 그들이 살 때는 모스크가 파괴되고 교회가 세워졌지만 이제는 모스크가 세워지고 교회가 파괴되어 있었다. 가이드가 말하길 이 투어는 지금껏 총 4번만 진행되었고 그 중 한국인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서 전쟁 및 분쟁 중인 지역이라 출국권고 이상의 조치가 있던 곳이니 어쩌면 2020년 이래 처음으로 이곳을 밟은 한국인일지도 모른다. 근 5년여 동안 한국인에게 금지되었을 곳을 가장 먼저 밟았을 수도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보기에 아제르바이잔은 자신들의 우위를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어디서나 LTE 데이터가 작동한다. 지금껏 여행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주요 도시에서도 어려웠던 것이 이제 막 평화협정을 맺고 관광지화 진행 중인 반유령도시에서 가능한 것이다. 잔해들 위로 자신의 도시를 당당하게 세우고 있고 현재의 국력 격차는 아르메니아가 따라오기 힘들다. 어쩌면 평화협정을 통해 완전히 아르메니아계가 빠져나갔기에 평화가 (예상보다는) 길게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마치 인구 교환을 통해 추가적인 대규모 충돌은 방지한 그리스와 튀르키예처럼. 슈샤와 한캔디도 제대로 재건된다면 관광지로서 매력이 생길 수 있다. 한캔디는 다소 정치적으로 건설 중인 도시라면 슈샤는 자연 절경이 뛰어나고 성채를 비롯해 문화 자산들이 많다보니 정치적 목적 외에도 일반인이 볼거리가 좀 있다. 더 재건되면 그러할 것이고, 이는 아제르바이잔이나 튀르키예, 이란 등으로부터 수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여행 투어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인상을 위해 길 위에서 10시간 넘게 보내는 건 다른 문제일 수 있다. 관광을 포함해 15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썼고 그 중 3분의 2를 차 안에서 보낸다. 심지어 이들도 이제 시작했다보니 제대로 정립된 상태가 아니다. 슈샤의 절경에는 제한선이 없다. 그냥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도 되고 만지고 싶은 건 얼마든지 만져도 된다. 이곳이 관광지로서 매력이 생기려면 더 오랜 시간 안정되거나 공항이 요새가 아닌 민간 비행기가 뜰 수 있어야 한다. 차에서 10시간을 보낸 뒤 보는 건 철거 가능성 높은 이민족의 기념비, 주인만 바뀐 공원, 의회 위에 만든 대학교, 그리고 멋진 절경이라면 다소 애매하다. 다른 이들이라면 조금 더 시간을 갖고 더 평가가 쌓이고 더 편의가 갖춰진 뒤를 노려보자. 한캔디와 슈샤로 가는 길은 새로운 도로와 도시 건설로 한창이다. 몇 년 뒤에는 시간을 좀 더 확실하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다른 이들도 한 번 들렸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면 한다.
작성자 : kcvn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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