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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고문서
미국 코네티컷 주 예일 대학교의 "베이네케 희귀본 및 수고 도서관"(Beinecke Rare Book & Manuscript Library)에 보관중인 문서 실물<보이니치 문서>Voynich Manuscript보이니치 문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하고 해독 불가능한 고문서로, 1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24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양피지 문서는 정체불명의 문자와 기묘한 삽화로 채워져 있어, 수백 년간 수많은 학자와 연구자들의 지적 호기심과 좌절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문서의 역사는 15세기 중반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존재가 대중에 알려진 것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1912년, 폴란드계 미국인 고서적상 "윌프리드 보이니치(Wilfrid Voynich)"가 이탈리아 로마 근처의 한 수도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렸다. 이후 탄소연대측정 결과, 이 문서는 1404년에서 143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조사에 따르면, 이 문서는 17세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소유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루돌프 2세는 미신과 신비주의에 관심이 많아 이 문서를 엄청난 거금에 사들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문서의 소유권은 여러 연금술사와 학자들을 거쳐갔지만, 그 누구도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미스터리로 남았다.보이니치 문서는 내용에 따라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각 부분은 현실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삽화들로 채워져 있어, 문서의 내용이 약학, 천문학, 또는 생물학 등과 관련되었음을 암시한다. 1. 약초학 (Herbal Section)문서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페이지마다 하나의 식물 그림과 함께 본문이 쓰여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식물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식물과는 다른 기이한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물은 다른 식물의 뿌리, 잎, 꽃이 뒤섞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중세 유럽의 약초 서적(herbal)과 유사한 형식을 따르고 있어 약초학이나 식물학 관련 내용으로 추정되지만, 삽화에 그려진 식물들이 실제하는지, 아니면 상상 속의 식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2. 천문학 (Astronomical Section)천문학과 점성술에 관련된 내용으로 추정되는 도표들이 등장합니다. 이 섹션에는 해, 달, 별자리로 보이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으며, 특히 12개의 원형 다이어그램은 황도 12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각각의 별자리는 나체이거나 옷을 입은 여성들의 그림과 함께 묘사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3. 생물학 (Biological Section)문서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작은 튜브들이 연결된 복잡한 구조물과 함께, 나체 여성들이 목욕하는 그림이 다수 등장합니다. 이 그림들은 마치 인체의 내부 기관이나 순환계를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중세 시대의 목욕 문화, 재생 의식 또는 심지어 생식 과정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습니다.4. 우주론 (Cosmological Section)대형 접이식 페이지에 여러 개의 원형 바퀴가 회전하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우주의 구조, 천체의 움직임 또는 일종의 지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삽화의 형태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여, 단순히 장식적인 목적을 넘어선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5. 약학 (Pharmaceutical Section)이 섹션은 약초학 섹션에서 등장했던 식물들의 뿌리, 잎 등을 담는 것으로 보이는 약병과 작은 용기들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앞서 나온 식물들이 약초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며, 일종의 조제법이나 치료법에 대한 내용을 담았을 것으로 보입니다.6. 레시피 (Recipes Section)문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부분으로, 짧은 단락들이 별 모양의 점으로 구분되어 나열되어 있습니다. 다른 섹션과 달리 삽화가 거의 없으며, 이는 약초를 사용하는 방법이나 특정 물질의 제조법 등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보이니치 문서의 모든 섹션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삽화와 문자가 함께 의미를 전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모든 내용의 실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현대과학으로 이어지는 해독의 희망>보이니치 문서의 해독은 20세기 암호학의 가장 큰 도전 과제였다. 제1,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했던 전문가들조차 보이니치 문서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이 문자는 단순한 치환 암호가 아닌, 훨씬 복잡한 체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언어학적 분석: 문서에 사용된 단어의 빈도 분포를 분석한 결과, 실제 언어와 유사한 통계적 패턴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 문서가 무작위적인 낙서가 아니라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 AI와 빅데이터 분석: 최근에는 인공지능(AI)과 자연어 처리 기술을 활용한 해독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8년 캐나다 앨버타 대학교 연구팀은 AI를 통해 이 문서가 고대 히브리어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일부 단어를 번역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번역은 문맥이 불분명하고, 학계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해 '새로운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영원한 수수께끼, 세 가지 가설>보이니치 문서는 그 정체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 진정한 언어 또는 복잡한 암호: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가설로, 문서가 실제로 의미를 가진 언어이거나 복잡한 암호문이라는 것이다. * 정교한 사기극 (Hoax): 16세기 초, 돈을 벌기 위해 고안된 정교한 가짜 문서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언어의 통계적 패턴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우연히 실제 언어와 유사한 패턴을 가진 가짜 문서를 만들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 마음속의 언어 (Glossolalia): 저자가 알 수 없는 영적 경험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쓴, 즉흥적이고 무의미한 언어일 수 있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수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니치 문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침묵하고 있다. 이 문서는 중세 유럽의 신비와 지식이 담긴 보물일 수도, 혹은 한 사람의 기발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일 수도 있다. 어떤 쪽이든, 보이니치 문서는 인류의 지적 호기심을 영원히 자극할 것이다.그리고 이 보이니치 문서에 대해서 흥미로운 해석중 하나는우먼 센스나 생생 내고향 같은 여성 건강 관련 잡지식 책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극히 일부 해석된 내용과 삽화들 보면기괴하게 생긴 식물삽화도 실존하는 식물들을 뿌리째 뽑은 후 눕혀놓아 쳐진 모습이라고 하고목욕법이나, 점성술 그러니까 별로 점치는법, 화장품으로 쓸만한 식물등 뭐 이런 여자들이 좋아하는 잡지식들 모아놓은책내용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거고뭔 언어인지 번역이 안되는 이유도그 지역, 아니면 당대 쓰는 축약어로 써놔서 이해를 못하는것이라 추정한다 한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역사역사] 고양이를 활용한 펠루시움 전투를 알아보자
https://youtu.be/kIVHL1AIkE8고대 이집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동물을 신성한 존재로 대우한 문명 가운데 하나였음.나일 강 유역에서는 고양이·이비스·송골매·황소 등 여러 동물이 특정 신의 화신으로 숭배되었음.그중에서도 고양이는 풍요의 여신인 바스테트(Bastet)의 상징으로, 집과 출산, 보호를 관장하는 존재로 여겨졌음.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이집트에서 집에 불이 나면 사람들은 불부터 끄는 대신 고양이를 구하러 뛰어든다”고 기록했고,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죽으면 가족 전원이 눈썹을 밀고 애도했다고 전함.심지어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의도적이든, 사고든 중범죄로 간주되어 사형에 처해졌다는 기록도 있음【Diodorus Siculus, Bibliotheca historica 1.83】.실제 고고학적으로도 이집트의 고양이 사랑에 대한 근거는 차고 넘침.사카라(Saqqara)·부바스티스(Bubastis)같은 유적에서는 실제 수천 구의 고양이 미라가 발굴되었고,이 중 상당수는 실제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확인됨.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에는 이런 고양이 미라와 바스테트 청동상들이 소장되어 있음.이는 이집트인들이 단순히 동물을 길렀다는 수준을 넘어 죽은 뒤에도 장례를 치르고 종교 의식에 포함할 만큼 깊은 애착과 신앙적 의미를 부여했음을 보여줌.그러다보니 이집트인은 (물론 당연히 육식과 사냥도 했지만) 채소나 유제품 등 채식을 주로 했는데, 이러한 식습관도 동물존중의 일종이라 볼 수 있겠음. 즉, 고양이는 단순한 애완동물이 아니라 가족, 신의 화신, 공동체를 지키는 존재로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에 기원전 525년 펠루시움 전투에서 페르시아가 고양이를 방패로 이용했다는 일화가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임.그럼 아래부터는 최초이자 유일한 고양이를 대거 활용한 전투, 펠루시움 전투를 알아보도록 하겠음. 우선, 이 전투를 알아보기 이전에 당시 이집트와 페르시아의 정치적-외교적 상황 및 관계 등을 알아 볼 필요가 있음. 먼저, 기원전 6세기 중반, 나일 강 하류의 이집트는 마지막 토착 왕조인 사이스 왕조(제26왕조) 아래에 있었음.기원전 7세기 초에 프삼티크 1세 등이 국내를 통일하고 국력을 신장시켰으며,이후 네카우 2세 등 파라오는 대외 교역과 군사력 강화에 힘썼음.그러나 신왕국 시대의 전성기에 비하면 국력은 쇠퇴한 상태였고, 제22~25왕조를 거치며 중앙 권력이 약화된 여파로 완전한 안정에는 한계가 있었음.그 상황에서 아마시스 2세(재위 기원전 570 ~ 526년)는 반란을 통해 즉위한 인물로서, 전임 왕 아프리스(우아히브라)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음.이러한 정권 교체로 인해 왕실 혈통의 정통성 논란이 당시 이집트의 구조적 불안기와 겹치며 상당히 혼란스러웠지만, 아마시스 2세의 포용 정책 등으로 집권기 동안 이집트는 번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음. 즉위 후 내정 안정과 경제 부흥에 힘쓰며 나우크라티스(Naucratis)에 그리스인 거류지를 허가하고,헬라스 세계와 활발히 교역하는 등 옛 패권국 지위까지는 아니어도 다시 부를 쌓으며 과거 영광을 어느 정도 회복하던 차였음. 동시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은 키루스 2세(고레스 대왕) 시기에 급속히 팽창하여 서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였음.키루스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재위 기원전 530 ~ 522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국 확장을 지속했고,특히 이집트 정복을 최대 과제로 삼았음.당시 페르시아는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 등 인근 강국들을 이미 굴복시킨 상태였고,지중해 동부에서 유일한 독립 강대국은 이집트 뿐이었기에 페르시아의 제1목표는 이집트를 굴복시키는 것이었음. 이에 따라,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면서 외교적으로도 주도면밀하게 움직였음.그는 사전에 동맹 관계 구축과 정보 수집을 통해 유리한 여건을 마련하였는데,예를 들어 이집트군의 그리스인 용병 지휘관이던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 파네스(Phanes)가이집트 왕과 불화하여 페르시아로 망명해오자 이를 적극 활용하였음.망명자 파네스는 이집트의 지리와 전략을 상세히 조언하여 페르시아군의 침공 계획 수립에 큰 역할을 하였고,특히 시나이 사막을 넘어 이집트로 진군하는 경로와 관련해 아라비아 부족들의 협조를 얻도록 제안했음.이에 따라 캄비세스는 이집트로 통하는 유일한 육로인 팔레스타인-시나이 경로의 통과를아라비아 부족 왕에게 요청하였고,아라비아 왕은 당시 이집트의 아마시스 2세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에 기꺼이 이를 승낙하며 페르시아군에 안전 통로와 식수를 제공했음.이처럼 페르시아 제국은 침략 이전에 철저한 사전 외교 공작과 보급 대책을 강구함으로써 장거리 원정의 장애를 극복하였음.또한, 캄비세스는 적의 동맹을 이간질하는 외교전략도 구사했는데,대표적으로 에게 해의 섬나라인 사모스의 참주 폴리크라테스가 자발적으로 페르시아 편에 가담하여 함선을 지원한 사례가 있음.원래 이집트가 오히려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와 친교를 맺고 그와 서신을 교환할 만큼 우호적 관계였으나,폴리크라테스는 기원전 525년경 돌연 캄비세스에게 사절을 보내 이집트 원정에 협력하겠다고 제안하였음.그 결과 폴리크라테스는 삼단노선4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페르시아 측에 파견하였음.(물론 폴리크라테스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체제에 반항하는 시민들도 같이 묶어서 축출하는 차원에서 보낸거긴함.)사모스 함대는 항해 도중 일부가 귀환하는 등 혼선도 있었으나,어쨌든 이 사건으로 이집트는 원래 기대했던 그리스 세계의 지원군을 잃게 되었음.이처럼 페르시아는 이집트의 우방이었던 그리스 세력(사모스, 키프로스 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이집트를 고립시킴으로써 전략적 우위를 이미 진작에 확보하고 있었던 것임. 페르시아의 이집트 침공은 단지 제국 팽창주의뿐만 아니라 양국 간의 외교적 갈등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음.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와 아마시스 2세 사이의 사소한 외교 마찰이 전쟁을 촉발한 직접 계기가 되었음.사건의 발단은 당시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게 매우 좋은 조건으로 이집트의 안과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구했음.(당시 이집트는 의학술 상당히 훌륭한 수준) 의사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달라고 요청했음에도 아마시스가 씹고 혼자만 보내 가족들과 생이별하게 된 것에 이집트에 원한을 품고, 캄비세스 2세에게 "파라오의 딸을 아내로 달라 요구하라"는 계략을 제시했음.당시 딸바보로 알려진 아마시스가 자신의 딸을 페르시아에 보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문제였고, 그렇다고 해서 거절하자니 강대국인 페르시아를 자극해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질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음.어쨌든 캄비세스는 이 조언대로 아마시스에게 공주를 시집 보내달라고 요구했고,아마시스는 강대국 페르시아의 요구를 뿌리치기도, 딸을 내주기도 곤란한 처지였기에 자기가 반란을 일으켜 죽였던 전왕, 아프리스의 딸인 니테티스를 자신의 친딸인 냥 꾸며 보냈음.그러나, 니테티스가 자신의 친정 아버지를 아마시스가 아닌 아프리스로 부르는 것이 발각되었고 결국 니테티스가 아마시스의 속임수를 폭로하면서 이 일을 통해 아마시스의 기만을 알게 된 캄비세스는 대노하여 이집트에 대한 원정을 결심하게 되었음.물론, 이게 하나의 흐름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제1원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실제로 이집트는 이전에도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와 동맹을 맺는 등 페르시아 신흥 세력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페르시아 입장에선 이집트가 잠재적 적대국으로 인식되고 있었음.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에 패배한 후 이집트만이 남은 독립 강대국이었으므로, 캄비세스가 적당한 명분을 얻는 대로 공격할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임.심지어 전쟁이 이제 막 일어나기 직전 아마시스 2세는 기원전 526년경 사망하였고,아들 프삼티크 3세(Psametik III)가 겨우 즉위 6개월 만에 대제국 페르시아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음.매우 어렸던 프삼티크 3세는 갑작스러운 국난을 헤쳐나갈 경험이나 기반이 부족했고,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고자 부왕 때 맺어진 그리스 도시국가들과의 동맹에 기대어 지원군을 요청했으나,앞서 언급한 대로 키프로스의 도시들과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 등이 모두 페르시아 쪽으로 선회하는 바람에 이 기대는 어그러졌음.게다가 이집트 용병대의 중요한 지휘관이었던 파네스까지 적국에 합류함으로써프삼티크 3세는 사실상 군사 전략 고문과 외원(外援)을 모두 잃은 상태에서 혼자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음.결국, 기원전 525년, 아마시스 2세가 죽은 바로 1년 뒤에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2세가 이끄는 군대와 이집트의 프삼티크 3세 군대가나일 삼각주 동쪽 관문인 펠루시움 성채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짐.이곳은 이집트로 들어오는 요충지였기에 이집트군은 강력한 저항 의지를 보였고, 성채에는 투석기와 같은 공성병기까지 준비하여 페르시아군에 맞섰음.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양측의 격전 후 현장에는 해골이 산처럼 쌓였다고 하며,나일강 주변 모래밭에 흩어진 이집트와 페르시아 전사들의 유골을 보고 그는 두 민족의 해골 단단함이 다르다고 기록하기도 했음.(이집트인은 어려서부터 머리를 깎아 햇볕에 두개골이 굳고, 페르시아인은 머리를 두건으로 가려 약하다 평함)사실 처음에는 이집트가 생각 이상으로 공격에 탁월하게 대응하며 방어했음. 폴리아이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이 펠루시움 성을 공격할 때이집트 수비군은 투석기와 화살, 불탄 등을 퍼부으며 완강히 저항하였고 페르시아 측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그러자 결국 캄비세스 2세는 전술을 돌변하며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고양이를 활용한 전술로 바꾸게 되는데 ....페르시아군은 캄비세스 2세의 전술 변경에 따라 전면에 이집트인들이 신성시하는 동물들을 내세우는 계략을 폈다고 함.구체적으로 페르시아 병사들은 개, 양, 이집트 따오기(이비스)와 고양이 등 여러 성스러운 동물을 잡아모아 방패 역할로 앞세웠고,어떤 병사들은 방패에 아예 여신 바스테트의 형상을 그려넣기도 했다고 전해짐.이집트 군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성 동물들이 적의 최전선에 등장하자 큰 충격을 받았으며,함부로 화살이나 돌을 쏘았다가 자칫 자기들이 신성시하는 고양이나 이비스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 망설이기 시작했음.그 결과 성의 방어선이 급속히 무너졌고 페르시아군은 손쉽게 펠루시움을 함락하여 이집트로 통하는 관문을 열 수 있었다고 전해짐.이 기묘하고 독창적인 전략으로 인해 믿거나 말거나 설화로는 전투 후 분노와 수치심에 빠진 이집트인들 앞에서 캄비세스가 일부러 고양이들을 집어들어 그들의 얼굴에 내던졌다는 이야기까지 나옴. 이러한 ‘고양이 방패’ 전술 덕분에 페르시아군은 최소한의 피해로 이집트군의 강력한 방어를 무력화할 수 있었고,이집트 측은 종교적 금기에 스스로 발이 묶여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음.결국 이집트군은 더 이상 항전을 지속하지 못하고 대열이 붕괴되어 퇴각하였으며,패잔병은 나일강 서쪽 내륙의 요새도시 멤피스로 도망쳐 최후 항전을 준비했음.프삼티크 3세 역시 펠루시움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멤피스로 돌아갔고, 페르시아군은 승세를 몰아 곧바로 멤피스를 포위 공격하였음.그러나, 당연하게도 멤피스 공방전은 오래 가지 않아 페르시아의 승리로 끝났고,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는 함락되었음. 참고로, 이 때 사실 페르시아 측에서는 굳이 무의미한 전투 하지말고 협상하자는 의미에서 사절을 보냈지만, 멤피스로 보낸 협상 사절이 이집트 군중들에게 몰매맞아 찢겨 죽임을 당하자 캄비세스가 분노하여 멤피스 함락 후 보복 학살을 명령했다고 함. 어쨌든 멤피스 함락과 함께 프삼티크 3세는 페르시아에 사로잡혀 포로 신세가 되었고,이로써 이집트 제26왕조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음.(참고로 프삼티크 3세의 공주는 노비로 / 왕자는 처형당하고, 프삼티크3세는 그나마 좀 대접받으며 살다가역모 꾸미는 걸 들켜서 오염된 황소 피 먹어 죽었다고 함.)아무튼 펠루시움 전투와 멤피스 함락의 여파로, 기원전 525년부로 이집트의 고대 왕조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되고,이집트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음.캄비세스 2세는 승전 후 이집트 전역을 손쉽게 제압하였고,정통 파라오를 몰아낸 정복자로서 이집트의 새로운 왕(페르시아계 파라오)를 자처함. 그는 이집트를 페르시아 제국의 제6번째 사트라피로 편입시키고 키프로스와 페니키아를 함께 이 관할에 묶었으며,자신이 이집트의 왕위를 계승했음을 내세워 이집트 제27왕조(제1차 페르시아 왕조)를 열었음.한때 독립왕조(제28~30왕조)가 부활하기도 했으나 결국 기원전 343년에 제2차 페르시아 지배가 재개되는 등이후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가 이어받기까지 지속적으로 외세 통치의 시대가 펼쳐졌음.아무튼 이 모든 변곡점이 된 것이 고양이를 활용한 펠루시움 전투에서의 페르시아 승리 덕분이라는 것임. 물론, 실제 고고학적으로 해당 전투가 다소 과장되었던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무튼 이 펠루시움 전투는 상대국의 문화적 요소를 활용한 독창적인 전술 전략이면서 동시에 계사적 변곡점으로서 중요함.이 전투에서 이집트 토착 왕조가 무너지고 이후 2000여 년간 진정한 자주 독립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펠루시움은 이집트 고대사의 종언과 외세 지배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분기점이라 할 수 있음.결과적으로 펠루시움 전투의 ‘고양이 심리전’은 역사적 사실 여부를 넘어 문화와 전쟁의 관계, 신념과 승패의 상관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고전적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임. 실제로 중국에서도 재건축 철거를 막기 위해 건물 주인이 건물 모든 면에 시진핑 사진을 붙임으로써 막은 일례도 있는 것처럼 우리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만약 제2의 한국전쟁이 또 한 번 발발한다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김씨 일가 사진을 탱크에 붙이는 것도 어떨까 싶음..
작성자 : 영단어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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