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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둠을 천재가 만든 게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게임 장르를 하나 고르라면 10명 중 9명은 FPS를 고를 것이다FPS는 다른 장르보다도 게임에 대한 몰입감이 상당한 장르이다생각해보자 내가 조종할 수 있는 캐릭터가 화면 상에 존재하는가? 없다모니터가 내 눈이 되어주고 마우스는 내가 쥔 소총이 된다FPS 게임에서 게임과 플레이어의 연결은 타 게임보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다FPS 게임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게임의 최정상에 자리한 왕좌에 굳건히 앉아 버티고 앉아 있다흥망성쇠를 겪었지만 여전히 FPS는 판매량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도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1970년대에 컴퓨터 그래픽은 미지의 영역이었다시대의 흐름은 이제 막 펀치카드에서 화면의 픽셀로 옮겨가는 중이었고컴퓨터의 픽셀은 프로그래머들에게 흥미롭고 새로운 장난감이었다FPS 게임이 처음으로 시도된건 1973년 NASA의 에임스 연구 센터에 설치된임락 PDS-1 컴퓨터용으로 개발된 메이즈 워(Maze War)이다이로 인해 개발자 스티브 콜리는 최초로 FPS를 개발한 프로그래머로 크레딧에 이름이 올랐다최초의 FPS 게임은 멀티플레이로 개발되었다플레이어는 한 타일씩 미로를 거닐며 다른 플레이어(눈알로 표시됨)가 보이면 레이저를 쐈다매우 어색하고 삐걱거리는 게임이었지만 응당 최초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1974년에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플라토 컴퓨터 시스템에서 'Spasim'이 개발되었다와이어프레임으로 렌더링 된 3D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우주선을 조종하며 다른 플레이어와 교전했다당시 하드웨어 성능은 너무 끔찍해서 프레임은 초당 1이어서 원할한 플레이는 불가능에 가까웠다이후 스페이스 시뮬레이터는 몇 년이 지나 아케이드 머신에 이식되었고우주선이 아닌 탱크를 조종하는 후속작 'Panther'가 되었다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아케이드 머신을 빼어 놓을 수는 없다1980년대 아케이드 머신은 '최첨단'이었으며 높아지는 하드웨어 성능에 힘입어새롭고 혁신적인 게임 디자인이 실험적으로 도입되었다'진짜' FPS 게임의 조상이라고 할만한 물건은 1980년대 등장한 배틀존일 것이다벡터 렌더링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탱크를 조종하며 기하학적 형체의 적들과 교전하고필드를 가로지르며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회전하고 이동할 수 있었다원시적이고 삐걱거리지만 우리가 FPS 게임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 그 핵심 요소가 거기 있었다미드웨이가 1981년 출시한 'Wizard Of Wor'는 1인칭 시점은 아니지만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했다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위험한 생물체가 들끓는 미로를 탐색했다2인 모드에서는 서로에게 총을 쏘며 교전할 수도 있었는데 이는 '둠'의 원형이 되었다울펜슈타인 3D와 같은 해 출시된 Taito의 'Gun Buster'는 아케이드에 출시된 최초의 프리 로밍 스프라이트 기반 FPS였다조이스틱으로 이동하고 라이트 건(아케이드 머신 용 주변 기기, 건슈팅 게임의 컨트롤러 생각하면 됨)으로 조준 및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또한 여러 대의 아케이드 기기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데스매치를 즐길 수도 있었다아케이드 머신이 아닌 가정용 컴퓨터에서 즐길 수 있는 FPS는 1987년 탄생했다Hybrid Arts가 Atari ST용으로 출시한 'MIDI Maze'가 바로 그것이다플레이어는 직각 미로에서 팩맨과 같은 구체를 조종하며 다른 플레이어에게 거1품을 쏠 수 있었다MIDI Maze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멀티플레이 기능이었다사운드 녹음과처리를 위한 MIDI 입출력 포트를 사용해 이 게임은 최대 16명의 플레이어와 플레이 할 수 있었다(다만 4명을 넘어가면 엄청난 지연이 발생함)또한 간단한 텍스트 편집기를 이용해 플레이어가 자신만의 커스텀 맵을 만들 수도 있었한편 1991년 MIDI Maze의 한 버전이 'Faceball 2000'이라는 이름으로 게임보이에 출시되었다하드웨어 해킹을 통해 대규모 멀티플레이를 즐길 수 있었고 꽤나 흥미로운 게임이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진 못했다Softdisk 출신 개발자 존 카맥, 존 로메로, 톰 홀, 아드리안 코맥은 미국 텍사스주에서 이드 소프트웨어를 설립한다존 카맥은 프로그래머로서 뛰어난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고 1990년대 커맨더 킨을 시작으로 PC의 성능을 끌어냈다이후 존 카맥은 3D 환경에서도 횡스크롤 게임 만큼 빠르게 화면을 렌더링 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을 알아냈다존 카맥은 'Catacomb 3D'라는 회사의 초기 타이틀에서 레이캐스팅이라는 개념을 개발했다이는 컴퓨터가 게임을 렌더링 할때 세계 전체를 구현하는 대신 플레이어가 볼 수 있는 지역만 그리는 것을 의미했다이를 통해 3D 게임은 비행 시뮬레이터와 그 아류작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았다1992년 기념비적인 작품이 발매된다이드 소프트웨어는 '울펜슈타인 3D'를 셰어웨어로 출시했다이는 고전 어드벤처 게임 '캐슬 울펜슈타인'의 비공식 후속작이었다본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2D 그래픽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내려다보며 조작했지만이 새로운 형태의 게임은 플레이어를 나치 감옥에서 나치를 학살하는 연합군 스파이 BJ 블라즈코윅스의 두개골에 박아넣었다이 게임은 1년 만에 20만장이 팔렸고 배급사 Apogee는 후속작을 의뢰했다게임은 엄청난 수준의 흥행을 했고 플레이어가 만든 레벨 800개를 모아 출시하기도 했다이 엄청난 히트작은 새로운 장르의 시작을 알렸다울펜슈타인의 대성공은 이드 소프트웨어의 개발진들을 고무시켰다그들은 더 큰 성공을 원했고 차기작 개발에 착수한다이드 소프트웨어는 'Hovertank One'과 'Catacomb 3-D'를 개발하며 두 차례 기술적 진보를 이루어냈다호버탱크 3D를 통해 더 빠른 렌더링이 가능해졌고 카타콤 3D에서 표현에 텍스처 매핑이 가능해졌다이제 게임은 다양한 고도의 바닥을 구현하고 영역에 따른 조명의 수준을 조절할 수 있었다에일리언의 라이선스를 얻으려는 시도가 무산되자 게임의 콘셉트는 악마와의 전추로 변경되었고기념비적인 작품 '둠'이 탄생했다게임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수많은 개발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이후 등장하는 많은 아류작들이 둠의 엔진을 재활용해 제작되었다하지만 둠의 한계는 명확했다둠 엔진으로 제작된 게임은 캐릭터와 오브젝트를 스프라이트로 표현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이는 당시의 컴퓨터 성능으로는 주변 환경을 모두 3D 렌더링하는게 불가능 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컴퓨터의 하드웨어 스펙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상황이 달라졌다폴리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처음 이드 소프트웨어는 세가의 '버추얼 파이터'에서 영감을 받은 3D 대전 격투 게임을 만들려고 했다하지만 팀은 더 익숙한 중세 세계로 배경을 옮겼고 게임은 슈팅 게임으로 변모했다1996년 발매된 '퀘이크'의 풀 3D 환경에서 플레이어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수직축의 이동이 가능해졌다이드 소프트웨어는 챔피언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지만 도전자도 있었다1998년 에픽 게임즈는 자체 엔진으로 제작된 '언리얼'을 출시했다언리얼의 엔진은 실시간 지오메트리 배치가 가능한 에디터를 제공했고 이는 모더들의 새로운 장난감이 되었다이후 20년의 세월을 거치며 언리얼 엔진은 업계 전반에 두루 쓰이는 신뢰 받는 미들웨어로 성장했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인터넷 인프라가 발달하며 대학 캠퍼스에 초고속 인터넷 회선이 연결되었다에픽은 1999년 처음 순수 멀티플레이 중심 FPS 타이틀인 '언리얼 토너먼트'를 출시했다싱글플레이 캠페인은 오로지 튜토리얼의 역할만을 하는 빈약한 한 요소에 불과했고 핵심은 멀티플레이였다게임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등장할 FPS 게임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한편 같은 해 말 이드 소프트웨어는 '퀘이크 3 아레나'를 출시했다초창기 FPS 게임은 매우 빈약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플레이어는 오조리 눈 앞에 나타나는 적을 찢고 죽이면 그만이었고 줄거리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하지만 1998년 '하프라이프'가 출시되며 개발사들은 개발 방향을 바꿔야 했다밸브는 블랙메사에서 탈출하려는 물리학자 고든 프리맨을 주인공으로 하는 게임 '하프라이프'를 출시했다컷신 없는 매끄러운 진행 방식을 통해 게임은 환경 스토리텔링을 장르의 핵심 요소 중 하나로 만들었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성 세실 대성당과 이단 이야기
프랑스 남부 Occidtanie // Langue d'oc 지방의 Tarn, 그리고 그곳의 도시 Albi 에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벽돌 성당이 위치해 있다.1282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480년에 건축이 완료되었는데, 일반적인 성당과는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을거임. 거의 동시기에 착공을 시작한 노트르 담 드 랭쓰와 비교해보면, 확연한 차이가 나는 걸 볼 수 있다.노트르담 드 랭쓰는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뽑히는데, 하이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굉장히 유명함. 위의 알비의 성 세실 대성당보다 약 100년 이른 시기에 (1345년) 건물의 전체적인 외관과 골격이 완성되었는데, 건물 내부나, 스테인드글라스같은 장식은 이후에도 줄곧 계속 작업이 진행되었으니, 한 15세기 쯤에 모든 작업이 완성되지 않았을까 싶다. 반면, 초기 고딕양식을 보이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경우, 노트르담 드 랭쓰와 마찬가지로 1345년에 건축이 완성되었는데, 파리 대성당은 모든 것이 완성된 시점이 1345년이고, 건축 시작 년도는 1163년으로, 1211년에 건축이 시작된 랭쓰 대성당과는 약 50년의 시간차가 있음.랭쓰 대성당은 프랑스의 전설적인 영웅인 요안나 아르켄시스의 동상도 있고, 샤를 7세 동상도 있는 등, 프랑스 민족주의의 상징 비슷한 곳인데, 마린 르펜은 여기서 쫓겨난 적이 있다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성 세실 대성당은 위 사진, 툴루즈의 자코뱅 수도원처럼 "남부 고딕" 양식을 사용했는데, 이 양식은 알비, 툴루즈 등의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만 발달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음. 이 남부 고딕 양식은 대체적으로 벽돌을 이용해서 건축되었고, 북부 지역의 고딕 양식과는 달리 장식이 많이 달리지 않아, 굉장히 절제되고 엄격하다는 인상을 받기 쉬운데, 프랑스의 여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성당이나 교회와는 달리, 오히려 요새같은 견고함이 느껴질거임.그리고 그렇게 느끼는게 맞다.그런 심리적인 효과를 유발하기 위한 건축 양식임.정확하게는 교회의 권위와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한 건축 양식인데, 이건 이 지방의 역사와 크게 관련이 있다.먼 옛날, 1200년대 쯔음에, 발칸반도- 특히 보스니아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 운동인 "보고밀" 이라는 기독교 이단 종파가 일어남.말은 기독교 이단인데, 오히려 마니교에 영향을 크게 받은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음.이 보고밀이라는 애들은, 세계 최고 (最古) 기독교 종파가 존재한,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유래한 기독교 이단 종파인데, 초기 기독교 역사에 존재했으나, 이단 판정을 받아 몰락한 영지주의- 그노시즘과 커다란 연관성을 갖고 있었고, 상술한대로, 이란-페르시아 지역에 기반을 둔 마니교와의 유사성 때문에 박해를 받았음.그노시즘은 그리스-로마신화 (특히 오르페우스 밀교) 까지 올라가는 존-나 어려운 종교-철학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서 직접 다루지는 않겠음. 나도 확실하게 아는건 아니라당시 교황은 도이칠란트의 로마 신성-제국 황제가 무릎꿇고 싹싹 빌었던 사건 = 카노사의 굴욕이 있던 1077년 이후로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상황이였음.발칸반도의 보고밀 파 신도들이, 상인으로써 또는 순례자로써 북이탈리아를 (밀라노) 횡단해, 남프랑스까지 신앙을 전파하게 되었다.당시 남프랑스- Langue d'oc 지역은, 이름 그대로, "오크어" 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오일어" 를 사용하던 북프랑스와는 사이가 그렇게 좋지않은 상태였음.비록 프랑스 왕국 밑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언어도 다르고 자치를 바라던 동네였으니까.이 남프랑스 지역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갖고 있었고, 자치를 중요하게 여기다보니 외부 권력을 별로 안좋아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 프랑스 판 보고밀파인 "카타리 파" 가 스며들고, 또 이곳 귀족들의 보호를 받게 되면서, 이 지역은 교황의 눈길을 끌게 됨.남프랑스는, 알다시피 이탈리아 반도와 그렇게 멀지 않은 지역인데, 이탈리아 반도와 매우 가까운 지역에 대규모 이단이 존재한다는 건,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입장에서는 전혀 달가운 게 아니였음.프랑스 남부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던 당시 프랑스 국왕과 교황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자, 1208년, 교황은카타리파의 3대 거점인 툴루즈 - 알비 - 카르카손에 대한 성전을 선포하고,북부, "오일어" 사용지역의 기사들이 남프랑스를 침공하게 된다.전쟁은 1029년까지 약 20년동안 지속되지만, 십자군 전쟁 이후로도 카타리파 신자들의 반란과 불만은 지속적으로 일어났음. 알비 십자군 전쟁 이전에도 툴루즈에서는 카타리파 교리를 반박해, 대중들을 카톨릭으로 다시 되돌리기 위한 수도사들의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고,이 설교의 십자군들은 이후,교황의 인준을 받아 창립자의 이름을 따 도미니코 회라는 이름을 얻게된다.이 도미니코 회 수도사들은 이단심문관이 되어 남프랑스에 잔존한 카타리파 신자들을 뿌리 뽑아버림.이렇듯, 알비 십자군 이후, 남프랑스 카타리파 이교 지역에 건축된 건물들은 교황의 권위를 내세우고, 이교도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건축되엇음.러시아 외무부 건물이 스탈린주의 양식으로 건축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몇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 마왕성 같다는 인상이 떠오르는 걸 보면, 이 남부 고딕 양식이 13세기의 스탈린주의 양식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드네.알비의 성 세실 대성당 내부는 이런 모습임.설령 건물 외부는 성당보다는 하느님의 요새 같은 느낌이지만, 내부는 일반적인 성당이랑 똑같음.하지만 지옥을 묘사하는 이런 벽화도 그려져 있는 만큼, 건축 의도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카타리파에 대한 성전, '알비 십자군' 이 끝난 이후, 교황은 동방의 정교회와 서방의 카톨릭 사이에서 줄을 타던, 보고밀파의 총본산인 보스니아로 눈을 돌림.교황은 보고밀파에 대한 성전, '보스니아 십자군' 을 일으키면서, 유럽 대륙 내의 보고밀 계열 이단 종파는 모두 사멸하고 맘.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는 끝났지만, 역사는 건축물이라는 형태로, 예술이라는 형태로 아직까지 내려오고 있구나.------끝
작성자 : 도시드워프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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