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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CIA와 페미니즘의 공생관계 그리고 흑인에 대한 공격
현대 페미니즘에 대한 요안나 윌리암스의 기사 "4세대 페미니즘: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이유"라는 기사를 읽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윌리암스는 오늘날의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고, 남성 폭력과 억압, 여성 피해자화라는 주장을 퍼뜨리는 데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 CIA의 지원을 받은 페미니즘은 흑인 여성들을 마틴 루터 킹이 제시한, 흑인 공동체 성공의 핵심으로서 '강력한 가족 단위 공동체'에서 이탈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의 4세대 페미니즘 또한 남녀 갈등을 조장하여 여성과 남성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이 가진 지위와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이 가진 바로 그 권력을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페미니즘은 결코 자신의 성공을 인정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지지자들이 자신의 역할이 끝났는지 자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사회에서 경력을 쌓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이를 인정하는 것은 생계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자아 정체성에 실존적 위협을 가한다. 결과적으로 여성의 삶이 나아질수록 페미니스트들은 또 다른 불평등과 차별을 찾아내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남성 권력과 억압에 대한 주장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은 #MeToo 운동의 지속적인 인기를 설명한다.윌리암스는 이러한 사회운동의 진정한 목적은 페미니즘을 도구 중 하나로 사용하여 사회를 인위적으로 분열시키고 "진짜 의제"에서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였다고 설명한다.
시민권 운동이 제도적 차원에서 많은 잘 알려진 변화를 가져왔지만, 이 운동이 미국 사회의 전면적 변혁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마틴 루터 킹의 꿈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이는 흔히 보수파와 진보파 사이의 당파적 책임 전가로 변질된다. 이 역사를 고찰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바로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 모든 사회 운동을 무력화하려 한 미국 정보 기관들의 공작이다.시민권 운동을 대상으로 표적 공격을 시도한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대략저그로 1960년대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포함한 CIA Asset들은 대부분이 흑인인 시민권 운동 지도자들을 표적으로 삼고 흑인 사회를 혼란 시키려 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같은 정부 요원들은 60년대와 그 이후에 마치 바이러스처럼 페미니즘과 같은 이론화된 선전을 퍼뜨리는 일에 직접 관여했다. 미국 내 흑인 공동체에 미친 영향은 인구 통제 실험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정도다. I. 글로이아 스타이넘과 CIA의 역사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CIA의 접촉 시작에 대해서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물적 증거들은 그녀가 대학 시절이나 졸업 직후에 모집되었음을 시사한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스타이넘은 인도와 남아시아를 여행했다. 스타이넘의 경력 기록에 따르면, 그녀가 그곳에서 만난 인물들 중에는 인도 공산당 창립자 M. N. 로이와 CIA 요원으로 보이는 한 연구원이 있었다. 스타이넘의 "공식적인" CIA 접촉은 1959년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시작되었다. 그녀는 독립 연구 서비스(Independent Research Service)라는 위장 조직을 맡아 1959년과 1962년에 소련에서 개최되는 청년 축제에 참석할 학생들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1978년, 페미니스트 단체 리스토킹스는 《페미니스트 혁명》이라는 책에서 스타이넘이 독립 연구 서비스의 팸플릿 《미국의 흑인 분리에 대한 검토》의 공동 책임자로 기재되어 있다고 썼다. 이 팸플릿은 흑인 미국인의 분리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체적으로 영속화된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사실들 중 하나는 《페미니스트 혁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포드 재단은 출판사 랜덤 하우스에 스타이넘과 독립 연구 서비스에 대한 모든 언급을 삭제할 것을 요구한 기관들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스타이넘, 독립 연구 서비스, CIA 사이의 연관성은 1967년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그해 비밀에 붙혀진 자금 지원의 세부 사항이 《램파츠》 잡지에 유출되었고, 이후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에 의해 널리 보도되었다. 이후 CIA와 스타이넘 본인 모두 결국 이 연관성을 인정했지만, 둘 다 그들의 작업이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II. CIA와의 유착관계 폭로 이후CIA하는 재직 기간 동안, 스타이넘은 다양한 CIA 작전에 관여한 여러 고위 인사들과 접촉했다. 미주리-세인트루이스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록펠러의 체이스 맨해튼 은행 회장 존 맥클로이, OSS 심리전 전문가이자 타임 잡지의 고위 임원인 C.D. 잭슨, 그리고 워터게이트 사건과 연관된 CIA 요원 코드 메이어가 독립 연구 서비스에서의 그녀의 작업을 지원한 인물들로 나열되어 있다. 스타이넘과 CIA의 관계가 1962년 이후 종료되었다고 하지만, 그녀와 공공 정책을 좌우하는 고위 인사들과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줄리안 어산지에 따르면, 스타이넘은 닉슨 행정부에서 일하던 시절 헨리 키신저와 데이트를 했다. 그녀는 또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살해에 FBI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 전 법무부 민권국 차관보 스탠리 포팅거와 9년간 관계를 유지했다.
스타이넘이 1971년 《Ms.》 잡지를 창간했을 때, 그녀는 존 F. 케네디의 1963년 댈러스 방문 준비를 도왔던 PR 임원 엘리자베스 포슬링 해리스를 공동 창립자이자 발행인으로 선택했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스타이넘의 작업이 얼마나 효과적이였는지 그리고 그 목표를 검토해보면, 스타이넘과 CIA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국 내 시민권 단체들을 약화시키려는 CIA의 공작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냉전의 절정기에 시민권 운동의 초기 급속한 성공과 미국의 권력 구조를 효과적으로 교란할 수 있다는 생각은 결국 그것을 정보 기관들의 표적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 동안 흑인 공동체에 대해 취해진 조치에는 시민권 지도부를 상대로한 표적 공격, 반전주의자들의 징집과 해외 분쟁 투입, 가족 단위를 겨냥하고 성별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공동체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A. 흑인 지도자들에 대한 표적화흑인 지도자들은 1960년대 훨씬 이전부터 정보 및 정부 기관들의 표적이 되어 왔지만, 60년대는 일련의 표적 암살로 특징지어졌다. 이 시기의 가장 잘 알려진 두 사례는 아마도 말콤 X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일 것이다. 흑인 민족주의자였던 말콤 X는 대부분의 경력 동안 킹 목사의 비폭력적 시민권 접근법에 반대했지만, 그의 사망 1년 전에 그의 의견은 바뀌었다. 1964년 5월, 말콤은 《뉴욕 타임스》에서 백인들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바뀌었으며 인종차별과 싸우기 위해 젊은 세대들과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 해인 1965년 2월에 암살되었다.
시민권 운동의 가장 상징적인 지도자 중 한 명으로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의심할 여지 없는 최우선 표적이었다. 킹 목사는 생전에 여러 차례 자본주의에 대한 약간의 사회주의적 비판을 했지만, 맑시즘에는 강력히 반대했다. 실제로 이러한 반대 때문에 그는 미국과 소련 양국의 정보 기관에 의해 표적이 된 유일한 미국의 고위 인사가 되었다. 소련의 KGB는 킹 박사가 공산주의자들이 계급 투쟁의 수단으로 인종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를 적대시했다. 그의 죽음은 말콤 X가 사망한지 3년이 되는 1968년에 왔다.이러한 상황은 베트남 전쟁과 맞물렸고, 이는 많은 수의 반전주의자 및 흑인 남성들이 징집되거나 전쟁터로 보내지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 군사 역사 옥스퍼드 동반자》에 따르면, 1965년부터 1969년 사이 흑인들은 미국 인구의 11%를 차지했지만, 베트남에 있는 군인의 12.6%를 차지했다. 이들 대부분은 보병으로 복무했고 14.9%의 사상률을 겪었다. 이런 통계 때문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다른 시민권 지도자들은 베트남 전쟁을 "백인의 전쟁, 흑인의 싸움"이라고 비난했다. 실제로 흑인 징집병이 전투에 투입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기 때문이다. 군인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은 또한 제2차 세계대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회를 교란시키는 효과가 있었다.B. OPERATION CHAOS 하에서의 CIA 국내 정보 계통 통합CIA는 외국 정치에 개입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국내 활동은 최근 몇 년간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60년대 말까지 CIA는 Operation Chaos라는 단일 프로그램 하에 다양한 국내 작전을 중앙집중화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된 이 작전은 1969년 1월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직을 맡은 후 모든 기존 CIA 국내 정보 계통을 그 아래로 통합했다.Operation CHAOS는 CIA가 "불법적이고 전복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고 여겨지는 집단과 개인들을 침투하고 스파이 활동을 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CIA가 표적으로 삼은 조직들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학생 조직, 흑표당, 그리고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CIA의 관계를 처음 폭로한 《램파츠》 잡지가 포함되었다. 1969년 4월 4일, 스타이넘은 《뉴욕 매거진》에 "흑인 권력 이후, 여성 해방"을 발표했다. 이 기사의 주요 초점은 여성들에게 시민권 운동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라"고 장려하는 것이었다. 시민권 지도부가 빈번한 암살로 인해 약화되고 전투 연령의 남성들이 베트남으로 보내지는 상황에서, 그녀의 글은 시민권 운동 내에 성별 갈등을 일으켜 이러한 문제들을 영속화하는 역할을 했다.
"흑인 권력 이후, 여성 해방"은 스타이넘이 "가부장적"이라고 공격한 사회상을 지지하는 이전의 철학들과 완전히 대조를 이루었다. 킹 목사와 같은 지도자들은 강한 흑인 미국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초석이 핵가족이라고 설교했다. 1966년, 킹은 연설에서 흑인의 생존 자체가 강한 가족을 만들고 육성하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킹은 "사회 전체가 안정, 이해, 사회적 평화를 위한 이 기반 위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1969년까지 킹과 같은 인물들이 제거되면서, 그가 미국 흑인 사회의 초석으로 본 것을 공격할 명확한 기회가 생겼다. 스타이넘의 기사로 불붙은 불씨는 시민권 운동에 병원체처럼 퍼지는 새로운 유형의 페미니즘을 "접종"했다.은밀한 정보 공작에 대한 폭로로 대중의 감시가 증가하면서 작전 CHAOS는 1973년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1974년, 기자 세이무어 허쉬가 《뉴욕 타임스》에 발표한 탐사 기사로 이 프로그램을 폭로했다. 이 폭로는 충분한 대중의 분노를 일으켜 하원과 상원에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넬슨 A. 록펠러 부통령이 이끄는 록펠러 위원회도 만들어졌다. 이 조사들은 제럴드 R. 포드 행정부 관리들이 의회 위원회가 정보 접근을 막고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록펠러 위원회에 초점을 맞추려는 시도로 특징지어졌다.
위원회의 목표는 미국 정보기관들의 잘못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유출로 인한 피해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MK ULTRA 프로젝트의 공개와 같은 유명한 폭로들은 사실 CIA 관리들이 이 프로그램들을 실패로 간주했기 때문에 폭로된 것이었다. CIA의 암살 공작 관여에 대한 공개를 포함한 일부 정보가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정부의 인구 통제 요구와 관련이 있고 1930년대 나치의 우생학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했던 록펠러 가문의 넬슨 록펠러가 관여한 것은 특히 문제였다.흑인 공동체에 대한 표적화는 1960년대 훨씬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1970년대에 터스커키 매독 실험과 같은 미국 인구를 대상으로 한 생물무기 실험이 공개되기 시작했을 때, 이러한 프로그램들에 관한 많은 정보는 여전히 기밀로 분류되거나, "파기"되었거나, 공공 영역에서 숨겨져 있다. 미국 시민을 실험쥐로 사용한 이 작전들의 전체 범위를 알아내는것은 불가능하다.흑인 공동체에 대한 법적, 생물학적, 사회학적 공격의 복합적 효과는 그들이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안정적인 가족 단위를 기반으로 한 사회상을 실현하는 것을 막았다. 1960년에는 흑인 아이들의 3분의 2가 두 부모와 함께 살았지만, 오늘날 그 수는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질병통제예방센터가 2012년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73% 이상의 흑인 아이들이 혼외에서 태어났다(1938년 11%에서 극적으로 증가). 이러한 통계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전반적인 출산율 감소의 일부다. 1960년대부터 사회과학자들이 가족 단위의 붕괴가 경제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고 관찰해 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세는 우려스럽다. 정보 공동체와 새로운 사회 이론들이 만들어낸 장애물들은 가족 단위에서 결속력 있는 구조를 유지할 능력을 저하시켜, 자녀들을 한부모 가정의 어려움과 지속적인 빈곤에 노출시켰다.페미니즘이 가족 구조를 붕괴시키고 흑인 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드는데도 불구하고,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2015년 《허핑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흑인 여성들이 자신이 1960년대와 70년대에 육성하고 확산시키는 데 도움을 준 "페미니스트 운동을 시작"한 것에 대해 공을 돌렸다.
이상으로 글을 마치겠다.
작성자 : 뉴진스민지사랑해고정닉
서울달리기 하프마라톤코스 소회
생각과 결과가 달랐지만 결코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작부터 생각하던 구호였다. 아마 패배를 먼저 생각했기에 30분 안에 들어오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조갤러들을 만나고 나면 오히려 시합때문에 생기는 긴장이 사라진다. 오늘도 그랬다. 짐 맡길때까지 분명 3명이서 갔는데 맡기고 나니 혼자남아있었다. 두리번거려봤으나 말그대로 서울광장에서 김서방찾기다. 덕수궁 대한문을 찍었다. 그리고 충무로 쪽으로 한 없이 걸었다. 내가 기억하던 길과 많이 변했다. 사진에 미쳐있을때 다녔던 중간중간의 나를 살려주던 화장실 건물들이 다 사라졌다. 그래도 다행이 파출소를 지나 스타벅스 건물의 화장실에 갔다 혼자 썼다. 출발이 대충 10분정도 남아서 워밍업 겸 살짝 달렸다. 솔찍히 판단 미스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분명 골반이 뻣뻣해서 이미 이때 장경인대를 살짝 걱정하긴 했었으니까. 출발준비하러 가는동안 스트레칭을 못한게 지금은 너무 아쉽다 차츰차츰 출발하고 출발했다. 2019년 서울 달리기가 생각이 났다. 코스는 다르니까 코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내 앞으로 나아간다’ 라는 감각이 다가왔다. 1-3km 이순신 장군님과 세종대왕님을 지나 경복궁 둘래길을 돈다. 웨딩사진 알바라던가 개인적으로 몇번이고 찾아온 경복궁… 20대때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시야가 좁고 더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아 이런길도 있구나.. 하고 천천히 돌려고 노력했다. 오르막에서 일부러 한번 멈췄다 다시 뛰었다. 주변 속도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경복궁을 돌아 나오면서 아니 사람들을 멈추게 하라고 내가 저리 간다니까!를 우주방어하시는 경찰 형님 4-7km 아니나 다를까 상당히 오래되고 선진시민이라면 어느정도 용납할만한 서울달리기에 차량으로 왜 못가게 하냐며 경찰형님들께 욕만 안했지 진상을 피우는 민원이 벌써 시작 되고 있었다. 그래도 차도를 내어준 대부분의 운전자분들께 감사했고 저런민원들 행사때문에 감당하는 경찰형님들도 감사했다. 결국 그래도 수십명씩 다수로 활동하는 러닝크루때문에 달리는 사람들이 욕먹는건 다를바가 없을테지만... 첫번째 코너를 돌기 바로 직전 정말 많이 다니던 곳이 나타났다. 카메라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그거리… 20대의 나는 여유가 없엇다. 늘 지쳐잇었고 왜 그런지 몰랐다. 남들따라 사진을 찍는 사람은 가야하니까 많이 다녔던 기억으로 다가왔다. 소심하고 멍청하고 아집만 가득한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은 아니길 바래본다. 힘차게 여기를 달리고 있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힘도 없고 능력도 없이 하악질이나하는 새끼고양이같은 무능력한 남자라니… 이제는 안녕이다. 그런 나는 없다. 그런 나를 버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돌아가진 않겠다. 숭례문을 돌았다. 여기서 처음으로 눈물이 핑 났다. 뭐 내가 대단한척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꺼드럭대면서 속빈강정이었는지… 내가 낭비한 무례하고 바보같이 소모한 젊은 날의 방황이여 이제는 안녕. 정말 안녕. 맞은편을 보며 조갤러 형님들은 벌써 여기 지나갔겠다 대단하다.. 나도 꼭 해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첫번째 반환... 그 출발할때 핸드폰이랑 붙여두면 안찍힐 수 있다 그래서 괜히 티셔츠를 좀 위로 들었다. 11k주자들은 여력을 지금 쓴다... 따라가보려했으나 나는 아직 멀었다. 7-11km 1차적인 통증들이 나타났다. 왼쪽 발목이 아파왔다. 잘 신경쓰며 충격을 배분해주고 싶은데 쉽지 않다. 뚱뚱하니까. 맞은편은 이미 11k 주자들조차 휙휙 달려나가고 있었다. 여유감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파워젤을 일찍이라면 일찍 먹어본다. 3개 종류를 다 다르게 가져와서 랜덤가차처럼 먹었다. 이번 대회선물로 받은 빨간 제품이었다. 10k 페매들조차 휙휙 지나간다. 슬슬 고1독하게 뛸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나만 늦게 뛴다는 느낌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계속 모든 사람이 나를 앞서간다. 우회전을 했다. 이제는 뒤로 못간다. 나는 하프를 달리겠다고 결정했다. 그럼 달릴 것이다. 반만 더 가면 된다. 시간은 어느세 1시간을 넘어있었다. 상당한 집중력일지 아니면 딴생각을 정리를 잘하고 있는 것인지… 미쳐 몰랐다. 그러나 나는 우회전을 했고 하프코스를 선택했다. 그럼 나는 그걸 한다. 선택했으니까. 다시한번 말하지만 조깅갤러리 10월 사자성어는 ‘기호지세’ 이다.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를 잡는다. 호랑이 등에 탓으니 이제 잡아야지.예전 문구갤 닉네임 '조식' 선생의 글씨. 나는 이분글씨를 참 좋아한다. 반대편에 수많은 하프 주자들이 힘차게 달린다. 생각보다 이쪽에도 사람이 있어서 위안을 받았다. 13km가 넘어가려는때에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정신을 전환할겸 파워젤을 또 하나 먹는다. 실력이 없으니 뭐라도 한다는 위안거리로 먹어본다. 세렌디피티 조갤러가 준 아이스블라스트맛이었나? 그 파워젤이었다. 생각보다 이게 나랑 잘맞는거 같다. 맛은 강렬했는데 이때 힘이 확 올라왔다. 플라시보일 수도 있고 그래도 내가 먹고 오… 뭔가 힘이 올라오네?라고 생각이 뛰면서 점점 들었다. 이거 한박스 살까한다. 커플 주자들을 뒤 따랐다. 7개월만의 13k 이상이다보니 내가 내속도로를 조절하기 어려웠다. 215페매가 왜 이 후미에 있나 생각해봤는데 11k에서 뛰던 사람인 것 같았다. 살짝 따라가볼까했는데 벅차서 아까 커플을 기준점으로 잡았다 655정도의 속도였기때문이었는데 점차 느려지더니 755까지 내려간다 덩달아 나까지 속도가 처지려는데 다른 그룹하나가 지나간다. 700으로 꾸준히 밀길래 따라붙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하면 안되는 실수를 한다. 6년간의 달리기 경험상 이걸 따라가면 2시간28분은 찍는 속도였다. 그런데 중간에 730으로 살짝 쳐지길래 파워젤 효과 덕에 힘이 붙은 나는 640정도로 속도를 높히며 앞서 나갔다. 경찰아조씨가 아니라 모범아저씨라 만만하게 보고 내려서 싸우는 차량주인... 화내는 이유 - 아니 아저씨 말투가 기분나빠! 15k에 조붕이가 응원해주니까 티나게 화이팅 해봐야지했는데 실패했다. 힘들어서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여기서 바나나는 바로 먹고 초코파이를 챙겼다. 여기서 나눠준게 맞던가? 아무튼 챙겼다 마지막 반환이다... 미지의 영역이다.. 장경인대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반대편에서 벌써 도로 정리를 시작한다. 괜히 조급해진다. 인도로 가라는 경찰차의 스피커가 마음을 후벼판다. 걷는 사람들도 다수가 보인다. 사람 마음이라는게 정말 특이하다. 10k를 죽어라 뛸땐 저 걷는사람들을 보면 나도 걷고 싶어져서 화가났는데 너무 힘들고 여태 뛰어본적 없는 거리를 뛰어보니 신경조차 안쓰인다. 장경인대가 슬슬 입질을 한다. 왠 숏컷의 여성분 한분이 16k 쯤 아 나는 할 수 있다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사실 그대 멍하니 쭉달려지고 있어서 그대로만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번뜩 정신이 돌아와 또 복잡한 혼자만의 생각을 막 시작해버렸다. 힘들면 멈추고 쉬고싶다라며 그렇게 안이하게 살아왔다. 끝을 보는게 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상태가 또왔으니 잘되었다. 이걸 이겨내보면 되겠네. 게으름아 덤벼라.라며 꾸준히 갔다. 대충 시간을 게산해보니 2시간 27분쯤 들어가질거같았다. 자~ 5k!! 40분남았다!!! 목청은 좋은편이니 외쳐보았다.그리고 스스로를 속여봤다. 힘들다면 이 목소리가 나올까? 그와중에 2.7k 촬영으로는 여기가 한계다라며 고프로도 꺼진다. 슬슬 한계에 다가온다. 18-21k 어느정도 뛰었을까? 기분전환겸 고프로를 만져 1080화질로 바꾸고 다시 작동시켜본다. 아까 숏컷 여성분이 결국 걷는다. 730으로 가면 여유있게 들어가지는 시간이라 힘내라고 말해본다. 나도 18k 진입 페이스는 700이라 걱정을 안했다. 심박은 185정도였지만 190이 아니니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때부터는 미친듯 시간 계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29분. 29분30초 30분 직전… 이대로만 가자 제발 제발… 이때 아까 앞에서 쓴 그룹에게 잡혔다. 설마 잡힐까 했었기에 생각보다 충격이었다. 시계를 봤다 745페이스로 쭉쳐져있던 것이었다. 따라 붙었다. 힘들어서 여기서 초코파이를 한입 물었는데… 먹은게 잘못이 아니고 이걸 들고 뛰는게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 버릴 곳이 없다. 아마 찍힌 사진마다 돼지가 초코파이 들고 뛰면서 따봉날리는 사진들만 건질거 같다.. 버릴 곳이 진짜 없다... 결국 이때 30초씩 두번 걸었다. 심박이 195가까이 가는데 무슨 소심줄이라고 내가 버티겠는가. 심박을 딱 180까지만 두번 떨어트리면 바로 뛰었다. 걷고싶지 않으니까. 이미 그룹은 코너를 돌고 있다. 이미 완주한 사람들이 다왔다며 응원을 한다. 18k부근에선 그게 별로 느껴지는게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진짜 코앞이 맞다. 심장이 아프다 몸에서 통제를 벗어나 따로 노는게 느껴진다. 21k -finish 사이버 포뮬러에서 아스라다와 오거의 마지막 코너를 다들 기억하는가? 늘 그래왔듯 나는 여기서 질주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능력이 안되서 달리지 못했다. 중간에 인도로 가라고 하는 바람에 속도를 줄일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다시 차도로 가라고 하더라. 그럴거면 그냥 뛰게 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분통이 터진다. 분명히 30분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들어왔다. 시계는 이미 30분을 19초나 넘어 있었고. 30분 안으로 들어오면 소리지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장경인대! 교통사고! 왼쪽발목내외측인대3도파열! 코로나! 신스! 다 이겨내고 나는 하프를 뛰었다! 라고 그러나 30분을 넘긴 내가 무슨 염치로 그걸 외친단 말인가. 눈을 질끈 감고 이 달리기를 마감했다. 그렇게 내 첫하프마라톤은 지구가 태양을 6바퀴를 도는 여정이 걸린 시간만큼 지나고서야 처음 시작했고 첫번째 매듭을 지었다. 생각과 결과는 달랐다. 6초. 나는 6초로 제한 시간을 넘긴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사연없는 사람 없듯 나는 그 6초만큼 긴 6년의 부상과 좌절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걸음마다 그 이야기들을 내려두며 하프를 뛴 것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결코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풀프레임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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