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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근대 건축기술.jpg
한중일의 전통 건축은 서양인에게는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한국인은 즉각 구별할 수 있는 뚜렷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건축은 공학과 예술이 결합된 분야로서, 궁극적으로는 삶의 방식과 문화가 반영된 산물이다.사진은 세계 최대 목조건축물인 일본 도다이지(東大寺)의 다이부츠덴(대불전)이다.현재도 단일 목조건축물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지만, 두 차례의 화재로 전소된 후 복원 과정에서 원래보다 규모가 축소되었다.중국의 자금성처럼 거대한 건축 복합체가 있으나, 단일 건축물로서 다이부츠덴을 능가하는 예는 드물다.일본 열도에서는 전근대에도 대형 목조건축물이 다수 건립되었는데,이는 고도의 목재 가공 기술과 구조 공학, 그리고 건축문화의 발전이 결합된 결과라 할 수 있다.우선 가구(架構)의 발전은 일본 목조건축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가구란 지붕을 지탱하는 구조물로, 건축물의 골격이라 할 수 있다.일본 건축은 8세기경 중국 등 대륙에서 가구 형식을 도입한 이후 약 1000년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특히 대규모 건축물의 조영을 용이하게 하는 다양한 구조적 기법들을 체계화하여, 견고하면서도 웅장한 목조건축물을 완성할 수 있었다.대륙 건축의 기본 구조는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는 방식이다.기둥 위에는 들보가 올려지며, 들보 위에 도리가 놓여 도리를 지점으로 삼아 서까래를 얹고 최종적으로 지붕이 형성된다.이 구조는 가로 방향(간구)으로는 확장이 용이하나, 깊이 방향(오행)으로 확장할 경우 들보와 지붕 사이의 거리가 크게 벌어져 지붕을 안정적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그래서 대륙에서는 건물의 내부로 갈수록 기둥을 높게 세워서 지탱하는 수법을 채택하고 있었다.보조적으로 기둥 위에 싣는 들보를 이중으로 설계하여 들보와 지붕 사이의 거리를 커버치는방법도 쓰였지만 이 방법은 오행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거목을 동원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또한 기둥의 배치는 지붕의 형태에 따라서 오르락 내리락 해야 했으므로 공간의 배치 역시높은 기둥으로 둘러싸이는 내진칸과 낮은 기둥으로 둘러싸이는 외진칸으로 이분화되어버리는평면 구성으로 고정되어 버리는데 여기에 대륙 건축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대륙 건축의 전형적인 가구 형식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8세기경으로, 그 대표적인 사례가 759년에 건립된 일본 열도의 토쇼다이지(唐招提寺)이다.토쇼다이지의 콘도(금당)는 당시 대륙 건축의 기본 구조와 미학을 충실히 계승하여,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우며 들보와 도리, 서까래를 통한 전통적 목조건축 기법을 구현하고 있다.이 건축물은 단순한 구조적 모방을 넘어, 일본의 기후와 재료 특성에 맞춘 적절한 변형과 지역적 특색을 결합한 결과물로 평가된다. 이는 일본이 대륙의 건축 기술을 수용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발전을 꾀한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따라서 토쇼다이지 콘도는 일본 목조건축 역사에서 대륙과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자, 이후 일본 전통 건축 양식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축적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10세기경부터 일본 건축에서는 대륙 건축 양식과 차별화되는 변화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대륙과 한반도에서는 처마를 길게 내기 위해 지붕을 곡선으로 휘게 할 때, 지붕면과 서까래 사이에 생기는 공간을 주로 흙으로 메워 단단하게 마감하였다. 반면 일본 열도에서는 이러한 공간을 일부러 남겨두고 지붕을 이중으로 구성하는 독특한 방식을 도입했다.이 이중 지붕 구조는 단순한 미적 변화뿐 아니라 통풍과 방수, 경량화 등 기능적인 측면에서도 장점을 제공하며, 일본 목조건축이 대륙 건축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결국 이 작은 구조적 변화는 일본 건축이 환경적 특성과 문화적 요구를 반영하여, 보다 유연하고 지역에 적합한 건축양식을 정립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12세기에 이르러 일본 건축은 이중 지붕 구조를 완성하게 된다.기존 지붕과 서까래 사이의 간극을 크게 확장한 후, 그 위에 별도의 동자기둥(柱)을 세워 추가적인 지붕을 형성하는 혁신적인 구조가 고안되었다.이 이중 지붕 방식은 건축물의 무게 분산과 내구성 향상뿐만 아니라, 내부 공간의 쾌적한 환기와 습기 조절에도 효과적이었다.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러한 구조는 일본 전통 건축의 독창성과 기술적 발전을 상징하는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13세기에는 중국 송(宋)나라의 건축 양식이 일본에 도입되면서, 목재 기둥을 관통시켜 서로 연결하는 ‘누키(貫木)’라는 새로운 구조기법이 습득되었다.누키 기법은 개별 기둥이 독립적으로 하중을 지탱하던 종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기둥들을 상자형으로 견고하게 결합하여 구조적 축부를 강화함으로써 수평력특히 태풍과 지진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힘에 대한 내구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이로 인해 일본 목조건축은 단순한 수직 하중 지지체계에서 벗어나, 전체 골조가 통합된 구조체로 진화하였으며, 이 누키 시스템은 이후 700년 이상에 걸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통 건축의 내진 성능을 담당하는 핵심 기술로 자리매김하였다.누키 구조의 도입으로 축부가 크게 강화되면서, 지붕 내부에 숨겨진 하네기(跳檜)의 기능적 이점이 극대화되었다.기존에는 하네기가 주로 기둥 위에 배치되었으나, 누키에 의해 축부가 견고해지면서 외벽면상의 어느 위치에든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하네기가 건물 내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외관상의 제약 없이 다량 설치가 가능해졌으며, 실제로 14세기 이후 지붕 내부는 하네기로 빼곡히 채워지게 되었다.한편, 지붕 하중을 지탱하던 공포(肘木)와 서까래는 일본 건축에서는 역학적 역할이 약화되어 주로 장식적 요소로 변모하였다.하네기는 지렛대 원리를 활용하여 처마뿐 아니라 내측 지붕 하중도 견고해진 외벽 구조에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내부 기둥을 가늘고 적게 설계할 수 있게 하였다.무로마치 시대에 접어들면서 누키 구조가 지붕 내부까지 확대 도입되었다.이로 인해 기존에 동자기둥이 촘촘히 늘어서던 방식은 폐기되고, 마치 정글짐과 같은 견고한 지붕틀이 형성되어 지붕 자체가 독립적인 구조적 강도를 갖추게 되었다.지붕이 자체 내구력을 가지면서 무거울 필요가 사라졌고, 넓은 내부 공간을 지탱하기 위한 거대한 거목 사용도 불필요해졌다.또한, 하네기가 닿지 않는 지붕 내부 하중은 면 단위로 분산되어, 기둥 설치 위치의 제약이 극도로 완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공간 배치의 자유도는 크게 증가하였다.이처럼 일본 전역에서 대규모 내부 공간을 갖춘 목조건축물이 다수 건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약 천년에 걸친 일본 건축 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이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특히, 거대한 목재를 대규모로 동원하지 않고도 견고한 구조를 구현할 수 있는 가구(架構) 시스템의 혁신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반면, 중국을 비롯한 대륙 건축에서는 다포식(多包式)의 공포 양식 변천 등 외관적 변화는 있었으나, 기본적인 가구 구조에 있어서 일본과 같은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변화는 찾아보기 어렵다.대륙에서는 여전히 장대한 목재 부재가 대규모 건축물의 구조적 전제조건이며, 이는 고대부터 크게 변화하지 않은 제약으로 작용해왔다.특히, 대규모 건축에 필요한 거목 확보에 있어 삼림 자원의 제한이 심각한 문제로 남아, 건축 기술의 근본적인 전환보다는 자원의 범위 내에서의 양식적 변형에 머무른 경향이 있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네거티장애고정닉
디올의 뮤즈, "럭키"에 대해 알아보자.araboza
오늘도 시발 향수 얘기보다 섹드립에 여념이 없는 우리 향붕이들이 모두 알고 있는 디올의 향수 럭키. 이 향수 이름은 실제 인물이자 디올 역사에 매우 중요했던 모델 루 시 다우파르를 뜻한다노. 루시 다우파르가 누구였으며 디올과 무엇을 하였기에 향수까지 나 왔을노?오늘은 루시 "럭키" 다우파르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아보자.araboza(루시 “럭키” 다우파르가 태어난 모르비앙 지역)독일이 1차대젖 배상금 못 내겠다고 배째라 선언을 한 1922년, 루시 다우파르는 모르비앙의 생모데 마을이라는 개깡촌에서 태어났다.루시 다우파르의 부모는 마을의 소작농이었다. 굶주림 때문에 루시를 버리고 파리 남쪽의 발 드 루아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세 살이었던 루시만 고향에 남아 다섯 살때부터 동네 빵집에서 잡일을 했다. 아기 때부터 이미 인생이 꼬여있었다.(싸튀충은 어디가고 여성들만 남았냐)루시는 열 살 때 홀로 기차를 타고 부모를 찾아갔다. 거기서 열여섯 살 때까지 부모와 함께 살았다.열여섯 살 때 동네 이상한 남자를 사귀었다. 남자는 애만 싸지르고 도망갔다.루시는 부모님 동네에서 멀지 않은 샤르트르의 카톨릭 기숙사에 강제로 보내졌다. 사회 밑바닥 여성들을 갱생시키는 시설이었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종종 매를 맞았다.(20세기 초, 여성시설의 재봉 수업)현대의 역사학자들은 20세기 초까지 있었던 카톨릭 여성 갱생시설을 아동노동, 강제노동, 노예노동의 한 형태로 보기도 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이곳에 입소한 여자들은 애미 없는 고아거나 창녀 출신이거나 최하층 빈곤여성이었다. 이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재봉틀을 돌렸다.하지만 이곳의 경험이 루시 다우파르의 훗날을 바꾸었다. 여기서 배운 재봉 기술을 통해 패션계와 가까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1940년, 독일군을 피해 탈출하는 파리지앵들)루시는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기숙시설을 탈출해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로 갔다. 거기서 용접공으로 일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같이 공장에서 일했다.남편은 루시와 결혼한지 반 년만에 실종됐다. 이번에는 자발적 싸튀충이 아니었다.루시는 남편 없이 아이를 낳았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 재봉 알바를 했다.(메종 아녜스 드레콜의 이브닝 드레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루시는 재봉 알바를 계기로 아녜스 드레콜의 피팅 모델이 되었다. 전쟁 때문에 파리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모델이 될 수 있었다.당시 모델이 하는 일은 옷을 입고 서있는 게 전부였다. 루시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키가 크고 목이 길었다.아녜스 드레콜은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실 드레스를 만들던 대단한 회사였다. 나중에 2차 대전의 영향으로 망해 없어졌다.(디자이너 마기 루프)아녜스 드레콜 파리 지점을 경영하던 디자이너 마기 루프는 자신만의 컬렉션도 만들고 있었다. 엄청난 부자이자 거액 상속녀였던 그녀는 전쟁 중에도 패션 제품을 계속 생산했다.독일군의 파리 점령 중에도 고급 패션을 만들던 디자이너 하우스는 마기 루프, 에르메스, 로샤스, 니나 리치, 자크 파뜨 등 소수에 불과했다.루시는 마기 루프의 소개로 다른 디자이너들의 피팅 모델 알바도 했다. 그러다가 자크 파뜨와 독점 계약을 하고 정식 패션 모델이 되었다.(자크 파뜨의 드레스를 입은 루시 다우파르. 이래보여도 20대 때다.)자크 파뜨는 피에르 발망, 크리스찬 디올과 함께 전후 오뛰꾸뛰르 패션 삼대장으로 일컬어지지만, 생전에는 발망, 디올과 격이 다른 거물이었다.자크 파뜨는 온가족이 유명한 예술가나 작가인 집안 출신이라 예술계 핵인싸였고 대단히 부유했다.루시가 자크 파뜨의 모델이었던 당시, 자크 파뜨에서 일하던 견습 디자이너가 지방시, 발렌티노, 기 라로쉬 등이었다.같은 시기 피에르 발망은 로베르 피게의 조수였고 발망의 친구인 디올은 그냥 덤으로 딸려있는 두번째 조수에 불과했었다.(당시의 일반적인 패션 모델. 오른쪽이 자크 파뜨)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부유하고 우아한 사람들이 다시 파리에 돌아왔다. 젊고 예쁜 20대 초반 여성들이 오뛰꾸뛰르 모델 일을 차지했다.종전 후 루시는 몇 년간 극도의 빈곤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미 거의 퇴물이었다.원래부터 좆나 못생겼던 데다 어린 시절부터의 고생으로 폭삭 삭은 그녀는 일거리를 거의 구할 수 없었다. 위 사진에서 자크 파뜨의 평범한 모델과 루시의 면상만 비교해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당시 루시에게는 아이가 벌써 넷이나 있었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다 달랐다. 남자들은 애만 싸지르고 도망가거나 실종되었으므로, 루시 혼자 아이 넷을 돌봐야 했다.(루시 다우파르와 크리스찬 디올)루시가 다시 찾은 일자리는 이제 갓 독립해 쥐좆만한 옷가게 하나 가지고 있던 하꼬 디자이너의 모델이었다.크리스찬 디올이라는 이름의 하꼬 디자이너는 미신을 믿는 또라이였다. 항상 부적을 지니고 다녔던 그는 점성술로 사람 만나는 날, 외출해도 되는 날, 집에만 있어야 하는 날을 정하는 사람이었다.디올은 전쟁 기간 유명 디자이너들의 모델이었던 루시가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를 “럭키"라고 불렀다.세 살 때 부모에게 버림 받았던 가난한 시골 계집이 루시 “럭키” 다우파르라는 레전드 모델이 된 순간이었다.루시의 인생 마지막 순간이자 그녀의 불꽃 같은 전성기가 시작된 순간이기도 했다.(1949년 루시 “럭키” 다우파르가 처음 등장한 디올 패션쇼)패션계 역사는 모델 루시 “럭키” 다우파르의 디올 시기 이전과 이후가 뚜렷하게 다르다. 사실상 루시로부터 “패션쇼” 가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그렇다.루시는 고급 드레스를 사러 온 부유층 고객들 앞에서 음악을 틀고 당당한 표정으로 걸었다. 사진 속 팔과 손의 독특한 포즈를 자세히 봐라. 루시 이전에는 패션계에서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루시가 없던 1948년의 디올 콜렉션 발표회)“패션쇼” 이전에는 디자이너가 새로 만든 콜렉션을 공개하는 발표회가 있었을 뿐이다.모델은 옷을 입고 고객들 앞에 멀뚱멀뚱 서있다가, 뒤로 돌아보세요 하면 뒤로 돌고, 그저 옷을 보여주었다.고객들은 옷만 보았다. 아무도 모델을 기억하지 않았다. 모델보다 옷이 돋보여야 했기 때문에, 모델은 기억에 남지 않아야 했다.(특이한 포즈를 취하는 루시 “럭키” 다우파르)그랬던 것을 루시는 당당하게 걷고, 워킹 사이에 특이하지만 인상에 남는 포즈를 취하고, 다시 걷고, 다시 포즈를 취하는 “쇼”로 만들었다.옷보다 모델이 돋보이긴 했지만, 루시의 디올 패션쇼는 여느 디자이너들의 발표회와 다른 것을 보여주었다.그저 옷을 보여주는 현장이 아니었다.루시의 디올 패션쇼는 전쟁이 끝난 세계의 아름다움과 약속된 미래의 풍요로움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좆밥 디자이너였던 디올의 이름도 루시와 함께 세계에 알려졌다.(디올 드레스를 입은 루시 “럭키” 다우파르. 뭔가 다른 아우라가 느껴진다.)루시가 서른 두 살이 되던 해인 1954년, 그녀는 세계 최초로 모델 노동조합을 설립했다.노동조합이지만 회사에 맞서 싸우는 일을 하는 데가 아니었다. 잘 나가는 모델 조합원들과 후원자들에게 걷은 돈으로 빈궁한 모델들을 돕는 일을 했다.빈궁했던 모델들이 잘 나가게 되면, 그녀들이 낸 돈으로 어려움을 겪는 다른 모델들을 다시 돕는 구조였다.갑자기 아프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모델들이 루시가 설립한 노조의 도움을 받았다.이러한 상호부조 형태의 사회제도가 현재는 연금이나 건강보험, 사회연대기금 등으로 정착되어 있다. 루시의 시대에는 법제도가 없거나 미비했기 때문에, 그녀는 뒤질 때까지 법률적인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디올 드레스를 입은 루시 “럭키” 다우파르)서른 여섯 살에 은퇴한 루시는 모델 학교를 설립했다. 모델처럼 걷는 법, 몸을 관리하는 법, 눈썹부터 손가락 끝까지 세세하게 포즈를 잡는 법을 가르쳤다.작게 시작했던 모델 학교는 이후 패션계의 유명한 모델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지금은 루시처럼 걷는 “워킹”이 패션 모델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그녀는 마흔한 살의 이른 나이에 암으로 죽었다.(디올 럭키)디올의 향수 “럭키”는 모델 루시 “럭키” 다우파르에게 헌정된 향수다. 그녀는 디올의 뮤즈이자 미신의 대상이었고, 디올 패션을 일으킨 장본인이다.향수 “럭키”는 생전에 은방울꽃을 부적으로 지니고 다녔던 크리스찬 디올의 미신에서 영감을 받았다. 은방울꽃을 메인으로 하는 가볍고 순결한 향기다.하지만 사회 최저층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던 루시의 생애나, 패션 모델로서 당당하고 특출났던 그녀의 이미지를 닮지는 않은 것 같다.모델들의 보돕보였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사회적 리더로서의 모습도 담겨있지 않다.은은하고 깨끗하지만, 은은하고 깨끗하기만 한 이 향수는 프랑수아 드마쉬라는 거장 조향사의 작품임에도 다소 심심한 평작으로 평가된다.(디올 럭키 에스프리)럭키 에스프리는 드마쉬의 뒤를 이어 디올 조향사가 된 외노자 새끼가 만든 좆망작이다.외노자는 오리지널 럭키에 흙냄새와 인돌릭한 땀냄새 등을 더했지만, 이 향수에 어울리지 않는 인공적인 단내를 너무 두텁게 넣어버려서 개쳐망했다.애 딸린 못생긴 흙수저로 시작해, 세련된 패션의 미래를 보여준 레전드 모델이 된 럭키.진정으로 그녀를 닮은 향수는 언제쯤 나올 수 있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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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안태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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