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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증리)라이저우 증류소
라이저우 증류소는 2021년 중국 쓰촨성 청두시 충라이(邛崍)에 설립된 신생 증류소로, 이 지역은 예로부터 바이주 생산지로서 긴 증류 역사를 자랑합니다.중국 내 위스키 신생 증류소 중에서도 관심을 두고 지켜보던 곳이었는데, 지인의 도움 덕분에 드물게 견학할 기회를 얻어 다녀왔습니다.라이저우는 약 15만 m²(약 45,375평) 부지에 위치해 있으며, 연간 약 6,500만 리터의 순수 알코올(LPA)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코틀랜드 싱글몰트 증류소 중 최대 생산량을 자랑하는 글렌피딕(약 2,100만 LPA)의 약 3배 수준이며, 지금까지 제가 방문한 모든 증류소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컸습니다.증류소 축소 모형그간 대부분의 증류소에서는 생산량과 품질이 반비례하는 경험을 자주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생산량이 많을수록 품질 관리에 집중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견학은 그러한 선입견을 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생산 공정을 미디어아트를 통해 소개하는 방식은 마치 위스키 테마파크에 온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대형 위스키 브랜드들이 대중 소비자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 에든버러 조니 워커 하우스, 맥캘란 에스테이트), 라이저우는 그중에서도 감각적으로 가장 잘 구성된 투어였습니다.캐스크 내부에 묻어있는 와인 결정을 확대한 전시, 분홍빛이 와인캐스크가 주는 풍미와 시각적으로 어울린다.투어 초반에는 생산 공정에 대한 전시가 이어지고, 중간에는 브랜드 철학을 전하는 연극이 있었습니다. 증류소에서 연극을 본 건 조니 워커 하우스 이후 처음인데, 전 세계 위스키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며 ‘중국에서 위스키를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화두에서 시작해 그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부분은 시음기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킬트 저렇게 입는거 아닌데.. 부들부들..과거 아드벡에서 일할 당시, 업계 동료로 증류소를 방문하면 특별히 더 많은 걸 보여주려는 관행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번 견학에서도 일반 투어에서는 보기 힘든 생산 설비들을 자세히 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일반 견학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생산현장. 님들두 증류소 하셈 두번 하셈라이저우는 일반적인 증류소라기보다는 ‘증류 도시’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큽니다. 예를 들어 800톤 규모의 발효조(아드벡은 10톤)는 어지간한 아파트보다도 클 정도였습니다. 시작한 지 4년 만에 120만 개의 오크통을 채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 막 100개를 넘긴 저희 작은 증류소가 떠올랐습니다.건물 외벽을 뚫고 나온 800리터 발효조특이하게도 설비 발주를 단일 업체가 아닌, 두 업체에 나눠서 진행했습니다. 서로 다른 업체에서 제작한 두 개의 매시튠을 통해 맑은 워트와 탁한 워트를 각각 생산하고, 증류기 10기의 형태를 전부 다르게 설계해 다양한 스타일의 스피릿을 얻는 방식은 마치 일본 야마자키의 방식을 한 단계 진화시킨 느낌이었습니다.증류기의 모양이 전부 다르다생산 외적인 부분에서도 기존 증류소들의 장점을 연구하고 개선한 흔적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스펜트 그레인을 바이오연료로 활용하는 방식(글렌피딕 사례), 바이오매스를 활용한 스팀 생산(맥캘란 방식), 발효 시 발생한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RTD 음료의 탄산가스로 재사용하는 등 최신 친환경 기술이 폭넓게 적용되어 있었습니다.스펜트 그레인으로 만든 쿠키, 화심주조는 지게미로 만든 약과를 준비중이다대형 증류소답게 자체 쿠퍼리지를 갖추고 있었고, 지금까지 본 쿠퍼리지 중 가장 정돈된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STR 공정을 자동화한 설비를 갖추고 있어 레드 와인 캐스크 활용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오크통 거래업자에 따르면 하루 약 700개의 캐스크를 입고한다고 합니다.중국산 참나무로 만든 오크통, 미즈나라와 같은 수종(퀘르쿠스 몽골리카)이다이쯤 되면 독자 분들 중에는 ‘그렇게 규모가 크면 품질은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고, 대부분의 대형 증류소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라이저우는 예외였습니다.일본, 스코틀랜드, 제3국의 다양한 신생 증류소 제품을 경험해왔지만, 단언컨대 최근 경험한 신생 증류소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품질을 가진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뉴메이크 스피릿 시음부터 시작했는데, 화려한 에스테르 향과 달콤한 곡물향이 공존하는 두 가지 타입의 스피릿을 적절히 블렌딩하고 있었습니다.남의 증류소에 갔는데 뉴메이크 스피릿을 맛 보여준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모든걸 다 주고 있거나, 정말 자신있거나헤리엇 와트의 위스키 전공 출신이라는 담당자와 금세 친해져, 일반 투어에서는 제공되지 않는 다양한 제품들을 시음해볼 수 있었는데 그중 황주 캐스크에 숙성한 제품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중국 황주는 개인적으로 드라이 셰리와 비슷한 뉘앙스를 느꼈던 술인데, 그 캐스크에 위스키를 숙성하다니 조합이 흥미로웠고 결과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안개 낀 산 속 신사(神祠)의 분위기, 오래된 고목 향, 은은한 약재향, 황토흙의 뉘앙스가 섞인 독특한 풍미였습니다. 그야말로 ‘액체로 만든 중국’ 같았습니다.황주캐스크에 대한 설명, 혼자 잘하지 말고 서로 페어플레이 하자고 아ㅋㅋ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티베트산 몰트를 사용하는 시도, 중국 와인을 주정강화해 오크통을 시즈닝하는 실험 등 크래프트적인 접근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토록 거대한 증류소가 실험정신까지 갖추고 있다니, 참 비겁하다고 느꼈고, 저도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동기를 얻었습니다.스코틀랜드 하이랜드가 아닌 중국 하이랜드(티벳)이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중국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저에게도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한 중국은 제 기대 이상으로 위대했습니다. 직원들은 “중국의 위스키는 중국다워야 한다”는 비전을 공유하며,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제품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견학을 넘어, 저 개인에게도 의미 있는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후기 중 언급한 황주 캐스크 제품은 소량 샘플을 조금 챙겨왔습니다. 언젠가 위스키 갤러리 분들을 대상으로 두번째 견학을 모시거나, BYOB에 참여할 기회가 생긴다면, 이 귀한 샘플을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작성자 : 이탄심판관고정닉
Never Forget, Never Forgive: KAL 858
'All aviation regulations are written in blood' '모든 항공규칙은 피로 쓰여졌다' -미 연방항공청(FAA) 1970년대, 대한민국은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었음에도 국가주도적인 경제정책을 통해 빠르게 발전했다. 길거리에는 빌딩이, 지하에는 하수관과 지하철이 깔렸고, 집집마다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발전의 중심에 한진그룹이라는 한 재벌이 있다. 정석(靜石) 조중훈 회장, 1945년 인천에서 트럭 1대로 한진상사를 창업했다. 전후 미군 납품 수송권, 베트남전 군수물자 수송을 도맡으며 중소기업이었던 한진상사를 크게 성장시킨다. 1960년에는 고속버스 회사인 한진관광을, 7년 뒤에는 해운사인 대진상선을 설립했고, 삼성으로부터 동양화재를 인수해 금융업에도 손을 뻗었다. 1968년에는 건설업체인 한일개발을 합병했다. 1969년에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 대한항공으로 사명을 바꿔달고 영업을 시작한다.1969년 당시, 대한항공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항공사였다. 보유한 기체는 단 8기, 그중에서 제트기는 DC-9 1기 뿐이었다. 옆나라의 JAL(일본항공)이 2년 전인 1967년에 런던까지 취항했던걸 생각해본다면 너무나도 초라했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해 1969년 일본제 YS-11 8기를 구매하여 국내 노선을 확충하고 외항사로부터 B-720을 대거 임차하여 국제선에 투입, 1970년에는 10개소의 해외지점을 설립한다. 그리고 1971년 6월, 대한항공은 보잉에 주문서 1장을 넣는다 기종은 B-707-3B5C, 등록번호 HL7406, 가격 970만불, 대한민국 최초의 B-707이었다. 1971년 8월 11일부터 김포~도쿄를 오가며 승객들을 태웠고 이후에는 대한항공의 미주노선인 KE 001/002편에서 활동,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미국땅을 밟게 해준 기체였으며, 1980~1982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기로 쓰이기도 했다.HL7406이 날아오르는 동안 회사는 급격하게 커진다. 1969년, 비행기 8대로 시작한 작은 항공사는 어느덧 B-747로 미주노선을 횡단하고 있었다. 급속하게 성장했던 만큼 어두운 면도 꽤나 많았다. '빨리빨리'가 일상이었던 나라에서 안전은 부가적인 요소였다. 안전수칙들은 제대로 지켜지는 항목들이 없었다. 항공기 운항이 동네 용달회사 운영하듯 이루어져 최대이륙중량(MTOW)를 초과하는 과적이 반복되었으며, 이로 인해 수없이 많은 추락 위기를 단순히 조종사들의 기량으로 때우는게 일상이었다. 당시 대한항공은 비용 절감에 집착했다. 정비비용을 어떻게든 아끼기 위해 고장난 비행기를 그냥 무턱대고 비행시키는 것은 기본에다가, 전세화물기같은 부정기편은 영공통과 허가증조차 안받고 일단 항공기를 출발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장난 항공기도 안고쳐주는 회사에서 워라벨같은게 있을리 없다. 대한항공의 조종사들은 70년대의 노동자가 으레 그렇듯이 자신들의 건강을 버려가면서 비행기를 조종했고, 승무원들은 몇십시간씩 잠도 자지 못한채로 승객들을 응대했다.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66년부터 '82년까지 16년간 대한항공은 총 307건의 사고를 냈다. 1976년 30건, 1978년 30건, 1979년 37건, 1980년 39건, 전체 사고의 60% 이상이 76년부터 82년 사이에 발생한다.HL7406도 크고작은 사고들을 피해갈수는 없다. 1977년과 1987년, 노즈기어에서 유압계통 결함이 발생해 동체착륙하는 사고를 겪는다. 미국에서 수리와 엔진 개조를 받은 후 1987년 11월에 다시 운항을 시작한다. 858편이라는 이름으로 바그다드~김포 노선에 투입될 것이다.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사담 국제공항 대한항공 858편의 항공권을 소지한 일본인 2명이 보안검색대에서 공항 관계자들에게 붇잡힌다. 바그다드 공항의 보안검색은 꽤나 엄격하다. 당시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기였고, 1985년에 승객 307명과 승무원 22명을 태운 에어 인디아 182편이 아일랜드 근해에서 시크교도의 폭탄 테.러로 공중폭.파된 이후 공항 보안검색이 더욱 깐깐하게 변한 탓이기도 했다. 70세의 노인 하치야 신이치(蜂谷眞一) 25세의 하치야 마유미(蜂谷眞由美) 부녀지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총 5번에 달하는 보안검색을 거치며 짜증을 부렸다. 이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일본인이긴 한걸까? 당연히 아니다. 이들은 조선로동당 해외정보조사부, 현 정찰총국 소속으로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었다. 본명은 김승일과 김현희 당시는 1988 서울 올림픽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으로, 북한은 남한의 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여러 작전을 실행한다. 대외적으로는 서울-평양 공동 올림픽을 주장하거나 독재국가였던 대한민국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황으로는 올림픽을 열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으며, 물밑으로는 남의 나라 국가원수 묘소에 폭탄을 설치해 대한민국 정부 관료들을 폭사시키거나 수도 한복판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키기도 했다. 올림픽 개최까지 1년도 채 남지않은 시점에서 대한민국 국적기 1대가 공중폭파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 최대의 항공사였던 펜암은 103편 폭파 사건으로, 제 2의 항공사였던 TWA는 800편 공중분해 사고로 망했다. 대한항공이 이를 버틸 수 있을리가 없다. 미국 국무부가 대한항공 이용 자제를 권고할 정도로 별로 안전하지 않은 항공사다. 사고로 한국인 수백명이 죽겠지만 북한은 신경쓰지 않는다. 1987년 11월 12일, 북한 공작원 두 명은 평양을 떠나 소련의 모스크바로, 모스크바에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이동했다. 이후 헝가리에서 6일간 머물다가 11월 18일에 자동차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동, 이때 헝가리에 파견된 요원으로부터 일본 위조여권을 넘겨받는다. 오스트리아는 냉전 시대에 명목상으로는 중립국이었기에 북한 여권으로도 입국이 가능했지만, 북한보다는 일본 여권이 의심을 피하기엔 더 수월하다. 당시 북한인들 중에서 해외여행이 가능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국조차 아직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다. 반면, 1986년에만 일본인 550만명이 해외여행을 떠났다. 550만명중 2명, 모레밭에서 바늘 찾기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들은 빈에 위치한 호텔에서 9일간 숙박했지만 아무도 그들이 테러범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희생자를 찾아나설 시간이다. 2명의 공작원들은 오스트리아 항공을 이용하여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이라크 바그다드,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를 거쳐 바레인으로 가는 티켓을 구매했다. 대한항공과 코드셰어된 티켓이다. 비행기를 폭파시킨 후에 이탈리아로 도피할 계획을 세운 이들은 아부다비에서 로마로 가는 항공편 티켓도 구매한다. 11월 27일, 오스트리아로 온 다른 북한 요원이 이들에게 액체 폭발물과 기폭장치를 건네주었고, 이들은 다음날 이라크 바그다드로 떠났다.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사담 국제공항 HL-7406이 이륙을 준비하고 있다. 콜사인은 대한항공(KAL) 858편,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아부다비, 방콕을 거쳐 최종적으로 김포에 착륙하는 노선이다. 탑승객의 대다수는 중동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파견 노동자들, 고된 몸을 이끌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몇시간 뒤면 그리운 고국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 다시 사담 국제공항의 보안검색대로 돌아와 보자. 전쟁중인 이라크에 나타난 늙은 일본 노인과 젊은 여자, 꽤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보안요원들은 그들의 소지품을 샅샅이 뒤진다. 총 9번에 걸친 추가적인 보안검사 끝에, 가방에서 라디오 하나가 발견된다. 이들이 소지한 파나소닉 RF-082 라디오, 사실 라디오 기종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당사자의 진술이 수없이 뒤바뀐 탓이다. 하지만 라디오의 배터리가 문제가 되었던것은 확실하다. 2년 전,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사건에서도 테레범들은 라디오 내부에 폭약을 집어넣어 비행기를 터뜨렸다. 공항 보안요원들이 1.5V 배터리 4개를 압수하자, 마유미는 울면서 돌려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보안요원들은 라디오를 X레이 탐색기로 3번이나 검사하고 배터리 하나를 칼로 뜯어보기까지 했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었던 탓에 배터리와 라디오를 돌려준다. 늙은 노인과 젊은 여자, 테러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조합이다. 저들이 비행기에 해를 끼칠 수 있을까, 바그다드의 보안요원들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라디오 안에는 컴포지션-4, 흔히 C-4라고 불리는 고성능 폭약이 250g가량 들어있었다. 밤 11시 30분경, 3시간의 기다림 끝에 858편의 7B와 7C 좌석에 탑승한 이들은 기내 선반에 라디오를 올려놓는다. 액체 폭발물인 PLX 700cc도 양주병에 담겨 기내로 반입된다. 타이머는 9시간 뒤로 맞춰 놓았다. 그때쯤이면 그들은 이미 로마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858편은 주기장을 떠나 활주로로 향한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몇시간 뒤, UAE 아부다비 국제공항에 858편이 착륙한다. 승객 15명이 내리고, 11명이 새로 탑승했다. 아유미와 신이치는 걸프에어 003편으로 환승한다. 요르단 암만으로 이동한 뒤 로마로 떠날 것이다.하지만 이들의 여행은 바레인 국제공항에서 끝난다. '빈에서 베오그라드를 거쳐 바그다드...경로가 너무 수상한데?' '여자 여권번호가 왜 MG로 시작하는거야? 이건 남자 번호잖아' 이들의 도피 시도는 처음부터 실패했다. 비자 문제로 요르단이 아닌 바레인으로 날아가야 했고, 바레인 당국은 그들의 여행 동선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공작원들은 11월 27일부터 29일까지 5개국에 들렀다.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UAE, 바레인) 80일간의 세계일주라도 하려는 것일까, 일본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도 의심가는 동선이다. 급하게 여권을 위조하느라 일련번호가 잘못 찍혔다. 여자 여권의 일련번호에 남자를 의미하는 MG가 인쇄되어 있다. 이들은 곧장 바레인 경찰에 체포된다. 한편, 858편은 아부다비를 이륙해 방콕으로 향하고 있다. 승객 104명, 승무원 11명, 이중 1명은 인도인, 1명은 레바논인이다. 고도 37,000ft(11km), 기장이 항공관제소와 교신을 시작한다. "우리는 정시에 방콕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들은 영원히 도착하지 못했다. 한국 표준시로 오후 2시 5분경, 설정된 9시간이 지나자 라디오 내부의 기폭장치가 작동한다. 858편은 기수부가 떨어져 나가면서 공중분해되어 미얀마에서 서쪽으로 18마일(29km) 떨어진 안다만해에 추락,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비상상황을 알리는 교신도, 목격자도, 파편도 없었다. 최종적인 기체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 수색지역이 급속도로 넓어지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태국에 조사단을 급파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12월 10일, 사고 11일 후에 대한민국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한다. 필리핀에서 미군 P-3C 3대가 이륙하여 수색을 시작, 12월 13일에 비행기에서 떨어져 나온 구명벌을 발견한다. FDR(비행기록장치)와 CVR(조종석 녹음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12월 17일, 대한민국 정부는 수색을 종료한다. 사고발생후 20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12월 10일부터 12일까지, 단 3일간 수색작업이 이루어졌다. 2009년, 에어프랑스 447편이 대서양에서 추락하자 프랑스 정부는 2011년까지 블랙박스 수색에 나섰다.1985년 에어인디아 182편이 폭파되었을때도 인도 당국은 CVR과 FDR을 발견할때까지 수색을 계속했다. 블랙박스 발견까지 2주도 걸리지 않았지만 858편보다는 길었다. 유족들이 이를 납득할 수 있을까, 1990년 3월 13일, 우연히 기체 잔해가 인양된다. 플랩, 엔진덮개, 연료탱크, 옷가지가 함께 발견되었다. 한 어부가 자신의 그물로 건져올린 것이다. 원래는 고물상에 팔아넘기려고 했지만, 선주는 어망이 끊어지고 선체가 파손되었으니 물어내라면서 한국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다른 파편들도 추가적으로 발견되기 시작한다. 발견 장소는 태국 어촌의 한 고물상이었다. 태국의 어떤 선원은 날개를 인양하여 기념품으로 삼았다. 아마 수많은 증거품들이 이렇게 사라졌으리라 대한민국 정부는 사고조사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태국의 어부들도 찾아내는 잔해들을 찾지 못했다. 재수색을 요구하는 유족들에게는 추락지점의 수심이 깊어 수색이 어렵다고 거짓말을 친다. 버마 사고조사위가 예상한 추락지점 수심은 50m였다. 그래도 꽤나 많은 잔해들이 한국 정부에게 인도되었다. 정확히는 당시 국정원의 전신이던 국가안전기획부에 인도된다. 안전기획부는 이 잔해들을 국과수에 감식을 요구한다. 감식을 마쳤으면 다시 되찾아가면 될 일이다. 안기부는 무려 5년간 잔해를 되찾아가지 않았다. 아니, 국과수에서 찾아가라고 전화를 해도 씹어버렸다. 유일한 증거들은 국과수 내부 규정에 의거해 폐기처분된다. 유족들이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바레인에서 체포된 김현희와 김승일는 청산가리로 살자를 시도했지만 김승일만 요단강을 건너는데 성공했고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당한다.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16일만에 사면되었다. 사면 이후 국정원 직원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그녀는 유족에게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30년간 전화 한통, 편지 하나조차 건네지 않았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수많은 음모론의 근원지가 되어 유족들을 절망에 빠뜨렸으며, 자신을 정부에서 탄압받는 정치싸움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온갖 핑계를 들며 진실화해위의 조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도데체 무슨 이유로 사면한단 말인가? 정부는 살아있는 증거로 남겨두기 위해서라고 했다. 1급 간첩을 살려둠으로써 얻는 이익이 막대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체 파편들을 찾아가지도 않았다. 어민들도 찾는 잔해를 수심이 깊다는 핑계로 수색하지 않았다. 2014년, 말레이시아 항공 337편 실종사건이 발생하자 국내 방송사들은 김현희를 전문가로 초빙한다. 115명을 죽인 테러리스트를 전문가랍시고 떠받들고 있었다. 2020년, 대구 MBC에서 사건 33년만에 858기로 추정되는 잔해들을 미얀마 근해에서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2021년에 발발한 미얀마 내전이 지속됨으로써 아직까지 잔해 수거는 요원한 상태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무차별 테.러에 의해 희생된 무고한 대한민국 국민 113명과 인도인 1명, 레바논인 1명의 명복을 빌며 글을 마친다.
작성자 : 우희힝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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