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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어떻게 애니를 불법으로 봤을까? LD 해적판 비디오
요즘 어둠의 루트로 애니를 보려면P2P, 무슨무슨 디스크, 토렌트를 이용해서 컴퓨터에 다운받거나인터넷 스트리밍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는 방법이 있다우리나라는 인터넷이 빨리 발달한 덕에 2000년대 초반부터 일상화된 방식이었다그런데 컴퓨터도 겁나 비싸고인터넷도 없고 삑삑 소리에 영상을 재생할 수도 없는 1980~90년대에는 어떻게 불법으로 애니를 봤을까?바로 레이저디스크를 가게에서 사면 그것을 비디오테이프(VHS)에 무한정 복사한LD 해적판 비디오 라는게 있었다1. 레이저디스크가 뭐임?일단 레이저디스크가 뭐냐면,1979년 개발된 영상을 담을 수 있는 광학식 디스크다요즘의 DVD, BD처럼 플라스틱 수지 사이의 반짝거리는 표면에 영상신호를 새겨서그것을 레이저로 읽어들이는 방식이다다만 다른게 있다면 크기가 존나 컸다는 것12인치 레코드판과 같은 사이즈였다개발된 년도가 년도인만큼 영상신호의 밀도가 낮고디스크에 CD나 DVD처럼 디지털 신호를 새기는게 아니라 아날로그 신호를 새기는 방식이었다그래도 당시 주류 매체였던 VHS 비디오테이프와 비교 했을때 많은 이점이 있었다일단 비디오테이프는 몇십번씩 재생하면 테이프의 탄성력이 줄어들어영상이나 음성이 깨지거나 주욱 "늘어나는" 경우가 많았는데레이저디스크는 레이저로 표면만 읽는 광학방식이니까 반영구적으로 재생할 수 있었다게다가 비디오테이프하면 떠오르는 특유의 노이즈도 없었고화질도 당시 텔레비전의 720x480 화질을 거의 꽉 채울 정도로 선명했고(비디오테잎은 대략 320x240)일시정지도 불안정한 비디오테이프에 비해 완벽한 일시정지화면을 얻을 수 있어서프레임 단위로 작화를 돌려보는 애니덕후들에게 좋았다그래서 일본의 버블 경제 때 쓸 돈은 많고 더 좋은 화질을 원한 영상 마니아들,특히 애니 오타쿠들을 겨냥한 작품이 많이 나왔어거기다 이 레이저디스크는 기술력의 한계로 요즘 같이 복사방지기술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별다른 장치 없이 LD플레이어 출력선을 VCR에다 연결하면 식은죽 먹기로 복사할 수 있었어재생이 반영구적, 많은 작품들, 좋은 화질, 간단한 복사가 맞물려레이저디스크를 들여와 비디오로 불법복사해 주는 집이 생기기 시작했어2. 왜 불법으로 봄? 그때는 일본애니를 볼수 없었음?ㅇㅇ 없었음왜냐하면 일본문화를 한국에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뭐 이유는 여러가지 있지만 반일감정이 엄청 심했던게 컸던거랑자국 산업 성장이라는 이유가 있다(https://namu.wiki/w/%ED%98%95%EB%A0%88%EC%BD%94%EB%93%9C)만약 허락한다 해도 TV에서 하는 만화영화는 철저히 어린이 위주의 방송이었거나비디오테이프로 나오는 일본애니는 소수인데다나와도 감독을 밝히지 않고 로컬라이징 하는 등 일본 것이라는 걸 철저히 숨기거나 한국 것으로 위장하고엄청난 검열과 심의로 인해 잘려 나가는 장면이 많았다정말 소문으로만 듣거나 잡지에서 정보만 보던 애니를 보고싶다! 하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3. 역사(사진은 형레코드는 아님, 회현상가의 다른 레코드 가게)1980년대 말에 서울 명동의 회현역지하상가의 레코드 가게인"형레코드"라는 곳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레이저디스크를 복사해 준 것이 시작이었다이 곳에서는 손님이 어떤 애니를 보고싶다 는 요청을 받으면 그 레이저디스크를 직접 일본에 가서 사와서손님에게 돈을 받고 복사를 떠주는 것이다복사비는 편당 1만원, 지금돈으로 5~8만원 가까이하는 거금그것도 비디오테이프는 자기가 준비해야 되고분당이 아니라 편당 으로 받는거라 TVA보다는 극장판이나 OVA를 선호했다그래서 루팡이나 시끌별녀석들 같은 장편 애니들은 인기가 없었다(형레코드에서 복사해 온 천공의 성 라퓨타)게다가 복사만 가능했고 자막을 넣을 기술도 없는지라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림만 볼 수 있는 형편이었다또 만원내기는 너무 비싸니까 2차, 3차로 복사한 걸 또 복사하고그래서 화질은 그냥 씹창이 나버리는 것이다그래도 당시 오덕 선배님들은 이거라도 어디냐 하는 심정으로 보셨다4. 해적판 기술의 발전그런데 9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면 PC통신 애니동, 애니메이트 같은 동호회를 통해자신이 직접 레이저디스크를 사와서 비디오로 복사해서 팔거나 공유하고, 아예 이것만 전문으로 하는 다른 업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특히 옛날엔 방송국이나 프로덕션에서만 쓸 수 있었던 자막기가 학교 방송부나 동호회, 비디오업자들이 구매 가능할 만큼 싸져서그것을 이용해 번역 자막을 밑에다 달기도 쉬워졌고(물론 자막의 질은 불법인 만큼 그닥 좋지 않았대)여러편의 애니를 한 테이프에 담아 비교적 싸게 파는것도 가능했다아예 원본이랑 거의 비슷한 전용 케이스까지 만드는 일까지 하게 된다5.쇠퇴내가 갖고있는것 중에 가장 최근 것은LD 끝물인 2000년에 LD로 나온 카드캡터 사쿠라 극장판인데2000년대 초반부터는 위에 이야기했다 시피초고속 인터넷이 엄청 빨리 보급되어서 다들 인터넷으로 다운받거나 공CD로 구워서 보기도 했고90년대 후반부터 일본문화 개방이 되면서 일본애니들이 로컬라이징 없이 거의 그대로, 자막이나 더빙으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으니 굳이 불법으로 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돈, 인터넷이 없는 사람들은 더 싸고 1분만에 몇백장씩 찍어낼 수 있는 불법 VCD나 DVD가 나타나면서 녹화할 시간만큼 기다려야 하고 대량생산도 못하는데다 비싸고 큰 비디오테이프는 점차 물러나고불법의 자리를 이것들에게 물려주게 된다6. LD해적판 비디오들의 특징바로 이 표시, 처음 재생할 때 레이저디스크, 플레이 버튼이 나타나는게 특징인데LD -> VCR로 복사할때VCR의 녹화버튼을 누르고 LD 플레이어를 재생하면이런 모습의 화면으로 시작된다그리고 애니메이션 극장판은 1시간이 넘어가니까양면 레이저디스크일 확률이 높은데 그런 경우 디스크를 뒤집어줘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대부분 편의를 위해서 오토리버스 기능이 탑재된 플레이어를 많이 썼는데그러면 영상이 갑자기 멈추면서이렇게 A면 -> B면으로 간다는 표시가 나온다이러면 레이저 구동부 자체가 아래에서 위로 이동하여디스크 아랫면을 읽는게 아니라 윗면을 읽게 된다7. LD해적판 비디오의 의의1950년대 소련에서는 서구권의 음악을 검열해,금지곡을 엑스레이 필름에 레코드판을 새긴 뼈 음악이 있었다. 그리고 그 뼈 음악은 1970년대 소련의 많은 유명한 밴드를 낳았다.아까도 말했듯 일본문화 공개 금지, 심한 검열과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거라는 기성세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해적판 비디오는 새로운 문화를 보는 한줄기 빛이었고더 나아가 정부나 사회에서 밝히지 못했던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서더 새로운 생각, 감각, 센스를 가진 사람들이 나중에21세기의 한국의 문화를 이끌었다고도 할 수 있다위의 책을 쓰신 분이 한 말인데이 말은 지금도 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문화는 강제로 막는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문화는 공기와 같아서 아주 작은 틈새만 있어도 어느새 밀려들어온다.8. LD해적판 비디오 맛보기링크aHR0cHM6Ly9kcml2ZS5nb29nbGUuY29tL2RyaXZlL2ZvbGRlcnMvMVBES1JIWGpCNnhZcUU5OHJKMVpmTUdrek5SRl9xRU5f요즘은 아예 사라진 방식의 비디오지만대전역지하상가의 해풍사나 부산의 효림서점 같은 오래된 일본수입서점에 가면 구할 수 있다내가 소장중인 건 애니동아리에서 물려받은 약 30편 정도화질은 안 좋지만, 옛날엔 많은 돈을 들여 새로운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귀중한 비디오였다참고해적판 애니메이션 비디오는 문화해방구였다https://ridibooks.com/books/1010000066형레코드https://namu.wiki/w/%ED%98%95%EB%A0%88%EC%BD%94%EB%93%9C레이저디스크https://namu.wiki/w/%EB%A0%88%EC%9D%B4%EC%A0%80%EB%94%94%EC%8A%A4%ED%81%AC일본 대중문화 개방https://namu.wiki/w/%EC%9D%BC%EB%B3%B8%20%EB%8C%80%EC%A4%91%EB%AC%B8%ED%99%94%20%EA%B0%9C%EB%B0%A9
작성자 : ㅇㅇ고정닉
일본 일왕 히로히토의 일대기 이야기
[시리즈] 일본 일왕 히로히토의 일대기 · 역사)) 일본 일왕 히로히토의 일대기 이야기...jpg · 역사)) 일본 일왕 히로히토의 일대기 이야기 2편...jpg · 역사)) 일본 일왕 히로히토의 일대기 이야기 3편...jpg 이 글을 읽으려거든 전편은 필히 읽기를 권유한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 가이후 일본 총리 (1990년 11월 12일 아키히토 일왕 즉위식에서) 12. 애매한 사과와 논란 고령에 접어든 히로히토는 미국과 유럽을 자주 방문하기 시작했다. 미키 마우스도 만나고.. 닉슨 대통령도 만나고.. 포드 대통령도 만나.. 2차 세계대전에 대해 "내가 심히 개탄하는 가장 불행한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난 미국 대통령은 레이건옹이었다. 히로히토는 미국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사죄의 발언은 한적이 없다. 오히려 미국은 1988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 억류한것을 사과, 배상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 방문때는 히로히토에 대한 반대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1984년에는 일본을 방문한 전땅크와 만났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가 원수가 일본 국왕과 만난 최초의 사례로 당시 국내의 온 이목이 집중되었다. 가장 주목을 끌은 것은 히로히토가 일제 강점기의 일왕 당사자로서 한일 과거사에 대해 과연 어떻게 발언할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금세기 한시기에 양국간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 진심으로 유감이며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일본 언론은 하나 같이 이것으로 양국의 역사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보도 했으나, 한국에서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논란이 된것은 '유감'이라는 표현이었다. 적어도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범죄의 역사가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사과될 수 있다고 생각한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1978년 등소평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히로히토는 위와 똑같이 말했다. 13. 야스쿠니는 반대한 전범 히로히토가 전범이라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가 자의적으로 일본의 왕으로 즉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이름으로 자행된 숱한 전쟁을 막으려는 시도도 의지도 없었다. 그가 일본군에게 가졌던 유일한 불만은 "빨리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히로히토도 야스쿠니만큼은 A급 전범들이 합사된 후로는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야스쿠니에 대해 "(전범을 합사하는 것은) 전사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신사의 성격이 변할 것이며, 전쟁에 관련된 나라들과의 관계에 앞으로 깊은 화근을 남기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때문에 일본 국왕이 야스쿠니를 참배하거나 방문한 사례는 아직 없다. 이들에게는 그런 일왕의 의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듯하노 14. 다가온 죽음과 기이한 현상 히로히토는 31살 시절 이봉창 의사의 폭탄과 마주했을때(1편 참고) 이후로는 죽음의 위기를 겪은적이 없었다. 그는 어느덧 당대 세계 최장수 국가 원수가 되어갔다. 그래도 자연인으로서의 운명을 거스를수는 없는 법.. 히로히토도 인상 깊게 보았다는 88' 서울 올림픽이 열린 이 해 가을. 일본인들의 내면속에 천황의 존재를 재확인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올림픽이 개막된지 이틀 후.. 히로히토는 위독했다. 당시 그의 연호로 세어진 해는 무려 63년째였고.. 일본인들은 70대 이상이 아니면 그 말고 다른 천황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일본인들은 슬퍼 했다. 매일 수많은 인파가 히로히토의 쾌유를 빌러 궁성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일본 총리 다케시다는 모든 국내외 일정을 취소했다. 모든 방송사들의 카메라는 궁에 집중되었다. 심지어 신문에서는 매일 일왕의 맥박, 호흡 등이 일기예보를 알리듯 보도되었다. 이것은 일본인들도 미처 예상 못한 기이한 현상이었다. 각종 연예인들의 콘서트나 행사도 취소되고, 유흥업소들도 문을 닫았다. 방송 CF에서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등의 표현이 금기시 되었다. 숙연함을 강조하는 사회 전반에서는 '자숙'이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심지어 6년만에 리그에서 우승한 야구팀 주니치 드래곤즈가 그 흔한 맥주파티조차 안했으니..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위독 상태가 해를 넘겨 꽤 오래 끌게 되자.. 일부 할배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TV에서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히로히토 관련 다큐나 프로그램들만 방영했는데.. 물론 이런 프로그램들은 매우 재미없어서.. "이제 그만 좀 하고 정규 방송 틀어줘 ~" 하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이 시기는 일본 역사상 비디오 대여율이 가장 높았던 시기라고도 한다. 124대 일왕 히로히토는 1989년 1월 7일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로써 파란만장했던 쇼와 시대 63년도 막을 내렸다. 15. 애도와 경멸 이미 4달 가까이 발악하다가 맞이한 죽음이라 사망 당시 일본내 분위기는 별 충격없이 차분했다. 한국에서는 "히로히토는 평화주의자라서 종전선언을 한거임."이라는 일본 총리의 발언에 분노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무렵이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고 총리를 조문으로 파견했다. 국내 언론에서 '일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그 전까진 '천황(天皇)'이나 '일황(日皇)'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으나 1988년 일본 정부의 재일교포 날인 정책으로 반일 감정이 증폭되어 일부 언론들이 '일왕(日王)'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고, 점차 확산되어 갔다. 주한 일본 대사관에는 분향소가 마련되었고, 일부 정재계 인사들이 다녀간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아는 슨상님도 참배했다. 지금 보기엔 나경원의 자위대 행사 참여보다 훨씬 더 욕 먹을만 하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당시엔 별로 논란이 되진 않았다. 일본은 해외 언론의 반응에도 민감했다. 이미 히로히토가 앓아 누웠을때부터 일본 언론과는 사뭇 다른 기사들이 쏟아졌다. 해외 언론 보도는 담담하면서도 애도와 경멸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다. 히로히토는 '죄값을 받지 않은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재향군인단체가 히로히토를 히틀러에 비유했고, 네덜란드는 장례에 조문을 파견하지 않았다. 16. 그 후.. 새로운 연호는 '헤이세이(평성)'으로 발표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즈음부터 버블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해 '헤이세이 불경기'라고 불렸다. 일본 정부는 1990년 11월 12일에 거행된 아키히토의 즉위식에 우리 돈으로 무려 570억원의 비용을 들였다. 세계 158개국의 국가원수, 총리, 장관급 인사 2천 5백여명을 초청해 후하게 대접해가며 부자 면모를 과시하여, 당시 언론은 이 즉위식이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보다 성대했다고 보도했다. 과격 좌파 단체의 폭탄 테러도 있었으나 별 탈은 없었다. 즉위식에서 가이후 일본 총리는 일왕을 향해 만세 삼창을 했는데 이에 대해 시민단체가 위헌이라고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참고로 일본 헌법 1조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이 소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아키히토 일왕은 어릴적 전쟁을 목격한 탓에 평화주의자이며, 한국에도 우호적인 친한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의 왕은 현재 국민통합의 구심이자 국가 원수일뿐 사실 군주로서의 권한은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에 비해서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일왕은 왕실 예산이라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또한 전쟁 범죄국이었던 '일본 제국'의 국체이자 패전 이전의 일본으로 복귀할 수 있는 명분으로서 여전히 보존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왕의 의사가 어떻든 일본 극우의 정신적 근원일수밖에 없는 모순에 갇혀 있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왕실이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과연 일본의 천황제와 아시아의 평화란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끝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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