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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20세기 여객선 잡썰들 · 안싱글벙글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사진들.....jpg · 싱글벙글 5만 톤짜리 여객선을 움직이는 방법.....jpg · 싱글벙글 옛날 여객선이 검은색인 이유.....jpg 1912년 4월 15일 새벽,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던 화이트 스타 해운의 타이타닉호는 대서양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구명보트의 부족으로 인해 탑승자 2천명 중 거의 1500명이 사망하였으며 이는 당시 승객 수 당 얼마나 구명보트를 배치해야 하는지 정해진 게 없었던 19세기 목선시대 수준의 관련 조항과 미관상 배를 깔끔하게 보이게 하려 설계 변경으로 구명보트의 수를 줄였던 화이트 스타 해운 수뇌부의 결정 때문이었다 타이타닉 침몰 후 급하게 개수된 자매선 올림픽호는 원래 설계대로 구명보트를 다시 설치하였고 때문에 1등석 승객들은 비싼 표 구매하고 구명보트에 가려서 바다 풍경도 제대로 못 보게 되었으나 이에 대해서 불평하면 바로 사회적 매장 후 관짝 뚜껑까지 골고루 미싱당할게 뻔했기 때문에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이타닉 침몰의 영향과 더불어 1등석의 바다 감상 특권도 모호해지면서 올림픽호의 1등석 표는 사고 이후 잘 안 팔리게 된다 본론으로 들어가 타이타닉 침몰 후 구명보트에 탄 생존자들은 거친 북대서양의 밤바다와 얼어 죽은 시체들 사이에서 거의 두 시간 가량을 추위에 떨며 보내야 했다. 화이트 스타 해운의 경쟁사였던 큐나드 해운의 카르파티아호가 구조요청을 듣고 타이타닉에게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나 1903년에 건조된, 1912년 당시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구식 여객선이라 난방에 이용되는 모든 증기압을 끊고 전부 엔진에 집중하였음에도 17.5노트(32km)의 속도밖에 못 냈고 구명보트 무리에서 카르파티아호의 불빛이 수평선상에 보일 때쯤에는 이미 새벽 동이 터오고 있었다. 카르파티아호의 선원들은 침몰 좌표가 가까워질수록 빵과 스프를 준비하고 담요와 매트리스를 갑판으로 나르며 생존자들을 마주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점점 동이 트며 시야가 트이자 갑판에 나와있던 카르파티아의 승객들과 선원들은 전부 경악하였는데 2천명이 타고 있다고 알고 있던 타이타닉호의 승객 수에 비해 너무도 적은 구명보트들만이 바다 위에 떠 있었고 멀리서 밀집해 있던 구명보트 주위로는 수 백 구의 얼어 죽은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악할 틈도 없이 일단 구조가 우선이어야 했던 카르파티아는 사다리를 내려 생존자들을 구출했고 다치거나 노쇠해 사다리를 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물도 내려 구조 활동을 했다. 카르파티아의 갑판은 생존자들과 담요, 스프의 김이 뒤섞여 난민촌의 풍경이 되었고 이내 생존자들을 거의 다 구조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다에는 시체들과 타이타닉의 구명보트들만이 남았는데 구명보트들도 화이트 스타 해운의 재산이었기에 카르파티아는 주변에 있던 구명보트들을 전부 크레인으로 끌어올렸다. 큐나드와 화이트스타는 경쟁사이긴 했지만 큐나드는 속도를 중시했고 화이트스타는 안락함을 중시하여 서로 추구하던 항해의 방향성이 달라 마찰은 거의 없었고 겸사겸사 증거 확보도 해야 하니 만장일치로 구명보트의 인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체는 전염병의 위험이 있고 보관 시설도 마땅치 않았기에 수습은 불가했고 대신 갑판 위에서 장례 의식을 치른 후 카르파티아는 뉴욕으로 향했다. 카르파티아호의 갑판은 구명보트들로 개판이 되었지만 그 누구도 이런 상황을 욕하지는 않았다. 이후 4월 18일 뉴욕에 도착하여 수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된 카르파티아는 구명보트들을 하역한 후 후처리 작업을 하였고 타이타닉의 구명보트들은 화이트 스타의 인수 거부로 뉴욕항 구석에 계류되어 있다가 이후 타이타닉이라는 글자가 제거된 채 다른 배들에게 무료로 공여되었다. 타이타닉이 침몰한 후 많은 시체들이 바다에 둥둥 떠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유가족들은 돈을 각출하여 해저케이블 부설선 맥키베넷호를 포함한 몇몇 배들을 침몰 지점으로 급파하였고 시신 수습을 위해 관과 얼음을 잔뜩 싣고 사고 지점으로 달려간 맥키베넷호는 여전히 바다에 남아 있던 시체들을 서둘러 수습하기 시작했다. 맥키베넷호에서만 거의 300구의 시신이 수습되었고 이후 더 이상 수습할 시신이 없다고 판단, 항구로 돌아와 장례를 치뤘다. 그러나 사고 지점에서 멀리 표류하여 카르파티아호나 맥키베넷호가 발견하지 못했던 구명정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침몰 이후 바닷물이 들어와 타고 있던 생존자들이 전부 다른 구명정으로 갈아탄 후 시체들만 남았던 접이식 구명정 A였다. 타이타닉 침몰 한 달 후, 1912년 5월 13일. 영국에서 미국으로 항해 중이던 화이트 스타 라인의 여객선 오세아닉호의 한 승객은 버뮤다 해역에서 수평선상에 일렁이며 떠다니던 물체를 발견한다. 선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선장은 표류자라고 판단, 구조를 위해 그 물체에게 다가갔고 이에 소식을 들은 승객들은 갑판으로 나와 그 물체를 구경했다. 점점 오세아닉호가 그 물체에게 가까워지자 보트의 형상이 보였고 실려오는 바닷바람에는 이상한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세아닉호의 옆에 그 보트가 위치하자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전부 경악하였는데 보트의 옆에는 선명하게 찍힌 "S.S. TITANIC"이라는 글자가 보였고 그 안에는 물에 팅팅 불어 다 썩어가는 시체 3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대서양에서 표류하여 실종된 접이식 구명정 A가 한 달 동안 시체를 싣고 버뮤다 해역까지 떠내려온 것이었다. 원치 않게 현실 베스트고어를 목도한 승객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심각한 시신의 상태는 둘째치고 이 상황에서 시체를 버리고 가면 추후 엄청난 비난에 휩싸일 것이 분명했던 터라 선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시신 수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시신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여 의미가 없었기에 신원 확인만 한 다음 바로 바다에 수장하여 장례식을 치뤘다. 이후 오세아닉호의 선원들은 구명정을 침몰시키려 구멍을 뚫었으나 아무리 물이 들어와도 구명정은 바다에 둥둥 떠 있었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명정을 뉴욕항까지 견인하여 갔다. 뉴욕에 입항한 구명정 A는 다른 구명정들과 함께 부두에 묶여 있다가 이후 해체되었다는 소문만 들릴 뿐, 행적이 불확실하게 되었다.
작성자 : DDII고정닉
폰지사기의 역사를 만든 찰스 폰지...jpg
이탈리아계 이민자였던 찰스 폰지는, 미국에 도착하여 사업을 구상한다. 그건 바로 국제 반신쿠폰 (International Reply coupon)을 활용한 사업이였는데, 이 국제 반신쿠폰이란건 우편을 송달할 때, 발송인이 상대방의 수취인에게 답신용의 우편요금을 부과시키지 않도록 편지에 같이 동봉하여 보내는 국제 통용의 일종의 우표대체 유가증권이다. 폰지의 생각은, 이 쿠폰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가격이 올랐을때 되팔아 그 차익을 노리는 것. 하지만 생각보다 투자자들은 늘지 않았고, 폰지는 이때부터 위험한 제시를 시작한다. "게이야 나한테 투자해봐라" "확실한 수익 보장한다! 따블이다 따블" 폰지는 실제로 투자한 돈을 불려서 투자자에게 건내줬고, 투자자들은 삽시간에 모이기 시작한다. 귀가 얇은 투자자들은 환호하며 투자했지만, 당연히도, 이렇게 좋은 거래가 애초에 성사 할 리가 없었다. 폰지가 실제로 했던 일은, 기존의 고객들에게 신규 가입한 회원들의 돈을 모아서 준것 뿐이였고, 실제 투자는 전혀 하지 않았다. 본인 또한 그 중간에서 이득을 취해야 했기에, 돈은 갈수록 적어졌고, 추가 투자자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웠다. 결국 찰스 폰지는 이 사기극을 뒤로하고 도망갔고, 이를두고 "폰지 사기 (Ponzi Scheme)", 혹은 폰지게임 이라고 한다. 물론 눈치 챈 게이들이 있겠지만, 이건 바로 초기 형태의 다단계다. 그냥 다단계라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어렵게 써놓냐!!! 라고 할 게이들이 있을지 몰라서 희대의 사기극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폰지게임을 이용한 사기인데, 피해액은 무려 6백억 달러, 한화 기준 약 80 조 원. 주인공은 다름아닌, 2008년 희대의 역적, 전 나스닥(NASDAQ) 회장이자 ‘버나드 매도프 투자증권’ 설립자였던 버나드 매도프(Bernard L. Madoff). 찰스 폰지의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은 매도프는 투자자들에게 안정된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광고를 하였고, 1970년대부터 엄청난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똑같은 방식으로 돈을 축적해 나갔다. 미국의 경기가 좋았을때는 투자자들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2008년, 미국에 대 재앙이 덮쳐오며 매도프의 사기극은 들통이 나게 되고, 그가 투자했다던 모든 기록과 손익 상황, 기타 사업 관련 사실들이 전부다 거짓으로 밝혀지며, 형량 150년을 선고받게 된다. 그의 투자사기극에 동원된 사람은 몇백만명을 상회했고, 개중에는 전문적인 투자가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회계부정 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으로 인한 투자자 손실액은 총 648억 달러로 추산됐다. 특이한 점으로 매도프는 월가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람중 하나였으며, 그에게 투자할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특별한 사람들" 뿐이였다는 점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매도프의 폰지게임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사기극으로 만든 주요 원인이였다.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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