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미국’에 대한 두 할머니의 깊은 상처
나는 평양방문 일정 중에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산책길에 나선다.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에 일어나 대동강변을 향해 산책에 나섰다. 마침 동이 터가는 무렵의 강가에는 70대 후반의 할머니 두 분이 뚝방에 나란히 걸터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 다가갔다.
할머니들에게 간단한 안부 인사를 드린 후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해방 전 평양에 있던 교회 이야기를 꺼내며 어릴 적에 교회에 다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지팡이를 든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다녀본 적이 없다는 의미를 던져주는 듯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설레설레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같이 산책하던 일행에 뒤처지지 않으려 급히 인사를 하고 할머니와 헤어졌다.
그리고는 이튿날도 산책을 하다 보니 어제 그 자리에 그 할머니들이 다시 앉아 계셨다. 나는 일행의 대열에서 잠시 홀로 이탈해 그 할머니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속내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는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6.25전쟁 당시 미군폭격에 의해 형제 3명과 어머니를 동시에 잃고 자신과 아버지만 구사일생으로 남았다고 전해 주었다. 전쟁통에 흔히 그럴 수 있는 일이겠거니 하며 나머지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사연은 그게 아니었다.
피난민 대열 속에 섞여가던 할머니의 가족들은 미군폭격을 피하려 이리저리 몸을 숨기던 중 가장 안전하게 생각한 교회당으로 피신을 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평안도 정주에서 교회를 다녔던 아버지는 우박처럼 쏟아 붓는 포탄공격으로 절박한 상황이 되자 식구들에게 “미국은 기독교 나라니까 교회당으로 피신하면 무사할 수 있다. 빨리 따라 오너라”하며 온 식구를 데리고 근처에 있던 교회당에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러나 잔인한 미군 조종사는 오히려 그 교회당 건물에 더 집중적으로 폭탄을 퍼부어 안타깝게도 나머지 식구들이 모두 몰살을 당했다고 했다.
그 후부터 그 할머니에겐 ‘기독교’, ‘교회’, ‘예수’, ‘예배당’, ‘미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분노와 증오가 치밀며 한 평생을 살아왔다고 눈물을 글썽이셨다. 난 그 순간 갑자기 방망이로 한 대 얻어 맞은듯했다. 더 이상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필요 없었다.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민망함 그리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이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당시 방북단 일행 중에 교회를 안다니는 분들도 더러 있기에 혹여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생길까봐 나는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지금까지 혼자 간직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내가 황해도 신천군을 방문할 때의 일이었다. 양팔이 완전히 잘려나간 ‘복수하리라’의 어머니인 리옥희 할머니를 만났을 때 내가 받은 충격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전쟁 이후 성장한 후 결혼해서 삼남매를 낳았는데 첫째 아이의 이름을 ‘복수’ 둘째는 ‘하’, 셋째는 ‘리라’로 지었다. 사건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생했다. 황해도를 진격한 미군은 신천군 일대를 좌익과 우익이 서로 잔인한 살육전을 벌이도록 공작을 벌여 전체 군민들을 죽음의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마을마다 총부리를 들고 들어가 좌익들을 색출하던 때였다.
당시 어린 소녀였던 할머니는 음식을 구하러 밖으로 몰래 나왔다가 미군에게 발각되어 달아나던 중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은신처로 들어가려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지척에서 쫓아오던 미군의 무차별 난사로 두 팔이 잘려나갔다. 바다 건너 기독교 나라에서 온 백인에 대한 소녀의 선입견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엔 한평생 증오와 저주만이 대신하게 됐다. 미국에 대한 그녀의 복수심과 증오심이 얼마나 극에 달했으면 자식들의 이름을 ‘복수하리라’로 지었겠는가? 평생을 안팎으로 상처 입은 채 불구자로 살아오며 겪은 그녀의 깊은 한숨과 설움을 그 누가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굳이 두 할머니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이처럼 이북의 인민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북의 인민들에게 행했던 일은 60년이 넘은 지금까지 이북의 인민들에게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으며 그 어떤 회복의 기미가 좀처럼 없어 보였다. 그들의 반미감정은 미국이 믿고 있는 종교라는 이유 때문에 기독교라는 종교에까지 거부감과 증오로 변환되었다.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북한 정부는 인민들에게 반미와 항미를 일관성 있게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과 국가가 정치적 목적으로 주도하는 습관적 반미운동이 아니었다. 인민들 속에 깊이 뿌리내린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상처와 원한을 국가에서 어느 정도 대변해주는 것에 불과한 것임을 나는 현장에서 알게 되었다.
미국, 기독교, 자본주의는 정신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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