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결혼 제도의 본래 구조가 훼손되니 저평가 받는 경향이 있지만, 그 구조의 의미와 효용은 현대에 왜곡된 이미지와 별개로 평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와 사회 구조를 보자. 인간이 먹이사슬 피라미드를 벗어나 만물의 영장이 된 핵심은 '협업과 분업의 효율'이다. 거기에 전제되는 조건은 '사회적 신뢰'다. 이걸 지속가능하게 만든 개념이 바로 결혼이다. 겉으로 보이는 형태는 다르지만 핵심 구조는 가족 결합이다.

야생에 홀로 남겨진 개인을 보자. 사회적 협업과 분업을 기대하지 못하는 개인은 개체가 아무리 뛰어나도 별로 대단한 종류가 아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장수도 그 조건에서 야생의 포악한 맹수에게 취약하며, 가장 똑똑한 지성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당신이 지식과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지구에 홀로 남겨져 영생을 사는 조건이라고 볼 때, 몇 년이 지나면 컴퓨터와 인터넷을 개발할 수 있겠는가? 사전 지식이 있어 많은 부분을 스킵함에도, 인류가 개발한 시간보다 빠르게 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개인이 컴퓨터/인터넷 관련 모든 분야에 박사급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농사, 기후, 재련, 상하수도, 건축, 직조, 위생, 의학, 기계, 에너지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을 다 알 수는 없다. 심지어 머리로 안다는 것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 지식 사이에는 빈 틈이 매우 많아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며, 지식을 현실에 구현 하더라도 혼자서는 엄청나게 많은 작업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실험은 내가 매우 진지하게 했던 종류인데, 나는 혼자서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컴퓨터는 고사하고 전기로 작동하는 공장도 만들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지능이 높은 영장류를 찾아 선택적으로 지능이 높은 개체만 번식시켜 협업과 분업을 하는 편이 가능성 있었다. 물론 어떤 경우도 내가 10년 이상 살아남을 확률이 크지 않았지만.

진지하게 메서드 방식으로 몰입해서 상상해보라. 당신이 지식과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지구에 홀로 남겨져 영생을 사는 조건이라고 볼 때, 현대 CPU나 인터넷 시스템, 해저 케이블, 발사체와 인공위성을 만들어 구축할 자신이 있는가?

결국 '인간'은 별로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현대 문명을 이루는 '인류'가 대단한 것이다. 한 때 유행하던 현대 인류가 중세로 가면 위대한 성자가 된다는 종류의 얘기. 난 그것도 믿지 않는다. 현대 수학을 배웠으니 중세에 가면 신적 존재가 된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 배경도 가정도 없는 인간이 초월적인 수학 지식을 내보이면 잡혀서 고문을 받거나 죽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열악한 시대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것도 현대 문명에 익숙한 인간에게 어려운 일이다. 출신도 모르는 이방인이 마을에 들어서자 전염병이 창궐하므로, 분노한 대중에게 붙잡혀 화형을 당하는 쪽이 현실성 있다.

역사상 많은 발견과 발전이 가능했던 이유? 발견자가 해당 공동체 소속이라 사회적 신뢰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견한 개인도 공동체와 상호작용하며 효율을 누리고 그 발견에 닿은 셈이다.

결국 신뢰의 문제다. 개인을 넘어 공동체에 흐르는 '사회적 신뢰'가 핵심이다. 그래야 협업과 분업의 효율을 누리며 '인간'이 하지 못하던 일을 '인류'가 되어 해결한다.

당신이 중세에 떨어지는 조건에서 '해당 시대 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난다'만 넣어도 많은 부분이 나아지는 것과 같다. 영장류를 찾아 지능이 높은 개체만 번식시키는 경우에도 그 원숭이들도 납득 가능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을 제시해야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과 같다. 권한과 책임의 비례, 황금률, 신의칙.

결국 늘 하던 얘기 그대로 정리가 나온다. 사회적 신뢰가 중요하며, 그걸 위해서 권한과 책임의 비례, 황금률, 신의칙을 지켜야 한다. 현대 사회는 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결혼 제도 역시 이런 붕괴와 왜곡을 피하지 못했는데, 사실 구조만 놓고 보면 결혼이라는 가족 결합은 예술에 가까운 아름다움이 있다.

유전자 수준 본능에서 인간이 최우선 신뢰를 가지는 부분이 혈연이다. 그래서 본래 부모-자식 관계는 사회 문화나 법률조차 초월하여 신뢰를 유지한다. 워낙 근본 층위라, 자녀가 살인을 저질러도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자식을 탓하지 않는다.

본능적 혈연으로 보면 배우자는 피가 섞이지 않은 이방인이다. 하지만 결혼이란 가족 결합 시스템에서 이방인과 섞여 자녀를 낳고, 비로소 동일한 이익과 관점을 공유하게 된다. 이 시점에 결혼 당사자의 부모, 자녀까지 전부 혈연으로 묶이는 것이다.

단순 부모-자식이면 본능적 이기심에 제한되는 소규모 집단 이기주의지만, 배우자라는 완전한 타자가 진입하며 복잡한 사회적 혈연 관계가 섞이는 가족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가정은 모든 사회 공동체의 최소 단위였으며, 가정으로부터 출발하여 복잡한 거대 국가 시스템을 이루었다. 이방인이 마을에 왔는데 출처도 모르는 홀몸이면 경계하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고, 공동체 출신이어도 가정을 이루지 않으면 경계하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다.

이는 단절된 이기적인 시스템에서 사회적 신뢰로 도약하는 구조다.

생존 기반 공동체 (연속성을 가진 의식주)

비가역적인 인과 공유 (부모세대–당사자–자녀세대로 이어지는 혈연 결합)

근본 층위라 가장 우선하는 신뢰 (서로가 보호자, 교육자, 위로자, 창조자)

혈연 기반으로 작동하지만 외부 결합 가능 (개방성 + 확장성)

인간은 역사 내내 이런 가족 결합 구조를 통해 생존과 번식으로 이어졌고, 자연에서 보잘것 없는 파편화된 인간을 넘어 인류가 되었으며, 협업과 분업의 효율을 누려 문명을 창조하고 유지했다.

하지만 권한과 책임의 비례, 황금률, 신의칙이 지켜지지 않자 사회적 신뢰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이제 구조적으로 예술에 가깝던 가족 결합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구조가 망가졌는데 형식만 붙잡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래도 현대 문명이라 포악한 야생동물은 없으니 다행일까? 사회적 신뢰가 무너진 도시에서 가장 포악한 맹수가 누구일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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