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도입부는 예상보다 음산한 냄새를 풍긴다. 태풍 예보가 섬마을에 전해지는 사이, 한 소녀가 유서를 쓴 후, 아마도 바다로 추락사한 듯한 정황을 비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의 전형적인 전개, 톤 앤 매너대로 흘러가리라 지레짐작하기 쉽다. 섬이라는 제한된 지역의 특성을 감안할 때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도민들의 증언과 태도를 수상쩍게 주시하게 되기도 하고, 타살은 아닐지 궁리도 해가며 말이다. 특히나 사건을 종결짓기 위해 온 외부인 '현수'가 마을 곳곳을 탐문해가며 소녀의 행적을 파헤치고 죽음에 얽힌 사연을 조명하는 과정은 국내 영화 '이끼'를 연상케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기대를 하나씩 배반해가며 본 작품이 종국에 '스릴러'가 아닌 '드라마'로 구획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차근차근 가닥을 풀어간다.
극 중 중축이 되는 세 인물은 심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발이 묶여 있는 고립자들이다. 경찰 현수는 남편의 외도로 인한 배신감과 스스로에 대한 질책 속에 매여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간다. 한편, 소녀 '세진'은 (친부와 관련된 수사를 진전시키기 위한) 경찰들의 압력에 의해 섬 속에 폐쇄된 채, 본인과는 무관한 잘못에 대한 속죄와 기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현실에 대한 비관 사이에서 죽음만을 고대하며 자해를 반복한다. 그리고 소녀에게 집을 내준 도민 '순천댁'은 거둬들인 조카딸이 중풍에 걸려 전신 불구가 되자 자살 시도를 하지만 끝내는 목숨을 건져 환자를 부양하는 것이 평생의 과업인 것 마냥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재앙과도 같은 힘든 시간을 겪고 함몰된 채 살아가던 이들은 동질적인 서로의 환부를 감지하고 이를 매개로 느슨하게 연결된다.
유독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진을 향한 현수의 태도다. 극중 현수는 경찰로 등장하지만 투철한 사명감이나 정의감이 장착된 인물은 아니다. 심지어 소녀의 자살추정 사건을 맡게 된 동기에는 오히려 개인적인 사유와 염치없는 욕심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남편의 외도를 통보받은 후, 심적으로 동요하다 업무 중 낸 사고에 대한 과실로) 징계위를 앞둔 시점에 이전처럼 서로 복귀하기 위해, 그리고 1년이 넘도록 지난하게 앓아오는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하게 되며 현수는 지난 1년간 본인이 갇혀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지옥에서 살았던 소녀의 고통에 이입하며 점차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 기점부터 세진의 행방을 살피는 과정 총체는 현수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복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그로부터 탈출구를 찾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여성 배역들이 중축이 되는 작품이지만 여성 서사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죄도, 짐도 아닌 것을 이고 스스로가 만든 동굴 속에서 무기수처럼 살아가는 모두를 잔잔하지만 넉넉히 위무하는 영화다. 어찌보면 흔한 메시지이지만 결코 피상적이지 않다. 진정 어린 연대와 공감은 매일 스스로에게 사망선고 내리던 사람,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했던 사람마저도 살게 함을 구체적인 실감으로 와닿게 한다. 더불어 공감, 연대의 힘을 신뢰하면서도 결국 구원은 셀프라는 메시지는 섬세함을 더한다. 지옥 속에 고립된 자신을 탈출시킬 수 있는 이는 나밖에 없다는 것. 이 영화의 온기에, 용기에 기대 감히 말해보고 싶다. 모든 것이 붕괴되고, 모든 이가 떠나간 이후에도 '나'는 남아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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