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의 첫 에피소드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일명 '미치광이 여행자'로 낙인찍혔던 이들에 대한 소문을 개괄하며 문을 연다. 이에 주인공 '박하경(이나영)'은 이런 내레이션을 덧붙인다. '그들은 과연 미쳐서 여행을 떠난 걸까? 그대로 살다가는 미쳐 버릴 거 같아서 떠난 게 아닐까?'라고. 25분을 웃도는 러닝타임, 8화의 짧은 호흡으로 구성된 본 드라마는 그렇게 매회 오프닝에서 주인공 '하경'에게 닥치는 미쳐버릴 수밖에 없는 소동을 제시하고, 그로부터 일탈하고자, 혹은 이를 더 내밀히 이해해보고자 방방곡곡을 누비는 그녀의 하루짜리 유랑기를 다룬다. 촘촘한 계획을 세우다가도 즉흥적인 결단을 내리기도 하고, 사소한 행복을 만끽하다가도 여행이란 행위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씁쓸함에 젖기도 하고, 화자의 위치에서 청자의 위치를 자처해보기도 하고, 익숙한 선택을 찾다 낯선 도전에 스스로를 맡겨보기도 하는 박하경의, 온갖 여정을 경유하는 웰 메이드 작품이다.
매 에피소드는 '박하경'이라는 한 인물을 다양한 측면에서 톺아보는 과정에 가깝다. 예컨대 고등학교 교사로서 겪는 매너리즘, 자녀 세대로서 부모 세대와의 불통으로 빚는 마찰, 영화같은 사랑과 만남에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는 여자, 옛 동심을 한 켠에 품고 살아가는 꽤나 낭만적인 사람 등 하경을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조명해내는데, 여기서 밀도 있는 각본과 연출이 두드러진다. 자신의 다양한 면면의 모습을 자극하는 여행의 여정 동안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과 시간을 보내고, 소소한 끼니를 즐기며 하경은 사라져야 할 이유 위에 살아갈야 할 이유를 덧대어 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하는 만큼 풍광, 분위기, 감각 등 보다 직관적인 요소들은 인물, 사건 못지 않게 긴요하게 다뤄지곤 한다. 땅끝마을 해남을 가득 메우는 무해한 자연의 이미지, 기시감을 부르는 과거의 흔적이 베긴 군산의 옛 골목, 장마철 특유의 쿰쿰하지만 상쾌한 기운 같은 것들이 그렇다. 더불어 남녀노소를 불문한 다양한 인물들과 함께 스크린 안에 담길 때 하경의 스탠스나 반응을 관전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모한 꿈과 아득한 현실 사이에 놓인 제자를 향해 낯부끄럽지만 힘을 가득 실어 응원을 건네는 모습, 죽은 옛 친구와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 때 절로 만개하는 미소, 자꾸만 시선이 가는 남자와의 동행의 순간 드러나는 묘한 흥분과 기대 같은 것들 말이다. 묵묵한 성격에 정적인 분위기가 어울리는, 낯선 것에 대한 어색함이 투명히 드러나는 사람이지만, 때로는 담대하게, 동적이게, 자연스럽게 변모하기도 하는 하경의 예외성을 포착하는 순간의 묘미가 분명하다. 이는 극중 배역을 맡은 이나영 배우의 단단한 내공이 돋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박하경 여행기'가 전하는 바는 모호한 판타지가 아닌, 실체적 제언이다. 영구한 도피는 불가하지만 때때로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 도저히 버틸만한 여력이 남아나지 않을 때,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데로 향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정처없이 걷고, 든든하게 먹고, 구애없이 멍 때리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부단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찰나의 기억이 평생을 살아갈 힘은 못 될 지언정, 그 날 하루를 위무할 정도의 온기는 너끈히 공급해준다는 것, 가장 가까운 동시에 멀기도 한 나 자신에 대해 몰랐던 혹은 알지만 봉인해둔 모습들을 정면할 수 있는 기회도, 스스로를 짓눌렀던 모든 것들과 화해할 수 있는 단서도 결국 그러한 자극과 사색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담백히 전하는 '박하경 여행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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