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이은상 선생님의 설악행각을 보노라면.
설악산의 여정에 구곡담계곡이 나옵니다. 쌍용폭포를 위시한 귀떼기 청과 용아장성 사이의 계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은.
아쉽게도. 지금보다 더 많은 구전과 고전이 이어져올법한 그 시기에도 설악산은 미완의 산입니다.
금강산이 발길이 닿기 쉽기에 풍류를 읇조리는 장소로 유행을 오래전부터 하였것만.
설악은 그옛날에 들기엔 너무 험하고, 어려운 곳이었던것입니다. 주요 등산로가 지금 비선대는 커녕.
솔숲으로 저 목우재 삼거리 너머까지 숲이었던고로.
설악의 시간은 관모, 송암, 주봉산처럼 지금 속초 시내의 한가운데서부터 시작하였고.
골골마나 산판골과 곰골 같은곳에 약초꾼의 움막이 있었지만은 그것이 빈번한 왕래가 아닌 소로로 이어졌기에 그렇게 큰 길은 아니였을 것
같읍니다.
디시 게시판의 어느 산객께서 그러면 신흥사같은 큰 절은 무엇이냐 라고 물으셨것만. 당시 신흥사는 번화지에 지은 절이라기 보다는
반대편의 백담사나, 영시암처럼 산속에 묻힌 사찰이었겠지요....
설악산이 예전 열리기 전에는 나이든 산객들은 저 먼 서울 외각에서 몇번을 갈아타고, 인제에서 내려.....예까지 걸어오고들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진부면까지 가는 어쩌다 한두번 드는 버스가 있었지만은 그걸 타기가 쉽지 아니했기에. 가끔 근처 12사단 60트럭이 있으면
그시절엔 태워주기도 했답니다.
그리하야 어렵게 백담사를 걷고, 영시암을 걸어 수렴동에 도착하면 꼬빡 자정이고 했습니다.
그런 심신을 달래주는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막걸리 한잔에 전한잔 부쳐먹고는 수렴동 산장 주인이 해주는 얘기를 들으며 잠들면
그것이 참 꿀맛이기에 군제대 후에 꼬빡 하루를 걸어 양구군 도사리에서 예까지 든적이 있습니다.
그시절에 영시암은 하켠을 손님에게 내놓은 조각 유리를 붙인 미닫이 창이 달린 시골 가게같은 모습의 사찰 한켠과, 보살들이 묵는 움막,
그리고 등로 곁에는 큰 부뚜막에 가마 세개를 걸고, 산객들에게 찐 감자며, 옥수수를 주곤했습니다. 간혹 잠을 청하려면 시님 에게 사정사정하여
하루종일 잡초 뽑고, 뒷간에 분뇨를 퍼올려 드리곤 했었읍니다.
수렴동에서 그전날 늦도록 마신 막걸리에도 잠이 일찍 떠집니다. 바깥에서는 맑고 청아한 구곡담의 물소리가 들립니다.
가야동 계곡처럼 유순하고 편하게 들러볼 코스도 있지만은 오늘은 뒤편 고개로 해서 봉정암을 들러 시주를 하고, 봉정연암 줄기를 따라 소청에
오르려 합니다.
용아장성이라는 이름이 있지만은 설악산 고지대가 열리고 발길이 닿은지 불과 십수년이 채 되지(당시)않은 시점이라 그런 이름을 누가
어떻게 붙였는지 못내 아쉽습니다. 그러다보니 산객들이 편의상 지도에서 보고 붙인 이름이 통용되는 것은 참 안타깝다할수있습니다.
저위에 사진은 용아장성에서 옆으로 게걸음을 걸어야 지난다는 게구멍 바위입니다. 큰 공깃돌같은 바우인데. 귀떼기 청쪽에서 보면
가운데가 빈 어금니같은 모양이며 양쪾으로는 최소 2-30미터 정도의 걸리는것 없는 낭떠러지가 많은 산객을 불귀객으로 만듭니다. 옆에
전위봉과 나뉘는 계곡이 시커멓게 보입니다. 참으로 생의 무게가 가벼워짐을 느낍니다.
아래 사진의 고인을 기리는 비는 제가 산에든지 십수년 후 어느분의 사고이후 누군가가 세운것인데. 설악을 누비다보면 이무렵 8-90년대에
이런것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국립공원이란곳에서 길을 억지로 만들면서 이제 이런 것들은 세월의 한켠에서 청녹이 끼며 사라지고
있읍니다.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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