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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마지막 군웅할거 군벌지 인물전 -1-
BC 700여년 경부터 수많은 통일과 분열을 반복한 중국 그렇기에 우리의 대스타이자 동아시아 베스트 오브 베스트 셀러인 삼국지연의의 작가 나관중은 이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천하는 나뉜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된다길게는 춘추전국 위진남북조 오대십국같은 몇백년간의 분열시대, 짧게는 초한쟁패, 삼국지, 5호16국, 수말당초 원명교체 명청교체기 같은 이런 혼란한 시기에는 영웅이 나오기 마련이었다.가장 먼저 살펴볼 인물은 아직도 중국에서 한간(간신 and 민족 반역)of 한간으로 악명을 떨치는 인물이자, 한국사에도 잠깐 등장해서 우리들에게 인상을 깊게 남긴 인물인 위안스카이.역사의 반복성일까?삼국지의 그 유명한 사세삼공 원씨가문처럼 이 때의 윈씨 가문 또한 당대의 명문으로 고관대작을 지낸대다가 조부는 흠차대신(그 유명한 아편전쟁의 임칙서가 흠차대신으로 특정부문의 전권위임대사), 조운총독등을 지냈고 아버지 위안바오중과 자식이 없어 입양간 숙부 위안바오칭 도 할아버지 부대에서 같이 종군한 금수저 가문이었다. 이런 위안스카이는 젊은 시절 과거에 3번 낙방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다가 인맥으로 산둥성에 주둔중이던 숙부의 친구인 우창칭 막하로 들어가게 되는데23살의 나이에 그의 인생은 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게 바로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으로 청조는 밖으로는 아편전쟁의 패배,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연이어 자신감을 잃어가던 와중에 가까스로 양무운동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윽고 조선에서도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우창칭을 파병시키고 그 막하에 있던 위안스카이도 따라서 가게 된다. 청군은 빠르게 조선군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납치하여 청으로 보내버린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계속 조선에 남아 통상대신이라는 신분으로 외교관이 됐지만 사실상 총독의 역할을 하면서 빠르게 조선을 장악하기 시작하는데이 과정에서 청은 아편전쟁 이후로 크게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하고자 했고 특히 일본의 조선 진출을 막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갑신정변에서도 위안스카이는 크게 활약했고 그 기간동안 기존에는 85퍼센트의 무역 비율을 갖던 일본에 비해서 크게 뒤쳐지던 무역규모를 채 10년도 안되어서 90여배 증가시켜 비슷한 규모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결국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당시 청국의 전함이던 정원함청국은 아직 제대로 근대식 무기를 갖추지 못해서 일본에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편견과 달리 당시 청나라의 전함은 당대 동아시아 최대의 정원함과 진원함이 있었다. 또 명중률 12퍼센트의 일본과 비교해서 중국의 해군도 명중률 20프로를 달성하는 등 겉보기에는 전력이나 무기의 질에서 크게 뒤지지 않게 보였지만 정원함, 진원함은 13인치로 동아시아 함선중 가장 두꺼운 장갑을 가졌으며 당시 발주한 독일에서도 갖지 못한 신형 함선이었다. 그러나 수병들의 훈련은 매우 더디어서 포탄의 발사속도 또한 매우 느려서 일본에서 10번 발사하는동안 1번 발사 하는 수준이었다.결국 황해 해전에서 5척의 순양함이 침몰됨과 함께 패배를 맞이하였고, 육군에서도 평양성-요동으로 이어지며 패배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참패했고 위안스카이는 겨우겨우 조선에서 도망쳐서 청으로 복귀하게 된다.은퇴 후 만난 이홍장과 비스마르크청일전쟁에서 충격적인 패배 이후 당시 조정을 주도한 이홍장은 은퇴수순을 밟게 됐으나, 그의 심복이라 할만한 위안스카이는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권력의 핵심에 다가갔다. 특히 조선에서 신군창설에 경험이 있는 위안스카이에게 군권이 몰렸고, 대거 개편을 통해 신건육군을 창설하였다. 여기에 이전 이홍장이 건립한 근대 사관학교라 할 수 있는 텐진무비학당 출신들이 대거 합류하여 훗날 북양군벌의 요람이 되었다. 여기에 이제 막 성인이 된 광서제는 캉유웨이, 량치차오와 같은 개혁파 인물들과 손잡고 메이지 유신과 비슷한 변법자강운동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홍장이 키운 북양군벌을 그대로 물려받은 위안스카이는 군부의 우두머리로 부상하게 된다. 광서제의 이러한 노력이 있음에도 아직 청의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있던 사람은 바로 서태후였고, 광서제는 위안스카이를 사냥개로 삼아 서태후를 위시한 보수세력을 일신하고자 하였다.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이런 황제의 의도를, 그리고 청나라의 개혁을 배신하였다. 그는 그대로 서태후의 측근에 달려가 황제의 결심을 밀고했다. 이로 인한 쿠데타로 개혁파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광서제는 자금성에 유폐되어 결국 암살당했다고 여겨진다.(머리카락에서 비소가 발견) 이 것이 위의 3배신중 첫번째 배신이었다.결국 광서제는 젊은 나이에 죽게 됐고 어린 황제 푸이가 즉위하게 된다. 이 때 서태후도 죽게 되서 푸이의 아버지인 짜이펑이 섭정을 맡게 됨. 짜이펑은 군부를 손에 잡은 위안스카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를 축출하기로 결심했어. 위안스카이도 그 과정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아직 황실의 권위가 강하기 때문에 마치 삼국지의 사마의 처럼 웅크리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그러던 중 청나라에는 마지막 숨통을 끊는 그리고 위안스카이 개인에게는 엄청난 운으로 작용한 일이 일어났는데우창봉기 당시 혁명군의 포병우창에서 봉기가 일어나게 된다.이 우창봉기에 미국의 쑨원등이 합류하여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된다.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오른쪽 어린이)와 아버지 짜이펑이에 짜이펑은 정말 정말 혐오하는 위안스카이였으나, 당시 반란을 막을 수 있는 군대 자체가 의화단 사건 이 후 피해를 입지 않은 사실상의 위안스카이의 사병이라 할 북양군벌뿐이었고, 그를 곧장 복귀시켰다. 그러나, 후광총독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권토중래중이던 위안스카이는 짜이펑을 믿지도, 그리고 그의 명령을 받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정은 그에게 흠차대신이라는 명예와, 실제 청나라의 모든 육해군을 맡기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위안스카이는 그 명령을 받기로 한다.베이징에서 내려온 북양군은 겉보기엔 손쉽게 반군을 정리할 수 있었다. 병력만 봐도 당대 가장 근대화된 군대였던 북양군이 수만 많은 병사, 부사관들이 지휘하는 반군에 질 수 없었다. 당대 열강들 또한 불안한 혁명군보다 위안스카이가 다음 대세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쑨원의 차관 요구 군대 지원 요구를 거부했다.우창봉기 직전의 청나라군베이징의 1진, 텐진의 4진, 산동의 5진등 5만여명의 대군이, 청나라 최강부대인 북양군벌이 철도를 타고 속속 남하했다. 반군의 위세는 대단했지만 진압군의 병력, 질을 보았을 때, 진압군이 이들을 분쇄하지 못할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차일피일 싸우기를 미뤘고, 어느새 반란은 전국으로 퍼졌다. 그러던 와중에 난징의 혁명정부에서는 위안스카이에게 편지를 한통 전해받는다.그걸 믿었냐 난 총통할거임 ㅋㅋㅋ 1.청 황제는 퇴위하지만 외국의 군주로 대우하며 존칭은 그대로 사용한다.2.황실경비는 400만냥으로 민국정부에서 지급한다.3.황제는 퇴위하고 이허위안으로 옮기고 궁인들은 그대로 부린다.4.종사와 능묘는 유지하며 민국의 경비를 배치하여 보호한다.5.아직 미완성인 도광제의 묘는 민국정부가 완공한다.6.황제의 사유재산은 민국정부가 보호한다.7.금위군은 민국 편제에 편입하고 정원과 보수는 유지한다.다음의 조건을 들어준다면 화의 하겠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군사력도 금전적으로도 부족한데다 아직도 멸만흥한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같은 한족이라는 희망을 가진 쑨원은 이에 동의했고 청의 조정에서는 협정으로 황제가 통치권만 잃을 뿐 황제는 여전히 남을 것 이라고, 그러면서도 난징의 정부에는 공화국을 얻게 될 것이며, 황제는 이름만 남길뿐이라는 아주 교묘한 협약을 이뤄냈다. 푸이는 이를 회상하며, 어느 뚱뚱한 노인이 자신과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아주 꺼이꺼이 슬프게 울었다고 했다. 무엇이 그리 슬펐는지 모르겠지만 한 설에 의하면 위안스카이는 그대로 퇴근해서 집에서 변발을 자르고 가가대소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진시황이 처음으로 황제를 칭한 이래 2000여년 이어오던 황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쑨원의 임시 대총통 작위를 양보받는 형식으로 임시 2대 대총통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북경에서 쑨원과 위안스카이가 만나게 됐는데 노련한 위안스카이는 쑨원과의 만남에서 쑨원을 높게 평가하며 그가 말할때마다 하오하오하며 긍정했고 설령 자기랑 맞지 않는 말도 고민해 보겠다는 말을 하며 구워 삶았다. 훗날 레닌의 평가에 의하면 마치 시골 아낙네와 같이 순진한 쑨원은 그와 만난 후 그의 동지들에게 '위안스카이는 비록 방법이 구식이지만 명석하고 능력이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나라를 다스릴 사람은 이 사람이 적격이다'라고 평가했고 완전히 위안스카이를 믿게 됐다.그리고 또 한명의 사상가, 량치차오가 일본에서 복귀하는데 입헌파이던 량치차오의 귀국길에 환대는 쑨원보다 더 화려하면 화려했지 모자라지 않았다. 당연히 위안스카이는 량치차오도 구워 삶는데 성공했고 그는 자신과 광서제등이 위안스카이에 당했던 것도 잊은 채 그 노인에게 빠져 버렸다. 입헌파와 공화파의 거두인 쑨원과 량치차오는 군벌인 위안스카이에 맞서 견제하는 대신 서로가 견제하는 일이 벌어지게 됐다.이 와중에 위안스카이를 진짜로 위협하는 존재는 그 들 보다 훨씬 어린 혁명가 쑹자오런이었다. 중국 역사상 첫 선거인 제헌국회 선거를 앞두고 쑹자오런은 아시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당인 국민당(이 후의 쑨원의 국민당이 이 당의 후신을 자처하기 때문에)을 만들었고 압승을 하여 국회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 젊은이가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할 것을 두려워한 위안스카이는 상하이에서 그를 암살했다. 이런 정치적 협박에 위안스카이를 두려워한 다른 의원들은 모두 용돈정도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리고 중화민국은 위안스카이 천하가 되었다.쑨원은 그제서야 자기가 속은걸 깨닫고 2차혁명(계축전쟁)을 일으키지만 경력으로나 세력으로나 쑨원과 그의 동료인 황싱은 기껏해야 협객 정도에 불과했고 위안스카이에 빠른 대처에 완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1913년 이제 정식 초대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바야흐로 황제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위안스카이의 아들인 위안커딩은 능력도 없는 인간이었지만 아버지가 황제가 되면 자기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이라 생각하여 독일의 황제가 민주제보다는 군주제가 낫다고 했다던가. 위안스카이가 읽는 신문을 조작해서 위안스카이만의 신문을 만든다던가 하는 식으로 뽐뿌질을 넣었다. 위안스카이의 심복 북양 삼걸(좌:왕스전 중: 돤치루이 우: 펑궈장)당시 북양군의 위안스카이 측근은 북양의 용,호랑이,개로 불리는 왕스전, 돤치루이, 펑궈장 3명이 있었는데 이 중 왕스전은 필두격이었지만 측근의 역할에 충실하여 정치적으론 영향이 적었고 돤치루이와 펑궈장은 위안스카이의 즉위에 반대했는데 가까이에 있는 돤치루이는 육군총장직에서 사직시키고 남경의 펑궈장에겐 "우리 가문은 59세 이상 산 사람이 없고 내 나이가 이미 50후반인데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황제가 되겠나?" 는 발언을 하며 예의 그 정치력을 발동시켰다. 그러나 뒤에선 내가 황제가 된다는데 왜 부하놈들이 이래라 저래라야 같은 소리를 하며 불만을 성토했다고 한다. 사진의 왼쪽에서 두번째 노인이 위안스카이. 결국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으로 개칭하여 황제에 올랐고 이것이 바로 홍헌제제다. 앞서 제국을 자기손으로 무너뜨리며 공화국을 세운 장본인이 다시 공화국을 배신하고 제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이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게 당대의 주유라고 평가 받기도 하며 위안스카이 본인도 가장 두려워 하던 차이어였다. 차이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차이어 인물열전때 하고 이 차이어와 탕지야오, 차이어의 스승인 량치차오등은 호국전쟁을 개시하며 토원의 기치를 들었다. 결국 밖으로는 호국전쟁, 안으로는 퇴위요구에 의해 결국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취소하고 얼마 안 있어 속을 앓다가 그의 말대로 60을 못넘기고 58세에 죽어 버렸다. 그의 죽음으로 중국은 군벌시대를 활짝 열게 됐다. 이 시대의 간웅이 이렇게 허무하게 갔다. 사람들은 그를 원술이나 동탁같은 악당으로 여겼지만 이는 어떻게 보면 객관적이지 못한 판단이기도 하다. 결국 시대의 승리자인 쑨원의 국민당, 그리고 그 이후의 공산당은 그를 당연히 호의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위해 변명을 한다면, 위안스카이가 아니었다면 이미 청은 의화단의 난때 망했거나, 또는 신해혁명 당시에도 어설프게 대처하다가는 제2의 태평천국의 난이 됐을지도 모른다.겉으로는 쑨원, 량치차오, 황싱등 당대의 사상가들을 감화시켰고, 뒤로는 황제, 제국을 배신하며 탁월한 처세술, 권모술수를 갖추었다. 리홍장이 죽고 그의 군벌을 그야말로 그대로 흡수했으며, 정치경력으로나 명성 실력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정치가에게 밀리지 않았다. 짜이펑에게 밀릴때는 철저하게 숨었고, 발톱을 드러낼때는 철저하게 상대를 공격했다.초기 2년은 그가 발톱을 감추고 있는 시기였지만 이후 공산당의 재통일까지 40년 가까이 있을 혼란기에서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으며, 무상 교육 확대, 사법제도, 전족 금지같은 당대의 과제를 통과시켰다.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조조나 사마의의 그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실패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청조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도 민중의 지지를 버리고 권모술수만으로 상대를 대했다.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명목으로 각종 이권은 일본에 넘겼고, 말기에 보여준 홍헌제제는 그야말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만약 그가 있던 시대가 이런 개화의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 또한 한 나라의 개국군주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쨋거나 지금의 중국이 원하는 영웅은 그가 아니었다. 결국 가장 높은 곳에 올랐던 위안스카이는 그렇게 통한속에서 갔다. 이젠 어느 누가 그를 이어 받게 될까.다음 화는 량치차오와 차이어가 될 것 같다.
작성자 : 슼슼솩솩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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