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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 에버랜드 케데헌 존 오픈런 후기
커여운 쪼이의 부탁으로 에버랜드 케데헌 콜라보 존을 갔다 자차로 약 30분... 8시반쯤인가 출발ㅋㅋ 이때가 아마 9시 좀 넘어서일텐데 진짜 계속 몰려오드라... 아마 학생들 현장체험에 가족들 슬슬 날씨 풀려서 몰린 듯... 그리고 10시 오픈하자마자 28주후 좀비떼 마냥 뛰어가는 놈들... 덩달아 나도 존나 급해져서 속보로 케데헌 존까지 빠르게 걸어갓음 그런데 스카이웨이는 아직 점검이라고 못타고 결국 존나 걸어감... 한눈에 안 들어오긴 하는데 대충 이런 느낌으로 걸어가서 알파인매표소 위에 케데헌 존 도착 화질은 내가 하도 폰을 떨궈서 초점이 잘 안맞는다ㅋㅋㅋ 암튼 주변은 저랬고 입구 문 바로 뒤에 영상 틀어줘서 감상하면서 기다렸다 바로 앞에 페인팅이랑 의상대여 있었고 확실히 외국인 많더라 그리고 뒤쪽엔 스낵버스터랑 헌트릭스 컴백사진 붙어있는 간식차 이어서 11시에 입장 체험스테이지 후 일월오봉도 스탬프 찍는 종이를 받아들고 바로 ㄱㄱ 소다팝 가사에 맞춰서 번호 누르기 ㅋㅋ 이거랑 머였지 무슨 판떼기 막 조절해서 공 넣는게 있었는데 30초안에 어케하누... 이어서 바깥으로 나와서 헌트릭스 존 가는 길 난 아무도 없었는데 늦게 온 게이들은 아마 여기까지 줄 다 서있었을 거임 헌트릭스 존 앞에 ddrㅋㅋ 할말하다가 그냥 포기햇다... 그리고 모두를 설레게했던 기사 사진의 실체 그냥 모형이었구연... 마누라 잘나온 사진 한컷 비행기에서 총쏘기겜 조이자리에서 못햇음...ㅠ 그리고 튀어나오는 악귀들 대가리 부수기 겜 40점 ez 이어서 헌트릭스존 포토존 그네 앉아볼까 하다가 그냥 얼른 나왔다 ㅋㅋ 4번 체험 후 스탬프 다찍은 일월오봉도 나쁘지 않음 생각보다 ㅋㅋㅋ 이어서 굿즈샵 인터넷에 없던 것도 있었는데 저거 노리개랑 머리 잡아두는 집게 2.9만원ㅋㅋㅋㅋ 하나같이 존나 비쌈 진짜로... 암튼 대리구매 해주고 내꺼로는 쿠션 컵키링 랜덤아크릴갤주 ㅋㅋ 그리고 m사이즈 에잇세컨드 후드 프리사이즌지 생각보단 큼 그렇게 밖으로 나와서 스낵버스터로 감 개씹창렬버스터... 솔직히 포스터 별로 안땡겨서 거름... 먹은게이들 존경한다... 소다팝에이드는 그냥 소다맛... 컵홀더는 이뻐서 챙김ㅋㅋ 그리고 테이블 진우 만지고 간... 프라이드는 슬퍼하지마렴...ㅋㅋ 그 뒤 티익스와 더블스핀인가 타고 입구쪽 에잇세컨드 매장 입갤 이쁜 내 마누라 근접사진 사실 후드티 살말 존나 고민하다가 입어보고 결정하자 해서 피팅룸 들어갔는데 이렇게 되있더라 ㅋㅋㅋ 참고로 옆자리는 소다팝 갤주들 그 옆자리는 더피있다 ㅋㅋㅋ 아무튼 입어보니 생각보다 커서 삼ㅋㅋ 추가로 이 옆에 라 어쩌고 샵 있는데 여기서 굿즈상품 그대로 다 판다 그렇게 3시경 집도착 힘들긴했는데 갔다와보니 즐겁고 좋았다 겨왕 이후로 이렇게 빠져본 것도 올만이고 그때랑 다르게 지금은 돈도 버니 굿즈도 팍팍 지르고 씹이득임ㅋㅋㅋ 그래도 두번은... 못가겟다... 후기 봐줘서 고맙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엔Zoey고정닉
알렉산더 알레킨 2부 - 카파블랑카와의 결전
[시리즈] 체스사 시리즈 · 체스는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 중국 장기는 중국인이 발명했는가? · 체스 유럽 전파 초기의 무서운 이야기 · 1000년 전의 이슬람 체스 퍼즐, 만수바(مَنصوبة) · 15세기의 체스 대격변 패치, "여왕의 체스" · 대수기보법과 오스만제국 출신 체스마스터 이야기 · 벤저민 프랭클린, 체스의 교훈 · 1824년, 런던 - 에든버러 클럽 서신체스 매치 · 에반스 갬빗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 인디언 오프닝과 어느 시골 브라만의 이야기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上 - 영웅편 -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下 - 악귀편 - · 윌리엄 슈타이니츠 : 세계 체스 챔피언의 탄생 · 엠마누엘 라스커와 지크베르트 타라쉬, 두 독일 유대인 체스마스터의 삶 · 에드워드 라스커, 엠마누엘 라스커와 바둑 · 예술운동으로서의 하이퍼모더니즘 · 식민지인이었던 내가 대영제국의 체스 챔피언?! · 알렉산더 알레킨 1부 - 제국의 총아 · 1933년, 체스 최강자와 쇼기 최강자의 만남 · 체스 선수는 기보 저작권의 꿈을 꾸는가? · 카르포프와 카스파로프가 월챔 48게임을 뛰게 된 배경 · 미국체스협회 레이팅 2위를 달성한 살인범의 이야기 · 체스 역사 속의 TMI들 · 체스를 주요 모티프로 삼은 유명 문학작품들 3대 세계 챔피언,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 4세에 아버지가 체스를 두는 모습을 보고 혼자서 체스를 터득.13세에 쿠바 챔피언 후안 코르소와의 매치에서 승리.22세에 첫 국제 토너먼트 데뷔전인 산세바스티안 토너먼트에서 우승.그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사람들은 두 번째 폴 모피가 등장했다고 떠들어댔고,카파블랑카가 세계챔피언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 예측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연습량이 극히 적었고, 집에는 체스 세트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타고난 재능과 직관에 기반한 단순·정확한 기본기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체스의 괴물.당대 사람들은 그런 카파블랑카를 "체스 기계(The Chess Machine)"라고 불렀다.카파블랑카는 이미 1910년대 초부터 세계챔피언 최유력 후보 중 하나로 꼽혔지만, 그를 확고히 정상에 올려놓은 것은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다.주요 경쟁자였던 엠마누엘 라스커(독일), 아키바 루빈슈타인(러시아-폴란드), 알렉산더 알레킨(러시아) 등이 모두 크고 작게 세계대전의 여파에 휘말리며 체스 실력의 정체·퇴보를 겪고 있는 동안, 쿠바 출신이었던 카파블랑카는 아메리카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체스 실력을 더욱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그 자연스러운 귀결로, 1920년대 초의 카파블랑카는 더 이상 그 누구도 비견 불가능한 체스계의 절대강자로 떠올랐던 것이었다.이 시기의 카파블랑카는 1924 뉴욕 토너먼트(2위), 1925 모스크바 토너먼트(3위) 외에는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고,이때 남겼던 전설적인 기록 중 하나가 바로 1916-1924년의 8년 무패(40승 23무)였다.그저 패배했다는 사실이 뉴욕타임즈의 기삿거리가 될 정도의 압도적인 퍼포먼스. 그 안에는 심지어 2대 세계 챔피언 엠마누엘 라스커와의 챔피언십 매치(4승 10무 0패)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뛰어난 실력, 훤칠한 외모, 자연스러운 카리스마와 신사다운 매너.그의 명성과 인기는 체스 외적으로도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나갔고, 그가 출전하는 대회마다 팬들의 발길로 대회장이 미어터졌다.카파블랑카가 아메리카에서 안락할 생활을 구가할 동안,알렉산더 알레킨은 유럽에서 억류, 전쟁, 혁명을 겪었고, 이제는 망명자 신세가 되었다. 소련을 빠져나온 알레킨은 잠시 베를린에 머무르다 파리로 향했고, 그곳에서 볼셰비키를 피해 떠나온 러시아 이민자 그룹에 합류했다. 파리도 그를 그저 반겨주지는 않았다. 코민테른 활동 경력이 문제가 되어 프랑스 경찰은 알레킨을 "소비에트로부터 프랑스에 특별 임무를 띠고 파견된 볼셰비키"로 의심했으며, 이로 인해 알레킨의 귀화 신청은 반려되었다.재산, 가족, 그리고 국적마저 잃은 삶.러시아 제국의 촉망받는 엘리트였던 알레킨이 가진 것이라곤 이제 오로지 체스 실력 하나밖에 없었다.알레킨은 파리의 작은 임대아파트에 살며 체스로 생계를 꾸려나갔다.대회가 없을 때는 다면기나 눈가리개 체스 행사를 개최하여 수입을 충당했고, 러시아에서의 경험을 살려 체스 칼럼을 쓰기도 했다.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알레킨이 금세 기존의 폼을 되찾고 최고의 체스선수 대열에 재합류했다는 것이었다.알레킨은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출전한 20개의 대회에서 12번의 1위, 6번의 2위를 차지하며 유력한 챔피언 도전자 후보로 떠올랐으며,그가 작성한 토너먼트 해설서("New York 1924" 등)도 큰 주목을 받아 사비엘리 타르타코워와 함께 세계 최고의 체스 주석가로 손 꼽히게 되었다. 영국 체스 연맹이 개최했던 1922년의 런던 국제 토너먼트.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이 대회에서도 카파블랑카와 알레킨은 나란히 1위·2위를 차지하였다.그러나 이 대회는 경기 그 자체보다도 대회 중 일어났던 한 가지 사건이 더욱 중요하게 다뤄지곤 한다.이 대회의 휴식일이었던 8월 9일, 세계 챔피언 카파블랑카는 향후 세계 챔피언십의 진행 방식을 논의하기 위하여 기자들과 최고의 실력자들을 불러모았다. 이전까지는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던 체스 세계 챔피언십에 대해 명확한 공식 규정을 제정해보자는 것이었다.(루빈슈타인, 마로치, 레티, 알레킨, 보골류보프, 타르타코워, 비드마르의 서명)카파블랑카가 제안한 규정, 런던 규칙(London Rules)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첫째, 도전자는 1만 달러 이상의 상금을 가지고 챔피언에게 도전한다. 스폰서 모집의 책임은 도전자에게 있다.둘째, 상금이 충족될 경우 챔피언은 1년 내에 도전에 응할 의무를 지닌다.셋째, 상금 중 20%는 챔피언에게 선지급하며, 나머지 금액은 6:4로 승자와 패자 사이에서 분할한다.넷째, 경기는 6선승제로, 각 40수당 2시간 30분의 제한시간을 가진다.언뜻 보면 챔피언이 여러모로 유리해보이는 규정이기는 하나, 이전에는 이러한 규정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아 모든 것이 챔피언 마음대로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특히 카파블랑카는 선대 챔피언 엠마누엘 라스커와의 챔피언십 협상 과정에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는데,라스커가 챔피언 도전에 제때 응하지 않아 도전이 크게 지연됐을 뿐 아니라, 2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상금을 요구당하기까지 했던 것이다.(심지어 라스커는 승패와 관계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상금 배분을 주장하여, 완패해놓고도 그중 1만 1천 달러를 받아갔다!)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카파블랑카가 런던 규칙을 통해 스스로의 재량을 축소하고 상금을 1만 달러로 설정한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제법 관대한 처사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회의에 참석했던 선수들이 그 자리에서 흔쾌히 카파블랑카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였던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 규칙의 크나큰 맹점이 드러났는데, 바로 1만 달러라는 금액(현재가 약 20만 달러)의 현실적인 무게였다.오늘날 축구선수나 프로게이머들이 받는 대우를 생각해보았을 때는 이것이 그렇게까지 큰 금액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대중매체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1920년대에는 스폰서의 규모가 그리 크지 못했고, 재력가의 취미로나 후원이 이루어지는 형편이었다. 라스커-카파블랑카 챔피언십의 2만 달러라는 기록적인 상금은 두 선수가 가지고 있었던 비정상적인 인기 때문에 성립 가능했던 것이지,일반적인 선수들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을 후원받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이러한 조건은 앞으로의 챔피언십 도전을 위해서는 체스 실력 이외의 무언가, 즉 인기와 매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했다.카파블랑카에게 챔피언 도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던 선수는 님조비치, 루빈슈타인, 알레킨 세 명이었는데,이 중 님조비치와 루빈슈타인은 각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끝내 1만 달러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챔피언십 도전이 좌초되고 말았다.신생조직 FIDE를 비롯하여 여러 체스계 인사들이 해당 규정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카파블랑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러나 끈기와 집념의 화신, 알렉산더 알레킨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알레킨은 다면기·눈가리개 체스 행사를 통해 유력 후원자들과의 접촉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고, 심지어는 대서양 너머 아르헨티나까지 여러 차례 방문해 대회에 참가하며 자신이 후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도전자임을 적극 어필하였다.물론, 국제 토너먼트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1926년, 몇 년간의 집요한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알레킨은 후원자를 찾아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거물로. 아르헨티나 체스클럽, 그리고 아르헨티나 대통령 마르셀로 T. 데 알베아르의 후원이었다.1920년대의 아르헨티나는 경제적 호황을 누리며 국제적 위상 제고를 위해 여러 문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카파블랑카 - 알레킨의 체스 세계 챔피언십이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목적에 맞아떨어졌던 것이다.알레킨이 1만 달러를 모아오자 카파블랑카는 런던 규칙에 따라 공식적으로 도전을 수락하였고, 1927년 9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경기 개최에 양측이 최종 합의하였다.그리고 챔피언십 개최 몇 달 전, 1927년 봄의 뉴욕.오늘날 1927 뉴욕 슈퍼토너먼트라고 불리는, "Six Masters Tournament"가 개최되었다.참가선수는 카파블랑카, 알레킨, 비드마르, 마샬, 님조비치, 슈필만. 말 그대로 세계 최정상들만 모인 쿼드러플 라운드 로빈 대회.세계 챔피언십을 앞둔 카파블랑카와 알레킨이 모두 참가한다는 점에서 이 대회는 큰 주목을 받았고, 팬들은 이 대회의 결과를 통해 챔피언 자리의 향후 향방을 가늠하고자 하였다.그리고 그 결과는 몹시 충격적이었다.카파블랑카 우승, 14/20, 무패. 카파블랑카는 세계 최정상들을 상대로 단 한 게임도 내주지 않고 1위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우위를 과시하였다.알레킨은 2위를 차지하며 도전자격을 다시 한번 확고히 증명했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카파블랑카와의 승부 결과는 이미 뻔해보였다.이때까지의 알레킨-카파블랑카 사이의 상대전적은 총합 0승 7무 5패.알레킨은 지금까지의 커리어 전체에서 카파블랑카로부터 단 한 번의 게임조차 따내지 못했던 것이다.체스계 인사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아, 슈필만은 곧 펼쳐질 챔피언십에서도 알레킨이 단 한 경기도 따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였고, 카파블랑카 본인도 1927년 2월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칼럼에 이러한 말을 남겼다."매치 플레이어로서의 알레킨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하기 어렵다. 그는 최정상급 선수와 매치를 치러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가장 가까운 사례라면, 최근 네덜란드의 막스 오이베 박사와의 10연전인데, 알레킨은 3승 2패 5무로 이겼다. 필자는 그가 매치 플레이에 알맞은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투쟁심이 충분치 않으며, 더구나 매우 신경질적인 성향이어서, 침착하고 수완 좋은 상대와 벌이는 길고 지루한 접전에서는 이 두 성향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그러나 단 한 명, 1924년에 카파블랑카의 연승을 끊어놓았던 리하르트 레티만큼은, 공개적으로 알레킨의 승리 가능성을 논하고 있었다."마로치처럼 승리가 카파블랑카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점쟁이 노릇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경력에 어떠한 실패도 없었다는 점에서 카파블랑카가 우리 시대의 탁월한 마스터라고 말할 이유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각 선수의 특징을 철저히 연구하고, 매치에서 작용할 심리적 요인들을 고려하며, 더 중요하게는 팬들 사이에서 현실이 되어버린 '카파블랑카 무적 신화'를 걷어낸다면, 쿠바의 그랜드마스터가 재능 있는 슬라브 선수를 반드시 꺾을 것이라고 그토록 확신할 근본적인 이유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카파블랑카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기질을 가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의 야망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자체를 성가셔하기에 이런 종류의 매치를 위해 집중적으로 준비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타고난 재능 덕분에 지금의 위치에 올랐지만, 체스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천부적인 감각은 경탄스러울 정도지만, 혹독한 훈련을 감당할 에너지가 부족합니다.""반면에 알레킨은 비범하고 왕성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승부에 돌입하면 그는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고귀한 열망에 이끌리며, 앞으로 치를 매치의 중요성에 걸맞은 훈련에 자신을 몰두시켜 왔습니다..."레티의 올바른 지적대로, 알레킨과 카파블랑카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카파블랑카는 노력하지 않았지만, 알레킨에게는 체스가 삶의 전부였다.당시의 카파블랑카는 알레킨에 대해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다. "매치 플레이에 알맞은 기질", 그것이야말로 알레킨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며,전쟁과 혁명을 헤쳐나온 알레킨은 더이상 카파블랑카가 알던 이전의 조용한 아이 '티샤'가 아니었던 것이다.1927년 9월 15일, 남반구의 봄을 맞이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온 체스계가 주목하는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개막식은 아르헨티나 대통령 알베아르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고, 추첨을 통해 첫 경기에서는 카파블랑카가 백을 잡게 되었다. 첫 경기의 오프닝은 프렌치 디펜스.그리고 바로 이 첫 경기에서, 카파블랑카는 사상 처음으로 알레킨에게 패배를 당했다.그것도 백을 잡고서.모두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알레킨은 카파블랑카와의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무기를 활용했다. 병적인 기억력, 그리고 분석가로서의 능력.알레킨은 근 10여 년간의 모든 주요 체스마스터들 간의 경기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은 두 챔피언, 라스커와 카파블랑카였다.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카파블랑카가 얼마나 강한지,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그러나 동시에 카파블랑카가 신화대로 완벽한 플레이어는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카파블랑카의 체스상의 약점은, 사실 크지 않고 내가 그것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은 뿌리 뽑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인간적인—너무나 인간적인—결점들과 지나치게 긴밀한 유기적 연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알레킨이 볼 때 카파블랑카의 너무나도 뛰어난 재능은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그 재능이 카파블랑카의 한계를 결정짓고 있었던 것이다.첫째, 오프닝 신수(novelty)는 통하지 않는다.예나 지금이나 체스에서 오프닝 신수는 약자가 강자를 쓰러뜨리는 비장의 무기다. 새로운 오프닝 라인을 개발하여 내가 알고 있는 유리한 전장에서 상대를 맞이하는 것.그러나 알레킨은 과감하게 이것을 포기했다. 알레킨은 카파블랑카의 직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고 있었다.처음 보는 오프닝에서도 최선의 방어수를 찾아내는 마법 같은 능력, 마셜과의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그 천재성을 말이다.그래서 알레킨은 익숙하디 익숙한 QGD를 선택했다. 도박수를 던지지 않고, 건조하고 장기적인 포지션 싸움에서 천천히 이점을 쌓아올리겠다는 전략이었다.카파블랑카 또한 오프닝에서 우위를 취하려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이 매치는 전체 34경기 중 32경기가 QGD로 진행되었다.둘째, 포지션 판단에 부정확성이 있다.카파블랑카는 자신의 직관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애써 계산하여 최선수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직관으로 적당히 플레이함에도 그것만으로 연전연승을 이뤄왔기에.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도리어 카파블랑카의 약점이 되었다.알레킨이 볼 때 커리어 초기의 카파블랑카는 뛰어난 전술가이자 전략가였지만, 커리어 후기로 갈수록 전술가의 면모는 점차 약화되었다. 단순화를 선호하고 직관에 의존하는 카파블랑카의 스타일은 종종 철저한 계산을 통한 포지션 평가를 게을리 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여기서 나타나는 사소한 이점들을 서서히 축적하여 엔드게임까지 이어간다면 카파블랑카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카파블랑카의 강점은 엔드게임 그 자체가 아니라 유리한 엔드게임을 만드는 미들게임 실력에 있었으니까.셋째, 견고하게 버티는 상대로 점차 자신감을 잃기 시작한다.모든 상대가 그의 앞에서 손쉽게 무너져 왔기에 가지고 있는 결점.끈질기게 버티다보면 카파블랑카는 자신이 유리한 포지션에서도 점차 실수를 보이다가 무력하게 무승부를 내주곤 했으며,알레킨은 이를 이용해 불리한 경기를 여러 차례 무승부로 지켜낼 수 있었다.그렇게 철저히 대비하고 임한 챔피언십이었지만 사실 컨디션조차 알레킨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경기 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몸 상태가 완벽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던 카파블랑카와 달리, 알레킨은 경기 중 심각한 골막염을 앓았다.의사는 치료를 위해 경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치아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고, 알레킨은 단호히 치아를 포기했다.알레킨은 챔피언십 도중 여섯 개의 치아를 발치하면서도 꿋꿋이 경기를 이어나갔다. 경기는 가히 용호상박이라 할만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1경기는 알레킨이 따냈지만 3경기·7경기에서 카파블랑카가 승리하며 리드를 잡았고, 또 11경기·12경기를 알레킨이 연달아 가져가며 다시 역전했다.13경기부터 20경기는 전부 무승부가 나올 정도로 치열한 경기양상이었지만, 심리적 압박에서 점차 무너져갔던 것은 카파블랑카쪽이었다.치열한 승부가 34경기에 이르렀을 때, 알레킨이 5승, 카파블랑카가 3승을 각각 차지하고 있었고,카파블랑카가 마지막 경기에서 수세에 몰리자, 그는 경기에 출석하지 않고 편지를 남겼다."친애하는 알레킨 박사에게. 저는 경기를 포기합니다. 당신이 세계 챔피언이며, 당신의 성공을 축하합니다. J. R. 카파블랑카"알렉산더 알레킨이 제4대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알레킨 6승, 카파블랑카 3승, 무승부 25회. 총 34경기.이 경기는 먼 훗날 카르포프-카스파로프가 갱신할 때까지 역사상 최장경기 기록으로 남았다.카파블랑카는 이 패배로 큰 충격을 받아 알레킨을 위한 축하연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체스계 역시 무적이라 불리던 카파블랑카의 갑작스러운 패배에 크게 술렁였고, 카파블랑카의 일시적인 기량 저하로 인한 패배가 아닌지 의심하는 팬들도 더러 있었다.카파블랑카는 곧 재도전 의사를 밝혔고, 알레킨도 런던 규칙에 부합하는 한 카파블랑카와의 재대결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기에,알레킨과 카파블랑카의 재경기는 체스계에서 가장 기대되는 이벤트로 떠올랐으며, 다음 승부는 머지 않은 시일 내에 성사될 것으로 보였다.그러나 이들의 사이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1928년 2월, 카파블랑카는 FIDE를 끌어들여 챔피언십 규정의 개정을 시도했다. 무제한 대국이 선수들의 체력에 부담을 주며, 장기간의 경기 일정이 후원자들에게도 부담스러우니 전체 대국을 16국으로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본인이 도입했던 각 40수당 2시간 반의 시간제한 역시 각 30수당 2시간으로 바꾸자고 주장하였다.(1928년 3월 18일 뉴욕타임즈 기사)알레킨은 즉시 강력히 항의했다. "경기가 끝난 후 저는 당신에게 첫 경기과 정확히 같은 조건에서만 재경기를 할 의사가 있다고 분명히 밝혔고, 당신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은 마음을 바꾸어 세계 챔피언전 규칙을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경쟁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경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스스로 만든 규칙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저는 당신을 상대로 6승을 거두었으며, 앞으로도 제가 우월하다고 인정할 선수는 저를 상대로 6승을 거두는 선수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챔피언이라는 이유로 경쟁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만들어 놓고, 패배 후에는 도전자에게 더 쉬운 조건과 우연성을 도입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체스계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는 점을 확신합니다."카파블랑카는 예상치 못한 강한 반발에 맞닥뜨리자 이후의 챔피언십에 대해 말했을 뿐이라며 한발 물러섰고, 자신은 런던 규칙에 따라 도전할 것임을 다시 한 번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두고두고 둘 사이의 앙금으로 남았다.알레킨은 이후 FIDE와의 협의 과정에서, 챔피언십의 규정을 바꿀 의향이 있지만 카파블랑카와의 재경기만큼은 런던 규칙에 의거하여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피력하였다.FIDE 역시 이러한 알레킨의 요구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알레킨은 사실 줄곧 카파블랑카에게 묵은 감정이 있었다. 알레킨은 1만 달러라는 막대한 후원금을 모으며 정말 갖은 고생을 다했고,카파블랑카가 무리한 조건을 계속 고수했던 것은 손쉽게 챔피언 자리를 지키려는 방책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그런 생각을 하던 터에, 챔피언 자리를 빼앗기고 나니 자신이 만든 규칙을 바꾸겠다고 하는 것은 알레킨의 눈에는 폭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알레킨은 카파블랑카와 함께 출전하는 토너먼트에는 고액의 출전료를 요구하며 사실상의 출전 거부 선언을 했다.사실 그럼에도 여전히 재경기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카파블랑카는 팬이 많아 후원금 1만 달러쯤은 금방 동원할 수 있었으니까.그러나 카파블랑카의 복귀전, 1928년의 바트 키싱겐 토너먼트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당연히 카파블랑카의 우승을 기대했지만, 놀랍게도 알레킨의 오랜 지인 보골류보프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며 깜짝 우승을 차지했던 것이다. (보골 8/11, 카파 7/11)보골류보프도 오래전부터 세계챔피언 후보로 거론되던 최상위권 플레이어 중 하나였고, 이 승리는 알레킨이 보골류보프의 도전을 먼저 받아들일 충분한 명분이 되어주었다.1929년 9월, 알레킨은 11승 5패 9무로 보골류보프에게 승리를 거뒀고, 성공적으로 챔피언 자리를 지켜냈다. 그 다음 차례였던 카파블랑카는 즉시 알레킨에게 공식적으로 도전장을 던졌고, 알레킨은 도전을 수락했으며, 1930년 가을로 경기 날짜가 잡혔다.그러나 이번에는 또다른 사건이 전세계를 뒤흔들었다.1929년 말,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후원자가 차고 넘치던 카파블랑카조차도 이 상황에서는 적시에 1만 달러를 조달할 수 없었다. 후원을 약속했던 재력가들도 곧 말이 바뀌기 일쑤였다.제때 자금을 모으지 못한 카파블랑카는 1931년 초로 연기를 요청했고, 알레킨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카파블랑카는 얼마 안 가 자신의 이전 요청이 “행정적 착오”였다며, 1931년 말로 경기를 연기하고자 한다고 또다시 요청하였다. 알레킨은 거듭된 연기 요청에 질려 "앞으로는 연맹이나 체스계에서 인정받는 후원자의 공식적인 재정 보증 하에서만" 카파블랑카의 도전을 고려할 것이라는 통보를 날렸다. 이때를 기점으로 카파블랑카와 알레킨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져 말조차 섞지 않는 사이가 되었고,챔피언 자리를 탈환할 희망이 사라진 카파블랑카는 크게 좌절하여 몇 년간 체스계의 경쟁에서 떠나기까지 하였다.알레킨과 카파블랑카와의 재경기는 이렇게 일시적으로 좌초되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알렉산더 알레킨의 챔피언 자격을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1930년대 초, 알렉산더 알레킨의 선수로서의 전성기가 찾아왔던 것이다.1930년 산레모 토너먼트, 13승 2무(14/15), 우승. 2위 님조비치는 10.5/15. (*알레킨의 총이 탄생한 대회.)1931년 블레드 토너먼트, 15승 11무(20.5/26), 우승. 2위 보골류보프는 15/26.알레킨은 프랑스 국가대표(1927년 국적 취득)로 출전한 두 차례의 체스 올림피아드에서도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며,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렸다.세계 챔피언의 지위와 커리어 정점을 달린 퍼포먼스는 알레킨에게 막대한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세계일주까지 다녀오며 삶의 가장 행복한 한때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앞선 챔피언들에게도 그랬듯이, 누구에게나 끝은 찾아온다.새로운 세대, 새로운 라이벌들.1930년대 중반, 체스계의 세대교체 물결이 닥쳐오고 있었다.
작성자 : 김첨G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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