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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들와들 의외로 진짜 있었던 부산 마피아 총격사건
디시에 올라온 한 게시글... 아 ㅋㅋㅋ 이새끼 영화 존나많이 봤노 ㅋㅋㅋㅋ 영도구 마피아 총격사건 두 마피아 집단 간 사업적 분쟁이 있었고 한 조직에서 히트맨 고용해 다른 조직 간부 살해함 재빠르게 죽이고 바로 해외로 튀어서 못잡음 근데 몽타주 수준이.... 잡을 생각이 있긴 했는지 의문 ㅋㅋㅋㅋ 이때는 "진짜 기자"들의 낭만의 시대라 사살당한 마피아 간부도 그대로 찍어서 송출했음 이건 위 사건과는 관계 없이 부산 경찰이 러시아 마피아계 히트맨 검거하고 뺏은 암살용 권총 저 시대 부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나중에 히트맨 공범 몇명이 특정돼고 (아무래도 암살당한 조직 간부 적대 조직중에 하나라 수사망 좁혀짐) 일부는 체포까지 하긴 했는데 정작 암살 수행한 인원, 도주 조력자, 사전 정보요원 등 핵심 인물은 밝혀내지 못함 - dc official App
작성자 : 무따쟈이!고정닉
기계식 겜기부터 시작하는 수중전 고전 게임 이야기
전에는 게임과 해상전만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수중전 게임을 알아보자..근데 여러분들 반응을 잘 모르겠더라.내글을 진짜 좋아해 주는건지 나혼자 신나서 잡썰 떠드는 건지 말야 ㅠㅠ 먼저 조상님 부터 알아보자..핀볼 게임기는 다들 알거다 이게 기계랑 전기장치가 결합된 전자게임 나오기 이전 게임기쟌오 마찬가지로이런 종류의 겜들이 제법 있었음>>이미지 출처:https://russiainfo.co.kr/1754나름 근본중에 근본인 게임기 ㄷㄷ이건 러시아에 남아 있는 구형 기계식 게임기로 잠망경으로 화면 들여다 보면서 움직이는 적군함 어뢰로 맟추는 게임인데 어뢰 속도가 느려서 맟추기 힘든게 제법 리얼하더라.>>이미지 출처 https://russiainfo.co.kr/1754알삼스 팩에도 이겜을 토대로 만들어진 구형 액정 겜이 들어있더라 ㅋㅋ. 저멀리 섬들사이 현실감 있게 희미하게 어두운 실루엣이 적 군함이고 밑에 빛줄기가 물속으로 항주하는 어뢰 연출이야 아마 저거 실제로 러시아 해군에서 지도 상황판에 입력하는 표기 기호인거 같더라.월드 위쉽의 맵화면인데 비슷한 표기 기호 쓰더라어쩧든 빠니보틀도 유라시아 편에서 여기 놀러가서 이겜 잼나게 하면서 놀더라. 이런 기계식 게임기는 구 소련에만 있던건 아니고 각나라에 있었음 울나라에도 당연이 있었고 보통 어린이 놀이공원에 있었다. 영상보니 초딩 한정으로는 지금 어린애들도 좋아하더라고 이제 전자오락기 시대로 넘어가보자... 구축함으로 잠수함 잡는게임 70년대부터 벌써 많더라 ㄷㄷ나름 매니아층이 있는지 꾸준이 리메이크 되서 나온 배틀 쿠루저.대부분은 오락실에서 이겜으로 알거임. 이름은 전투순양함인데 사실 구축함이 폭뢰로 잠수함 잡는 게임임 이겜 스샷 구하기 힘들어서 애먹었다 ㄷㄷ 이거 후속작까지 나왔는데 취급이 너무 안좋더라..>옛날에는 대잠전이 꽤나 좋은 소재였나 보더라.57년도 영화 상과 하(수상과 수중) 인데 구축함 함장과 유보트 함장의 치열한 머리쌈 대결을 묘사한 수준작임 특이한게 미국짱 독일 나쁜놈 이런 느낌 보단 싸나이간의 진정한 대결 그런 느낌으로 만든 영화임이건 어디까지나 해상에서 수중으로 공격하는 게임이지 수중전 겜이라 하기에는 그렇다본격적인 수중전 게임은 이녀석이 아닐까 싶다. 물속에서 기뢰 피하고 수중 스쿠터로 어뢰 날리고 동료 구출하고 갈아타기 하고 ㅎㅎㅎ근데 당시 시대가 인류가 우주 진출에 열올리던 시점이라 이런 수중전 쟝르는 비주류였음..타이토의 배틀샤크..큰오락실에서만 볼수 있었던 겜이였던 걸루.. 우리가 잠망경 비스무리한 조준경 움직여서 어뢰 쏘는 게임인데 게임이 진행될수록 적은 미칠듯이 탄을 쏘거나 많이 나오는데 어뢰 장전되는 속도 후달려서 어려운 겜이였음이제 90년대 들어서 잠시 딴애길 하자면엄청난 영화(어비스)가 나올거라는 영화제작 소식덕에 경쟁 제작사들이 견제 한다고 설레발 쳐서 너도나도 영화를 만든덕에 해저 배경 영화가 반짝 붐을 일으킨적 있었고 제작사들 다같이 쫄딱 망했음 그런 반짝 붐은 가셧어도 마지막 뒷북으로 나온 드라마가 씨퀘스트라고 이런 드라마를 국내에서도 방영한적 있었음 항공모함만큼 거대한 잠수함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SF 드라마임. 수중판 스타트렉 비슷한 느낌이라 보면됨..우주 아닌 수중이 배경이라 그런지 별로 인기는 없었던 걸루...잠삼이 너무 커서 애들 안에서 연애도 하고 할건 다함여배우가 쫄쫄이 옷입고 등장하면서 인기가 급상승한 미드도 있지만 이드라마는 성공못한듯 ㅎㅎ.지금 보면 거대 잠수함 디자인은 꽤나 잘뽑은..이걸 SFC겜으로도 출시된적 있었다드라마 스케일에 비해 게임 자체는 쬐그만한 오징어처럼 생긴 잠수함 비스무리한게 바다속에 돌아댕기는 듯한 많이 루즈한 게임이였어 당시 한계라고 봐야... 예전에 본인도 햐 이런겜이 있구나 하고 잠시 해보다가 말았음...다들 좋아했던 걸작인 해저대전쟁 아이렘사에서 만들었는데 내가 캡콤 다음으로 좋아하는 아케이드 겜 제작사가 아이렘임..도트 그래픽 너무나 깔끔했고 잠수함이 역동적으로 흔들거리면서 움직이는 연출도 좋았음 난이도는 쉽지 않지만 원코인은 가능한 겜이였지엔딩이 4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해피엔딩 장면임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바닷속으로 뚸어내리고 하는 엔딩장면이 귀엽고 아기자기해이거 2인용으로 하면 충격적이게도 유저 잠수함끼리 서로 일기토 하면서 끝난다 그러네 ㄷㄷ 마지막으로 대망의 PC겜으로 넘어가보자도스 게임인 사일런트 헌터1이야 내가 유일하게 해본 잠수함 시뮬 겜이지 이화면부터 확질려서 어려워 보이는데 알고보면 이겜 만큼 초보 유저 배려한 겜이 없었음..난 겁먹고 욜나 하드에 그냥 쳐박고 안하고 있었는데 >>이형 정말 오랜만에 등장 ㅎㅎ동네 문화 전도사 형님이 몇가지 요령만 알면 이겜만큼 쉬운 겜은 없다 면서 몇가지 요령을 알려 주셧음 필자는 정보료 댓가로 최신 유행하던 탄산음료를 뇌물로 바쳐야 했다 ㅠㅠ 그형님이 탄산음료광이였음.내가 왜 이렇게까지 이겜을 할려고 했냐묜특전 유보트라고 영화(드라마) 보고 잠수함 뽕 찻기 때문임... ㅎㅎㅎ 이거 진짜 잘만들어진 명작 영화이니 안본 사람은 보길 바람. 80년대 영화인데 화면에서 영상이 촌스럽다거나 그런게 별로 안느껴짐. 육지전 걸작이 밴드오브브라더스라면 잠수함전 걸작은 이드라마(영화)임 그렇게 알면 됨 요즘 극장판만 보이고 드라마판 구하기 힘들더라.이제 겜 이야기 하자면기본 임무과정은 졸라 단순 했는데 임무 브리핑 받고 그냥 고민할것없이 맵 화면 켜고 빨간넘 있는곳으로 시간 배속 올려서 이동하면 됨 맵 상황판 밑에 죄하단에 컨트롤 박스 보이지 바로 이게 형님이 전수해준 모든 핵심이 이거임 1.복잡하게 여기저기 화면 전환 마구 누르면서 바쁘게 관측하고 그지랄 않해도 잠망경으로 관측할수 있는 심도만 되면 알아서 실시간으로 상황판에 다표시된다는 거임 2.상황판에서 실시간으로 들여다 보면서 어뢰쏘고 잠수함 이동 컨트롤 하고 잠수 부상 여기서 모든게 다됨3. 진짜 중요한거는 상황판에서 적 클릭하고 어뢰 쏘면 자동 조준임 뭔 최첨단 유도 어뢰 처럼 유도까진 아니여도 잠수함 틀어서 어뢰 발사구 각 마추고 할필요 없다는 소리임 이것만 알아도 겜 난이도가 확 내려감...초보들을 위한 엄청난 배려 ㄷㄷ엔진이랑 심도 보는 계기판 복잡해 보여도 속도 조정하고 산소 체크 하고 잠수 깊이 조정하는것뿐이다 알고 보면 별거없고 간단함 잠망경 화면인데 빨간 체크가 밑에 보인다 어뢰 조준 되고 있는 거임 요즘 겜은 상황판에서 콤파스 꺼내서 백터값 계산해서 발사해야 하는데 이겜은 조준이 자동임체크 뜨면 밑에 어뢰 표시 보이지 그냥 누르면 되 근데 아까 언급한대로 이화면도 잘안쓴다 ㅋㅋㅋㅋ 뽀대용으로 배 명중해서 폭발하는거 관측 도파민용으로 보는거지 밑에 계기판은 배 방향 심도 속도 정도임 알고나니 별거없었음 뭔가 복잡하게 조정할수 있던 레이더랑 소나 화면...덕후들은 이거 보면서 정보 판별하겠지만 사실 이거 생각보다 일반미션에서는 필요없다 ㅋㅋㅋ 잠망경 심도까지만 올라가면 상황판에 실시간으로 적이 표시 됨다만 특수 미션 악천후 폭풍속에서는 시야가 안좋으므로 잠망경이 지역할을 못해서 이걸로 정보 얻어서 어뢰 날려야 하는데 이것도 짬차면 저절로 하게됨 겜이 너무 쉬웠어..진짜 어뢰 재장전 오래 걸려서 신중하게 쏴야해.이것 장전 시간은 옵션으로 타협 볼수 있었던 걸로 안다.그리고 이겜이 미국 잠수함이 주인공인 겜이라 당연하게도 미국산 어뢰인데 문제는 저 어뢰야 어뢰 스캔들이라고 아주 유명함어뢰가 감지하고 배밑에서 폭발해야 하는데 그냥 솩 하고 지나감...이것뿐이 아니고 실전에서 당시 최고의 타격대상인 일본항모를 대상으로 쐇는데 명중한 4발중 1발만 폭발하고 나머진 불발탄이였다니 말다했지.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였음근데 이걸 방산비리라고 하기에는 애초에 예산이 다른 신무기 프로젝트들은 억단위 달러 돈을 주면서 개발시키는데 유달리 어뢰는 비주류라 느꼈는지 달랑 몇만달러 주고 어뢰 개발 시켰다더라 그지랄 나니 이런건 당연한거임..겜 화면에서 배 스팩 북 꺼내서 보는 이유는 거리 측정 때문임 실제 배 크기랑 잠망경으로 보이는 크기 눈금 비율 계산해서 거리 측정했었어.이런것까지 할정도면 지대로 겜뽕 차서 플레이 하는 거임다행이 게임에서는 이딴 이슈는 없으므로 그냥 맘놓고 어뢰 쏘면 된당콰릉~~도파민 성공..이런겜 해본 사람은 안다 진짜 뽕차오름 그런데 이겜의 말도 안되는 오류라 해야 하나 잠수함에 덱건이라고 있지잠수함에 포 한개나 두개 달린 이거 말야이게 사격 화면인데 겜중에 야심한 밤에 잠입해서 일본항모 보이길래 이걸로 포격해서 격침시켜 버림 포 수십발 쏘는데 가만이 쳐맞기만 하고 아무 반응없음 ㄷㄷ. 초기작이라 그런지 ai가 문제 있었음 내가 자랑스럽게 이거 봐라 내가 일본놈 항모 잡았다 하니까 옆에 구경하던 동생이 어이없어서 형 이거 말이 되나 하더라 ㅋㅋㅋ 뭐 덱건에 대해서 말하면 그것도 긴데 그냥 패스 함...덱건이 이겜에서 좀 사기무기이긴 했지만 놀랍게도 겜상으로나 할만한 구상이 실제로 잠수함에 덱건으로 도배해서 잠수 포격함을 만들려는 게획도 있었다 카더라 일본은 잠수항모도 만들었는데 그런 구상이 나올만 했지..어쩧든 사일런트 헌트는 당시 기준으로 그래픽도 준수한편에 잘만들어진 엉성해도 게임이였음 이상으로 오늘은 고전 수중전 게임 이야기를 마치도록 한다....난 딴겜하러 간다 다들 행복하게 지내거라 이만
작성자 : 아틀라스K형고정닉
알렉산더 알레킨 2부 - 카파블랑카와의 결전
[시리즈] 체스사 시리즈 · 체스는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 중국 장기는 중국인이 발명했는가? · 체스 유럽 전파 초기의 무서운 이야기 · 1000년 전의 이슬람 체스 퍼즐, 만수바(مَنصوبة) · 15세기의 체스 대격변 패치, "여왕의 체스" · 대수기보법과 오스만제국 출신 체스마스터 이야기 · 벤저민 프랭클린, 체스의 교훈 · 1824년, 런던 - 에든버러 클럽 서신체스 매치 · 에반스 갬빗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 인디언 오프닝과 어느 시골 브라만의 이야기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上 - 영웅편 -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下 - 악귀편 - · 윌리엄 슈타이니츠 : 세계 체스 챔피언의 탄생 · 엠마누엘 라스커와 지크베르트 타라쉬, 두 독일 유대인 체스마스터의 삶 · 에드워드 라스커, 엠마누엘 라스커와 바둑 · 예술운동으로서의 하이퍼모더니즘 · 식민지인이었던 내가 대영제국의 체스 챔피언?! · 알렉산더 알레킨 1부 - 제국의 총아 · 1933년, 체스 최강자와 쇼기 최강자의 만남 · 체스 선수는 기보 저작권의 꿈을 꾸는가? · 카르포프와 카스파로프가 월챔 48게임을 뛰게 된 배경 · 미국체스협회 레이팅 2위를 달성한 살인범의 이야기 · 체스 역사 속의 TMI들 · 체스를 주요 모티프로 삼은 유명 문학작품들 3대 세계 챔피언,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 4세에 아버지가 체스를 두는 모습을 보고 혼자서 체스를 터득.13세에 쿠바 챔피언 후안 코르소와의 매치에서 승리.22세에 첫 국제 토너먼트 데뷔전인 산세바스티안 토너먼트에서 우승.그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사람들은 두 번째 폴 모피가 등장했다고 떠들어댔고,카파블랑카가 세계챔피언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 예측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연습량이 극히 적었고, 집에는 체스 세트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타고난 재능과 직관에 기반한 단순·정확한 기본기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체스의 괴물.당대 사람들은 그런 카파블랑카를 "체스 기계(The Chess Machine)"라고 불렀다.카파블랑카는 이미 1910년대 초부터 세계챔피언 최유력 후보 중 하나로 꼽혔지만, 그를 확고히 정상에 올려놓은 것은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다.주요 경쟁자였던 엠마누엘 라스커(독일), 아키바 루빈슈타인(러시아-폴란드), 알렉산더 알레킨(러시아) 등이 모두 크고 작게 세계대전의 여파에 휘말리며 체스 실력의 정체·퇴보를 겪고 있는 동안, 쿠바 출신이었던 카파블랑카는 아메리카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체스 실력을 더욱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그 자연스러운 귀결로, 1920년대 초의 카파블랑카는 더 이상 그 누구도 비견 불가능한 체스계의 절대강자로 떠올랐던 것이었다.이 시기의 카파블랑카는 1924 뉴욕 토너먼트(2위), 1925 모스크바 토너먼트(3위) 외에는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고,이때 남겼던 전설적인 기록 중 하나가 바로 1916-1924년의 8년 무패(40승 23무)였다.그저 패배했다는 사실이 뉴욕타임즈의 기삿거리가 될 정도의 압도적인 퍼포먼스. 그 안에는 심지어 2대 세계 챔피언 엠마누엘 라스커와의 챔피언십 매치(4승 10무 0패)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뛰어난 실력, 훤칠한 외모, 자연스러운 카리스마와 신사다운 매너.그의 명성과 인기는 체스 외적으로도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나갔고, 그가 출전하는 대회마다 팬들의 발길로 대회장이 미어터졌다.카파블랑카가 아메리카에서 안락할 생활을 구가할 동안,알렉산더 알레킨은 유럽에서 억류, 전쟁, 혁명을 겪었고, 이제는 망명자 신세가 되었다. 소련을 빠져나온 알레킨은 잠시 베를린에 머무르다 파리로 향했고, 그곳에서 볼셰비키를 피해 떠나온 러시아 이민자 그룹에 합류했다. 파리도 그를 그저 반겨주지는 않았다. 코민테른 활동 경력이 문제가 되어 프랑스 경찰은 알레킨을 "소비에트로부터 프랑스에 특별 임무를 띠고 파견된 볼셰비키"로 의심했으며, 이로 인해 알레킨의 귀화 신청은 반려되었다.재산, 가족, 그리고 국적마저 잃은 삶.러시아 제국의 촉망받는 엘리트였던 알레킨이 가진 것이라곤 이제 오로지 체스 실력 하나밖에 없었다.알레킨은 파리의 작은 임대아파트에 살며 체스로 생계를 꾸려나갔다.대회가 없을 때는 다면기나 눈가리개 체스 행사를 개최하여 수입을 충당했고, 러시아에서의 경험을 살려 체스 칼럼을 쓰기도 했다.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알레킨이 금세 기존의 폼을 되찾고 최고의 체스선수 대열에 재합류했다는 것이었다.알레킨은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출전한 20개의 대회에서 12번의 1위, 6번의 2위를 차지하며 유력한 챔피언 도전자 후보로 떠올랐으며,그가 작성한 토너먼트 해설서("New York 1924" 등)도 큰 주목을 받아 사비엘리 타르타코워와 함께 세계 최고의 체스 주석가로 손 꼽히게 되었다. 영국 체스 연맹이 개최했던 1922년의 런던 국제 토너먼트.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이 대회에서도 카파블랑카와 알레킨은 나란히 1위·2위를 차지하였다.그러나 이 대회는 경기 그 자체보다도 대회 중 일어났던 한 가지 사건이 더욱 중요하게 다뤄지곤 한다.이 대회의 휴식일이었던 8월 9일, 세계 챔피언 카파블랑카는 향후 세계 챔피언십의 진행 방식을 논의하기 위하여 기자들과 최고의 실력자들을 불러모았다. 이전까지는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던 체스 세계 챔피언십에 대해 명확한 공식 규정을 제정해보자는 것이었다.(루빈슈타인, 마로치, 레티, 알레킨, 보골류보프, 타르타코워, 비드마르의 서명)카파블랑카가 제안한 규정, 런던 규칙(London Rules)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첫째, 도전자는 1만 달러 이상의 상금을 가지고 챔피언에게 도전한다. 스폰서 모집의 책임은 도전자에게 있다.둘째, 상금이 충족될 경우 챔피언은 1년 내에 도전에 응할 의무를 지닌다.셋째, 상금 중 20%는 챔피언에게 선지급하며, 나머지 금액은 6:4로 승자와 패자 사이에서 분할한다.넷째, 경기는 6선승제로, 각 40수당 2시간 30분의 제한시간을 가진다.언뜻 보면 챔피언이 여러모로 유리해보이는 규정이기는 하나, 이전에는 이러한 규정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아 모든 것이 챔피언 마음대로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특히 카파블랑카는 선대 챔피언 엠마누엘 라스커와의 챔피언십 협상 과정에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는데,라스커가 챔피언 도전에 제때 응하지 않아 도전이 크게 지연됐을 뿐 아니라, 2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상금을 요구당하기까지 했던 것이다.(심지어 라스커는 승패와 관계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상금 배분을 주장하여, 완패해놓고도 그중 1만 1천 달러를 받아갔다!)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카파블랑카가 런던 규칙을 통해 스스로의 재량을 축소하고 상금을 1만 달러로 설정한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제법 관대한 처사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회의에 참석했던 선수들이 그 자리에서 흔쾌히 카파블랑카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였던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 규칙의 크나큰 맹점이 드러났는데, 바로 1만 달러라는 금액(현재가 약 20만 달러)의 현실적인 무게였다.오늘날 축구선수나 프로게이머들이 받는 대우를 생각해보았을 때는 이것이 그렇게까지 큰 금액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대중매체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1920년대에는 스폰서의 규모가 그리 크지 못했고, 재력가의 취미로나 후원이 이루어지는 형편이었다. 라스커-카파블랑카 챔피언십의 2만 달러라는 기록적인 상금은 두 선수가 가지고 있었던 비정상적인 인기 때문에 성립 가능했던 것이지,일반적인 선수들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을 후원받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이러한 조건은 앞으로의 챔피언십 도전을 위해서는 체스 실력 이외의 무언가, 즉 인기와 매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했다.카파블랑카에게 챔피언 도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던 선수는 님조비치, 루빈슈타인, 알레킨 세 명이었는데,이 중 님조비치와 루빈슈타인은 각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끝내 1만 달러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챔피언십 도전이 좌초되고 말았다.신생조직 FIDE를 비롯하여 여러 체스계 인사들이 해당 규정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카파블랑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러나 끈기와 집념의 화신, 알렉산더 알레킨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알레킨은 다면기·눈가리개 체스 행사를 통해 유력 후원자들과의 접촉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고, 심지어는 대서양 너머 아르헨티나까지 여러 차례 방문해 대회에 참가하며 자신이 후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도전자임을 적극 어필하였다.물론, 국제 토너먼트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1926년, 몇 년간의 집요한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알레킨은 후원자를 찾아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거물로. 아르헨티나 체스클럽, 그리고 아르헨티나 대통령 마르셀로 T. 데 알베아르의 후원이었다.1920년대의 아르헨티나는 경제적 호황을 누리며 국제적 위상 제고를 위해 여러 문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카파블랑카 - 알레킨의 체스 세계 챔피언십이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목적에 맞아떨어졌던 것이다.알레킨이 1만 달러를 모아오자 카파블랑카는 런던 규칙에 따라 공식적으로 도전을 수락하였고, 1927년 9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경기 개최에 양측이 최종 합의하였다.그리고 챔피언십 개최 몇 달 전, 1927년 봄의 뉴욕.오늘날 1927 뉴욕 슈퍼토너먼트라고 불리는, "Six Masters Tournament"가 개최되었다.참가선수는 카파블랑카, 알레킨, 비드마르, 마샬, 님조비치, 슈필만. 말 그대로 세계 최정상들만 모인 쿼드러플 라운드 로빈 대회.세계 챔피언십을 앞둔 카파블랑카와 알레킨이 모두 참가한다는 점에서 이 대회는 큰 주목을 받았고, 팬들은 이 대회의 결과를 통해 챔피언 자리의 향후 향방을 가늠하고자 하였다.그리고 그 결과는 몹시 충격적이었다.카파블랑카 우승, 14/20, 무패. 카파블랑카는 세계 최정상들을 상대로 단 한 게임도 내주지 않고 1위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우위를 과시하였다.알레킨은 2위를 차지하며 도전자격을 다시 한번 확고히 증명했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카파블랑카와의 승부 결과는 이미 뻔해보였다.이때까지의 알레킨-카파블랑카 사이의 상대전적은 총합 0승 7무 5패.알레킨은 지금까지의 커리어 전체에서 카파블랑카로부터 단 한 번의 게임조차 따내지 못했던 것이다.체스계 인사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아, 슈필만은 곧 펼쳐질 챔피언십에서도 알레킨이 단 한 경기도 따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였고, 카파블랑카 본인도 1927년 2월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칼럼에 이러한 말을 남겼다."매치 플레이어로서의 알레킨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하기 어렵다. 그는 최정상급 선수와 매치를 치러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가장 가까운 사례라면, 최근 네덜란드의 막스 오이베 박사와의 10연전인데, 알레킨은 3승 2패 5무로 이겼다. 필자는 그가 매치 플레이에 알맞은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투쟁심이 충분치 않으며, 더구나 매우 신경질적인 성향이어서, 침착하고 수완 좋은 상대와 벌이는 길고 지루한 접전에서는 이 두 성향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그러나 단 한 명, 1924년에 카파블랑카의 연승을 끊어놓았던 리하르트 레티만큼은, 공개적으로 알레킨의 승리 가능성을 논하고 있었다."마로치처럼 승리가 카파블랑카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점쟁이 노릇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경력에 어떠한 실패도 없었다는 점에서 카파블랑카가 우리 시대의 탁월한 마스터라고 말할 이유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각 선수의 특징을 철저히 연구하고, 매치에서 작용할 심리적 요인들을 고려하며, 더 중요하게는 팬들 사이에서 현실이 되어버린 '카파블랑카 무적 신화'를 걷어낸다면, 쿠바의 그랜드마스터가 재능 있는 슬라브 선수를 반드시 꺾을 것이라고 그토록 확신할 근본적인 이유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카파블랑카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기질을 가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의 야망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자체를 성가셔하기에 이런 종류의 매치를 위해 집중적으로 준비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타고난 재능 덕분에 지금의 위치에 올랐지만, 체스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천부적인 감각은 경탄스러울 정도지만, 혹독한 훈련을 감당할 에너지가 부족합니다.""반면에 알레킨은 비범하고 왕성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승부에 돌입하면 그는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고귀한 열망에 이끌리며, 앞으로 치를 매치의 중요성에 걸맞은 훈련에 자신을 몰두시켜 왔습니다..."레티의 올바른 지적대로, 알레킨과 카파블랑카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카파블랑카는 노력하지 않았지만, 알레킨에게는 체스가 삶의 전부였다.당시의 카파블랑카는 알레킨에 대해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다. "매치 플레이에 알맞은 기질", 그것이야말로 알레킨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며,전쟁과 혁명을 헤쳐나온 알레킨은 더이상 카파블랑카가 알던 이전의 조용한 아이 '티샤'가 아니었던 것이다.1927년 9월 15일, 남반구의 봄을 맞이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온 체스계가 주목하는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개막식은 아르헨티나 대통령 알베아르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고, 추첨을 통해 첫 경기에서는 카파블랑카가 백을 잡게 되었다. 첫 경기의 오프닝은 프렌치 디펜스.그리고 바로 이 첫 경기에서, 카파블랑카는 사상 처음으로 알레킨에게 패배를 당했다.그것도 백을 잡고서.모두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알레킨은 카파블랑카와의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무기를 활용했다. 병적인 기억력, 그리고 분석가로서의 능력.알레킨은 근 10여 년간의 모든 주요 체스마스터들 간의 경기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은 두 챔피언, 라스커와 카파블랑카였다.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카파블랑카가 얼마나 강한지,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그러나 동시에 카파블랑카가 신화대로 완벽한 플레이어는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카파블랑카의 체스상의 약점은, 사실 크지 않고 내가 그것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은 뿌리 뽑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인간적인—너무나 인간적인—결점들과 지나치게 긴밀한 유기적 연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알레킨이 볼 때 카파블랑카의 너무나도 뛰어난 재능은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그 재능이 카파블랑카의 한계를 결정짓고 있었던 것이다.첫째, 오프닝 신수(novelty)는 통하지 않는다.예나 지금이나 체스에서 오프닝 신수는 약자가 강자를 쓰러뜨리는 비장의 무기다. 새로운 오프닝 라인을 개발하여 내가 알고 있는 유리한 전장에서 상대를 맞이하는 것.그러나 알레킨은 과감하게 이것을 포기했다. 알레킨은 카파블랑카의 직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고 있었다.처음 보는 오프닝에서도 최선의 방어수를 찾아내는 마법 같은 능력, 마셜과의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그 천재성을 말이다.그래서 알레킨은 익숙하디 익숙한 QGD를 선택했다. 도박수를 던지지 않고, 건조하고 장기적인 포지션 싸움에서 천천히 이점을 쌓아올리겠다는 전략이었다.카파블랑카 또한 오프닝에서 우위를 취하려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이 매치는 전체 34경기 중 32경기가 QGD로 진행되었다.둘째, 포지션 판단에 부정확성이 있다.카파블랑카는 자신의 직관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애써 계산하여 최선수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직관으로 적당히 플레이함에도 그것만으로 연전연승을 이뤄왔기에.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도리어 카파블랑카의 약점이 되었다.알레킨이 볼 때 커리어 초기의 카파블랑카는 뛰어난 전술가이자 전략가였지만, 커리어 후기로 갈수록 전술가의 면모는 점차 약화되었다. 단순화를 선호하고 직관에 의존하는 카파블랑카의 스타일은 종종 철저한 계산을 통한 포지션 평가를 게을리 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여기서 나타나는 사소한 이점들을 서서히 축적하여 엔드게임까지 이어간다면 카파블랑카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카파블랑카의 강점은 엔드게임 그 자체가 아니라 유리한 엔드게임을 만드는 미들게임 실력에 있었으니까.셋째, 견고하게 버티는 상대로 점차 자신감을 잃기 시작한다.모든 상대가 그의 앞에서 손쉽게 무너져 왔기에 가지고 있는 결점.끈질기게 버티다보면 카파블랑카는 자신이 유리한 포지션에서도 점차 실수를 보이다가 무력하게 무승부를 내주곤 했으며,알레킨은 이를 이용해 불리한 경기를 여러 차례 무승부로 지켜낼 수 있었다.그렇게 철저히 대비하고 임한 챔피언십이었지만 사실 컨디션조차 알레킨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경기 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몸 상태가 완벽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던 카파블랑카와 달리, 알레킨은 경기 중 심각한 골막염을 앓았다.의사는 치료를 위해 경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치아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고, 알레킨은 단호히 치아를 포기했다.알레킨은 챔피언십 도중 여섯 개의 치아를 발치하면서도 꿋꿋이 경기를 이어나갔다. 경기는 가히 용호상박이라 할만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1경기는 알레킨이 따냈지만 3경기·7경기에서 카파블랑카가 승리하며 리드를 잡았고, 또 11경기·12경기를 알레킨이 연달아 가져가며 다시 역전했다.13경기부터 20경기는 전부 무승부가 나올 정도로 치열한 경기양상이었지만, 심리적 압박에서 점차 무너져갔던 것은 카파블랑카쪽이었다.치열한 승부가 34경기에 이르렀을 때, 알레킨이 5승, 카파블랑카가 3승을 각각 차지하고 있었고,카파블랑카가 마지막 경기에서 수세에 몰리자, 그는 경기에 출석하지 않고 편지를 남겼다."친애하는 알레킨 박사에게. 저는 경기를 포기합니다. 당신이 세계 챔피언이며, 당신의 성공을 축하합니다. J. R. 카파블랑카"알렉산더 알레킨이 제4대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알레킨 6승, 카파블랑카 3승, 무승부 25회. 총 34경기.이 경기는 먼 훗날 카르포프-카스파로프가 갱신할 때까지 역사상 최장경기 기록으로 남았다.카파블랑카는 이 패배로 큰 충격을 받아 알레킨을 위한 축하연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체스계 역시 무적이라 불리던 카파블랑카의 갑작스러운 패배에 크게 술렁였고, 카파블랑카의 일시적인 기량 저하로 인한 패배가 아닌지 의심하는 팬들도 더러 있었다.카파블랑카는 곧 재도전 의사를 밝혔고, 알레킨도 런던 규칙에 부합하는 한 카파블랑카와의 재대결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기에,알레킨과 카파블랑카의 재경기는 체스계에서 가장 기대되는 이벤트로 떠올랐으며, 다음 승부는 머지 않은 시일 내에 성사될 것으로 보였다.그러나 이들의 사이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1928년 2월, 카파블랑카는 FIDE를 끌어들여 챔피언십 규정의 개정을 시도했다. 무제한 대국이 선수들의 체력에 부담을 주며, 장기간의 경기 일정이 후원자들에게도 부담스러우니 전체 대국을 16국으로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본인이 도입했던 각 40수당 2시간 반의 시간제한 역시 각 30수당 2시간으로 바꾸자고 주장하였다.(1928년 3월 18일 뉴욕타임즈 기사)알레킨은 즉시 강력히 항의했다. "경기가 끝난 후 저는 당신에게 첫 경기과 정확히 같은 조건에서만 재경기를 할 의사가 있다고 분명히 밝혔고, 당신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은 마음을 바꾸어 세계 챔피언전 규칙을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경쟁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경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스스로 만든 규칙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저는 당신을 상대로 6승을 거두었으며, 앞으로도 제가 우월하다고 인정할 선수는 저를 상대로 6승을 거두는 선수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챔피언이라는 이유로 경쟁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만들어 놓고, 패배 후에는 도전자에게 더 쉬운 조건과 우연성을 도입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체스계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는 점을 확신합니다."카파블랑카는 예상치 못한 강한 반발에 맞닥뜨리자 이후의 챔피언십에 대해 말했을 뿐이라며 한발 물러섰고, 자신은 런던 규칙에 따라 도전할 것임을 다시 한 번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두고두고 둘 사이의 앙금으로 남았다.알레킨은 이후 FIDE와의 협의 과정에서, 챔피언십의 규정을 바꿀 의향이 있지만 카파블랑카와의 재경기만큼은 런던 규칙에 의거하여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피력하였다.FIDE 역시 이러한 알레킨의 요구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알레킨은 사실 줄곧 카파블랑카에게 묵은 감정이 있었다. 알레킨은 1만 달러라는 막대한 후원금을 모으며 정말 갖은 고생을 다했고,카파블랑카가 무리한 조건을 계속 고수했던 것은 손쉽게 챔피언 자리를 지키려는 방책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그런 생각을 하던 터에, 챔피언 자리를 빼앗기고 나니 자신이 만든 규칙을 바꾸겠다고 하는 것은 알레킨의 눈에는 폭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알레킨은 카파블랑카와 함께 출전하는 토너먼트에는 고액의 출전료를 요구하며 사실상의 출전 거부 선언을 했다.사실 그럼에도 여전히 재경기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카파블랑카는 팬이 많아 후원금 1만 달러쯤은 금방 동원할 수 있었으니까.그러나 카파블랑카의 복귀전, 1928년의 바트 키싱겐 토너먼트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당연히 카파블랑카의 우승을 기대했지만, 놀랍게도 알레킨의 오랜 지인 보골류보프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며 깜짝 우승을 차지했던 것이다. (보골 8/11, 카파 7/11)보골류보프도 오래전부터 세계챔피언 후보로 거론되던 최상위권 플레이어 중 하나였고, 이 승리는 알레킨이 보골류보프의 도전을 먼저 받아들일 충분한 명분이 되어주었다.1929년 9월, 알레킨은 11승 5패 9무로 보골류보프에게 승리를 거뒀고, 성공적으로 챔피언 자리를 지켜냈다. 그 다음 차례였던 카파블랑카는 즉시 알레킨에게 공식적으로 도전장을 던졌고, 알레킨은 도전을 수락했으며, 1930년 가을로 경기 날짜가 잡혔다.그러나 이번에는 또다른 사건이 전세계를 뒤흔들었다.1929년 말,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후원자가 차고 넘치던 카파블랑카조차도 이 상황에서는 적시에 1만 달러를 조달할 수 없었다. 후원을 약속했던 재력가들도 곧 말이 바뀌기 일쑤였다.제때 자금을 모으지 못한 카파블랑카는 1931년 초로 연기를 요청했고, 알레킨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카파블랑카는 얼마 안 가 자신의 이전 요청이 “행정적 착오”였다며, 1931년 말로 경기를 연기하고자 한다고 또다시 요청하였다. 알레킨은 거듭된 연기 요청에 질려 "앞으로는 연맹이나 체스계에서 인정받는 후원자의 공식적인 재정 보증 하에서만" 카파블랑카의 도전을 고려할 것이라는 통보를 날렸다. 이때를 기점으로 카파블랑카와 알레킨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져 말조차 섞지 않는 사이가 되었고,챔피언 자리를 탈환할 희망이 사라진 카파블랑카는 크게 좌절하여 몇 년간 체스계의 경쟁에서 떠나기까지 하였다.알레킨과 카파블랑카와의 재경기는 이렇게 일시적으로 좌초되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알렉산더 알레킨의 챔피언 자격을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1930년대 초, 알렉산더 알레킨의 선수로서의 전성기가 찾아왔던 것이다.1930년 산레모 토너먼트, 13승 2무(14/15), 우승. 2위 님조비치는 10.5/15. (*알레킨의 총이 탄생한 대회.)1931년 블레드 토너먼트, 15승 11무(20.5/26), 우승. 2위 보골류보프는 15/26.알레킨은 프랑스 국가대표(1927년 국적 취득)로 출전한 두 차례의 체스 올림피아드에서도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며,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렸다.세계 챔피언의 지위와 커리어 정점을 달린 퍼포먼스는 알레킨에게 막대한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세계일주까지 다녀오며 삶의 가장 행복한 한때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앞선 챔피언들에게도 그랬듯이, 누구에게나 끝은 찾아온다.새로운 세대, 새로운 라이벌들.1930년대 중반, 체스계의 세대교체 물결이 닥쳐오고 있었다.
작성자 : 김첨G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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