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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벙글 태국이 캄보디아에 개빡친 이유..txt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이라는곳이 있음대충 유명한 관광지임근데 이 사원의 위치가 애매함보는것처럼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에 있으면서사원으로 들어가는 도로(빨간 줄)는 태국쪽에 있고사원 자체(파란 원)는 캄보디아 국토에 있음왜 이지랄이 났냐?이 씹놈들 때문임대충 요약하면프랑스가 식민지배시절 태국-캄보디아 국경선을 좆대로 측정해서 대충그어놨고저 사원을 태국과 캄보디아가 두고 싸우다가국제재판소가서 재판소는 캄보디아 손을 들어줬고 결국 캄보디아가 가지게 됨태국은 아직도 이 사건에 개빡쳐하고있음그래서 태국-캄보디아 악감정은 수십년 넘은 유서깊은 전통임그렇다면 이번엔 캄보디아 입장을 보자캄보디아는 GDP의 60퍼를 전세계적 스캠으로 벌어먹는 병신국가임진짜로 이새끼들은 보이스피싱이나 인신매매로 버는 돈이 국가 GDP의 60퍼를 차지함 씨발 ㅋㅋ근데 이 인신매매 사업에 최근 위기가 닥침캄보디아 취업사기의 타겟은 원래 우리나라가 아니었음.사기 사업 맨 윗대가리가 짱깨인건 다 알고있을거임얘네는 처음에 자국민(짱깨)를 팔아먹다가중국 내부에서 단속이 심해지면서 캄보디아한테도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대만인과 태국인으로 타겟을 바꿈.근데 이게 22년에 들통나서 대만이 난리가 남.대만에서 취업사기가 안통함태국인들도 벌이가 영 시원찮음.그래서 타겟을 바꿈.그게 한국, 일본같이 아직 캄보디아 스캠이 덜 알려진 국가였음근데 또 올해 한국에서 난리났네? 일본도 옆에서 난리난거보고 같이 반응하네?슬슬 스캠으로 먹고살기가 힘들어짐GDP의 60%를 차지하는 사업이 망할 위기에 처함즉 사기를 치는게 어려워지면서 캄보디아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 소리임(씨발 내가 쓰고도 어이없네 병신 똥튀기새끼들)그래서 이 똥튀기 대장이 생각한게 뭘까?내부의 분노를 외부로 돌리자 ㅇㅇ라오스는 캄보디아보다 1인당 소득이 더 적은 개씨발병신나라라 도발할 명분이 없음베트남은 우리보다 군사력도 센데 왠지 빨갱이국가라 선빵때리면 끝까지 밀고들어와서 나라 쳐망할거같음그럼 남은건? 마침 악감정도 좀 있고 그래도 도발했을시 전면전까진 안 갈 것 같은 괜찮은 나라 태국이 있네그래서 캄보디아가 태국에 도발을 검 ㅇㅇ물론 캄보디아는 전면전 할 생각이 없었음대충 WWE하자고 걸었던거지태국도 당연 전면전 할 생각은 없었음지들 입장에서도 관광특수로 외화 잘 벌고 있는 나라가갑자기 미쳤다고 전면전을 할까대충 캄보디아 국경넘어서 포 몇번 쏘는 WWE한 다음개빡돈 트럼프가 너네 전쟁 안끝내면 뒤진다고 하니까 잘됐다리 하면서 전쟁을 끝내려고 하던 그때..근데 씨발!이 타이밍에 태국에 레전드 사건이 터짐올해 초까지만 해도 태국의 총리는 이 여자 총리였음캄보디아에게 선빵을 처맞고 조금 지난 뒤인 25년 6월태국 총리와 캄보 총리의 전화 통화 내역이 까발려짐여기서 태국 총리가 캄보디아 총리한테 '삼촌'이라 부르면서 굽신댔고자기나라 군대인 태국 군대마저 병신 군대라고 비하했던 녹취록이 그대로 드러남당연히 태국은 개씹난리가 났고 여자 총리는 즉시 직무정지, 재판을통해 9월에 해임됨그래서 지금 태국의 반 캄보 감정은 하늘을 찌르고 있음또한 몇 달 전에 트럼프 주관으로 휴전협정은 했지만캄보 똥튀기들이 지속적으로 태국 국경선에 지뢰를 매설해 군인들 발목을 앙고시켜버리는 도발이 수 차례 일어남어떻게 캄보디아 도발인지 알았냐고?도발용 지뢰가 죄다 구소련제 지뢰였음태국은 서방산 지뢰를 쓴다나 뭐라나아무튼 이런 자잘한 도발을 처맞던 태국은 현재 머리끝까지 개빡쳐서 캄보디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려(진짜 점령전쟁 수준) 하고있다고함
작성자 : ㅇㅇ고정닉
싱글벙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주요 국가별 지도자
개전일 1939년 9월 1일부터 종전일 1945년 8월 15일 사이에임기를 가졌던 전쟁 당시 주요국의 인물만 해당시킴대영제국네빌 체임벌린(Rt Hon. Neville Chamberlain)영국의 제60대 총리.전도유망한 신흥 정치인 가문의 가주, 성공한 기업인, 대공황경제난을 해결하는 데 공헌하며 신망을 얻은 유능한 재무 관료등 성공가도를 달리며 호평받던 정치인으로 총리 자리에까지올랐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시시각각 군사적재무장과 팽창 야욕을 대놓고 실행에 옮기는데도 협상 일변도로대응했고, 결정적으로 1938년 뮌헨 협정을 체결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에 넘겨주고 돌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가 도래했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지 6개월만에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이하여 ‘완전히 실패한 유화 정책‘이라는무능한 외교의 대명사로 역사에 남고 말았다.그러나 당시 영국의 압도적인 반전여론을 고려했을 때히틀러를 자극하리란 쉽지 않은 것이였고, 그를 생전에 비판했던윈스턴 처칠 조차 “인간은 사건의 추이를 예측하는 능력이 없다.“”그의 행동은 그저 실수와 오판이며, 악의의 의한 매국 행위는아니였다. 그가 좌절을 겪었던 이유는 큰 위협을 무릎쓰면서도인기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상관없이 인간의 가장 자비로운마음인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그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다 썼다는 것을 확신한다.“라고 인정하기도 했다.윈스턴 처칠(Rt Hon. Sir Winston Churchill)군인 출신 영국의 제61대,63대 총리.제2차 세계 대전을 이끈 영국 총리이자 엘리자베스 시대의첫 총리이다. 정치가이자 작가로서도 활동했으며 1953년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아돌프히틀러와 맞서 치열하게 싸웠고, 이때 열세인 전황에도 불구하고뛰어난 리더쉽과 선견지명을 발휘해 전세를 뒤집어 연합국의승리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이로 인해 영국인은 물론이고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다. 전후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철의 장막이라는 유명한 용어를 언급하며 냉전을 예언했다.동시에 한편으로는 해군장관 시절 갈리폴리 전투에서 보인추태와 인종차별적 이면 및 영국의 식민지 수탈을 옹호하는거만한 제국주의자라는 어두운 부분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영국 최고의 위인이라고 평가받는 동시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앞서 말했던 것 처럼 나치 독일에게서 자유 세계를 지켜냈다는긍정적인 평가와 총리 재임 시기를 기점으로 대영제국이 천천히쇠락하게 되었고, 확고한 제국주의자로서 식민지를 탄압하였다는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그는 강경한 반공주의자였으며파시즘을 창시한 무솔리니를 두고 “러시아라는 독가스에 대한해독제“라고 평하기도 했다. 전쟁 당시엔 소련에게 적의 적은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소련에 점차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고,전쟁 당시 소련과 함께 연합국의 맹주로 나치에 맞서 싸웠다.물론 반공 반소련 성향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전쟁 후엔나치 독일과 따로 휴전협정을 맺고 서방 연합군들을 전부 모아소련의 뒤통수를 친다는 언싱커블 작전을 계획하는 음모를꾸미기도 했다.프랑스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프랑스의 군인, 국가원수.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의 영웅이자 1차대전 종전당시 단 3명 뿐이었던 프랑스군 원수이다.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파리가 함락되고 공화국 정부가나치 독일에 의해 무력화되자, 나치 독일과 협상을 통해 괴뢰정부인 비시 프랑스 수장에 앉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오늘날프랑스인들에겐 영웅과 반역자라는 두 인생을 산 극과 극의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그는 나치 부역자 중에서도 수괴급이지만 열렬한 나치 동조자라기보다는 시대를 잘못 읽은 사람이고 적극적인 매국 행위를하기는 커녕 오히려 비시 프랑스 치하에서 자국민을 나름 보호하려들다가 나치에게 끌려가기까지 했던 인물이다. 단지 오판으로나치에 협조하여 결국 많은 프랑스인을 희생시킨 죄가 있을뿐인데, 주력군이 궤멸된 상태에서 나치군과 계속 싸우는 건불가능한 일이었고, 나름 프랑스를 건지겠다는 생각과 히틀러에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전반적으로 찬반 의견을 떠니서, 페탱의 행위에 매국노의 잣대를들이미는 것에 대해 프랑스의 다수의 국민들은 조심스런 시각을가지고 있다. 프랑스 내에서는 과거 부역자 재판 당시 반감적 국민정서와 지금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고 이에 따라 평가가새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명확한 답안을 정해놓고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다.프랑스가 항복했을 때 페탱의 나이는 수명이 짧았던 20세기 초당시 무려 84세였다. 그가 점점 인지력을 잃어가고 있었다는논란이 가세되면서 현재 페탱의 정신문제에 대해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그의 부역행위에 대해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프랑스의 군인, 작가, 정치인. 프랑스 제18대 대통령.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서 대독 저항 운동을 지위했으며, 자유 프랑스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탈환시켰다.전후 프랑스 강료평의회 의장과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많은 프랑스인들은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그를 ‘나치의 압제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전후 프랑스 재건을 주도한인물로 매우 높이 평가한다. 20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현재 프랑스 해군은 최신예항공 모함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샤를 드골급 항공모함으로명명하고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은 현 프랑스 최대 규모 공항이자유럽 대표 관문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많은 도나 마을에는 드골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있을 정도다. 역사상 가장위대한 프랑스인 1위에 선정되기도 했고, 2009년에는 프랑스국민 87%가 드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레지스탕스를 이끌었던 지도자였던 점과 전후 나치협력자청산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드골 시기 프랑스는전후 복구를 넘어 독일 못지 않은 경제적 기적을 이뤘던 시기라서지금도 드골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또한 핵개발을 추진하여 프랑스를 핵무장화 함으로서 현재 기준러시아, 미국, 중국 다음가는 핵 보유량을 가진 국가로 만들었다.미합중국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미국의 제32대 대통령.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으로 30대 후반 얻은 소아마비후유증으로 인해 다리가 불편하여 오랫동안 휠체어 신세를지고 살았지만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역사상 최대 경제공황인 대공황과 인류사를 통틀어 최대 규모의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 두 차례의 국난을 모두 극복해미국을 현재 세계 초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루스벨트의위업은 미국 역사에 손꼽히는 위인들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위대하다고 평가 받는다.그러나 안타깝게도 2차 대전 종전을 고작 4개월 정도 앞두고병세가 악화되어 순직하였다.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대통령이자 가장 많이대선에 승리했다는 진귀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특히 미국은 FDR의 집권기를 거치며 소련과 함께 명실상부세계 제1의 초강대국이 되는데, 대공황과 제 2차 세계 대전을기점으로 미국은 영국, 프랑스를 대신해 세계를 이끄는 지도국가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고, 종전 후에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반을 마련한대통령이었다는 것에 많이들 공감하고 있기에 FDR은 오늘날에도 대통령 업적 평가 등에서 독립전쟁 승리와 건국에 기여해최초의 미국을 만든 조지 워싱턴, 남북전쟁 승리와 노예 해방으로 최대의 미국을 만든 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더불어대공황 극복과 2차 대전 승리로 최강의 미국을 만든 지도자로서세 손가락 내로 드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선 루스벨트가2차 대전 당시 소련의 힘을 과대평가해 스탈린에게 너무 유화적이었던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2차 대전 동안,서방 진영의 지도자였던 루스벨트와 그 후임자인 트루먼, 강경한 반공주의자 처칠 중에서 소련에 상대적으로 가장 호의적이었던 건 루스벨트였다. 그가 소련에게 양보하고 전쟁 지분을용인한 결과로 결국 소련의 부상과 냉전의 성립에는 루스벨트의지분도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미국의 제33대 대통령.34대 부통령 임기 중,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4선으로연임한 지 한 달여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제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 트루먼 개인으로서는부통령이 된 지 단 82일만에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이 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서 냉전기로 이어지는 급격한 세계사의흐름 속에서 냉철한 판단력으로 전후 세계 질서 확랍에 크게기여했다는 점이 재평가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고평가 되고있는 대통령 중 한명이다. 한국 입장에서도 매우 인연이 깊고고마운 미국 대통령인데, 그가 바로 6.25 전쟁 당시 미군을파병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루스벨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범하다는 점에서크게 부각이 안되지만, 2차대전 종전 이후 전후 질서를 예측해소련을 압박하고 봉쇄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서 전쟁을 잘 마무리짓고 냉전 초기에 매우 유능한 대처를 펼쳤다고 평가 받는다.소비에트 연방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소련의 제2대 최고지도자이자 독재자.1922년부터 소련 공산당의 초대 서기장을 지냈고, 소련의 국부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한 1924년부터 본인이 사망한 1953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제2대 최고지도자였다. 청년기에 공산주의 혁명가가 됐던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휘하에서 러시아 혁명에 동참해 러시아 제국과 그 이후의러시아 공화국을 무너뜨렸고 러시아 내전에서 붉은 군대의승리에 기여하며 소련 건국에 일조했다. 레닌 사후 권력을 장악해소련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정적 제거 및 권력 장악을 위해대숙청을 벌여 적어도 약 70만 명을 직접 처형하고 수백만명을반혁명분자라고 비난하며 굴라그에 감금했다. 그의 집권기간 사형과 강제 이주, 노동으로 직간접 탄압받은 사람은 최대 1,300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농업 국가였던 소련을 5개년 계획와 같은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통해 중화학공업 위주의 공업 국가로 전환시키며 소련의 국력을 강화시켰다.1941년 독일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하며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대숙청을 비롯한 소련 내부의혼란 때문에 초기에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2,000만 명이 넘는막대한 인명 손실에도 끝내 승전했고, 전후에는 소련이 미국과대립해 전세계를 양분할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발판을 마련했다.그러나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정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을일으키면서 위상이 크게 떨어졌다. 이후 역사에서 스탈린은위 설명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종합해 극단적인 양면을 지닌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정립한 레닌주의 계열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는 마오쩌둥, 김일성, 토마스 상카라 등 전 세계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이자 공포정치의극한을 보여준 인물인 동시에, 소련을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 이끌고 2류 국가 취급받던 후진국을 초강대국으로 탈바꿈한공까지 제대로 평가를 받는 양면적인 인물이다.일본 제국쇼와 천황(昭和天皇)/히로히토(裕仁)일본의 제124대 천황.다이쇼 천황과 데이메이 황후의 맏아들이자 장나미며 대일본제국 헌법상 최고 군통수권자. 당시 일본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은 군부와 내각총리대신이 하였으나, 쇼와 천황의 경우 대외 이미지가 총리 대신에 일본 제국을대표하는 인물로 잡혔다. 그는 2000년대 전까지만 해도 쇼와 천황이 군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니 전쟁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많았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그의 전쟁 책임이 명백하다는 주장이우세하다. 천황은 원래 수동적군주였지만, 예외로 쇼와 천황은능동적 군주로서 스스로 행동하였다. 국무와 통수의 조정에 관여한 경우도 있었으며, 육해군이나 통수부가 타 조직에게 중요한군사정보를 정상적으로 공유하지 않은 것과 달리 중요한 군사정보가 바로 한 곳, 히로히토 천황의 앞에서는 공유 되었다.히로히토가 먼저 적극적으로 전쟁 시작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딱히 전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꼭두각시라고치부하기에는 상징성이나 독보적인 권한이 있었고, 천황이라는지위를 이용하여 군부의 폭주를 통제하기는 커녕 묵념하며 그저 방관했을 뿐이었다. 그의 전쟁 책임은 1945년 행동에서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독일마저 이미 항복한 상황에서 일본의 도시가 공습으로 폐허가 되고 설상가상 원자폭탄까지 투여됐음에도천황 권위유지를 위해 항복거부를 하며 계속 미루다가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만주 진공 소식이 들려오자 그제서야“필시 자신이 받는 대우는 소련의 지배보다는 미국의 지배쪽이더 나을거라고 판단한 천황은,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 미국과연합국이 제시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기로 했다.“또한 오직 천황의 ‘국체 유지’를 목적으로 일본이 국민 전체를대상으로 1억 옥쇄라는 정신나간 짓을 하려고 했다는 점 역시비판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당일 천황은 권위 수호를 위해 국민뿐 아니라 일본이란 국가까지 전쟁의 희생자로 묘사하며 막 끝난 전쟁을 해방전쟁으로 정당화하며 끝까지자신의 권위를 지키기위해 노력했다. 그는 항복을 결정하게 된이유를 ‘항복’이라든가 ‘패배’라는 표현을 쓰지않고, 단지 ”전국이확실히 호전되지도 않고, 세계의 대세 또한 우리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만 전하는 이 발표는 일본의 전쟁 행위를 해방을 위한 전쟁으로 정당화하고, 곧 뒤바뀔 세상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계속 지키려는 천황과 측근의 주목할만한 노력이었다.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일본 제국의 제40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전쟁범죄자.일본 육군 소속이며 최종계급은 대장이다. 일본 제국 육군 내통제파 파벌의 수장으로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주도했으며,결국 1941년 내각총리대신 겸 육군참모총장으로 태평양전쟁을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해방 전쟁으로 명명하며 시작한다.대표적인 추축국 지휘관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프로파간다를 포함한 매체에 일본군의 이미지가 ‘안경을 쓰고 콧수염 기른 빡빡이’로 정착된 것에 영향을 주었다. 워낙에 벌인 일이 거대하고 잔혹한 전범이라서 전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미군은 베니토 무솔리니처럼 될까봐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도조를 미군 피를 수혈시켜서되살려놓고는 도로 사형시켜 죽였다. 진주만공습을 명령하여독소전쟁과 함께 2차대전 당시 가장 잔혹하고 대규모였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화를주도한 원흉이었고, 일본 역사상 가장 광기에 가득 찬 막부의수장으로서 그가 긍정적으로 재평가받을 만한 여지는 거의 없다.서양에서는 도조 히데키에 대한 반감은 거의 없다.현대 서양에서는 더 꾸준히 까이는 나치도 있고, 일제에 대한증오심도 동양권에 비하면 낮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인들은도조 대신 2차 대전기 일본의 지도자를 쇼와 천황이라고 많이들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천황의이름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것과, 군주정이 많이 잔존하는 당시유럽에서 Emperor란 직책의 임팩트가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동양, 그리고 대표적으로는 중국에서는 난징 대학살, 생체 실험등 중국인을 바퀴벌레 취급하며 도살했던 일본군의 리더였던게 도조였으므로 도조 히데키라는 이름이 나오면 학을 떼며 가장 혐오하다시피 한다. 의외로 일반 병사나 하급 부사관, 하급 장교에게는 부드럽고자상한 아버지 같은 상관이었다. 도조는 신병이 들어오면일일이 부모를 찾아 뵙고 “귀한 자식을 맡겨주셨으니 끝까지보살피겠습니다”라며 부모와 입대하는 자식 모두를 안심시켰고형편이 어려운 가장이 입대하면 동사무소를 통해 생계비를받을 수 있도록 하여 불안을 해소해 주었다. 게다가 도조는 평등주의에 철저하여 식사도 사병과 같은 것을 먹었다. 이건 그 당시 의지드립이나 외쳐대는 꼰대가 만연한 일본군 장성치고는 대단히 이례적인 처신이었다. 특히 같은 군국주의자 항목의 하나야 타다시와 비교해 본다면 말이다. 부하들을 어찌나 사랑했는지 한 번이라도 다른 반찬이 나오면 병사들의 식단에도 그 반찬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는 만약 없을 경우 본인도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이탈리아 왕국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이탈리아의 군인 출신 두체이자 독재자.자신의 사병 파시스트 조직인 검은 셔츠단과 로마 진군’을 통해 이탈리아 왕국의 정권을 장악한 뒤 일명 ‘두체’라 일컬어진최고지도자에 등극했으며, 국가 파시스트당을 이끌며 독일의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파시즘의 발흥을 주도하였다.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손을 잡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가연합국의 반격을 받아 패전하면서 처형되었다.아돌프 히틀러, 도조 히데키와 함께 추축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파시즘의 창시자다. 아돌프 히틀러가 젊은 시절 그의 팬이었고,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아 집권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솔리니는 은근 언짢아했어도 나중에는 히틀러를 친구로 받아들였고, 히틀러 역시 중간중간 그의 무능을 질책하고, 무솔리니가 상심하자 비판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그를 유일한 친구로 여기며 의지했다.유명한 별칭으로 이탈리아어로 지도자 또는 영도자를 뜻하는 일 두체(Il Duce)를 가지고 있다.철학적인 부분에선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조반니 젠틸레의 이론을 기반으로 여러 철학 요소를 더해 이탈리아 파시즘을 만들어놨고, 파시즘의 거두로써 철학가들을 초청하여 진지하게 파시즘이라는 것에 대해 학문적인 토론을 하기도 했다. 때문에 타국에서 파시즘 성향으로 보이던 인물들이 광기에 휩싸인 히틀러는 경계하지만, 무솔리니에 대해서는 극우라는 타이틀 내에서 이념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많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대표적으로로마에 방문해 무솔리니를 만나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었던윈스턴 처칠이 있다. 국내 정치에서 동시대 다른 파시스트 후발 주자들에 비해선 비교도 안 되게 온건했다. 의외로 그는 막상 집권 과정과집권 이후에도 마테오티 살인 사건과 같은 간판 정치인, 핵심정적들을 살해하고 정치깡패 검은 셔츠단을 동원해 수시적으로탄압한걸 빼곤 자국민 상대로 전혀 대규모 폭력적 테러를저지르지 않았다. 또한 히틀러처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특정 인종을 집단말살을 한다던지 하는 것은 확실히 적었고,본인도 반유대주의가 바보같다며 거부하고 리비아 식민지의정통성을 가지려고 현지 이슬람교도들에게 칼을 선물받는 퍼포먼스도 보였다. 무솔리니 통치기에는 마피아 세력이 급격히약화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마피아는 최소 군벌급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집권국가를 원하던 무솔리니가 이들을 탄압하며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당연하게도 마피아에 의해 피해를본 사람들은 무솔리니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다.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를 만들기도 하는 등 기반시설도 확충하여인기를 얻었다. 이탈리아의 고질점인 남북부의 지역 갈등 역시무솔리니 정권에서 해소하려고 시도했으며, 축구 리그인 세리에A 지원 및 재편, 1934년 월드컵을 개최하는 등 스포츠에도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무솔리니의 경제 정책은 현대 이탈리아의경제구조를 형성하는 데에 많은 긍정적 영향을 주었는데,소위 장인들이 만드는 고급제품 시장에서선 이탈리아가 절대강자라는 사실이 잘 알려져있고, 실제로 무솔리니가 추진한이러한 경제구조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어서 한 때 미국-일본-서독-프랑스에 이은 세계 5대 경제대국에 오르는위엄을 발휘한 바 있다. 현대의 평가로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나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달리 ‘비정치적 일상’이 유지되어서무솔리니에 대한 이탈리아 내 기억은 금기시 되지 않는다.자국 내에서도 극우가 아닌 이상 부정적 평가를 받는 히틀러, 도조 히데키와 달리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두체를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당장 무솔리니 사후 이어진 것들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나치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고 오른손을 곧게 치켜드는 로마식 경례를 행할 경우 처벌대상이 될 수도 있는 독일에 비해 이탈리아에서는 현재도 양지에서 버젓히 활동하는 파시스트 정당이 여럿 존재하고 이들 당 행사에서는 파시스트식으로 공공연히 경례한다. 국가 파시스트당의 법적 후계인 FdI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중견급 원내정당이며 조르자 멜로니는 후술하듯 총리까지 되었다. 정치적 혈통으로 왕따당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어서 우파 선거 연합에 공공연히 참가한다. 전후에 나치 전범들의 자식들이 대체로 성을 바꾸거나 남아메리카로 이민해 은둔 생활했던 반면, 무솔리니의 자식들은 아버지 사후에도 그다지 곤란을 겪지 않아서 장남은 예술 평론가로서 명성을 날렸고 막내 아들 로마노는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활동하면서 쳇 베이커 같은 유명한 아티스트들과 협연하고 1995년에 내한 공연도 했다. 내한 당시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한국 기자들에 질문에 ”멋있었던 분"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이탈리아는 2010년대 중반부터 극우적인 여론이 커진 상태로, 아무리 온건했다고 한들 파시스트인 무솔리니에 대해 19.8%가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조사도 나왔다.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인, 나치 독일의 퓌러.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독재자로 제2차 세계 대전, 홀로코스트 등 전쟁범죄자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다.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지도자로 정치 활동을 하며 두각을 드러냈고 제24대 국가수상과 제3대 국가대통령을 역임하며 집권했다. 재임 중 공화국 체제를 무너뜨리고 나치 독일 체제를 수립한 뒤 퓌러(지도자)가 되어 독재자에 등극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불공평함 그리고 대공황과 실업난으로 인한 독일인들의 불만이 고조된 상황에서 무명에 불과했던 그는 천부적인 연설과 선동 능력을 바탕으로 독일 내에서 인지도를 쌓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속칭 나치당)의 지도자로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정권을 잡아 1933년 총리가 되어 히틀러 내각을 구성하고, 수권법을 통과시키는 것을 통해 독일의 민주주의 체제를 무력화시켜 나치 독일을 수립하였으며, 그 이후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병합한 ‘지도자 겸 국가수상', 일명 퓌러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개시하여 막대한 인명 손실을 초래하고,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 T4 작전 등 독일의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반인륜 전쟁범죄자로 평가받는다.그는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이던 1945년 4월 30일 칩거하던 퓌러붕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고, 며칠 후 5월 9일, 그의 뒤를 이은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연합국에 항복하며 그가 수립한 나치 독일은 종말을 고했다.정치적으로 권력을 잡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히틀러가 아무런 기반이 없는 무능력자였다면 나치당에서 당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나치당은 뮌헨 폭동 이후에 그저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져버린 극우정당 중 하나로 끝장났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 실패 이후에 많은 당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또는 당을 떠나는 등 나치당은 거의 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히틀러는 놀랍게도 쿠데타가 아닌 합법적인 노선으로 집권 전략을 바꾸어서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 여기서도 나치당에서 재건 전에 모든 시도를 해봤으나 지지율이 오히려 떨어졌고, 히틀러 없이는 구심점도 없고 선동적인 연설로 흥행도 되지 않았던 점도 작용한다.많은 사람들에게 단상에서 미치광이처럼 연설을 하는 선동가 히틀러의 모습이 익숙하겠지만 밀실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협잡을 하거나 권력을 잡는 정치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히틀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집권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경제부흥과 외교적 승리, 2차 세계대전 초반의 대승까지 이루어내자, 히틀러는 스스로가 ‘무오류의 인간’이라는 자기 확신에 빠져들며 오만해졌고, 모든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점점 더 큰 무리수를 두었다. 그리고 그 무모한 도박의 결과는 독소전쟁을 통해 한계를 드러냈고, 이전까지 출세길을 열어준 ‘전부 아니면 전무' 식으로 타협을 하지 않던 자신의 지도력을 신봉하던 히틀러는 궁지에 몰렸다고 협상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코 협상이나 타협은 없다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하여 그와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갔다. 히틀러 본인의 업무능력은 그저 그런 편이지만 집권 이후에 히틀러가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도박을 연이어 성공시켰기 때문에 행정에 무능했는데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인재들을 잘 활용한 승리자들과 달리 히틀러는 인재들을 관리하는 능력이 떨어졌을 뿐더러, 히틀러는 엄청나게 위험한 망상을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군사적 평가에서는, 히틀러의 군사적 결정으로 인한 승리들은 비록 그렇게 많지는 않으나 이 결정들이 2차 대전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아주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명백하다. 앞서 히틀러의 수많은 실책들이 있었으나 애초에 히틀러가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나치 독일은 그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독일에게는 대단한 업적인 셈이다. 만슈타인 계획안의 가치를 알아본 히들러의 안목으로 독일이 4년간 서부전선에서 질질 끌다가 결국 패전한 1차대전과는 달리 2차대전에서는 불과 히틀러의 과감한 결단으로인해 6주 만에 서부전선을 정리하게 되는 엄청난 성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 결정은 2차 대전에서의 가장 중요했던 결정들 중에 하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독일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서부전선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승리에서 얻은 결과물들은 어마어마해서 그러한 결과물들을 바탕으로 독일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결국 소련을 공격할 야심을 실행에 옮길 자신을 얻게 되었다.반면 실질적인 군사적 능력은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분명 그의 거침없고 무모한 결단력은 독일을 순식간에 패권에도달시키게 만들었으나, 역으로 그런 도박성 결정들은 전쟁중반부터 엄청난 파멸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또한 주도권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방어선 사수, 후퇴 금지 명령으로 인해 무리한 공세를 펼치면서 상당한 전력을 낭비시켰다.마지막으로 자기자신에 대한 과할 정도의 믿음과 오만함을그의 군사적 능력에 가장 큰 결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바르바로사 작전에서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낸다는근거 없는 망상으로 월동장비까지 굳이 금지한 결과로1941년 12월 말 국방군의 동상자는 10만 명 이상이 발생했다.아무리 현재 상태가 안좋다고 한들 미국에 버금가는 체급을가고 있던 소련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체제가 무너질것이라는마인드를 가진 자의 말로다.
작성자 : ZI존다크마스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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