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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기행] 갈리폴리 전적지를 가다
[시리즈] 전쟁사 기행 · [전쟁사 기행] 카라바흐를 가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은 무엇일까? 당연히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다. 말 그대로 전세계가 전쟁터가 되어 전세계가 전쟁을 실감했으며 그 여파가 전세계를 뒤엎었다. 그 어느 전쟁도 이 전쟁들에 비견할 수 없고 비견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유명한 전쟁, 혹은 그 전까지 가장 유명했던 전쟁은 무엇일까? 몽골의 원정,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나폴레옹 전쟁, 포에니 전쟁, 십자군 전쟁, 이름만 들어도 그 규모가 느껴지고 거대한 역사가 느껴지는 전쟁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유명했고 더 오랜 시간 부동의 위치처럼 있었을 전쟁이 있다. 트로이 전쟁이다. 트로이 전쟁은 신화의 영역에 있다. 어릴 적 침대, 도서관, 학교에서 읽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오던 이야기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신들의 잔치에 놓고 간 황금사과를 두고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세 여신이 차지하고자 했고 주인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선택하도록 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했고 아프로디테는 그 보답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어줬다. 문제는 헬레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였고 파리스가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도망쳐버렸다. 메넬라오스와 그리스 연합군은 당대 최고의 영웅들을 이끌고 트로이를 쳐들어간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트로이 최고의 영웅 헥토르가 이끄는 양측 군대는 10년 동안 전쟁을 벌이고도 싸움이 끝나지 않았고, 둘은 1대1 결투로 승부를 펼쳤다. 이 결투는 아킬레우스의 승리로 끝났다.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승리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 다음 이야기를 알고 있다. 헥토르가 죽었음에도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를 공략하지 못하고 또다시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자 지혜로운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꾀를 냈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연합군이 철수한 것처럼 위장한 뒤 해변에 목마를 만들어놓아 트로이가 목마를 신의 제물로 인식하게 해 성문 안으로 가져가도록 유도했다. 목마 안에는 특공대가 숨어있었고, 그들이 문을 열자 그리스 연합군이 물밀듯이 들어와 트로이를 멸망시켰다. 파리스는 아킬레우스를 죽였지만 그 역시도 죽고 말았고 헬레네는 다시 메넬라오스가 데려간다. 우리 모두 그 다음 이야기도 알고 있다. <오디세이아>는 우리를 지혜로운 오디세우스의 여정으로 이끈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미움을 사 10여 년 동안 지중해를 방황한다. 그의 선원과 동료들은 모두 다 죽고 말았고 가족들도 오디세우스의 생사를 모른다. 그러나 가족들은 오디세우스를 끝까지 기다리고 오디세우스도 신의 분노를 물리치고 끝끝내 이타카로 돌아온다.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부인 페넬로페와 왕국을 노리던 약혼자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이타카까지의 여정을 마친다. 20년의 세월이다. 우리는 모두 이걸 신화라 믿고 있다. 신이 등장하고 황금색 사과가 나온다. 10년이나 전쟁을 벌이고, 아킬레우스는 발 뒷꿈치 외에는 약점이 없다. 신에 의해 모든 이들의 운명이 결정되고 외눈박이 거인과 사람 얼굴의 세이렌이 지중해에 살고 있으며 영생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참으로 유명한 전쟁 '신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다. 한 마을의 암살자가 제국의 황태자를 암살하자 온 지구가 전쟁에 돌입한다. 전쟁을 막기 위한 분투가 이어지나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열차는 절대 멈출 수 없어 운명처럼 모두를 소용돌이 속으로 빨아당긴다. 딱 1킬로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오 만 명이 넘는 희생이 나오고 한 명의 기관총 사수가 수천 명을 죽인다. 물 속에서, 하늘에서 폭발이 다가오고 밤 하늘에서 내린 검은색 비는 도시를 불태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참호에 퍼지자 숨이 막히고 피부가 타오른다. 사람들을 기차에 태워 공장으로 보내자 사람들이 사라지고 여인들은 고통 속에 신음한다. 아주 높은 자리의 누군가가 손짓으로 가르킨 곳이 가깝다는 이유로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동네에서 목숨을 바친다. 누군가는 강철의 괴수로 수백의 적에 맞서고 누군가는 하늘에서 붉은색의 선을 그으며 회전한다. 하나의 섬광이 도시를 소멸시키고야 만다. 수 년의 전쟁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니 돌아온 건 나 혼자 뿐이거나 도시가 사라져 있다. 참으로 신화적이지 않은가. 우리가 이것을 신화라고 인식하지 않는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조금씩 시간이 흐르고 지나면 드레스덴의 잔해도, 솜므의 백골도, 난징과 다하우도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우리가 믿기 힘든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앞으로 더 긴 시간이 흐르고 또다시 세계가 달라진 뒤에 본다면 두 번의 세계대전도 신화처럼 보이고 전승될 것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트로이 전쟁은 미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트로이 전쟁은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에서 일어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서유럽과 동유럽, 중국과 태평양 일대에서 크게 일어났다. 때문에 트로이 전쟁과 세계대전은 서로의 유사성과는 별개로 서로 겹치는 지점이 많지 않다.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솜므, 미드웨이, 베르됭, 스탈린그라드, 아우슈비츠 등 더 굵직한 곳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절묘하게도 트로이에서 얇은 해협을 하나 건너면 그곳에 제1차 세계대전의 흔적이 있다. 갈리폴리 전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영국-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협상국과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주축으로 한 동맹국은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상태였고 당시 오스만 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독일과 매우 밀착했다. 만약 오스만 제국이 중립을 포기하고 동맹국 편에 서게 된다면 협상국인 러시아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막히게 된다. 이는 협상국간 협력 및 공조에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와 영국은 함대를 이끌고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가까운 차낙칼레, 갈리폴리 지역을 공략하고 해협을 장악하기로 했다. 그렇게 갈리폴리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영국 해군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해군 중심의 작전을 펼쳤고 오스만군의 준비와 규모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영프 해군은 강력한 포화를 쏟아부었지만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대규모의 기뢰밭을 만나며 그 이상 진입하지 못하며 실패하고 말았다. 성공을 위해서는 지상군이 필요하다는 걸 인식한 영국군은 대규모 지상군을 끌고 와 갈리폴리 반도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그러나 갈리폴리 전투는 25만여 명의 사상자만 내고 어떠한 실익도 얻지 못한 채 철수해야만 했다. 완벽한 실패였다. 갈리폴리 전투는 많은 걸 바꿔놓았다. 이 전투로 당시 식민지였던 ANZAC, 즉 호주와 뉴질랜드는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며 자치권을 요구하였고 오스만은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 무스타파 케말 대령이 부각되어 이후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으로 오르게 된다. 처칠은 해군장관에서 물러나야만 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떠오르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이 전투는 약점이자 아킬레스 건으로 따라다닌다. 밀덕이라면 안 갈 이유가 있을까? 당연히 가야지. 하루종일 트로이부터 갈리폴리 전투지까지 도는 일정을 계획하였다. 아침에 트로이 유적을 가고 차낙칼레 1915 대교를 건너 갈리폴리 반도 끝에 위치한 헬라스 곶부터 천천히 북상하는 흐름이다. 오늘은 11월 10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기일이다. 이날은 오전 9시에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5분간 그를 향해 기도하는 날이며 많은 이들이 아타튀르크의 흔적을 따라간다. 이미 며칠 전 앙카라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를 찾고 있었고 수학여행마냥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그가 영웅이 된 갈리폴리에도 사람들이 적잖이 있을 걸 예상하고 움직여야 했고 다소 서둘러 움직였다. 9시가 되자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아타튀르크를 향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거리에도 차가 별로 없었고 급한 일이 아니면 그를 위한 시간을 기꺼이 내줬다. 트로이 유적은 박물관과 유적지로 이루어져 있다. 튀르키예의 유적지와 박물관 대부분이 그렇듯이 외국인들에게는 살벌하게 비싼 요금을 적용하다보니 값어치를 얼마나 할지는 개인의 관심도에 따라 달라진다. 트로이 유적 방문시 가이드를 낀 투어를 대부분 권장하는 것도 그 때문. 근본적으로 신화적 안개를 끼고 봐야지만 가치가 느껴지는 돌무더기가 많다보니 구체적인 설명이나 초점이 없이 이들을 이해하기란 너무 어렵다. 그래서 과감하게 박물관은 빼고 유적지로 향했다. 튀르키예에서 유적지에 대한 만족도가 박물관에 대한 만족도보다 항상 높았었다. 아침부터 도착했기에 유적지는 한산했다.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입장이 중지된 트로이 목마 안으로 들어가며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볼썽 사나울 따름이었다. 목마 자체도 차낙칼레 시내에 위치한 영화 <트로이>의 소품보다 인상적이지 않으니 바로 지나쳐도 됐다. '사물은 시간과 함께 스러진다. 시간의 힘 아래 만물이 늙어가고 잊혀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모든 것은 시간에 따라 생성되고 그만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고 나면 소멸한다. 그리고 그 자리는 새롭게 생성되고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존재들로 채워진다. 이 표현은 어디에나 사용할 수 있다. 오지만디아스 시에서도,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에서도, 이스터 섬이나 앙코르 와트 같은 유적에서도 쓸 수 있다. 트로이도 마찬가지다. 트로이 유적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느껴볼 수 있다. 트로이의 유적들은 기원전 청동기 시기부터 로마 시기까지 아홉겹에 이르는 유적들이 층층이 세워져 있다. 유적에 들어갔을 때 바로 보이는 거대한 돌들은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로마와 그리스의 유적이며 조금 더 유적 안쪽으로, 조금 더 가장자리 쪽으로 가면 청동기 시기, 현지 토착민들의 시기에 만들어진 유적들을 볼 수 있다. 유적지들을 볼 때는 기억력과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돌무더기들에 가깝고 여러 시대에 걸친 건축이 계속되다보니 유적들이 섞여서 인식되기도 한다. 심지어 하인리히 슐리만이 유적지를 발굴할 때 무작정 파헤치고 지층 번호 순서까지도 바꿔놓은 바람에 더더욱 머리가 아프다. 또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트로이 유적은 제6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그 시기까지만 해도 지금은 내륙인 트로이 유적 바로 앞까지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 항구가 있었고 저곳에 요새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눈앞에 보이는 유적 몇 개를 머리에서 지워야지만 트로이 유적이 보인다. 그렇게 해서 보고 있노라면 트로이 유적이 참 한산하구나 생각이 들게 된다. 기본적으로 유적 자체가 크지 않고 머리 속에서 층층이 쌓인 면을 소거해보면 정작 보이는 건 생각보다 크지 않은 유적이다. 트로이 목마가 실제로 있었다 쳐도 이렇게 좁아서야 갖고 들어올 장소나 있었을까 싶은 느낌이다. 물론 유적은 아직 발굴 중이기에 이 아래로 더 파고 들어가면 더 넓은 면적의 유적이 보일 수도 있지만 당장 보이는 건 크지 않다. 하루 전에 보고 온 앙카라 서부 고르디온 유적과 비교해도 사이즈가 작다. 그러나 사이즈가 작다는 생각을 덮을 만큼 트로이 유적의 밀도가 높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든다. 말했던 것처럼 이 유적들은 시간의 힘 아래 늙어가고 잊혀지고 스러진 곳들 위로 채워지고, 또 채워지고, 또 채워졌던 유적이다. 유적은 <일리아스>가 말하는 '그' 트로이 전쟁인지는 불확실해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홉 번의 시대를 거치면서 그 외의 전쟁, 충돌도 분명 있었을 수밖에 없다. 수천 년에 걸쳐 이곳에 도시가 건설되고 유지되었다는 건 그야말로 전략적 요충지라는 뜻이다. 한국사로 따지면 암사동 유적지 위에 백제,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심지어는 일본제국과 북한까지도 도시를 건설한 셈이다. 하나를 파고 들어갈 때마다 단청이 달라지고 풍경이 달라진다. 그만큼 다른 세상들이 이 곳에서 중첩되고 교차하고 있다.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뛰어넘어서 말이다. 그렇게 층층이 쌓이며 교차했던 곳 사이에 신화가 숨어있다. 구전 속에, 아주 작은 돌조각 속에 숨어있는 전쟁은 신화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기억되어 온 최고의 전쟁으로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스러진 시간 속에서 그 장엄한 이야기만큼은 남아있던 것이다. 그리고 아홉 겹에 이르는 돌무더기 사이 속에서 찾아낸 유적들은 장엄한 이야기에 묻혀있던 다른 흔적들까지 찾아내는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너무나도 신기하지 않은가. 한 겹의 이야기가 신화로 남았다면 나머지 여덟 겹에는 또 어떤 신화가 남아있을지 말이다. 그렇게 교차하며 축적되어 있는 트로이 유적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바다를 보게 된다. 한때는 더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을 바다. 그리스 연합군이 배를 타고 왔을 바다. 그 바다 너머에 하얀색의 무언가가 있다. 등대와 거대한 기념비다. 헬라스 곶의 기억을 담고 있는 기념비는 하얀색으로 빛나고 있다. 위대한 전쟁사의 기둥 존 키건은 <제1차 세계대전사>를 쓰며 갈리폴리 전투를 두고 이런 표현을 썼다. '갈리폴리의 모든 것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갈리폴리에서 가장 애절한 기념물은 헬레스 곶의 튀어나온 부분에 서 있는 투명한 흰 대리석 기둥일 것이다. 이 기둥은 투명한 4월 아침에 바다 건너편 트로이 성벽에서 어렴풋이 보인다. 트로이와 갈리폴리는 고전 교육을 받은 지중해원정군의 많은 자원병 장교들이 인식하고 기록했듯이 독립적이지만 서로 연관된 2개의 서사적 사건을 만들었다.' 존 키건은 갈리폴리 전투를 트로이 전투와 연결짓는다. 둘은 바다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지만 이미 트로이는 수천 년의 역사를 바로 위 아래로 축적하고 있다. 고작 바다 하나를 건너 보이는 그 해변을 축적하지 못할 리 없다. '호메로스였다면 어느 서사적 사건을 더 영웅적이라 생각했을까? 말하기 어렵다.' 나를 갈리폴리로 이끈 문장이다. 트로이 전쟁만큼이나 애절하고 신화적인 전쟁이 그 바로 건너편에서 있었다는 뜻이라면 그곳을 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어느 서사적 사건이 더 영웅적일지 확인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간다. 갈리폴리로 넘어가는 방법은 차낙칼레에서 카 페리를 타거나 차낙칼레 1915 대교를 건너는 방법이 있다. 차낙칼레 1915 대교로 넘어가려면 차낙칼레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세계 최장의 현수교를 건너볼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차를 끌고 차낙칼레 1915 대교로 향했다. 이들의 속도 표지판은 참으로 알아보기 힘들어서 110km와 30km가 500미터도 안되는 간격으로 공존하는 것만 같다. 속도를 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다보니 차낙칼레 1915 대교까지 올라갔다. 튀르키예의 날씨도 차속도 표지판만큼 일관성이 없어서 마른 하늘에 빗방울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니 새로운 땅이 펼쳐졌다. 수많은 박물관과 묘지, 유적지들로 가득한 땅. 그 모두를 지나쳐 바로 가장 남쪽의 헬레스 곶으로 내려갔다. 가랑비와 햇살이 뒤섞이고 따스함과 쌀쌀함이,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가 공존하는 길의 가장 남쪽까지 내려가면 농경지 곳곳에 길게 자라있는 관목들이 있다. 프랑스 보카주를 보는 듯한 그림 사이로 커다란 기념비가 보인다. 헬레스 기념비. 갈리폴리 반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헬레스 곶은 이곳에서 죽은 수많은 영국군 장병들을 위한 기념비다. 거대한 기념비는 2만여 명에 이르는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아니, 정확히는 전사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이들의 이름이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묘비다. 이곳 갈리폴리에는 수없이 많은 무덤이 있다. 바로 헬레스 기념비로 오기 전 영국군 제29사단의 랜커셔 퓨질리언 연대의 묘지가 있다. 운이 좋게 수습한 이들은 그들처럼 그들만의 묘비를 가질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한 이들은 이곳 헬레스 기념비에 새겨진다. 사실 랜커셔 퓨질리언 연대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거의 모든 곳들에는 제대로 주인이 있는지 모호한 비석들이 많이 있다. 헬레스 기념비는 그들을 받아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삶과 죽음이 교차했다. 당장 사진을 찍던 순간, 맹금류가 작은 새를 잡기 위해 머리 왼쪽을 아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맹금류는 새를 낚아채 기념비 바로 뒤에 떨구는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강하게 바람이 불고 있었기에 다시 날아올라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떨어진 작은 새는 죽지 않았지만 다시 날아가지도 못하고 어중간한 상태로 바닥에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100여 년 전, 수천 년 전 여러가지의 변형된 모습으로 변주되며 나타났을 것이다. 그 교차점 바로 옆에 오스만 제국의 요새가 있다. 에르툴루 요새는 다르다넬스 해전 때 활약하고, 파괴되고, 최전선에 있던 요새다. 헬레스 곶 바로 옆의 에르툴루 요새에는 이 요새에서 생명을 다한 장병들의 묘소와 그 앞의 참호가 있다. 요새의 야포는 아주 거대하면서도 다소 어중간한 모습으로 덩그러니 놓여있다. 요새 내부도 선전 자료들과 귀를 피곤하게 하는 오스만의 음악이 틀어져 있다. 이곳 어디를 가더라도 질리도록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들. 하지만 그 삐딱하게 방치되어 있는 요새 바로 옆으로 헬레스 기념비가 보이기에 기묘한 그림이 연출된다. 승자의 요새는 덩그러니 놓여있고 패자는 어디서든 바라볼 수 있는 그 거대한 기념비를 만들어놓았다. 특이한 일이다. 트로이 유적지에 트로이 목마가 세워져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가장 기념비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전쟁이니까. 그 폐허 앞에 목마를 세워놓을 수 있고 사람들의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는 목마가 얼마나 사실적이냐, 목마가 실존했느냐와 별개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갈리폴리에서는 그 반대인 것만 같다. 이곳은 그때도, 지금도 오스만과 그 후예들의 땅인데 그들을 위한 기념비는 어디에 있을까? 요새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헬레스 기념비보다 수십 배는 더 거대한 기념비가 보인다. 네 개의 기둥이 지탱하며 사방으로 뚫려있는 기념비는 멀리서도 볼 수 있게 이 갈리폴리의 해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차낙칼레 순교자 기념비. 오스만과 그 후예들을 위한 기념비는 훨씬 크고 거대하고 눈에 도드라지는 모습으로 해협을 내려다보고 있다. 오늘은 아타튀르크의 기일. 수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차낙칼레 순교자 기념비를 찾았다. 헬레스 기념비는 나 혼자만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디를 가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거대한 기념비만큼이나 거대한 동상들과 레이리프들이 곳곳에서 기념비와 추모공원을 꾸미고 있고 정돈되어 있는 비석들과 그들의 붉은 월성기는 초록의 신록으로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차낙칼레 순교자 기념비 앞까지 가면 그 거대한 모습에 압도당한다. 패자들을 위한 헬레스 기념비가 차분하게 실종된 전몰자들을 기린다면 승자를 위한 차낙칼레 순교자 기념비는 그들의 승리를 화려하고 강렬하게 기리고 있다. 기념비의 네 면에는 그들의 전투로 가득하고 가운데로 들어가면 천장에 거대한 월성기의 모자이크가 있다. 국기 아래 잠든다는 의미일까. 그들의 국기는 겉으로 봤을 때 보이지 않지만 가장 높은 곳에서 지탱하고 있던 셈이다. 이들의 순교자 기념비는 프랑스의 개선문, 미국의 해병대 전몰 장병 기념비만큼이나 강렬한 기념비다. 순교자 기념비는 아주 거대하기에 그 위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헬레스 기념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승자의 기념비기에 패자의 기념비를 충분히 내려다 볼 수 있다. 허나 기념비를 올라갈 수는 없기에 아래에서만 해협을 볼 수 있고 헬레스 기념비는 언덕과 수목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날씨가 청명하거나 수목이 적다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눈에 들어오는 건 그들의 해안 절벽이다. 오스만의 요새에서도 내려다 볼 수 있었던 절벽은 바로 옆에서 보더라도 아주 각도가 높아보였다. 이곳에서 스러져 간 이들의 기념비를 보았다면 그들이 어디서 스러져 갔는지를 봐야 한다. 협상국은 다섯 개의 해변에 상륙했다. S, V, W, X, Y 해변. 물론 이보다 북부에 앤잭 해변, 수블라 만 등에도 병력들이 상륙했지만 헬레스 곶 바로 근처에서는 다섯 해변으로 상륙을 시도했고 헬레스 곶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V, W 해변이었다. 두 기념비를 방문하기 전에 지나쳤던 랜커셔 퓨질리언 연대가 상륙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W 해변이 있다. 랜커셔 해변으로도 불리는 W 해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W 해변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 뿐이다. 바닥은 흙탕물로 가득하다. 렌트카가 4륜 구동차가 아니라 평범한 현대 자동차였다보니 이런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위한 차는 아니었다. 차가 자주 덜컹거리고 크게 흔들렸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견인차가 오기도 힘들고 오더라도 견인해서 가기 아주 힘든 1차선 도로를 움직이고 있으면 모든 것이 긴장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위험한 곳을 가는 것이었다. 물론 이 길을 정확히 반대로 올라와야 했던 협상국 군인들만은 못할 것이다. W 해변에 도착하자 모든 환경이 적대적이라는 게 느껴진다. 해변은 강한 파도가 몰아치고 있고 바람 역시 날카롭다. 내리자마자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파도의 속도가 빠르다보니 배를 편안하게 정박시키기는 힘들어 보였다. 해변 자체도 넓지가 않고 양쪽으로 꽤 높은 절벽이 있다. 그곳에는 벙커의 흔적이 있는데 만약 오스만군이 그곳에 벙커를 건설해놓았다면 쉽게 뚫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면적이 넓거나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할테다. 하지만 해변은 비좁을 뿐 아니라 배를 정박시키기도 어려워 오스만의 공격에 집중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흙을 만져보면 이곳의 위험성은 더더욱 보각된다. 흙을 만져보면 쉽게 부스러진다. 이곳의 흙은 황갈색의 토양으로 겉으로 보기엔 단단해 보이지만 균열이 보이고 물에 쉽게 무너지기 쉽다. 경사면이 불안정하다보니 위로 기어 올라가기도 어렵다. 잘 연상시키기 어렵다면 티라미수 케이크와 같다. 겹겹이 단단하게 쌓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연약하기 그지없다. 이 티라미수 같은 땅에 내린 병력들은 포화를 벗어나려고 손을 뻗어도 손보다 절벽이 먼저 무너져내리며 다시 해변으로 굴러떨어뜨렸을 것이다. 이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X 해변은 더 나쁘다. W 해변은 그래도 차를 타고 내려가서 볼 수 있는 충분한 여유 공간이 있지만 X 해변은 내려가는 길도 훨씬 더 가파르고 해변이 훨씬 더 비좁다. 나는 X 해변으로도 내려가보려 했지만 내려가기 너무 어려워보이는 난이도 때문에 포기하였다. 내려서 사진을 찍을 때도 Y 해변을 능가하는 바람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오며 머리를 몰아쳤다. 해변이 좁고 절벽이 높다보니 오스만군의 포격도 거의 미치지 않아 X 해변은 초기 피해가 적었을 수밖에 없지만 대신 올라가는 순간부터는 개활지에 노출되는 것이나 다름없어 피해가 컸을 수밖에 없다. W 해변과 X 해변은 근본적으로 분위기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Y 해변은 항아리처럼 생겨서 올라가는 시도 자체가 커다란 피해를 낳을 수밖에 없고 X 해변은 그야말로 절벽 뿐이라 올라가는 동안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아니, 따지고보면 커다란 피해를 낳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해변에는 대규모 병력을 내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형이다. 작정하고 두 해변에 병력을 꾸역꾸역 내려놓더라도 많아도 2개 연대를 내릴까 말까 하다. 그리고 2개 연대를 내려놓는다 쳐도 이곳은 뷔페와 같다. 만약 현대적인 박격포로 무장한 1개 포병 중대만 있어도 2개 연대를 전부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해변이라고 크게 다른 것도 없다. W 해변 우측, 오늘날의 순교자 기념비와 가까운 S 해변과 V 해변은 두 해변보다는 조금 더 넓지만 시가지와 가깝거나 오스만 해군 활동 범위와 가깝다보니 그만큼 더 공격에 노출되기 쉬운 구조이고 Y 해변은 X 해변과 환경이 거의 유사하다. 다섯 개의 해변이 모두 다 좋은 조건이었다면 헬레스 곶 끝부터 천천히 치고 올라가는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상륙작전이라는 개념이 지금과 달랐던 시기였던 만큼 그만큼 무지했고 무지가 낳은 결과인 것이다. 협상국은 다섯 해변에서 삽질, 아니 삽질할 좌판도 열지 못하고 젊은이들만 낭비해야 했고 그들은 더 넓은 상륙 지점, 배후를 타격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했다. 이 알파벳 해변들보다 더 북쪽, 차를 타고 지나쳐왔던 해변에 앤잭이 상륙했다. 앤잭 해변을 향해 운전대를 돌렸다. 앤잭 해변으로 향하는 길은 평탄하다. 이곳이 노르망디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며 정말로 이곳은 프랑스와 비슷하다. 관목들은 보카주를 연상시키고 목가적인 풍경은 만약 먼 훗날 노르망디에 상륙한 영국 노병들이 있다면 이와 닮았다 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곳의 토양은 상당히 무르고 생각보다 해변과의 고저차가 있다. 무엇보다도 내륙과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더 높아진다. 앤잭 해변은 넓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날씨도 헬레스 곶보다는 덜 변덕스럽다. 도착하자마자 차를 반기는 건 오스만의 벙커였다. 도로 바로 옆으로 돌출되어 있는 벙커는 갈리폴리 전투 때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앤잭 해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마치 암시하는 것만 같다. 앤잭 해변에 들어가자마자 앤잭 전사자를 위한 묘지가 나타난다. 묘지는 개선 작업이 진행 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지만 헬레스 기념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서양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들어갈 수 없는 묘지를 바깥에서 바라보며 우수에 잠긴 표정을 하고 있다. 바로 옆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국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싸워온 자신의 조부가 잠든 곳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겨있을테니까. 수천 킬로미터를 넘어, 두 개의 대양을 넘어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곳에 내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장병들은 그리스 연합군과 조금 닮았다. 사령관들, 왕들은 목적을 알고 있었다. 헬레네를 되찾겠다는 것. 그러나 장병들 대부분은 헬레네의 얼굴은커녕 이름도 들어본 적 없을 것이다. 트로이라는 지명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의 명령을 따라 아나톨리아 반도의 이름 모르는 곳에 내려 수많은 적들과 오랜 시간을 싸웠어야 한다. 그래도 앤잭의 장병들에게 위안이 있다면 그들은 트로이의 바로 건너편이라는 건 알고 싸웠다는 것이고 불행인 건 트로이보다 앤잭 해변이 더욱 지옥 같았다는 거다. 앤잭 해변에 차를 세워놓고 왼쪽을 보면 넓은 해변이 보인다. 상륙함을 접안하기 좋고 많은 병력들이 집결하기 좋은 해변. 해변을 향해 걸어가면 선선한 바람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헬레스 곶에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 그 편안함을 안고 뒤로 돌아본다. 해변에 내린 앤잭 병사들이 처음 봤을 풍경. 상당히 날카롭게 솓아있는 흙더미는 그들이 왜 디거(Digger)라고 불렸는지 알 수 있다. 그 위로 오스만군 57연대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있었다. 앤잭 해변 바로 앞으로 펼쳐진 흙더미들은 물을 많이 머금고 있고 쉽게 무너지는게 헬레스 곶을 닮았다. 거기에 더해 빼곡한 수목들이 흙더미 위로 자라있다. 그래서 헬레스 곶보다는 덜 무너지겠지만 대신 참호를 만들어놓기 참 편하다. 흙이 무디면 포격이 먹히기도 힘들고 수목이 많으면 정확한 위치를 지정해 공격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높이 솓아있기에 그들은 뒷산 오르듯 그곳을 오를 수 없었다. 차를 몰고 흙더미 위로 향했다. 앤잭 해변을 알리던 요새를 지나쳐 비포장도로로 향했다. 하얀색 렌트카가 완전히 갈색으로 바뀔 정도로 험한 도로였다. 10분 가까이 올라가는 동안 바짝 정신을 차리고 운전해야 했다. W 해변보다도 난이도가 높게 느껴졌다. W 해변은 길이 좁다보니 어려웠다면 이곳은 언덕을 올라가기에 차가 한 쪽으로 미묘하게 기울어진 채 올라가야 했다. 그래도 타지키스탄보다는 나았다. 비포장도로를 올라가자 양갈래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오스만군 57연대의 참호와 기념비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론 파인 묘지가 나온다. 앤잭과 오스만군이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곳 가까이에 만들어진 앤잭 묘지. 외로운 소나무 하나가 묘지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앤잭 해변에서 들리지 못했던 묘지를 이곳에서 들리기로 했다. 론 파인 묘지는 정말로 묘지 한가운데 소나무가 있다. 지금 묘지에 있는 소나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져온 소나무지만, 1세기 전에도 이곳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그 주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참호전으로 유명한 제1차 세계대전이지만 이곳에서의 전투는 더더욱 격렬해서 수많은 훈장이 쏟아지는 전투였다. 앤잭 해변에서 죽은 이들도 수없이 많지만 그 앤잭 해변만큼 유명한 곳이 바로 이 론 파인이다. 이곳의 분위기는 헬레스 기념비와 그 주변의 협상국 묘지들을 섞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거대한 소나무 주위로 수많은 비석들이 있고 비석들 뒤로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는 안이 텅 비어있고 몇 명의 사진이 있다. 아마도 최근에 이곳을 방문한 가족 혹은 후손들이 남겨두고 간 것일테다. 론 파인 묘지에서 차를 몰고 조금 더 가면 57연대 묘지가 나온다. 오스만 육군 19보병사단 57연대. 무스타파 케말과 후세인 아브니 베이가 이끄는 이들은 971고지로 불리는 이곳에서 앤잭에게 지옥을 선사하며 영웅이 되었다. 그들은 불멸의 존재와 같고 그들을 위한 묘역은 수많은 이들이 찾았다. 사실 묘지만으로 따지면 크지 않다. 물론 협상국 묘지들과 비슷하게 여러 개의 묘역으로 나뉘어있기 때문이지만 그들의 순교자 묘지는 검소하다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57연대 묘지 바로 길 건너로는 수많은 참호들의 흔적이 있다. Dead Man's Ridge. 죽은 자의 능선. 그 능선은 오늘날 무수한 수목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 수목들로도 채울 수 없는 참호의 흔적과 파괴된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57연대 묘지가 검소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여전히 이 죽은 자의 능선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위해 거대한 묘지를 만들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57연대는 이 전쟁 이후 영구결번과 같은 존재다. 그들은 이 아래 남아있고 이곳 전체가 그들의 묘지기에 따로 거대한 묘비를 만들지 않은 걸지 모른다. 조금만 더 가면 57연대의 또다른 묘지와 아타튀르크가 전선을 시찰하며 해변을 내려다보는 동상이 있다. 수많은 튀르키예인들이 그곳에 차를 세운 뒤 아타튀르크 옆에서 같이 해변을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한다. 오늘은 아타튀르크의 기일이다. 아타튀르크의 영묘는 앙카라에 있지만, 오늘만큼은 이곳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죽으라는 명령 하에 싸우다 죽은 그들의 장병들을 이끌고 협상국 군인들을 내려다보는 것 아닐까. 동상에서 조금 더 가면 츄눅 베이어 기념비가 나온다. 거대한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꼿꼿한 자세로 서서 해변을 바라보고 있고 그의 옆으로 뉴질랜드의 전몰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아타튀르크의 여러 훈시가 거대한 돌에 새겨져 있고 오늘날 이곳을 찾아온 이들을 위해 재현해놓은 참호들을 볼 수 있다. 츄눅 베이어 기념비까지 왔다면 갈리폴리에서 가장 중요한 곳들은 거의 다 본 셈이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역사 박물관, 차낙칼레 에픽 프로모션 박물관 등 거대한 박물관들이 남아있고 이곳에 있는 묘지만 해도 100개는 될 것이다. 아직 보지 못한 해변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전적지나 묘역은 방문하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항구로 향했다. 돌아가는 시간을 맞추려면 항구로 가서 짧은 구간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츄눅 베이어 기념비에서 항구로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길가를 따라 참호를 만들고 있었다. 관목을 뽑아내고, 땅을 파고 있었고 본격적인 중장비를 동원해 커다란 돌을 뽑아내고 있었다. 뭔가 의아했다. 알고보니 이는 산불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곳을 방문하기 전, 갈리폴리에서 큰 산불이 있었고 넓은 면적이 불탔던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론 파인 묘지에서 57연대 묘지로 가는 길에 나무들이 불탄 흔적들이 있었고 츄눅 베이어 기념비에서도 해변을 내려다볼 때 이상하게 까맣고 휑한 곳을 볼 수 있었다. 상당히 큰 산불이었고 자칫하면 중요한 묘역들과 기념비, 동상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항구에 도착하자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강력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배가 많이 흔들렸고 사람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가 번개를 피했다. 번개가 바다 한가운데 내리친다면 배에 내리칠 확률이 높았다. 바로 옆차 운전자는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건 오랜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기예보에서도 이렇게 강한 비가 내린다는 얘기는 없었다고 한다. 항구에서 렌트카를 반납하러 가는 동안 간판이 끊어져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산불, 폭풍. 강력한 불과 물은 바다와 산을 뒤엎을 정도로 강력한 자연재해다. 만약 산불이 더 컸다면 내가 만났던 곳들은 소실되었을 수 있고 폭풍이 이처럼 강하게 몰아치는 곳이라면 묘역이나 전적지들이 손상될 수 있다.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갈리폴리 전투는 현대 튀르키예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전투였고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거대한 전적지이다. 아타튀르크가 이곳에서 영웅이 되었고 여전히 사랑받고 있으니 이곳은 오랫동안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영원할 수 있을까? 이곳도 트로이처럼 되지 않을까. "무의미하게, 열의없이, 영광없이 죽게 하지 마소서." "후세에 전해질 위대한 일을 이루고 죽게 하소서." <일리아스>에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 결투를 벌이기 전 이와 같이 말했다. 헥토르는 후세에 전해질 위대한 일을 이루고 죽었다. 그러나 사실 트로이 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 그의 위대한 일은 그저 신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무의미하게, 열의없이, 영광없이 죽지 않았지만 그가 남겨놓은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 아래 잊혀지고 그 위로 새로운 것이 쌓이며 사라졌다. 트로이도 수많은 시간과 퇴적 속에 사라져갔다. 훨씬 가까운 곳까지 왔던 바다는 저 멀리 떠나갔고 트로이의 유적은 겹겹히 쌓여 신화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 가치를 알아보기 힘들다. 아니, 분명 <일리아스>에서 다루는 전쟁의 모티브가 되는 전쟁은 일어났지만 이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바뀌어 신화가 되어있다. 갈리폴리라고 다를까. 튀르키예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아타튀르크의 위상이 변할 수 있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멀고도 먼 거리와 점차 쌓여가는 시간 속에 이곳을 찾는 발길이 줄어들 수 있다. 영국, 프랑스도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설사 이들의 관심이 여전하더라도 거대한 기후변화 속에 일어난 산불이나 강력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이곳을 대파할 수 있다. 수십 년 뒤의 풍경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차낙칼레 순교자 기념비도, 외로이 서 있는 론 파인의 소나무도, 해변을 내려다보는 아타튀르크의 동상도 시간의 흐름 속에 조금씩 변색되고 평가가 반전되고 기억에서 잊혀져갈 수 있다. 그러다보면 이곳에서 지구 반대편의 청년들이 땅을 팠다는 사실도, 이곳에서 등장한 영웅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도 조금씩 달라지고 각색되면서 신화처럼 아무도 현실에서 있었던 일이 아닌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비약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 당장 바로 바다 건너의 트로이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이 가장 기억되어야 할 것인가? 그건 트로이에서, 존 키건의 물음에서 답을 찾아낼 수 있다. 다름아닌 '서사'다. 트로이 유적의 아홉 층이나 되는 수천 년의 시간 속에서 오로지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건 트로이 전쟁의 시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고 신화로 변질되기도 하고 다른 지질과 문명이 위에 자리잡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진 건 그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서사 때문이다. 신들 사이의 갈등, 인간이 가장 강하게 느끼는 유혹들 속에서의 선택, 미녀를 놓고 벌이는 쟁탈전, 십여 년의 전쟁과 영웅들의 싸움, 정말 기발한 작전과 운명적인 몰락, 그리고 돌아가는 여정 속 수많은 고통과 끝내 되찾은 행복.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가진 서사는 그 어느 전쟁보다도 매혹적이다. 갈리폴리 전투도 그러하다. 이들의 서사는 제1차 세계대전의 다른 전투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흐름을 가지고 있고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거나 지역을 지배하는 국가들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솜므와 베르됭으로 대표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다른 전장은 '지옥도', '불합리함', '인간 윤리의 붕괴', '벨 에포크의 끝' 등의 이미지라면 이곳은 그와는 조금 다른 인상을 가지고 있고 승자도, 패자도, 이곳에 자신들의 묘비와 기념비를 세워놓고 있다. 이 서사는 제국의 해군장관이 벌인 거대한 오판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젊은이들이 하나의 나무를 두고, 하나의 능선을 두고 그들의 싸움을 벌이며 그 끝에서는 자유로운 공화국들이 등장한다. '사물은 시간과 함께 스러진다. 시간의 힘 아래 만물이 늙어가고 잊혀진다.' 그렇다. 결국 갈리폴리의 흔적들은 조금씩 불타고, 소금기에 젖고, 시간의 흐름 속에 잊혀지며 스러질 것이다. 아무리 거대한 기념비라 하더라도. 아무리 많은 장병들이 묻혀있는 묘지라도.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가 내가 그러했듯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서사를 유지한다면 조금씩 형태가 달라지더라도, 인물의 이름이 달라지더라도, 신이 등장하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 갈리폴리 언저리의 해변에 세 번째 서사를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
작성자 : kcvn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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