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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오일머니로 만들어진 파키스탄의 핵무기
이스라엘의 카타르 타격 소식에 이어, 또 한번 중동을 달군 소식이 하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파키스탄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파키스탄은 필요시 핵억지력을 사우디에 제공하겠다. 즉, 핵우산을 제공하겠다, 는 선언이 그것이다.일자무식한 사람들은 파키스탄 외노자의 국뽕 강의라도 들은건지 사우디가 파키스탄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고 지껄인다. 들은게 좀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도를 넘었기에 밀착한 것이라고 한다.그러나 기실, 사우디-파키스탄의 핵협력은 그런 것들보다 훨씬 오래된 연원을 지니고 있다.반세기 전으로 돌아가보자.혹, 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보았는가?보았다면, 아마도 이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영화에서는 여기에 굳이 부토를 더러 무지렁이 독재자라고 부르는 오류를 범했다)이 장면. 파키스탄의 부토가 풀을 뜯어먹고 살더라도 핵은 가져야겠다, 고 했노라고 언급하는 장면.이 발언은 부토가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직후 1965년에 실제로 한 말이다. “If India builds the bomb, we will eat grass or leaves, even go hungry, but we will get one of our own. We have no alternative.”전문을 옮겨오자면 이렇다.'인도가 핵을 가지면, 굶더라도 잔디와 풀잎 뜯어먹으면서 우리도 핵을 가지겠다. 대안은 없다.'이런 극단적인 발언이 왜 나왔는가.당대 파키스탄의 상황을 복기해보자.1차 인-파 전쟁에서는 사실상 패배. 2차 인-파 전쟁에서는 진땀 무승부. 파키스탄 내부에서야 2차 인파전쟁은 사실상 파키스탄의 승리라고 떠들어댔으나, 기실 종전 시점 전쟁의 방향추 자체는 인도쪽으로 기울어 있는 상태였다.뭐, 자동차 문짝 깡깡대는 큰형님이야 국뽕 선전 믿고 사시겠지만, 지도부는 두번 다 판정패격 결과를 받아든 것을 알고 있었다.전적이 아닌 전력을 보자면...(북한·인도·파키스탄의 핵무장 정책 동인을 통해 본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 가능성, 장석준 저 중)깡체급 비교로 가면 더욱 절망적이라, 인도가 물경 5억에 달할 때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의 인구를 합쳐서야 1억을 겨우 넘겼다.파키스탄은 인도에게 이미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 인도가 핵까지 가진다고? 이는 인도 아대륙의 균형추가 완전히 힌두교측으로 넘어가는 것이라, 파키스탄으로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래도 당장은 인도가 핵이 없으니, 물 밑에서 기반만 다지고 있었지만... 파키스탄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난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1974년 5월 18일.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파키스탄을 굴복시키고 방글라데시를 떨어트린지 3년 뒤, 석가모니가 태어난지 2537년 뒤. 미국의 제재와 방해를 우회하는데 성공한 인도가 '미소 짓는 부처'라는 퍽 장엄한 이름의 핵실험을 성공시킨다.인디라 간디 본인은 이것이 평화적 목적의 실험이라고 천명했으며, 인도는 이후 24년간 핵무기에 대해 NCND를 유지한다.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도의 공식적인 입장. 실질적으로, 인도는 그냥 핵 보유국인 것이다.파키스탄 입장에서 보자면 한번 더 졌고, 국가 체급은 반토막이 났는데, 여기에 최악의 숙적이 핵까지 가졌다, 라.이제와서야 미소 짓는 부처에서 터진 핵은 좀 조악했네, 뭐네 하고 있지만, 당대의 파키스탄은 그야말로 뒤집어 질 수 밖에 없었다.그렇잖아도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패배 직후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군사화시키고 있던 부토는 즉각 프로젝트 706, 파키스탄의 핵무장 프로그램을 가동한다.마는. 나라에 돈이 없었다. 이 당시 파키스탄의 1인당 gdp는 132달러 정도. 여전히 빈국 수준에서 놀던 한국의 4분의 1 정도요, 1350 달러 정도 하던 세계 평균 1인당 gdp의 십분지 일 밖에 되지 않았다.국민들이야 풀을 뜯어먹고 버틸 수 있다고 한들, 핵 프로그램은 풀을 뜯어먹고 살 수 없다.그런고로, 돈이 필요했다. 부토는 'Islamic Bomb' - 즉 이슬람의 핵이라는 수사법 아래, 물주가 되어줄 이슬람 국가를 찾기 시작했다.[왜 번역을 핵으로 해놨냐고? 일단 의미도 일맥상통할뿐더러, 원래 써야하는 단어는 디시 알바 시발련들이 좆대로 검열하고 있어서]가장 먼저 연을 맺은건 리비아였다. 리비아는 여러모로 좋은 상대였다. 왕정을 무너트리고 세워진 신정권은 아랍사회주의의 충실한 지지자요, 반미주의자였다. 워싱턴의 깍쟁이들이 떠들어대는 확장 억제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은 부류였다. 오히려 리비아 본인들부터가 핵개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1968년에 NPT에 서명하지 않았느냐고? 아, 그거야 왕정이 서명한거고.무엇보다, 리비아에는 돈이 있었다. 알다시피, 리비아는 석유가 펑펑 나지 않나.하여 두 나라의 실무자들은 미소 짓는 부처로부터 반년 전, 1973년 10월부터 회동을 가졌다.처음에는 일이 순탄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리비아는 석유 수출로 뽑아낸 수억 달러의 돈을 파키스탄에 관대히 전달했고,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니제르에서 뽑아낸 우라늄 정광을 파키스탄에 조달했다. 파키스탄은 리비아의 지원을 받아 핵 기술을 착착 고도화해내갔다.문제는 카다피가 상당히 괴팍한 인간이라는 것. 카다피는 물주라는 자신의 지위를 너무 과대평가했더랬다. 기술을 그냥 다 내놔라. 시설도 좀 내놔라 등. 파키스탄은 리비아의 요구를 '투자자의 정당한 요구'가 아닌 '강짜 부리는 미친개'의 짖는 소리로 듣기 시작했다. 그 와중 파키스탄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한다. 사회주의자이자 세속주의자요, 파키스탄에서 마지막으로 문민통제를 실현한 부토는 끌려내려왔고, 그 자리는 지아-울-하크 장군이 대체한다. 지아울하크는 부토와 대체로 반대였다. 그는 반공주의자였으며, 이슬람주의자였으며, 훈타였다. 파키스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점만은 같았지만, 물주인 카다피에 대한 시각은 또 달랐다. 지아울하크에 있어 카다피는 사짜 이슬람 교도인 아랍 사회주의자요, 변덕스러운 미치광이였다.카다피도 지아울하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카다피는 자신의 친구인 부토를 구하려고 노력을 했고, 심지어는 제 전용기를 파키스탄에 보내겠다는 의사도 표했지만, 지아울하크는 부토를 처형하는 것으로 응답했으니.두 나라의 관계는 벌어지기 시작한다. 리비아의 과학자들은 파키스탄에서 추방되었고, 기술 청사진이 리비아로 전달되는 일도 없었다. 사달이 난 후에도 카다피는 돈도 주고 원료도 줬으니 농축 우라늄 공장을 지어달라고 떼를 써댔지만, 지아울하크는 무시했다.아니, 그런데 어쨌건 핵개발은 해야겠다면서, 돈도 없는 양반들이 무슨 깡으로 물주를 걷어차냐고?그야, 다른 물주가 있었으니까.바로 오늘의 본론, 사우디아라비아다.1970년대의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 속에 처해있었다. 물론 체급과 전적면에서 압도적인 핵보유국과 맞대고 사는 파키스탄만은 못한 것이나. 코 앞에 이스라엘이 있잖은가. 두 성지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와하비즘 정권에게 있어, 탐탁찮지만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아랍 사회주의 국가들을 연달아 때려눕히는 시오니즘 식민 국가 이스라엘은 껄끄러운 존재였다. 욤 키푸르 전쟁 중, 이집트-시리아 연합군이 이스라엘 영내로 진입하기 직전 골다 메이어가 핵무기 조립을 명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부터는 더더욱 껄끄러워졌다.이 사실을 잘 알던 부토는 당시 사우디 국왕 파이잘을 만나 '이슬람의 핵' 구상에 동참해주기를 요청했더랬다. 그러자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이 필요할 경우 언제든 단기간에 왕국을 위한 안보 우산을 제공하겠다" 는 조건 하에 사우디는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시작한다.거기에, 1979년.팔레비 제정이 붕괴했으며, 그 자리는 꼴통 시아파 이단 분자요, 이슬람 공화주의 혁명을 전 이슬람 세계로 퍼트리려는 열망에 불타는 이슬람 신정이 대체한다.미국 외교사에 길이 남을 대참사였고, 굴욕이었다.허나 이것도 사우디 입장에서 보면 속 편한 소리다. 사우디는 저 미치광이 신정을 코 앞에 두고 있단 말이다. 이란 혁명에 자극받은 극단 이슬람주의자들이 사우디를 포함한 중동 전역에서 날뛰기 시작했으며...심지어는 메카 그랜드 모스크가 일련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점거당하기까지 했다. 미국으로의 석유 수출 금지, 모든 외국인 추방, 모든 텔레비전 폐기를 촉구한 전형적인 시대착오적 광신도들이었다.마는, 아주 중요한 건물을 점거한 미치광이들이었다. 게다가 이란의 호메이니는 이 사건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사주라는 라디오 성명을 발표, 중동 전역에서 반미 시위를 촉발한다.여러모로 국난의 시기. 사우디에게는 안전 보장 수단이 필요했다.곧, 핵이 필요했다.그런 사우디에게 있어 파키스탄은 아주 소중한 협력 파트너였고.사우디-파키스탄 핵밀착이 가속화되기 시작한다.Bank of Credit and Commerce International, 약자로 BCCI. 파키스탄의 은행가 아가 하산 아베디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금융가들이 각종 금융범죄를 저지르고도 중앙집중식 규제 심사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립한 이 은행을 타고, 사우디의 오일 머니가 파키스탄의 핵개발 자금으로 세탁되었다.또, 사우디에서 노동하는 파키스탄 노동자들의 임금이라는 명목으로도 사우디에서 파키스탄으로 돈이 흘러들어갔다.이뿐이랴.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의 F-16 40기 구매도 지원했다. 이를 통해 파키스탄은 전투기 구매에 써야 했을 수천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핵개발에 전용할 수 있었다.덕분에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진전될 수 있었다. 한편 사우디도 파키스탄에 마냥 맡기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탄두 미사일, 둥펑-3를 수입해왔다. 태부족한 인프라라 할지 언정, 일단 탄두만 있으면 버섯구름 한둘 정도는 피어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것이다.그리고 1998년 5월 중순.인도가 또 다시 핵 실험을 감행한다. 이제는 '평화적 목적으로' 같은 미사여구를 입에 담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명확한 핵보유국임을 천명했다.오래 전부터 편집증에 시달리던 파키스탄 군부는 미쳐 날뛰기 싲가했고, 파키스탄 정부는 군부로부터 핵실험을 해야한다는 강력한 압박을 받았다. 국민 여론 역시 이를 적극 지지, 핵 실험 단행 지지율이 70%에 달했다.그러나 문제는 미국. 미국은 꽤 오래전부터, 최소한 1979년부터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알아왔다. 방해하고 을러대기도 했지만, 어느정도 눈 감아준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핵실험? 이는 넘을 수 없는 레드라인이라, 미국은 강력한 제재안을 제시해보이며 파키스탄을 위협했다. 인도는 이미 제재를 맞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미국의 협박은 여론전에서도 효과를 발휘해, 파키스탄의 핵실험 지지율은 60%로 주저앉게 된다.허나 이 상황에서 파키스탄 정부에 확신을 불어넣어준 것이 중국,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였다. 특히 사우디는 제재를 버티게 하루 최대 5만 배럴에 달하는 석유를 지불 유예 조건으로 무기한 공급하겠다고 나섰다.하여, 1998년 5월 28일.파키스탄 최초의 핵실험, 차가이-I가 실행된다. 이틀 뒤인 5월 30일에는 두 번째인 차가이-II도 실행된다.그렇게, 사우디의 원호 하에 파키스탄은 공식적으로 핵을 가졌다. 이후에도 사우디-파키스탄 핵협력은 이어진다. 1999년 5월, 사우디 국방장관은 베나지르 부토 - 위에 언급된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이자 파키스탄 총리 - 조차 시찰하지 못한 파키스탄의 비밀 농축 시설을 시찰했다. 2008년 2월 경 미 상원 외교위에 올려진 보고서를 발췌해보자.'많은 학자들과 미외교관들이 "사우디아라비아가 핵무기에 관해 파키스탄과 어떤 종류의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양해를 맺고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보았듯이, 사우디는 테헤란과 텔아비브의 미치광이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그리고 파키스탄은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점유한 힌두 토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핵 협력을 해왔다.그런 면에서, 사우디-파키스탄 핵우산은 무슨 대단한 변곡점 같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반세기 넘게 준비해온 아주 오래된 서사가, 마침내 실현되는 쪽.요컨대 종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참고로 다 담지 못한 이야기들도 있다. 프랑스, 캐나다, 소련, 중국, 심지어 북한에, 당연하게도 미국까지. 다양한 나라들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사와 사우디의 핵준비-원호사에 등장한다. 분량상 생략했는데, 참고 문헌엔 이들도 포함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여럿 나오니 읽어보자.출처[링크는 알바삭 이슈로 댓글에]Pakistan and Saudi Arabia: The Nuclear Nexus, Kimberly Van Dyke, Steve A. Yetiv핵무기 보유 추진 국가들과 경제제재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박재석, 황태희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연구 - A. Q. Khan의 역할을 중심으로 -, 라윤도북한·인도·파키스탄의 핵무장 정책 동인을 통해 본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 가능성, 장석준
작성자 : Ashige_good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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