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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여행기 - 이스탄불, 아테네
가족 마일리지가 쌓여서 아시아나 합병도 되겠다 퇴사도 마침 했겠다 계획에 없었지만 무작정 한번 다녀왔다.기록하지 않아 사진첩에만 잠들까 여기에 글이나 좀 써본다.올해는 이스탄불로 첫 스타트를 끊었다.큰 이유는 없었고 90년대생들이라면 익숙한 보물찾기 시리즈에서 봤던 아야소피아(책에선 성소피아 대성당이라 칭했었더라는)가 막연히 보고싶어 그랬다.- 2월 22일비행기 옆자리엔 입냄새가 엄청난 아저씨가 앉았다. 유쾌한 아저씨였기에 고통을 무릅쓰고 시간도 보낼 겸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배낭 하나에 계획도 없이 여행하는 내 이야기가 좋게 들리셨는지 나중에 위급할때 쓰라며 20유로를 화장실앞에서 쓰윽 쥐어주셨다.이 20유로는 나름 큰 역할을 하게 된다.첫날은 역시 피곤했다. 2월이라도 아직은 겨울인지라 해도 빨리지고 추웠다.어쩔 수 없이 아야 소피아와 블루모스크만 눈에 담고 밥이나 먹으러 갔다.솔직히 음식은 크게 감흥이 없었다. 송탄이나 이태원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그런 맛이었다.그대로 집에 가긴 아쉬워 급히 유튜브를 찾아봤다.하맘이라는 목욕문화가 있더래서 피곤하기도 하겠다 한번 받아봤다.빠르고 강한 한국식 때밀이에 익숙한 우리들은 답답하다고 느낄만도 하겠다 느꼈다.아무래도 종교에 기인한 문화이다 보니 느리고 섬세하다.문화체험만을 위해 간다라고 하면 크게 추천은 못하겠으나 피로도 풀겸 사우나도 땡기는데 문화체험까지? 라고 하면 추천할 수 있겠다.- 2월 23일본격적으로 돌아다녔다. 코코레치를 먹고싶어 갈라타로 가는길에 여러군데를 들렀지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전부 닫았었다. 결국 밥도 못먹고 갈라타탑 가는길을 또 잘못들어서 구두닦이한테 10유로 삥도 뜯겼다. 여행의욕 상실 일보직전에 입냄새아재의 20유로가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정말 고마운 일이다.진짜 걍 귀국해버릴뻔여튼 별거없는 갈라타탑을 구경하고 튀르키예식 커피집을 갔다. 골목에 테이블을 두고 영업하는 집이었는데, 분위기도 좋고 커피도 색달랐다. 얼마 안가 곱창빵도 결국 먹고 돌마바흐체로 향했는데, 난 터키 관광지 입장료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여행하면서 입장료 체험비 아끼지 말자는 주의지만 이건 선을 많이 넘었다. 이스탄불에서 입장료를 안아낀다면 최소 30에서 50은 입장료로만 나갈 것처럼 느껴졌다. 입장료에 분노하며 한국 관광지의 입장료가 떠올라 경복궁의 입장료를 찾아봤다. 외국인 3천원이였다. 착잡했다.돌마바흐체를 뒤로 한 채 휴식이 필요해 숙소로 돌아갔다.이미 구두닦이, 코코레치 4번 허탕, 미친듯한 입장료에 내상을 많이 입어 담배한대 피고 푹 쉬려했지만?베란다 문이 잠겨 베란다에 갇혀버렸다.고양이랑 좀 놀다가 방주인이 날 구해줬고, 컨디션은 바닥을 쳤다.아무것도 안하고 쉬었다.- 2월 24일전날 푹 쉬어서 그런가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목표였던 아야 소피아까지 입장료 때문에 안갈수는 없으니 한번 들어가봤고 1층이 통제되어있어 크게 볼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꼭 보고싶었던 광경을 보게 되었다는 느낌은 정말 벅찼다.그러고 블루모스크를 가려는데 명찰을 단 사람이 입장시간까지 기다리면서 블루모스크 설명들을래?라며 날 어디론가 데려가길래 따라갔다. 대여섯정도 되는 외국인들이 앉아있었다. 다들 영문 모르고 끌려온 표정이었고 직원?이 내어준 홍차는 나말고 아무도 손을 안댄게 웃겼다.평범한 이슬람 전도강의였고 강의는 블루모스크 입장시간 맞춰서 끝났다. 종교는 없지만 종교에 관심은 많기에 나름 재밌게 들었다. 홍차도 맛있어서 두잔 마셨다.그리고 현지인들 많이 간다는 카디쿄이에 갔다. 이것저것 음식을 먹고 돌아다니는데 누가들어도 응원가같은 소리가 들려 따라가보니 김민재가 몸담았던 페네르바체와 오시멘이 몸담고있는 갈라타사라이의 더비 경기날이었다. 한 블럭이 팬들로 꽉 차있었고 어디서도 본적없는 미친 응원에 깜짝놀랐다. 옆에있던 가죽자켓입은 터키 조세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그들 무리에 껴서 뭔지도 모르겠는 응원가를 따라불렀다.아마 죽기전까지 이렇게 시끄럽고 난잡한 응원은 해보지 못할거라 예상한다.볼거도 다봤겠다. 이스탄불을 뜨기로 했다.다음 행선지는 옆동네 아테네였다.- 올해 초 여행기 2 - 아테네아테네를 간 목적도 이스탄불을 간 이유와 거의 일맥상통한다고 봐도 되겠다.파르테논 신전 한번 보려고 간거다.2월 25일에게안 항공은 샌드위치와 쿠키를 준다 꼴랑 11만원에 예매한건데 아주 혜자스러운..아테네에서 첫끼는 꼬치구이랑 그릭샐러드를 먹었는데 요상하게 모든음식에서 알 수 없는 감칠맛이 났다.술과 친근하지않은 이스탄불에서 넘어온터라 그저그런 식사주를 마셨는데도 너무 만족스러웠다.그렇게 그리스 와인이 궁금해서 테이스팅 코스가 있는 와인바를 방문했다.와인마다 맛이 정말 달랐다. 심지어 한잔은 귤와인이였는데 분명히 와인뉘앙스를 갖고 있는게 웃겼다.그리고 서버가 케이팝을 많이 좋아하는지 와인은 둘째치고 한국문화 얘기만 잔뜩 해주고 왔다.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발음이 정말 듣기 쉽지 않았다.그래도 서비스 와인에 빵까지 읃어먹었다.2월 26일파르테논 신전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크고 웅장했다.다 쓰러져가는 신전을 붙들은 철근들에 이질감을 느꼈지만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게 다행이다라는 생각이었다.저녁엔 여러음식을 먹어보고싶어 동행을 구했다.동행의 아프리카 여행기를 듣고 아프리카나 중동쪽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했다.아테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한시까지 과음했다.유럽은 음식점이 빨리닫는다는 단점이 있는데 아테네는 제법 여러군데 열어 신기했다.작은 도시라 짧게도 있었지만 걸어다니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었던 도시였다.크레타를 갈까 싶기도했지만 배타기는 너무 귀찮아 아테네를 뜨기로 했다.나폴리맛피아의 바이럴로 인해 다음 행선지는 나폴리였다.
작성자 : 해붕이고정닉
[궁금궁금] 과연 영생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https://www.youtube.com/watch?v=Hf7JBc9r-Mg 영생 ‘영생’이란 문자 그대로 영원히 삶을 지속하는 것, 즉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끝없는 생의 지속을 의미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죽지않고 영원히 삶"으로, 영문 사전에서는 immortality를 “죽음을 초월하여 무한히 존재하는 상태”라 정의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단순한 사전적 정의로 그치지 않는다. 인류는 태초부터 죽음의 불가피성과 맞서며, 이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인 영생을 상상해 왔다. 신화와 종교는 불멸의 신이나 불사의 존재를 그려내며, 인간이 가진 근원적 열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반영했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신들은 인간과 달리 죽지 않기에 숭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중국 도교 전통은 불로장생을 수행의 궁극 목표로 삼았다. 근대 이후에는 영생을 다양한 방식으로 성찰하며, “죽음이 없는 삶이 과연 의미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곤했다. 이처럼 영생은 인류의 문화·사유 속에서 줄곧 동경과 경계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 주제로 자리해 왔다. 어떤 이들에게 영생은 절대적 축복으로 간주되었으나, 또 다른 이들에게 그것은 끝나지 않는 형벌로 그려졌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두 입장을 고대·중세와 근현대의 동서양 사상 속에서 각각 살펴보고, 그 논리 구조와 윤리적 함의를 분석·비교함으로써 영생이라는 개념의 철학적 무게를 성찰하고자 한다. P.S ) 필자는 불멸영생은 필연적으로 저주라 생각한다. 영생을 축복으로 보는 입장 사실 인류 역사에서 영생은 주로 축복의 대상이었다. 최초의 설화로 불리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인류가 바라본 영생에 대한 동경심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설화 내 길가메시 왕은 친구 엔키두의 죽음 이후 끊임없이 불사의 비밀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데, 이 여정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나, 영원한 삶은 신들에게만 허락되었다." 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지속된다. 즉, 초창기 인류의 서사부터 영생은 성취되기만 한다면 최고의 선(善)으로 간주되었으며, 길가메시 또한 여정의 상당 부분 동안 영생을 축복으로 갈망했다. 비록 그는 끝내 “영원한 생명은 너의 운명이 아니다 (everlasting life is not your destiny)” 라는 신탁을 받아들이지만, 이러한 이야기 자체가 인간이 오래도록 가져온 영생에 대한 긍정적 열망을 드러낸다. 또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영생 추구는 축복된 목표로 여겨졌다. 고대 도가(道家) 사상과 연금술에서 불로장생의 추구는 그야말로 사회의 핵심 지향점이었다. 실제로 진시황(秦始皇) 같은 제왕은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수많은 도사들이 인간이 자연의 도(道)에 합치될 경우 육체적 불멸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도교 전통에서 말하는 영생은 기독교적 영혼 불멸과 달리 현세적 육체의 불멸을 가리켰으며, 호흡 수련이나 내단술(內丹術) 등의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신체를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이는 우주 만물이 한 태극(太極)의 흐름 속에 있다는 세계관에 기반하며, 자연의 순리에 동화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삼았다. 그래서 도교 화폭에는 용을 타고 승천하는 팔선(八仙) 등 불멸을 이룬 존재들이 이상적으로 묘사되었고, 수많은 도교 경전과 그림이 영생이라는 목표를 나타냈다. 한편, 서양의 고대 철학과 종교에서도 영원한 삶은 축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플라톤(Plato)은 영혼 불멸설을 통해 인간의 혼이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영혼의 영생은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에게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경우, “철학자는 죽음을 연습한다”라고 말하며, 죽음 이후에 영혼이 순수 이데아 세계에서 진리를 관조하게 될 것을 희망했다. 그에게 영혼의 영속성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앎으로 가는 길이었으며, 이런 맥락에서 영적 불멸은 축복의 개념으로 파악된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정복자들의 경우엔 불멸의 물을 찾으러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지배자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열망했다는 흔적이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신들이 특별히 총애하는 영웅에게 불멸을 선물하는 일화가 여럿 존재한다. 예컨대 헤라클레스(Hercules)는 온갖 시험을 통과한 끝에 올림포스의 신들 사이에서 영생하는 신적 지위를 얻게 되며, 이는 그의 고난에 대한 최고의 축복으로 묘사된다. 이후 기독교를 비롯한 중세 서양 사상에서도 영생은 분명 축복으로 인식되었다. 오히려 이 당시의 영생에 대한 철학적 사조가 가장 확고하고, 강력하게 자리잡았었다.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와 같은 구절을 포함해 곳곳에서 영생의 은혜에 대한 찬양과 함께 그것이 곧 신앙인의 궁극 보상으로 약속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에서 “참된 행복은 불멸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역설했는데, 모든 인간은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멸 또한 원하게 되며, 삶이 영원하지 않다면 진정한 행복도 불가능하다고 논증한다. 그는 “인간의 삶이 진정 복되려면 영원해야 한다”고 말하며,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신의 은총으로서 주어질 때 비로소 완전한 복지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독교적 맥락에서 영생은 곧 신과의 영원한 합일을 뜻하며, 지상에서의 유한한 고통을 딛은 후에 얻게 되는 최고의 선물로 여겨졌다.근대에 접어들며, 르네상스와 계몽기를 거치며 종교적 권위는 대폭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생은 여전히 일부 사상가들에게 최고의 선으로 여겨졌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실제로 과학의 힘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표출했고, 수 많은 당대 연금술사들은 불로장생의 영약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독일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d.Ä.)의 〈젊음의 샘(Der Jungbrunnen)〉 문학 작품에서도 영생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가령, 16세기 스페인의 전설에 따르면 폰세 데 레온(Ponce de León) 같은 탐험가는 젊음의 샘을 찾아 신대륙을 탐험했는데, 이는 영원한 젊음과 삶이 있다면 인류의 복지가 극대화될 것이라는 시대적 믿음을 보여준다. 위 작품에서는 파들이이 젊음의 샘에 들어가 젊어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영원한 젊음과 생명에 대한 인류의 갈망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늙고 병든 상태를 벗어나 다시 젊고 건강하게 산다는 꿈이 하나의 축복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림 속에서 연회와 춤을 즐기는 젊어진 인물들의 모습은 영생과 청춘의 결합을 인류가 얼마나 환희에 찬 축복으로 여겨왔는지를 보여준다.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은 실제로 수명 연장을 현실적인 프로젝트로 변화시켰다. 현대 트랜스휴머니스트(transhumanist) 진영은 노화와 죽음을 기술로 정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인류 향상의 긍정적 목표로 삼고 있다. 대표적인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참고로 7포티임..) “죽음은 너무나 비극적인 손실이다. (중략) 나는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고 말하면서, 죽음을 극복하여 영생에 도달하는 것을 인간의 궁극 과제로 여긴다. 그는 노화를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간주하며, 인간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여, 불멸에 이를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에서 영생은 인류가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며, 죽음의 정복은 인간 문명의 숙원으로 제시된다. 이렇듯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영생을 축복으로 보는 관점은 기술·과학의 언어를 입으며 지속되고 있다. 종교적 맥락에서 벗어나 세속적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 핵심에는 “삶은 선이므로 더 많이, 끝없이 누릴수록 좋다”는 생명 긍정 사상이 놓여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유한성은 극복되어야 할 한계이자 악으로 간주되며, 영생은 인류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최대의 축복이자 진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영생을 저주로 보는 입장 이처럼 인류는 영생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끝없는 삶의 그늘에 대해 일찍부터 경고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고대 신화들은 종종 신이 아닌 존재가 불멸을 얻게 될 때 발생하는 비극을 이야기하곤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는 사랑하는 인간, 티토노스(Tithonus)를 위해 제우스에게 청하여 영생의 축복을 내려준다. 그러나, 에오스는 영생만을 빌었을 뿐 불로에 대해서는 빌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결과 티토노스는 영원히 늙어가기만 하는 끝나지 않는 노쇠에 갇히게 된다. 알프레드 테니슨 경의 시 〈티토누스〉는 이 신화를 각색하여, “나만이야말로 잔혹한 불멸에 소모되어 늙어간다” 라고 탄식하는 티토누스의 목소리를 전한다. 결국, 티토노스는 사랑하는 여신에게 자신을 도로 죽게 해 달라고 애원하기에 이르는데, 이처럼 그리스 신화는 신이 아닌 자의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실제로 티토누스 이야기는 잘못 획득한 불멸은 끝없는 고통일 뿐임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의 유한성을 오히려 자연스러운 질서로 보고, 이를 넘어서는 것은 오만의 벌로서 저주에 가깝다고 여긴 고대인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동양 사상에서도 영생에 대한 회의적시각을 찾을 수 있다. 장자(莊子)는 특히 자연섭리에 따라 삶을 중시했는데, 그는 오래 산 전설적 인물 봉조(彭祖)를 언급하며 “사람들이 펑조의 장수를 부러워하지만, 참 어리석도다.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장자는 인위적으로 수명을 늘리려는 시도는 도에 어긋나는 집착이라고 보았고, 자연의 한계에 순응하지 않고 불멸을 좇는 것은 도리어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비판했다. 이는 곧 도가 사상 내부에서조차 영생을 추구하는 행위의 부질없음을 깨우치는 목소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불교에서는 더욱 철저히 윤회의 영속성을 고통으로 파악한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을 고통으로, 해탈을 바로 이 끝없는 생존의 굴레로부터 탈출로 나타낸다. 달리 말해 불교에 따르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지옥과 같은 것이며, 오히려 죽음(멸도)의 수용이 해방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초기 불경들은 “태어남이 있는 한 고통이 따르고,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고통이 끝난다” 고 설파하며, 생사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무생(無生)의 경지를 최고의 해탈로 설정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생을 꿈꾸는 것은 무지의 소산에 불과하고, 유한한 수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20세기에는 끝없는 삶의 의미를 숙고한 철학자들과 문학가들이 영생을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조나단 스위프트의 풍자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는 불멸을 가진 “스트럴드브럭(Struldbrug)”이라는 종족이 나오는데, 이들은 영원히 늙고 쇠약해지기만 할 뿐 죽지 못해 심각한 고통과 멸시를 받으며 산다. 소설 속에서 걸리버는 애초에 영생을 인간 최고의 선물이라 여겼으나, 실제 영생자의 비참한 처지를 목격하고는 경악한다. 이처럼 영생은 환상 속에서는 축복처럼 보이나, 현실이 된다면 끔찍한 저주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스위프트는 전하고 있다. 또한,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을 거스르는 행위의 윤리적 문제를 제기했고,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영원한 젊음을 얻은 인물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고통에 빠지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는 단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유한한 삶의 가치를 역설하여, 끝없는 삶이 가져올 공허함을 암시하였다. 이런 문학적 사례들은 결국 영원한 삶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을 우회적-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과 현대 윤리학에서는 영생의 바람직함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전개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는 《마크로풀로스 사례(1973)》 논문에서 오페라에 나오는 300년을 산 여성의 이야기를 분석하며 영원한 삶은 필연적으로 권태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그의 핵심 논지는 곧 인간이 살아가는 동력은 카테고리적 욕구(categorical desire), 즉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목표들인데,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결국 모든 욕구가 충족되거나 그 자체로 무의미해지기 때문이 어떤 것도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되어주지 못함을 뜻한다. 실제로 무한히 살게 된다면 처음에는 지식 추구나 예술 창작 등으로 시간을 보내겠지만,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새로운 목표나 열정을 찾기 어렵게 되어 극심한 권태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시간이 정말 무한하고, 시스템이 계속 존치한다는 전제 하라면 롤에서 마스터, 챌린저를 찍는 것도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이 걸릴지언정 사실상 달성할 수 있음은 사실적 진술이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의 도전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이러한 끝없는 권태와 정체 상태의 삶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어떠한 불멸의 인간 삶도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단언했다. 그의 견해는 현대 철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이후 다수 철학자들이 영생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철학적 주장이 말하는 것처럼 죽음이 삶의 서사적 완결을 부여하기 때문에 오히려 삶이 유의미하게 빛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주장처럼 결국 본질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긍정하는 입장은 곧 인간존재 자체의 특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영생은 축복이라기보다,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을 낳는 딜레마적 상태로 본다. 예컨대, 미국 작가 앨런 해링턴은 “죽음이 사라지면 인류는 근본적으로 달라져 인간성의 상실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고,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은 본래 죽음을 향해 존재한다”며 죽음이 인간 실존의 본질적 일부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곧 필멸성을 인간조건의 핵심으로 보고, 이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인간다움의 훼손이며, 영생은 오히려 인간 존재를 객체화하여 삶의 존엄과 의미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 결국, 종합해보자면 영생 축복론의 논리는 생명을 곧 선이라고 하는 대전제에 입각하여,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좋으므로 더 길거나 영원할수록 더 많은 선이 실현된다고 본다. 특히 종교적 논리에서는 영생은 신의 선물로서 약속되며, 유한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로 그려진다. 고대에도 영웅들이 불멸을 부여받는 것은 그들의 공덕이나 특별함에 대한 궁극 보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죽음은 부정적 현상이며, 극복될 수만 있다면 마땅히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영생을 축복으로 보는 입장에 내포된 윤리적 함의는 결국 생명 연장과 삶의 지속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생명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대에도 트랜스휴머니즘이나 수명연장 연구에 반영되어, 질병 퇴치와 노화 극복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는 어찌보면 당연한(?) 논리를 정당화한다. 반면, 영생 저주론은 삶의 질=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내용과 의미라고 볼 수 있겠다. 유한한 시간 안에서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며, 관계를 맺는 과정이 삶의 가치인데, 만약 시간이 무한정 주어진다면 이러한 긴장과 동기가 사라져버린다고 지적한다. 결국 이 입장은 죽음까지 포함한 삶의 전과정을 오히려 누구보다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는 태도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결국 양측 모두 인간 삶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지만, 가치의 원천을 다르게 본다는 점이다. 축복론은 양적 연장에서 가치를 찾고, 저주론은 질적 완성에서 가치를 찾는다. 전자는 현재의 행복이 더 이어지길 바라는 심정이고, 후자는 현재의 행복이 영원히 이어지면 결국 퇴색하리란 통찰이다. 이런 차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생을 축복으로 보는 이는 죽음을 극복해야 할 기술적 문제로 여기는 데 반해, 저주로 보는 이는 죽음을 수용해야 할 필연적인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전자가 능동적 정복의 윤리라면, 후자는 겸허한 수용의 윤리라 할 수 있다. 결국 두 관점은 인간이 인생의 유한함과 무한함 사이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라는 근본 물음에 대한 상반된 답변들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싱붕이들에게 영생은 어떤 의미일까..?
작성자 : 영단어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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