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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에 대하여.jpg
영화 조커 (2019)의 배경은 1981년, 아서 플렉(조커)의 개인적인 비극과 사회적 혼란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배경 설정은 영화의 주요 테마인 사회적 불평등, 고립, 정신 건강 문제그리고 폭력의 확산을 강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때문에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 로고는 현대에 익숙한 3D 애니메이션 스타일이 아닌 1970~1980년대에 사용되던복고풍의 2D 로고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연출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영화가 지닌 시대성과 복고적 정서를 강조하며 관객을 1980년대 초반으로 몰입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주인공의 이름인 아서 플렉(Arthur Fleck)은 단순한 설정 이상의 상징성을 지닌다. 감독 토드 필립스는 인터뷰를 통해 이 이름에 담긴 이중적 의미를 직접 밝힌 바 있다.먼저 아서(Arthur)’는 전설 속의 아서 왕(King Arthur)을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권위와 통치, 영웅적인 존재를 상징한다. 반면 ‘플렉(Fleck)’은 영어로 ‘작은 얼룩’, ‘부스러기’혹은 ‘티끌’을 의미하며, 무가치하고 하찮은 존재를 암시한다.이 두 요소가 결합된 ‘아서 플렉’이라는 이름은 곧 ‘광대 같은 인물’, ‘아무것도 아닌 왕’이라는 역설적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영화 속 아서가 사회적으로 철저히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인물이지만, 결국 대중의 분노와 상징적 존재로 ‘왕’처럼 떠오르게 되는 서사를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즉, 감독은 이름부터 인물의 내면과 운명을 암시하며관객으로 하여금 단순한 이름 이상의 해석을 유도하고 있다.영화 조커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아서가 거울을 보며 천천히 웃음을 연습하다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명장면으로 평가받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눈물은 원래 각본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즉흥적인 연기였다는 점이다. 감독 토드 필립스는 이 장면을 촬영할 당시호아킨 피닉스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기 위해 촬영장에 잔잔하고 슬픈 음악을 틀어두었다. 그 음악에 영향을 받은 피닉스는, 대사도 없이 단지 표정과 몸짓만으로 내면의 고통을 표현하던 중감정이 북받쳐 올라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거울에 비친 아서의 얼굴 뒤편조명이 어슴푸레한 공간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형상이포착되었다는 팬들의 해석이 존재한다. 이는 영화 속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이스터에그는 아니지만일부 관객들과 팬들 사이에서 "의도된 상징이 아니냐"는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켜 왔다.해당 형상은 조명, 아서의 머리 윤곽, 배경의 그림자 등이 절묘하게 겹치며 만들어진 것으로배트맨의 상징적인 실루엣 특히 뾰족한 귀와 어두운 형체를 연상시키는 순간을 연출한다.
비록 감독이나 제작진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는 없지만조커와 배트맨이라는 상징적 대립 구조를 고려할 때무의식적 혹은 우연에 의한 상징적 암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영화의 서사적 깊이를 더해주며팬들에게는 흥미로운 추측거리로 남아 있다양아치들에게 골목에서 구타당하는 장면은그의 비참한 현실과 사회적 소외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인상적인 시퀀스 중 하나다.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아서는 넘어지고 쓰러진 후본능적으로 손으로 자신의 뒷통수와 낭심을 감싸며 보호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이는 단순한 방어적 몸짓을 넘어서그가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디테일이다.
즉, 아서는 신체적으로 가장 취약한 부위를 먼저 감싸는 훈련된 듯한 움직임을 보이며 이전에도 유사한 상황 폭행이나 괴롭힘을 반복적으로 겪어왔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세밀한 연출과 호아킨 피닉스의 섬세한 신체 연기는아서라는 인물이 단지 한 번의 사건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상처와 학대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간 존재임을 강조한다.골목에서 구타당한 직후 그의 가슴에 달린 꽃 장식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장면이 짧게 등장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시각적 연출을 넘어코믹스 원작 조커 캐릭터에 대한 오마주로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디테일이다.원작에서 조커는 종종 광대 특유의 소품을 무기로 활용하는데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물총처럼 물을 뿜는 장난감 꽃이다. 겉보기엔 우스꽝스럽지만, 때로는 독을 뿜거나 치명적인 함정을 품은 이 꽃은 조커의 조롱과 폭력, 유희성과 잔혹성이 혼재된 성격을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다.
영화에서 이 꽃이 등장하는 타이밍은 아이러니하다. 구타를 당한 후,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아서의 가슴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은 슬프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조롱하듯 연출된다. 이는 관객에게 비극 속의 희극, 혹은 희극 속의 비극이라는 조커라는 인물의 핵심 정체성을 암시하며그의 본격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상징적 순간으로도 읽힌다.호아킨 피닉스는 캐릭터의 내면과 외형을 깊이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촬영 전부터 체중 변화에 대한 고민을 감독과 함께 나눴다.
호아킨은 처음에는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인 인물을 보다 현실적으로 표현하고자 살을 찌우는 방향을 원했다. 실제로 많은 정신과 약물 특히 항우울제나 항정신병 약물은 체중 증가를 흔한 부작용으로 동반하기 때문에아서 플렉의 심리적 상태를 육체적으로도 드러내기 위한 현실적인 접근이었다.
하지만 감독 토드 필립스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아서의 모습을 "영양실조에 걸린 늑대처럼" 보이길 원했다. 이는 단지 체형적인 표현을 넘어서아서가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점점 광기로 굶주려가는 존재라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각인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호아킨 피닉스는 24kg 이상을 감량하며 감독의 비전에 따라 극도로 마르고 뼈가 도드라진 외형으로 아서 플렉을 완성시켰다.감량 기간 동안 하루 식사는 거의 “사과 한 개, 양상추, 그리고 찐 강낭콩 몇 알”로 구성됐다고 밝혔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같은 코미디였어.”
이 대사는 영화 조커의 정서적,철학적 정점이자 조커로 변하는 계기가 되는데이 말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고통 어머니의 학대, 사회적 소외, 정신질환, 빈곤이 단순히 불운하거나 비극적인 삶의 연속이 아니라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조차 조롱당하는 ‘코미디’였다는 냉소적 인식을 드러낸다.
여기서 ‘코미디’는 웃음을 유발하는 장르가 아니라삶이란 본질적으로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희극에 불과하다는 조커의 세계관을 함축한다.
이 대사는 특히 그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순간에 나오는 점에서 더욱 강렬한데"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코미디다."
채플린의 말은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 즉 개인적 고통이 타인의시선 속에선 우스꽝스러운 오락거리로 소비될 수 있다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조커는 이 명언을 정반대의 방향에서 차용한다. 아서 플렉은 자신의 인생이 비극이라고 믿었지만사회와 타인에게 철저히 조롱당하고 외면받은 끝에그것이 실은 코미디였다는 잔인한 진실을 자각한다. 하지만 이 코미디는 채플린이 말하던 휴머니즘적 웃음이 아닌인간성의 몰락과 광기의 산물로서의 냉소적 희극이다.아서 플렉은 겉보기엔 평범한 인물처럼 보이지만그 이면에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내면이 자리하고 있다. 이 복잡성을 잘 보여주는 세밀한 설정 중 하나가 바로 그가 양손잡이(ambidextrous)라는 점이다.
일상생활에서 아서는 오른손을 주로 사용한다. 글씨를 쓰거나, 간단한 동작들 예를 들어 문을 열거나 담배를 피우는 장면 등에서는 대부분 오른손을 쓴다. 이는 그가 사회적으로 보이기 위한 ‘정상적인 자아’즉 억제되고 통제된 페르소나를 유지할 때 사용하는 손이다.그가 진짜 감정이나 내면을 드러내는 순간들왼손을 사용한다는 점이다.총을 쏠 때 왼손을 사용하거나,감정이 격해져 웃음을 억제하지 못할 때의 몸짓거울 앞에서 광대 화장을 할 때 등
이러한 장면에서는 왼손이 주도적으로 사용된다. 이는 단순한 연출을 넘어, 아서의 두 개의 자아 사회에 순응하는 자아와 억눌려온 진짜 자아(조커)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아서 플렉이 집에 찾아온 동료를 죽이기 전메모에 등장하는 스마일 마크를 담뱃재로 그리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장면에서 아서는 평소의 억눌린 모습과는 달리점차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둔 ‘진짜 자아’ 즉 조커로서의 본성을 곧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계단 춤 장면은 아서 플렉이 내면의 억압과 고통을 벗어던지고마침내 조커로 완전히 ‘재탄생’하는 극적인 전환점이다.이 장면은 단순한 춤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특히 명암 대비를 활용한 시각적 연출이 매우 인상적이다. 초반부에는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면계단에서 춤을 추는 순간부터는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비가 극적으로 부각되면서 아서가 자신의 어두운 본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기 시작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극장에서 배트맨 부모가 살해되는 장면을 보면웨인 부부가 타고 온 리무진이 불타고 있는 모습이 짧게 등장하는데이 장면은 단순한 배경 묘사가 아니라 의도된 복선 혹은 암시로 볼 수 있다.
이 불탄 리무진이 조커의 추종자 혹은 범죄 조직에 의해 사전에 계획된 방해 행위임을 제시한다. 즉, 누군가가 리무진에 불을 지름으로써 부부가 차량을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고그로 인해 두 사람이 직접 도보로 이동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결국 살해당했다는 의미 있는 ‘계획살인’으로 해석한다.이 장면을 다시보면 웨인 부부 이외의 차량은 모두가 멀쩡한것을 알수있다영화 조커에서 아서 플렉이 머레이를 살해한 직후그의 붉은 양복은 파란 조명과의 대비 속에서 보랏빛으로 물든다. 이 순간은 단순한 시각적 연출을 넘어 상징적으로 중대한 전환점을 나타낸다. 붉은색은 조커의 광기와 폭력성, 파란색은 냉정함과 고립을 상징하며, 이 두 색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보라색은 이제 아서 플렉이 '조커'라는 존재로 완전히 탈바꿈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개인의 분열된 정체성이 하나로 통합되어더 이상 사회의 피해자가 아닌 스스로 서사를 주도하는 상징적 인물로 거듭났음을 의미한다. 조명과 색채를 통해 감독은 아서 플렉의 내면 변화와 함께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커'로 공식적으로 탄생했음을 시각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조커가 폭도들에 의해 경찰차에서 구출된 직후 그가 있는 배경에는 "Ace in the Hole"이라는 문구가 적힌 간판이 눈에 띈다. 이는 단순한 배경 요소가 아니라,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의 마지막 대사 중 하나“I took Gotham’s white knight and I brought him down to our level. It wasn’t hard. You see, madness, as you know, is like gravity. All it takes is a little push... And I had an ace in the hole”에 대한 오마주로 해석된다.원작 노블 킬링 조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재미있는 농담 하나가 떠올랐다"고 말하며 짧은 일화를 들려준다. 얼핏 들으면 단순한 블랙 유머처럼 보이는 이 농담은사실 광기와 이성 사이의 경계를 넘어선 두 인물의 본질적인 유사성을 드러낸다. 농담을 들은 배트맨은 처음엔 무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점차 웃음을 터뜨리고, 마침내 조커와 함께 폭소를 터뜨리며 이야기는 끝이난다.이 인상적인 엔딩은 상징적으로 이들이 서로를 가장 깊이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조커는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미쳐버린 인물이고배트맨은 그 광기 앞에서도 끝내 도덕적 기준을 지키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하나의 나쁜 하루'가 사람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몸소 체현하고 있는 인물들이며그 점에서 서로를 누구보다도 닮아 있다. 이 장면은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가 단순한 영웅과 악당의 구도를 넘어서서로의 정체성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임을 철학적으로 암시한다.영화 조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서 플렉은 정신병원 상담사와 마주 앉아 “재미있는 농담이 하나 떠올랐다”고 말한다. 상담사가 그 내용을 묻자 그는 웃으며 조용히 말한다 “넌 이해 못 할 거야.”이 장면은 겉보기에는 허무한 블랙코미디처럼 보이지만사실상 아서 플렉 조커의 사고방식과 세상에 대한 절망적인 인식그리고 그만의 왜곡된 유머 감각이 사회와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말하는 ‘농담’은 단지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라그만의 고통과 광기, 세계관이 응축된 메시지다.
이와 동시에, 화면은 고담 시의 혼란 속에서 브루스 웨인의 부모가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이 병렬 편집은 단순한 사건의 병치가 아니라 향후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성장할 결정적인 순간과 조커의 탄생을 동시에 보여주며이 둘의 불가분한 관계를 암시한다. 특히 아서가 “넌 이해 못 할 거야”라고 말하는 순간은세상 누구도 자신의 광기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그와 같은 상처를 지닌 존재즉 배트맨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임을 암묵적으로 예고하는 대사다.
작성자 : 네거티장애고정닉
일본의 전자정부화는 왜 늦어졌는가? (下)
[시리즈] 일본이 왜 아날로그 왕국이라고? · 일본의 전자정부화는 왜 늦어졌는가? (上) · 일본의 전자정부화는 왜 늦어졌는가? (下) 지난 화를 정리해보자.무라야마 정권은 일본의 전자화를 구상했으며 기초적인 조직을 마련하고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내각이 단명함에 따라 무언가 제대로 추진되는 일은 없었다.그 뒤를 이어 탄생한 하시모토 정권은 일본의 전자화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여러 성청들을 통폐합하는 등 행정 개혁에는 신경을 기울였지만 전자화가 곧 행정 효율화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없었다.하시모토가 물러간 다음 탄생한 오부치 정권도 크게 낫지는 않았다. 정권 초입에는 당장 발등이 활활 타는 상황 -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의 여파를 수습해야 했으며, 상황이 조금 안정되어 관심이 일본의 전자화로 옮겨갈 무렵엔 총리 그 자신이 사망. 정권이 붕괴했다.그렇게 6년이 지지부진하게 흘렀다. 때는 2000년. 전자정부는 어느새 그다지 새롭지 않은 아젠다가 되어있었으니 - 최선두 주자 미국은 전자정부의 완성을 선언했으며, 1994년 일본의 전자정부화를 선언할 때 멀뚱멀뚱 보고 있던 나라들도 적잖이 전자정부화에 매진했다.그리고 모리 요시로가 일본의 총리가 된다.모리 요시로는 하시모토 류타로나 오부치 게이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총리였다. 그의 흔들리고 있는 일본에 대한 처방이라고는 오부치 시대의 채권 찍어 공공 인프라 만들기 요법을 반복하는 것이 전부. 대단한 리더쉽도, 비전도 없었다. 구태여 차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하시모토처럼 잘생기지 않았고, 오부치처럼 중도에 죽어 '살아남았다면' 따위의 아쉬움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막말과 망언에 능했다는 것 정도.이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모리 요시로 역시 일본의 전자정부화에 큰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전자정부라는 구호는 존재했으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러나, 모리 2차 내각이 조각되자 상황은 급변한다. 나카가와 히데나오가 입각한 것이다.이 덩치빨 좋아보이는 사람에 대해서 먼저 설명해보자면, 게이오대 법학대를 졸업해 사토 히데나오로서 기자생활을 하다, 성인 나카가와와 지역구인 히로시마를 장인에게서 물려받아서 세습 정치인이 된다. 정계 입문은 신자유클럽에서 했지만, 신자유클럽이 침몰해가자 자민당에 입당. 청화회 계파 소속 정치인으로서 고속출세를 해나간다. 자민당 상공부 회장으로서 소비세 도입에 앞장서기도 하고, 자사사 연립 내각이 출범하자 무라야마 총리의 보좌를 맡았고, 하시모토 내각에서는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냈다. 이후 잠깐 내각 밖을 돌다, 자신이 섬기는 모리가 총리가 되자 자민당 간사장 대리에 취임. 이 단락에서 다룰 모리 2차 내각에서는 관방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겸 IT 담당 대신이 된다. 여기까지 약력을 보면 그냥 참 일본정계스럽게 출세가도를 밟아온 무색무취 중진 1로 보이겠으나, 나카가와에게는 한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전자정부화가 급진전된 미국을 보고 충격을 먹었다는 것. 이제까지로 OK, 라는 타성에 젖어있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보스인 모리에게 전자정부화를 적극 권유했다. 그리고 모리는 관방장관과 IT 담당 대신을 겸하게 해주어, 일본 IT화의 지휘봉을 내주는 것으로 답했다. 고도정보통신사회추진본부를 발전적으로 개편하여 내각총리대신인 본인을 본부장으로 하고 국무위원들로 구성된 정보통신기술전략본부를 내각 직속으로 창설하며 그 휘하 조직으로는 민간 전문위원들이 배속된 IT 전략 회의를 설치, 나키가와를 지원한다.사실상 전권을 받은 나키가와는 잘 하는 것 같았다.IT 혁명이 주 화두로 '글로벌 정보사회에 관한 오키나와 헌장'(IT 헌장)이 채택되었던 규슈-오키나와 G8 회담을 성공시킨 다음, 그는 총리인 모리를 대신해 의욕적으로 정보통신기술전략본부/IT 전략 회의의 공동 회의를 주재했다.그는 '왜 굳이 내각에 이런 기구를 만드는가'라는 공세가 퍼부어진 IT 전략 본부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왔으며, 전자상거래를 촉진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자 했다. 이는 아예 하나의 패키지 법안으로 묶여 'IT 일괄법'으로 불리게 된다.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의 IT화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법적으로 정의할 'IT기본법'을 입안했다.지난화에서 성공적인 전자정부화라는 결말을 맞이한 한국/미국이 법제 정비를 통해 전자화를 정의하고 실현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는 일본이 6년간 갈팡질팡 전자화를 이어간 끝에 마침내 도달한 시작점이었다.총리의 신뢰를 받는 제법 유능한 장관이 톱다운 형식으로 추친하는 개혁.막을 것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았는데...있었다. 어느 주간지에서 나키가와에 대한 폭로가 터져나왔다. 우익 단체 회원과 만났다, 불륜을 하고 있다, (여기까진 일본 정치인 종특이니 OK) 내연녀가 각성제에 손을 댄 뽕쟁이다, 내연녀에게 돈을 줘 낙태를 하도록 했다.심지어는 뭐, 정부 요인으로서 북한에 가는 그 당일에도 내연녀를 만나느라 아침 7시에 이뤄진 호텔 집합에 늦었다지를 않나.한마디로 추잡한 스캔들이 쏟아졌다. 2000년 여름, 막 세 장관직을 연임했을 즈음엔 중의원에서 자신만만하게 IT 혁명을 외치던 나키가와. 가을이 되어서는 야당 의원들의 스캔 관련 질의에 절절 매는 신세가 되었다. 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내각관방장관과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직은 후쿠다 야스오가 이어받고 IT 담당 대신은 사카이야 다이치가 이어받는 형식으로 나키가와는 잠깐 물러난다.물론 무슨 군소파벌도 아니고 청화회의 중진이니만큼 얼마 안가 복귀하게 되어 고이즈미의 신임을 얻어 중책을 맡고, 이후 아베 내각의 탄생에도 일조하게 되며, 이후 선거구를 이어받은 아들놈은 애비처럼 내연녀 스캔들로 잡음을 낸다지만. 그리고 이 나키가와 스캔들 등으로 정부 지지율이 내리막길을 걷는 것을 빌미로 자민 내부에서 모리를 끌어내리기 위한 '가토의 난'이 발생한다지만.이는 이 글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추진되는 톱다운형 개혁의 단점이라고 한다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필두는 역시 '모가지가 날아가면 모든 것이 허사'겠지.IT화가 일본 경제의 가미카제라고 주접을 떨던 모리 요시로 치하의 IT 개혁은 여기서 삐딱선을 타게 된다. 먼저 일본 IT화를 규정할 IT 기본법은, 가을까지 통과시키려던 나키가와의 바램과 달리 겨울이 되어서야 통과되게 되었다. 또한 각계의 압력을 받아 흐물흐물해졌다. 이를테면, '모든 서류는 전자화, 중복되는 서류는 폐기'를 방침으로 세운 한국과 미국의 IT화 법안들과는 달리, 전자화된 문서 Ok, 기존 문서도 Ok. 전자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화를 하나의 선택지로 열어둘 뿐인 애매하기 그지없는 법안이 되었다.둘째로 IT 전략 본부의 방향이다. 2001년 1월, 나키가와의 낙마 이후 창설된 IT전략본부(풀 네임 : 고도정보통신네트워크사회추진전략본부)는 전신, '고도~본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IT 전략 본부가 결정하는 전략, 기본 방침 등은 어디까지나 제언으로서 다루어질 뿐 구체적인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각 성청이다.그래도 이 전략 본부를 내각관방이자 정권 실세가 장기간 이끌어나가면 문제가 없겠지만, 나키가와 이후 IT 담당 대신은 2~3개월마다 교체되게 된다.(그중엔 이분도 계신다)전임자와 달리 IT화에 열의도 없고, 관방장관직을 겸임한다거나 총리의 신임을 받는다거나 하여 강력한 권한도 없고. 그저 일본 정치의 관행대로 몇달 거쳐갈 뿐인 장관직을 역임하며, 겸임직인 경제기획청 장관직에 열심이었던 이 후임자들은 그 어떤 리더쉽도 발휘하지 않았다.IT 전략 본부와 IT 전략 회의는 그 어떤 결론도 내지 못했다. IT 기본법과 IT 일괄법의 후속 법안은 입안되지 않았다.전자화는 하나의 방안으로서 권장되나 강제되지는 않고. 몇몇 구시대적 규제는 철폐되었으나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고. 5년 이내에 미국을 뛰어넘겠다, 라는 거창한 목표를 가진 e-Japan 전략이 수립되기는 했고, 민간 인프라에 있어서는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되나 정부 전자화에 있어서는 글쎄. 애당초 내세운 구호부터 '고속 인터넷 3,000만 가구, 초고속 인터넷 1,000만 가구가 이용 가능한 환경 정비' 였더랬다.그런고로, 모리 시대의 전자화는 이렇게 애매한 결론을 맞이했다.고이즈미의 시대가 도래한다.90년대 초를 개혁, 개혁, 개혁으로 시작하여 90년대 거의 대부분을 불황에 시달린 일본은 2000년대 초도 개혁, 개혁, 개혁을 입에 달고 있었다.그런 와중 취임한 고이즈미의 캐치프라이즈는 '성역없는 구조개혁'. '관에서 민으로'라는 구호 아래 비대한 공공영역을 컷하고, 각종 구태들을 청산하여 새 시대에 걸맞는 일본을 열어가고자한 고이즈미는, 마찬가지로 IT, 전자화에도 손을 댔다.https://m.etnews.com/200109040103?obj=Tzo4OiJzdGRDbGFzcyI6Mjp7czo3OiJyZWZlcmVyIjtOO3M6NzoiZm9yd2FyZCI7czoxMzoid2ViIHRvIG1vYmlsZSI7fQ%3D%3D 日, 통신인프라 `빗장` 푼다日, 통신인프라 `빗장` 푼다m.etnews.com그는 IT 분야에 대대적인 투자를 약속한 다음, 마치 JA 쌀숭이들을 척결하는 아들놈처럼 전자숭이 NTT의 통신 인프라 독점을 깨버렸다. 경쟁이 촉진되었고, 일본의 통신 산업은 재도약을 시작. 고이즈미 임기 말이 되면 일본 전역에 광대역망이 깔리게 된다.덕분에 일본 민간 사회의 전자화는 더더욱 촉진되었다. 1999년 말 일본의 인터넷 보급률은 21.4%에 불과했지만 2006년에는 68.5%에 달하게 되었으며, 기업은 2005년 기준 97.6%. 사실상 모두가 인터넷을 도입하게 되었다.그러나 일본 정부의 전자화는 여전히 미묘했다. 일본의 고질병이었던 성청할거주의는 고이즈미 시대에도 악명을 떨쳐, 각 부처가 제각각 본인 확인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시스템들을 포괄하는 정부 통합 시스템을 만든다... 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이외에 전자화에 참가한 업체들이 초기에는 적자를 보고 계약한 다음, 자사에 유리한 시스템을 구축해 해당 부처의 전자화를 독점하고 본격적으로 이익을 올리는 일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일본 국세청의 전자신고/납세 시스템은 NTT 데이터가 독점했는데, 1차 계약에서는 5억 5천만엔에 계약했고, 2차 계약에서는 9억 8천만에 계약. 3차에서는 경쟁상대가 나타나지 않자 본격적으로 폭리를 취해 61억엔어치의 수의계약을 맺었다.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가운데, 2003년 고이즈미 내각은 전자정부 실현을 위한 행동 계획인 '전자정부 구축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뒤이어 2004년 경에는 정부 전자화의 발목을 계속 잡고 있는 할거주의를 청산하기 위해 정보통신성 논의가 등장했다.발단은 이렇다. 2004년 제 1차 경제 자문 회의에서 고이즈미 왈,「구 통상산업성과 구 우정성 시절부터 구 통산성의 산업·경제, 구 우정성의 텔레콤 산업이 부처별로 나뉘어 있어 경제계도 곤란했을 것」「어떻게 안 되냐고 해도 도저히 수직적 분할(칸막이 행정)로는 안 된다」「연계를 강화하면 중복이 줄어드니, 경제재정자문회의를 잘 활용해서 융합시켜야 한다」크게는 두개의 성 - 총무성과 경산성으로 나뉘어 있는 정보통신 부문을 합쳐서 새로운 부처를 만들어 좀 효율적으로 정부를 굴려보자, 이것이며,https://www.rieti.go.jp/users/it/column/column040121.html RIETI - no.41: 「情報通信省」はよみがえるかRIETI - no.41: 「情報通信省」はよみがえるかwww.rieti.go.jp언론도 이런 기사들을 쓰며 고이즈미가 내비친 의견을 사실상 공식화해나갔다.문제는 경산성의 입장이다. 총무성의 IT 관계 부서는 2국 29과 609명. 경산성의 IT 관계 부서 1국 4과 85명으로는 영락없이 흡수당할 수 밖에 없지 않나. 당연히 이쪽에서 볼맨 소리가 터져나왔다.결국 고이즈미의 정보통신성 구상은 무산. 대신 IT 관계 성청 연락 회의 정도나 설치되는 정도로 마무리된다. 팽배한 할거주의는 끝없는 비효율을 낳았다. 더불어 IT 기본법의 이도저도 아닌 전자화 규정 때문에 상당수의 서류는 전자화되지 않은채로 남았다.그 결과를 요약하자면, 2005년을 기준으로,신청·신고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율 - 96.2%(13,719건)신청·신고 이외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율 - 65.0%(10,695건)[독립행정법인이 취급하는 행정 절차의 경우]신청·신고 관련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율 - 12.0%(175건)신청·신고 이외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율 - 7.0%(159건)그리고 전반적인 온라인화율은 10%대를 맴돌았다. 때문에 일본 정부는 2006년도 16%, 2007년도 21%, 2008년도 28% 순으로 차근차근 온라인화율을 올려 최종적으로는 50%에 달하겠다는 「온라인 이용 촉진을 위한 행동 계획」을 세우게 된다. 덩달아 e-Japan을 살짝 틀어 u-Japan, 유비쿼터스화 계획도 세운다. 허나 이듬해 고이즈미가 사임하며, 고이즈미 시대는 종료.인프라는 깔았으나, 이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서비스의 발전은 지지부진. 라이브도어 쇼크 같은 거나 터진다. 더불어 정부의 전자화는 기존 IT 기본법의 한계와 성청 할거주의에 의해 지연된다는 지대한 한계를 가진다.고이즈미 시대 개혁이 거진 다 그렇듯, 시작은 거창했고 나름 의미가 없는건 않지만 그렇다고 홍보한 것 처럼 경천동지할만큼 대단하지도, 갈수록 뒤쳐지는 일본을 구원할 정도로 훌륭하지도 않았던 것이다.다음? 정권 교대 총선으로 이어지는 캐삽질의 연속들. 총리부터가 순식간에 갈리고 덩달 담당 대신들도 휙휙 갈리는 상황. IT화 정책이 안정화된다거나, 성청간의 기싸움이 중재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곤...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엄밀히 말하면 이른바 '하라구치 계획'이라고 나름의 IT-전자화 계획이 있기는 했는데, 관료들이랑 기싸움 하기 바쁜 정권에서 무슨 대단한걸 해낼 수 있을까.게다가 얼마 뒤엔 3.11,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다. 11년을 기점으로 확 꺾이는 예산 그래프를 보라. 불황에 이어 대지진까지 맞게 된 일본 정부는 IT/전자화를 미뤄야 했다.원래도 미뤄온거 아니냐고?그러게.그리고 일본 민주당 정권의 폐허 위에서 마침내 아베가 재등장한다. 아베 정권은 이번이 몇번인지 감도 안잡히는 IT 국가 선언을 했다. 그리고 뒤이어 「내각법 등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 이른바 정부 CIO법을 통과시키고 내각관방에 내각정보통신정책감(정부 CIO) 직책을 설치한다. 이 직책의 목적은 부서간 할거주의를 타파하고 정부 전체를 아우르는 전자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일본의 전자정부화를 막 시작하던 고도~본부때부터 지적되던 약점을 고칠 직책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경직될대로 경직된 일본 정부는 아베 2기 집권기에서도 IT화가 지지부진했다.결국 코로나가 빵 터져서 내각 총리부터 국민 개개인까지 모두 지금까지의 시스템이 낡아빠졌고 그다지 기능하지도 못함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일본 정부의 전자화는 급진전될 수 있었다.개혁이라는게 참 쉬이 되는 일이 아니다. 기존의 관성이라는 것은 막강하기 그지없어, 이웃들이 욱일승천하는 것을 보고도 '이대로도 Ok!'라는 타성에 젖게 만든다.한국처럼 기존 인프라가 미비하다면 그 관성에 덜 얽매일 수 있었겠지만, 일본은 오히려 기존 인프라의 강자라 무리.클린턴이나 김대중-노무현처럼 해당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일관성을 가지고 추진한다면 관성을 깰 수 있었겠지만, 일본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존재할 수 없는 정치 환경이었다. 그리고 90년대와 00년대 일본 정치의 혼란상은 '일관성' 이라는 단어를 정계에서 축출해냈고.게다가 중요한 대목에서 등장한 지도자들은 해당 분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결국 한참 늦어져서 문제가 문을 두드리다 못해 부술 정도는 되어서야 일이 이루어졌다.비단 일본뿐일까. 20년대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초대형 청구서를 받아들고 나서야 뉴딜의 길을 걸었다. 프로이센에서 진정 국가 대개조급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예나 전역에서 나폴레옹에게 처참하게 깨지고 국가가 찢겨진 다음이었다.거 개혁해먹기 참 어렵다.출처일본의 e-Japan전략과 정보화 성과, 전창수/현창회전자정부 구축에 대한 국가간 비교연구, 김윤호/이명무일본의 정보화 : e-Japan과 u-Japan 전략을 중심으로, 전황수/허필선전자지방정부구축에 의한 한・일 행정개혁연구, 허훈e-Japan 전략과 일본형 IT 입국 방향성, 하원규日本における電子政府の現状と課題, 谷口洋志/高鶴日本の電子政府政策に見る「電子政府」の変遷, 本田正美日本における電子政府化政策のポリティクス・イン・タイム, 河昇彬日本における情報政策の展開, 神足 祐太郎日米両国の業務改革(BPR)への取組比較研究 , 奥村裕一 デジタル改革における政治的リーダーシップの把握に向けた試論, 庄司 昌彦https://www.komazawa-u.ac.jp/~kobamasa/reference/it_act/ITact001.htm
작성자 : Ashige_good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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