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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K 소스 관련 킹리적 갓심
TBK 소스 영상을 보다 보니 식재료에서 분명히 이건 한국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그래서 찾아봤다.계란은 국경을 넘어 옮겨다니기 어렵기 때문에, 이 계란은 분명 촬영지에서 구한 것 일것이다.Cocorette 라는 상표가 보이는데, 이는 프랑스의 계란 공급업체 이름이고밑에 써진 Fermier 는 프랑스어로 농부라는 뜻이다.즉 촬영지는 프랑스이다.다른 힌트는 종종 쓰는 포장된 야채인데, 잘 안보이지만 Chef 라는 상표가 보이고 밑에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영어로 상표명이 써있다.이건 Metro Chef라는 브랜드로, Metro라는 독일계 할인점의 PB상품 같은 것이다.독일계이긴 하지만 지점이 프랑스, 영국등에도 있다고 함.따라서 TBK 영상은 프랑스에서 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왜 저딴걸 프랑스까지 가서 찍는지는 접어두고서라도프랑스... 백종원... 프랑스..?장사천재 백사장 시즌3는 프랑스에서 4월 말에 촬영했다.정확히는 가게는 4월 21일부터 4월 30일까지 운영했다.근데 백종원은, 오재나 인터뷰 영상에서 보듯이 5월 4일 입국했다. 그러면 그 사이에 뭘 했을까..?밑에 5/31이라는 표기가 보인다.당연히 유통기한으로 보이고, 다른 제품들을 냉동을 쓰는 경우가 많은걸로 보아 냉동야채라고 가정까지 한다면장사천재 찍는다고 프랑스 갔을때 찍었거나최소한 그때 세팅을 해놓은 영상임을 추론해볼 수 있다.혹시 장사천재 백사장에서 쓰던 레스토랑을 가져다가 지 회사용 촬영장으로 쓴건 아닐지 의심해본다.즉 국내에서 해결되지 않는 볼카츠문제나 농약통 문제로 아우성치고 있을때ㅈ까라 하면서 이런 영상을 만들고있었던 것으로 의심된다.그 영상의 수준은 뭐 아래로 대체한다. Garlic을 Garlics로 쓰면서 일관성도 못지키는 동아리 수준이다.
작성자 : 백갤러고정닉
알렉산더 알레킨 4부 - 한 시대의 끝
[시리즈] 체스사 시리즈 · 체스는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 중국 장기는 중국인이 발명했는가? · 체스 유럽 전파 초기의 무서운 이야기 · 1000년 전의 이슬람 체스 퍼즐, 만수바(مَنصوبة) · 15세기의 체스 대격변 패치, "여왕의 체스" · 대수기보법과 오스만제국 출신 체스마스터 이야기 · 벤저민 프랭클린, 체스의 교훈 · 1824년, 런던 - 에든버러 클럽 서신체스 매치 · 에반스 갬빗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 인디언 오프닝과 어느 시골 브라만의 이야기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上 - 영웅편 -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下 - 악귀편 - · 윌리엄 슈타이니츠 : 세계 체스 챔피언의 탄생 · 엠마누엘 라스커와 지크베르트 타라쉬, 두 독일 유대인 체스마스터의 삶 · 에드워드 라스커, 엠마누엘 라스커와 바둑 · 예술운동으로서의 하이퍼모더니즘 · 식민지인이었던 내가 대영제국의 체스 챔피언?! · 알렉산더 알레킨 1부 - 제국의 총아 · 알렉산더 알레킨 2부 - 카파블랑카와의 결전 · 1933년, 체스 최강자와 쇼기 최강자의 만남 · 알렉산더 알레킨 3부 - 추락과 부활 · 체스 선수는 기보 저작권의 꿈을 꾸는가? · 카르포프와 카스파로프가 월챔 48게임을 뛰게 된 배경 · 미국체스협회 레이팅 2위를 달성한 살인범의 이야기 · 체스 역사 속의 TMI들 · 체스를 주요 모티프로 삼은 유명 문학작품들 1939년 8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제8회 체스 올림피아드가 개최되었다.아르헨티나가 야심차게 기획한 제8회 올림피아드는 처음으로 유럽 밖에서 치러지는 올림피아드였으며, 역대 최다 참가국 기록을 세운 초대형 행사였다.12년 전 카파블랑카와 알레킨이 챔피언 자리를 놓고 대결을 펼쳤던 바로 그 도시에 각국의 국가대표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그중에서도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역시 이 두 사람.프랑스의 1번 보드 알렉산더 알레킨, 그리고 쿠바의 1번 보드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카파블랑카가 다시금 챔피언 도전자로 재거론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둘의 대결이 시작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지만, 카파블랑카는 "알레킨 박사와는 대결할 생각이 없다"라며 미리 선을 그었다.둘의 사이는 여전히 냉랭하였으며 서로 마주쳐도 대화조차 나누려 하지 않았다.그러나 올림피아드 진행 와중에도 알레킨과 카파블랑카의 챔피언 협상은 물밑에서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이전에 거의 타결 단계에 이르렀던 보트비닉과의 매치 협상이 이를 반대한 소련 관료들의 관료주의적 지연책에 의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말하자면 알레킨으로서는 카파블랑카와의 매치를 예비책으로 준비해두고 있었던 셈이다.미국과 소련의 불참으로 AVRO의 정예 멤버들이 대부분 빠진 가운데, 알레킨과 카파블랑카는 1번 보드에서 어김없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고, 알레킨이 이끄는 프랑스 팀과 카파블랑카가 이끄는 쿠바 팀 모두 결선 A조에 진출하였다.그리고 1939년 9월 1일, 결선 첫날 아침.유럽에서 전보가 쉴새없이 날아들기 시작했다.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동원령을 발령했다.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다.전쟁 발발 당일, 알레킨은 아르헨티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독일을 강력히 비판하며 독일 팀과의 경기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하였다.결선 진출팀 중 하나였던 영국 팀은 바로 짐을 싸서 본국으로 귀환했다. (귀국 후 영국 팀 멤버였던 해리 골롬벡, 휴 알렉산더, 스튜어트 밀너베리는 에니그마 해독팀에 파견되었다.)대회는 그대로 파행 위기에 처했지만, 주최 측이 기지를 발휘하여 참전국들은 서로 경기를 실제로 치르지 않고 무승부로 하는 조건으로 경기가 속행되었다.그 결과, 1위는 독일, 2위는 0.5점 뒤처진 폴란드가 차지했고, 1번 보드의 개인 금메달은 카파블랑카, 은메달은 알레킨이 가져갔다.1939 올림피아드가 끝났지만 수많은 체스 마스터들은 전쟁이 시작된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아르헨티나에 남았다.독일 팀 전원과 폴란드 팀 대부분(미구엘 나이도프 포함)이 아르헨티나 잔류를 택했고, 프랑스 팀에서도 잔류자가 나왔다. 알레킨의 아내 그레이스가 미국인이었으므로, 알레킨에게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말고 그대로 미국으로 떠나라는 제안이 있었다.그러나 알레킨은 프랑스행을 선택했다. 자신을 새로이 받아들여준 조국을 지켜야 한다며, 프랑스의 동원령에 응할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그때 아르헨티나 체스계에서 그를 만류하였다. 체스계가 오래도록 갈망해왔던 알레킨 - 카파블랑카 매치를 개최하기 위해 남아달라는 것이었다. 카파블랑카와 알레킨 모두 원칙적으로 이 제안에 동의하였다."대국 규칙에 관해서는 런던 규칙이면 되겠습니다만, 귀하께서 게임 수에 제한을 두는 방향으로 변경하시고자 한다면, 저는 그 수정도 기꺼이 수락합니다. 또한 귀하께서 원하시는 합리적 수정이라면 무엇이든 수용할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저와 합의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귀하께서 알레킨 씨로부터 조건을 얻는 즉시 최종 합의를 위해 저는 언제든지 대기하겠습니다.""저는 예비역 공식 통역관으로 동원 대상입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타이틀전처럼 장기간의 의무를 계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관계자들의 선의와 주최 측의 의지가—이전의 몇몇 경우와는 달리—진지하다면, 형편이 허락하는 때에 이 계획된 경기가 실현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성사 직전까지 갔던 이 매치 협상은 전쟁 발발 직후 혼란상 속에 아르헨티나 체스계가 자금을 조달하는 데 실패하며 좌초되었다.알레킨은 협상이 결렬되자 대서양을 건너는 배를 타고서,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프랑스로 향했으며, 또 한 번의 세계대전에 다시 몸을 던졌다.20여 년 전 1차 대전에서 러시아의 의무병으로 복무했던 알레킨은, 2차 대전에서 이제 47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통역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전과라 칭할 만한 것은 전혀 남기지 못했다.프랑스는 독일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제대로 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프랑스는 6주 만에 함락되었고, 수많은 프랑스인들은 남부를 향해 피난을 떠났다.패전으로 전역한 알레킨도 이 피난 행렬에 동참하여,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유에 이르렀다.그러나 남부로 떠난다 한들, 어디로 도망칠 수 있었을까? 1930년대 말부터 이미 아메리카 각국은 입국요건을 대폭 강화하고 있었고,이베리아 반도로 가는 국경 역시 서류를 모두 갖춘 극소수에게만 열려있었다. 알레킨은 마지막 동앗줄을 붙들었다.1940년 7월, 알레킨은 마르세유 주재 쿠바 영사를 통하여 쿠바 당국에 전보를 보낸다. 카파블랑카와의 재대결을 원한다고.재대결이 성사된다면 알레킨은 아메리카로 떠날 비자 뿐 아니라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할 자금도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카파블랑카는 알레킨이 유럽으로부터의 피난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단지 비자 취득을 위해 거짓된 제안을 던져본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다.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 제안을 몹시 반겨, 쿠바 당국의 스포츠 부문 책임자 하이메 마리네 대령에게 편지를 보내 알레킨과의 매치를 성사시켜달라고 청원하였다.그러나 쿠바 당국은 일체의 재정지원과 비자 발급을 거부하였다.카파블랑카는 쿠바에서의 매치 성사가 좌절되자 뉴욕에서 알레킨과의 챔피언전 개최를 위한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였으나,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2년 3월 뉴욕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이후 알레킨은 쿠바 외에도 아메리카로 떠날 길을 찾아 미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여러 국가의 문을 두드렸다.알레킨은 난민 수송이 집중되어 있던 중립국 포르투갈의 항구 리스본에 머무르며 비자 발급을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이번에는 아메리카의 비자를 기다리는 사이 포르투갈 비자가 만료되었고, 파리로 발길을 되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알레킨을 둘러싼 모든 상황은 절망적이었다.아내 그레이스는 파리에 남아있던 자신의 재산을 지키러 떠났다가 더 이상 독일로부터 출국 허가를 받지 못한 채 억류되었고, 그가 그토록 원하던 아메리카로 떠날 비자는 발급되지 않았으며, 그 사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과할 비자마저 만료되었다.그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했을까,1941년 3월, 알레킨의 명의로 된 칼럼 하나가 독일의 선전용 일간지 Pariser Zeitung에 게재된다.제목, Arisches und jüdisches Schach. 『유대인 체스와 아리아인 체스』이 칼럼은 체스계를 곧장 커다란 충격에 빠뜨렸다."라스커의 죽음으로, 두 번째이자 아마도 마지막 유대인 세계 체스 챔피언의 시대가 함께 막을 내렸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그동안 유대인의 방어적 사고에 오도되어 온 아리아인 체스가 마침내 정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지나치게 낙관하지 않으려 한다. 라스커는 하나의 학파를 만들어 제자들을 남겨 놓았고, 그 제자들은 체스에 상당한 해악을 끼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도대체 유대적 체스, 유대적 체스 사상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다. 1)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는 것, 2) 기회주의—가능한 위험의 그림자까지 없애려 드는 극단으로 밀어붙인 기회주의—그 결과 (그걸 과연 아이디어라 부를 수 있다면) 하나의 아이디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자체로서의 방어!" 이 아이디어는, 모든 형태의 싸움에서 결국 자살에 다름없다. 바로 이 아이디어 때문에 장래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유대적 체스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님조비치가 그의 『나의 시스템』으로 그랬던 것처럼, 레티도 소책자 『모던 체스 아이디어』로 앵글로-유대적 사이비 지식인 다수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1937년 오이베와의 설욕전에서도 다시금 전(全) 체스 유대사회가 동원되었다. (...) 내가 싸워야 했던 대상은 네덜란드인 오이베가 아니라 전체 체스 유대사회였으며, 실제로 나의 압도적 승리는 유대인 음모에 대한 승리였다. 덧붙여 분명히 강조하건대, 내 체스 대결들은 결코 개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고 항상 체스 유대주의라는 사상에 맞선 것이었다. 바로 앞서 말한 그 대결 또한 인간으로서의 오이베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부디 일시적이었기를 바라지만) 유대인의 영향에 굴복하여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당한 한 사람을 상대한 것이었다."아리아인이 발전시킨 체스를 유대인이 오염시켰다는 주장이 담긴 『유대인 체스와 아리아인 체스』는 동료 선수들에 대한 모욕과 나치 독일에 대한 노골적 아부로 점철되어 있었고,"라스커는 평생 동안 나의 스승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이전 알레킨의 발언과 크게 대비되어 체스계에 더욱 큰 충격을 안겼다.훗날 알레킨은 이 칼럼에 대해 자신이 작성한 원본 텍스트를 편집자 측에서 마음대로 수정한 것이며, 독일이 포르투갈로 가는 통행증을 내주는 조건으로 칼럼 투고를 내걸어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였다.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는 알레킨이 직접 이 칼럼을 작성하였다고 본다.『유대인 체스와 아리아인 체스』는 그의 이후 발언·텍스트들과 내용적으로 일관성이 있으며, 심지어는 알레킨의 친필 원고를 보았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다만 비자 발급 조건으로 어쩔 수 없이 칼럼을 작성했다는 주장은 그의 행적을 보면 거짓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이 칼럼을 작성한 뒤 알레킨은 다시 포르투갈 비자를 발급받아 1941년 3월부터 9월까지 리스본에 체류하며, 아메리카행 비자를 간절히 기다렸다.그러나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비자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알레킨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프랑스로 돌아왔고,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친나치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나치 독일의 국민계몽선전부(RMVP)는 아르헨티나로 도망친 FIDE를 대신할 조직으로 유럽체스연맹(Europaschachbund)을 창립하여 체스계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있었으며,세계 챔피언 알렉산더 알레킨은 당연하게도 이에 딱 맞는 얼굴마담이었다.프랑스로 돌아온 알레킨은 나치 독일이 개최한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으며, 그 대신 풍족한 경제적 보상을 받아 이전의 호화로운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파리에 억류되어 있던 아내도 대독일권 내의 이동 허가증을 받아 알레킨의 중부 유럽 투어에 동행할 수 있었다.이렇게 알레킨이 나치 독일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준 결정적 연줄은 악명 높은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였다.한스 프랑크는 히틀러의 법률 고문으로 출발하여 나치의 고위 관료 자리까지 오른 인물로, 1939년 폴란드 총독으로 임명되어 총독부 관할지역 내에서 강력한 행정·사법권을 휘둘렀다.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됨.)개인적으로 그는 예술 애호가를 자처하여 각종 미술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체스 역시 그의 각별한 관심대상 중 하나였다. 체스를 꾸준히 후원해온 한스 프랑크는 알렉산더 알레킨과 전쟁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으며, 이미 보골류보프를 총독부에 고용하고 있기도 하였다.한스 프랑크는 총독부 산하의 연구기관 독일동방연구소(IDO)에 자리를 마련해 알레킨을 고문으로 꽂아주었으며,알레킨은 나치 독일의 선전용 행사나 군 위문행사에 참가하는 정도의 간단한 임무를 맡으며 매월 1,000 라이히스마르크 상당의 고액의 봉급을 지급받았다.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소련·독일 등으로 분절된 체스 세계에서 알레킨은 유력 경쟁자 파울 케레스를 누르고 독일권 체스계의 최강자로 군림하였으며,1942년 창설된 나치의 유럽체스연맹에서도 연맹의 지도부 13인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2차 대전 발발 당시 나치 독일을 그토록 규탄했던 알레킨은, 평안한 생활을 위해, 그리고 파리에 남겨진 아내를 위해, 나치와 너무나도 깊게 손을 잡고야 말았다.물론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나 이어지진 않았다.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북아프리카 전역의 종결. 1943년 중엽이 되면 점차 나치 독일의 패망이 가시화되고 있었다.1943년 가을, 알레킨은 스페인 마드리드 토너먼트 참가를 구실로 삼아 스페인으로 떠났고, 다시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내 그레이스의 출국 허가는 나오지 않아 그녀는 파리를 떠날 수 없었다.알레킨은 또다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메리카행을 시도하였지만, 나치 협력 사실이 이미 널리 퍼진 알레킨에게 비자가 나올 리 없었다.2차 세계 대전 말엽,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알레킨은 동시대국과 조그마한 토너먼트를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술과 담배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며 그의 건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으며, 독일에서 벌어온 돈은 점점 줄어들어 바닥을 보였다.동시대국에서도 언제나 상대를 봐주는 법이 없이 몰아붙이던 자존심 강한 알레킨은, 이제 부자와 유력자를 만나면 일부러 져주며 상대에게 아부하였다.세계 챔피언의 비참한 몰락이었다.1945년 5월, 결국 나치 독일은 패망을 맞이하였다.체스계는 다시 한 번 통합되었고 전후 토너먼트들이 하나둘씩 준비되기 시작했지만, 그곳에 알레킨의 자리는 없었다.당초 알레킨은 1946년 1월의 런던 승전 축하 토너먼트에 초대되었으나 미국 체스 연맹과 네덜란드 체스 연맹이 알레킨이 출전한다면 출전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알레킨의 친나치 행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충격적이었던 『유대인 체스와 아리아인 체스』를 기억하는 체스 선수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알레킨은 자신이 강압에 못 이겨, 아내를 위해 나치에 협력했을 뿐이라는 입장문을 발표하였으나 여론이 쉽사리 뒤집어지지는 않았다.런던 토너먼트 중 오이베의 주도로 알레킨의 나치 부역 혐의를 조사하는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위원회는 FIDE에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회부하였다.그 어떤 대회에도 초대받지 못한 채, 알레킨이 실의에 빠져 더욱 비참한 나날을 보내던 와중, 1946년 3월 초, 리스본 주재 영국 대사관을 통해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발신자는 소련의 미하일 보트비닉이었다."알렉산더 알레킨 박사께! 1939년에 우리의 매치가 전쟁으로 인해 치러지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세계 체스 챔피언 타이틀을 위한 매치에 다시 한 번 도전하고자 합니다. 동의하신다면, 저의 공식 대리인과 모스크바 체스클럽이 귀하 또는 귀하의 대리인과 대국의 조건, 일시, 장소에 관하여—가급적이면 영국 체스 연맹의 참여하에—협의하겠습니다. 회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대국의 일시와 장소에 대한 귀하의 선호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모스크바 체스클럽 앞으로 회신 전보를 보내 주시고, 이어 우편으로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1946년 2월 4일 미하일 보트비닉"전후 소련 지도부는 국가 위신을 위해 체스 세계 챔피언 타이틀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고, 심지어 알레킨의 나치 부역 전력마저도 개의치 않았다.보트비닉은 이 매치를 위해 소련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정치적 이유로 알레킨을 모스크바로 초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지만, 런던에서 개최한다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 소련 측의 판단이었다.알레킨은 몹시 기뻐하며 즉시 보트비닉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이 챔피언십 매치는 알렉산더 알레킨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주었다. 충분한 수입을 확보하고 다시 체스계로 복귀할 발판.그의 말년을 함께 한 포르투갈의 체스선수 프란시스코 루피는 알레킨이 이 소식을 들은 뒤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고 회고하였다.물론 승산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알레킨은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몸을 완전히 망친 상태였고, 의사로부터 오래 살지 못할 것이란 경고까지 받았던 상황이었으며, 보트비닉은 기력이 정점에 다다른 상태였다.그럼에도 알레킨은 눈을 불태우며 보트비닉과의 매치를 준비하였으며, 루피에게 자신이 파노브 어택의 바리에이션을 연구 중이라고 귀띔해주었다.1946년 3월 23일, 영국 체스 연맹은 알레킨-보트비닉 세계챔피언십 매치 개최를 확정지었고, 알레킨이 거주하는 에스토릴로 전보를 보냈다. 매치 개최를 알리며 알레킨을 런던으로 초청하는 내용의 전보였다.그러나 그 전보는 알레킨에게 닿지 못했다.1946년 3월 24일, 알렉산더 알레킨은 에스토릴의 작은 호텔방에서 숨을 거뒀다.포르투갈 당국이 밝힌 공식적인 사인은 작은 고깃조각에 의한 질식사.석연치 않은 죽음과 그 시기로 인해 당시부터 여러 음모론이 나돌았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암살하였다거나, 소련의 보트비닉 반대파가 개입하였다거나.물론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된 물증은 없었다. 모스크바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촉망받는 천재로 태어난 알렉산더 알레킨은, 이렇게 유럽의 반대편 끝에서 고독과 가난 속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평생 소중히 간직해 온 황제가 하사한 꽃병 하나만이 곁에 남아, 그의 임종을 지켰다.여기서부터는 알레킨이 죽은 뒤의 짧은 후일담.알렉산더 알레킨은 챔피언 재위 중 사망한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현재까지 유일.)세계 챔피언이 공석이 되자 체스계는 다음 챔피언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큰 혼란에 휩싸였고, FIDE가 이 논쟁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FIDE가 그토록 간절히 원해왔던 세계 챔피언십의 관리권을 바로 이때 획득하게 된 것이었다. 보트비닉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 취득을 당연시하고 있던 소련은 알레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크게 당황했고,보트비닉을 비롯한 소련 선수들이 세계 챔피언 경쟁에서 배제될 것을 우려하여 독자노선을 포기하고 1947년 FIDE에 가입하게 된다.FIDE는 1938년 AVRO 토너먼트의 참가자 명단을 바탕으로 챔피언 도전자를 선발하였고, 이중 사망한 카파블랑카와 알레킨, 체스계를 떠난 루벤 파인은 제외되었으며, 소련의 요청으로 살로 플로르 대신 바실리 스미슬로프가 참가하였다. 최종 결정된 명단은 막스 오이베, 바실리 스미슬로프, 파울 케레스, 미하일 보트비닉, 사무엘 레셰프스키 총 5인. 미하일 보트비닉은 이렇게 개최된 1948년 세계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승리하며, 6대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이로써 세계 챔피언 타이틀이 개인의 소유물로 여겨졌던 시대는 막을 내렸으며,국가의 체계적 지원을 무기로 삼은 소련 체스의 20여 년간의 장기 독주가 시작되었다.알렉산더 알레킨은 1946년 포르투갈 에스토릴의 허름한 무덤에 매장되었으나, 1956년 FIDE에 의해 이장되었다.소련 체스계는 당초 러시아로 무덤을 이장하려 했지만 아내 그레이스가 파리 매장을 원하여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이장식에는 보트비닉, 케레스, 페트로시안을 비롯한 수많은 체스 마스터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작성자 : 김첨G고정닉
2025Worlds 4강-GEN/KT 리뷰&몇몇 픽들과 그외 잡다한 리뷰
- 관련게시물 : 비디디 쵸비 순수 1대1 솔킬장면 gif(GEN/KT)작성자는 13년도 유입 슼갈입니다.늙은 미드고, 브론즈 오리아나 장인입니다.그러니 반박하고 싶으시면 브론즈도 알아듣게끔 해 주시고, 정 좆같으면 롤알못 씹!새끼라 욕하십시오.아무튼 이 글은 오늘 경기 전반적인 리뷰와, 몇몇 새로운 '메?타?픽' 들에 대한 정리, 그리고 간단한 여러 잡다한 생각들을 쓴 글이예요.잡다할수있음 양해부탁합니다~역대급 캐리머신이었죠... 네.잠깐. 시발 너 슼갈이라면서 왜 티원 경기 끝난 다음엔 출몰 안하다 이럴때만 출몰하냐?내 팀 경기 안햇으니 편하게 갤질하는거지 뭐.... 4강 정도면 챙겨볼만 하고.아무튼 비디디 선수 결승진출 축하합니다.KT의 승리 요인은 그냥 오브젝트 싸움을 유리하게 가져간다, 이겁니다.퍼펙트가 솔직히 기인을 라인전에서 찍어누른다 < 이런 건 없었습니다. 애초에 기대를 하던 사람이 없었죠?오늘 퍼펙트가 빛났던 건 이퀄 기깔나게 깔고, 오른으로 한타 포커싱 쫙 빨고. 한타 집중도가 참 좋았어요. 이런 오브젝트 싸움 중심 운영 누가 잘합니까? 커즈 씨에요 커즈 씨.T1에 있을 때 오브젝트 귀신이라 욕 많이 쳐먹었었는데, 참 이럴 때 보면 잘하는 정글은 맞습니다.그때 그냥 시절이 안 좋았던거지.밑에서도 말하겠지만 문도 임마가 오브젝트 정글링 귀신입니다.대신 사이드 운영이나 라인 클리어 같은, 소위 말해 '결정타' 능력은 조금 부족한 조합들이었습니다.젠지는 그걸 보고 드러눕는 픽을 선택했지만 (애니비아 <- 밑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라인전 이기고 궁으로 라클하는 라딸이 가미된 시비르 메이지라 생각하면 됩니다)결국 비디디 선수를 필두로한 환상의 이니시 한타 박살 쇼가 통했죠?피터도 참 잘했습니다. 덕담도 어디 2군딱 원딜 생각나던 그 실력도 아니었고.쵸비 선수는 솔직히 부족했으요.오리아나로 조금 더 리드를 못 따는 거야 뭐 괜찮다 싶었지만, 첫 데스 이후 멘탈이 흔들렸나 싶은 솔킬이 한번 더 터져서.... 템 차이가 나니까 킬 프레셔가 안올라갔어요.그 외 다른 팀원들이 고점이었다면 버텨졌겠지만, 그것도 안 됐죠.안 되는 날도 있는 겁니다. 항상 그게 월즈에서 터지니 아쉬운 선수인거죠.다음에는 꿈을 가지고 와 봅시다. 그 외에 몇몇 신이한 픽들에 대해 좀 살펴보자면.문도 박사는 조금 멍청한 신짜오라 보면 됩니다.얘는 사실 탱커가 아닙니다. 브루져에요. 후반 왕귀형 브루져.탱킹 요소가 별로 없습니다. w / 궁을 제외한 모든 게 딜에 치중되어 있어요. 탱커라면 무조건 들고 있는 CC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유지력도 궁 하나에만 의존한 형태.아마 패시브가 최대체력 올라야 체젠이 오르는 패시브로 기억하는데 + 아마 e인가 스킬 딜에 체력계수인 놈이라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결국 템이 나와야 딜탱이 다 되는 놈인 겁니다.얘가 광물 학살자에요. 왜냐. 후반가서 원딜이 문도랑 거리조절을 못하거든.반대로 말하면, 얘가 왜 피어리스 후반에만 나오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겁니다.브루져는 1~2코어 타이밍이 세야죠. 물론 세긴 합니다. 근데, 짜오같이 똑똑한 체급짱도 아니고 자르반 바이처럼 개억지 스펠교환을 유도하는 스마트한 브루져 정글이 아니죠.순수 체급 하나로 벌어먹는 놈인데, 프로 단계에서 문도는 과성장하지 않으면 그냥 피주머니 이상 되기가 힘듭니다.이 놈의 파워커브는 원딜과 매우 유사한데, 그럼 당연히 프로 단계에선 거리조절 잘하는 원딜에 대가리 터지겠죠?광물에선 Q 다맞아주고 싸워주니까 성립되는 거지 얘 진짜 존나 머엉청합니다.즉, 체급은 짜오와 비슷하나 유틸이 거세된 브루져 정글. 딱 그정도로 보면 됩니다.엥 KT GEN에서 존나 잘버티던데요 <- 화공용이잖아.화공용이면 원딜도 나르랑 1대1이 돼.진짜로.얘는 라딸캐입니다.여기서 설명이 끝났어요. 예전처럼 블루 몰아먹으면서 라인 지우는 궁에 모든걸 거는 놈이 아니라평e평 감전딜교로 초반 상대적 우위를 가져간 다음 궁깔고 Q심리 벽심리 하는 애에요.그럼 얘가 왜 피어리스 후반에 나오는지 알겠지?초반 딜교가 오리아나 탈리야 같은 놈들에 비해 우월한가? < 그냥 저냥 좋음후반 밸류 딸깍이 훨씬 쉬운가 < X, 라인클리어 어차피 메이지는 "마나라는 자원 때문에" 후반 가면 못함, 탈리야가 템뜨면 나오는 무한 돌던지기나 오리아나 충격파 밸류를 못이김1~2티어픽들 다 빠지고 라인전에 하자가 있거나 어디에 하자 있을 때 나와서 한타 열리면 앞에서 개기다 벽r깔고 플로 빼서 빨아먹는 식으로 플레이 하는 놈이에요.딱 봐도 존나 구리죠? 조건이 존나 많아 근데 대신 초반 라인전이 셉니다.초반에 벌어서 중반에 시비르처럼 쓰는 앱니다. 시비르가 딱 얘처럼 하거든요 스펠쉴드로 스킬 빨고 튕부로 갈갈갈.근데 시비르는 평타인데 얘는 장판형 스킬이라.... 딜 프레셔가 막 시비르처럼 치명적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해서 구립니다.그리고 화공용에 존나 약합니다. 틱뎀이라.한 줄 요약.조금 물렁한 대신 딜이 잘 나오는 우디르.당연히 탱커 잘잡고, 진형붕괴 좋은데, 점점 힘 빠지는 전형적인 초반 강한 브루져.TES전 걱정이 됩니다....그냥 뭐 모든 경기가 사실 걱정이 됨.22년 DRX 생각나서 벌써 부랄떨린다 이런 놈들이 있는데 사실 이런 놈들은 좆뉴비거든요.뭐 당장 Bdd LZ도 있었고 18-21 좆박은거 원더의 탑파이크가 으아아악 이런 거 다 겪은 새끼 입장에선 당연히 경기 들어가기 전 까진 모른다 이겁니다.미라클런 우승도 사실 그냥 되라 되라 존나 빌었던 입장에서 상대를 병신 홍어좆으로 본다? 이딴 말을 하는 거 자체가 실례다.DRX때 진짜 뭐 상대 좆으로 본건가 롤갤에 왜 병신같은 글 쳐올렸는지 몰라 아니 나는 시발 젠지잡았다고 존나세겠네 하면서 벌벌 떨면서 경기보는데벌써 롤갤 뉴비새끼들은 축제야 몇년만에 우승이다 지랄ㅋㅋ 시발 월즈 우승이 그렇게 쉬운줄아나월즈가 쉬워?이게 존나 말이 안 되는 거에요....나는 그래서 항상 그냥 믿는다 응원한다 티원이 이긴다고 생각하는거지막 뭐 이미 따먹은 당상이다 이미 결승 우승했노 ㅋㅋ < 이런 적이 한 번이 없어 나는 시발존나억울해!!!근데 뭐 팬질이라는 게 이성적이면 재미있습니까 그게fan이라는 단어 어원 자체가 제정신이 아닌 그런 거에서 나왔다 안카요그냥 묻고 응원하고 지면 에이 시발 좆같노 하고 안보는거지.~하면 뭐 우승 안해도 괜찮음 ㅋㅋ (어차피 내 좆집~) 이런 마인드가 이상하다 이겁니다.암튼 이번에 젠지 팬 여러분도 시원하게 당했으니 잘 생각들 해 보시고.패배했을때.감코 탓을 존나 하고 싶을 겁니다.당연한 거에요. 패배엔 분명 감코의 영향도 있고, 내가 빠는 선수 탓 하기 싫으니까 감코 탓 마렵죠.나도 톰 마타 씨발년아 욕하고 그랬어 뭐 어떡해 그럼 밴픽도 분명 문제 있었는데.우린 남이잖아, 코치가 내가 빠는 선수야? 아니잖아 그럼 욕 하는 거지 뭐 모니터 밖에서 나 녹화해서 고소하겠냐고 ㅋㅋ제발 하지 말아 주십시오. T1 프런트 여러분들. 이거 다 그짓말입니다.아무튼 뭐 감코 욕하는 거로 너무 뭐라 하지 마라 내가 말해도 어차피 존나 돌리면서 노는 거 확정이니그때를 즐겨라! 시발 뭐 나중가면 덤덤해져 뭐. 돌리면서 노는거지.클린 팬문화 이딴 거 기대도 안하긴 하는데 그냥 늙은 청년 1 입장에선 뭐.... 그렇다 그거죠 늙은 뻐킹 미드라이너가 해봐야 무슨 감정이 있겠어요아무튼 뭐 KT 팬분들 축하드리고.나는 당장 내일 테스전 걱정에 갤 올 엄두가 안 난다 이거죠. 내일은 걍 갤을 꺼야할거같아서 지금 쓰는 겁니다 뭐....씨 발 그냥 좆나무섭다고 그냥 원래 내가 빠는 팀 경기 전에, 그것도 뭐 리그 1경기 이딴게 아니라 싱글엘리미네이션 경기 전에는 존나 쫄리는 게 당연한거에요23LNG 대떡냈다고 지금이야 좆밥 좆집팀 이러지만 하기 전에는 진짜8강딱인가? 아니다 그래도 잘 했잖아 팀즙에게 흔들렸지만 복구했잖아 벌벌떨면서 봣는데아니면 뭐 너가 아닌거고 난 그랬다고....Worlds 가 왜 가장 빨리고 중요한 대회일까.예전부터 생각을 해 봤던 주제인데, 핵심은 모든 팀이 달려들어 따고 싶어하는 '마지막 승리'의 장이기 때문 아닐까.모든 대회는 단 한 팀을 제외하면 패배로 끝나고, 응원하는 팬 입장에선 속이 뒤틀립니다. 당연한 거에요.Worlds는 세계에 모든 팀들을 그러모아, 마지막 승리를 향해 내달리라고 만든 투기장이자 일종의 축제입니다.그 수많은 난관, 이 로스터의 마지막을 승리로 장식하고 싶은 이들이 얼마나 많겠어요.Uzi도 실패하고Caps도 도전하며Chovy도 오열하는수많은 선수들이 월즈를 얻고 싶은 건 당연한 겁니다.모든 우승은 값지다고 생각합니다.하지만 모든 선수들이 하나를 위해 달리는, 한 해의 가장 위대한 대회가 Worlds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없다고 봄. 뭐 니가 아니다 아시안게임이 최고다 하면 어쩔건데세상 사람들 다 월즈따먹겠다고 슈퍼팀 만들고 대퍼팀 만들고 반지원정대 만들고 지랄 염병을 하는데 니만 부정하던가 ㅋㅋ아무튼 두서가 없었지만 뭐.... 결론은 이렇다.KT 팬 축하드린다.근데 우승은 개좆슼이 꼭 하는 거 보고 싶다.양보 이지랄하는거 존나 오만한건데? 뭐 너가 괜찮다면 너는 괜찮은 거고 나는 안괜찮은거고 시발 여까지 왔아면 우승 해야지 씨발!!!!!테스 이기고 먹텝 이기고 쓰리핏 하고 레전드 사건 또 열고 상습숭배하고 그러고 싶은데 ㅇㅇ....아무튼 그렇다.그 외에 대회 ~~같은 거 병신같았어요! 같은 글도 질문 받습니다.
작성자 : 롤붕리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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