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은 방과 후에 주번인 나를 끝까지 기다렸다. 다른 아이들은 다 집에 돌아갔을 시간이지만 그녀는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꼭 확인한 뒤에서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할 말이 있으니 잠깐 보자고 말한다. 좋아. 집에 가는 길에 해 줘. 사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뻔히 알지만 나는 부러 모르는 체 시치미를 떼고 말한다. 해질무렵의 노을이 학교의 회백색 벽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붉게 적셔가고 있을 때였다. 하굣길엔 거의 아무도 없었다. 추운 날씨에 아이들은 집에 서둘러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렇게 둘은 말 없이 한참을 길이 갈리는 교차로까지 함께 걸었다. 중간중간에 공부나 노래, 혹은 프리파라 따위를 주제로 삼아 말을 꺼내보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대화들은 스르륵 잦아든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들을 나누다 어느 새 두 사람은 교차로까지 다다랐다. 시온은 자동차들이 이리저리 지나가는 모습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지켜보다가 입을 몇 번 뗐다 다물었다 하기를 반복했다. 본인은 그 모습이 상대방을 가슴졸이게 한다는 사실을 알까. 마치 영겁의 세월 같았다. 내가 괜히 조마조마해져,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신호등은 초록색 눈을 번쩍 뜨고 만다. 작별할 때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시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 말은 다 했어? 시온은 마음을 굳힌 듯 눈을 내리 깔고, 응, 그럼 내일 보자. 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시온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다.

그러니 헤어질 시간이다. 곧장 횡단보도에 한 쪽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시온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시온을 바라본다. 하지만 막상 시온은 우물쭈물대며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날카로운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지나가고 동시에 교복 치마가 물결친다. 빨간 불 되겠어. 내가 말했다. 시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더니 결심을 굳혔다는 듯이, 비장한 표정을 짓고선 내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말한다. 내 초콜릿 받아주지 않을래...? 그렇게 말하고 시온이 주섬주섬 가방에서 꺼낸 초콜릿은, 하트 모양의 상자에 담겨 있었다. 부끄럽고 두렵다는 듯이 초콜릿을 수줍게 내민 손이 너무나 귀여웠다. 나는 그 초콜릿을 품에 꼭 감싸안았다. 그리고선 너무 기뻐서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고 고맙다고 몇번이고 말했다. 신호등은 이미 깜빡대며 빨간 불로 바뀌었지만 상관 없다. 영원히 저 불이 빨간 채로 남아서 집에 돌아가지 못해도 좋을 것 같으니까. 초콜릿을 맛보는 건 조금 뒤로 미뤄 두고, 노을 탓인 지 불그스름한 얼굴색을 하고 있는 시온을 강하게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