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게임동아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추가한 갤러리가 없습니다.
0/0
타 갤러리 게임동아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추가한 갤러리가 없습니다.
0/0
개념글 리스트
1/3
- 해발 900m까지 비상...이제 남은 곳은 한라산이 '유일' 마스널
- 며칠전 방콕에서 사기친 택시기사 참교육한 한국인 ㅇㅇ
- 어릴때 무섭게 봤던 두꺼비 종기 공포 만화 찾아줘 ㅇㅇ
- 한국인에게 고구려 역사를 강의하는 중국인...jpg 수류탄이야
- 양다리 남자 연예인 폭로자 그 후 올린 글 ㅇㅇ
- 제주도에서 파는 34000원 김밥 ㅇㅇ
- 훌쩍훌쩍 흙 먹는 북한인들.jpg Chart_Manager
- "정철원 홈 부진, 아내 문제 일수도"... 이순철 위원 논란 ㅇㅇ
- QWER 덕분에 살았다는.. 멤버 ..jpg 3dd
- ㅅㄱㅂㄱ 싱붕이 레딧 탐방기 강지훈
- 꼴릿꼴릿 싱순이가 된 선배....manhwa ㅇㅇ
- 방금자 따끈따끈한 레전드 한녀 이중성 신작.blind ㅇㅇ
- 호주에서 음식 다 못먹고 남긴 쯔양 근황 ㅇㅇ
- 고든램지도 인정한 독특한 생물.jpg 네거티장애
- 수십년 넘게 뻐꾸기를 당한 퐁퐁이 조선인의안락사
포에니 전쟁.jpg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 이후로마는 내외적으로 군사력을 확장하며 적극적인 정벌에 나섰다. 동부에서는 아드리아해를 무대로 한 일리리아 해적의 위협이 커지자, BC 229년 로마는 해군력을 동원해 일리리아 해적을 소탕하고 본토까지 공격하여 제1차 일리리아 전쟁을 개시했다.한편 북부에서는 알프스 너머의 갈리아 부족들이 로마의 팽창으로 인해 이탈리아 북부에 침입해 도시를 약탈하자, 로마는 BC 224~223년 대규모 원정에 나서 갈리아 세력을 격퇴하고 밀라노(메디올라눔)까지 진출하며 북부 경계를 강화했다.이후에도 로마는 수년간 갈리아 잔여 세력을 정벌하며 국경을 루비콘 강에서 포 강까지 북상시켰고새로 확보한 영토를 연결하기 위해 군용도로를 구축하였다.한편, 피로스 전쟁과 제1차 포에니 전쟁을 거치며 로마는 그리스 문화권과 빈번히 접촉하게 되었고특히 동맹국 시라쿠사와의 관계를 통해 그리스 문화의 유입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로마 상류층을 중심으로 그리스 예술, 철학, 교육 등이 유행하며 로마 문화 전반에 점차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한니발이 보유한 스페인 주둔 카르타고 육군은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의 유산으로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해군 중심 전략의 한계를 절감한 하밀카르가 스페인 정복과 동시에 강력한 육군을 양성한 결과였다.이 정예 육군을 기반으로 한니발은 BC 219년로마의 영향권에 있던 사군툼(현 사군)을 공격하며 로마와의 전면전을 준비했고이는 곧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BC 219년, 한니발이 로마의 속주 도시 사군툼을 공격하자 사군툼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다. 로마는 처음에는 외교적 해결을 시도하며 사절단을 보냈지만, 한니발은 이를 무시했고 카르타고 본국 역시 사군툼 포위 해제 요청을 거부했다.이에 로마는 원로원 사절단을 다시 파견했으나카르타고는 한니발의 행동은 본국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로마가 이를 전쟁 의지로 간주하자 카르타고는 한니발을 제지할 뜻이 없다고 밝혀결국 양국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사군툼은 결국 한니발에게 함락되었지만8개월 동안이나 저항하며 시간을 벌었다.로마는 전쟁의 중심 무대가 다시 시칠리아 섬과 주변 해역이 될 것이라 예상했고이번에는 시칠리아 전역을 자국령으로 확보한 상태였기에 자신감을 보였다.이에 따라 BC 218년 로마는 군을 양분해 2만 4천 명의 병력을 스키피오가 이끌고 스페인으로2만 6천 명의 병력을 롱구스가 지휘해 시칠리아에 파병했다. 그러나 시칠리아에 도착한 롱구스는 예상과 달리 적의 흔적조차 없는 평온한 분위기에 당황하게 된다.스페인으로 향하던 아버지 스키피오는 도중에 한니발이 에브로 강을 넘었다는 소식을 접했으나이를 단순한 도발이나 전초전 수준으로 판단하고 크게 대응하지 않았다.그러나 마르세유에 도착하자 충격적인 보고가 이어졌다. 한니발의 주력이 이미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로마 영토를 향해 진군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곧 한니발의 군대가 갈리아를 횡단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예상치 못한 전략에 놀란 스키피오는 즉시 기병 정찰대를 파견해 한니발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한니발의 진군 방향은 로마 입장에서 충격 그 자체였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육로로 이탈리아 북부를 우회해 로마의 배후를 찌르겠다는 의도로 전례 없는 전략이었다.당시 갈리아 지방은 미개척지나 다름없는 미지의 영역이었고 그 너머에는 험준한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로 여겨졌지만한니발은 그 도전에 나섰다.그는 그리스의 피로스 1세와 알렉산더 대왕을 가장 존경했고 자신의 원정을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에 견주며 역사적 사명감을 가졌다. 그러나 이 과감한 행군은 단지 명예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상 주도권을 로마가 장악한 상황에서한니발에게는 육로를 통한 이탈리아 침공 외에는 실질적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탁월하고 신중한 지휘관이었던 한니발은 철저한 분석 끝에오히려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를 통과하고 알프스를 넘는 육로가 유일한 대안이자 실현 가능한 전략이라 보았다.피레네를 넘은 그의 군대는 험난한 숲과 늪지를 돌파하고 갈리아 부족을 피해 움직이며 론 강에 도달했고이곳에서 아버지 스키피오가 보낸 로마 기병대 300기와 조우했다. 전투 끝에 로마 기병을 격퇴한 한니발은 곧 론 강을 건너며 이제 최후의 난관인 알프스 산맥을 눈앞에 두게 된다.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향해 진군하자마르세유에 주둔 중이던 스키피오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로마 본토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동생에게 일부 병력을 남겨 스페인을 견제하도록 지시하고본인은 2개 군단을 이끌고 급히 로마로 복귀했다.한편, 알프스 산악지대에 도착한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에게 펼쳐진 풍경은 말 그대로 절망적이었다. 알프스는 신기습곡산지로 유럽에서 가장 험준한 산맥 중 하나였고 당대의 군대가 넘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지형이었다.한니발은 인근 산악 부족들과의 교섭을 통해 일부 물자와 안내를 제공받았지만‘안전한 길’이라 불리는 경로조차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극한의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결단을 내리고 카르타고군을 이끌고 마침내 알프스 산맥을 넘는 데 성공한다.알프스 정상에 오른 한니발과 군대는 이제 이탈리아가 눈앞에 펼쳐졌음을 인식했다. 이탈리아에 진입하는 순간 로마의 심장부에 바짝 다가선 것이나 다름없었다.“저곳이 이탈리아다로마에 들어가기만 하면 로마 성문 앞에 선 거나 마찬가지다.여기서부터는 이제 내리막길뿐이다.알프스를 다 넘은 뒤에 한두 번만 전투를 치르면 우리는 이탈리아 전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은 약 15일에 걸쳐 험난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데 성공했다. 이 위험천만한 행군 동안 한니발은 언제나 최전선에서 병사들을 이끌며 솔선수범하였다.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는 동안 병력 손실은 매우 컸다. 원정에 나섰던 약 4만~5만 명의 병력 중고된 산악 행군과 추위, 기아그리고 부족민과의 충돌로 인해 약 절반 이상이 탈락한 것으로 추정된다.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쪽으로 내려오자한니발은 알프스 인근에 거주하는 복속을 거부한 갈리아 부족들과 마주쳤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북부 갈리아 지역을 점차 복속해갔지만 이들은 여전히 독립을 유지하며 알프스 경계선 인근에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한니발은 이들에게 연합을 제안하며 로마에 대항할 것을 호소했고갈리아인들은 알프스를 넘은 그의 군대와 처음 보는 거대한 코끼리 부대를 목격한 뒤 카르타고 편에 합류했다. 그 결과, 한니발은 약 1만 명의 추가 병력을 확보하며 세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었다.마르세유에서 급히 회군했던 아버지 스키피오는 로마로 돌아오던 도중 피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북부 방어를 위해 군을 이끌고 피아첸차(플라센티아)로 향했다. 이는 한니발의 진격을 저지하고로마 본토로의 진입을 차단하려는 조치였다.당시는 겨울이었고 관례적으로 겨울철에는 전투를 피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이에 따라 스키피오는 피아첸차에 주둔하며 롱구스의 병력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알프스를 넘으며 극한의 고난을 겪은 한니발에게 그런 상도덕은 의미 없었다. 그는 스키피오가 피아첸차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즉시 병력을 움직여 기습을 감행했다.카르타고군의 정예 누미디아 기병대는 티치노 강 근처(오늘날의 파비아)에서 휴식을 취하던 로마군을 급습했고스키피오는 서둘러 기병대를 조직해 대응했으나기병전의 질적 차이는 명확했다.한니발이 존경하던 알렉산더 대왕처럼 기병을 중시한 그는 누미디아 기병을 중심으로 로마 기병대를 격파했고 이 전투에서 스키피오 역시 중상을 입으며 후퇴를 감행해야 했다.한니발은 중부 이탈리아까지 진격한 뒤트라시메노 호수 인근에서 또 하나의 기습을 준비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모닥불을 피우는 것조차 금지시키고야영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호수 주변의 지형에 은밀히 매복시켰다.그리고 새벽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틈을 타 로마군이 무방비 상태로 협곡을 통과하던 중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은 사방에서 일제히 덮쳐 완벽한 기습을 감행했다. 이 전투는 로마군에 큰 타격을 입힌 전형적인 매복 전술의 성공 사례로 기록된다.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 로마군은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총 2만 5천 명 중 약 1만 7천 명이 전사하며사실상 전군이 전멸한 수준의 패배를 당한 것이다.이 전투는 로마 내부에서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원로원조차 이를 “완패당했다”는 표현으로 공식 평가했다. 이로써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방어선마저 상실하며한니발은 로마 심장부로 향하는 길을 사실상 열어젖히게 된다.로마는 대규모 병력 약 8만 명을 동원하여 한니발의 군대와 아풀리아 지역의 칸나에(Cannae)에서 결전을 벌인다한니발은 전형적인 포위 섬멸전술을 구사했으며중간을 약하게 하고 측면을 강하게 배치하는 전술로 로마군을 중앙으로 유인한 뒤 양익으로 포위했습니다.결과는 로마군의 대참패.약 5만~7만 명의 병력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로마 역사상 최악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칸나에 전투 이후 로마는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리고많은 동맹 도시들이 로마를 버리고 한니발 쪽으로 돌아섰다로마는 전황을 전환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눈을 돌린다아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젊은 나이에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페인에 파견되었고 빠르게 전과를 올린다BC 209년 카르타고의 주요 거점이자 보급기지인 누바 카르타고(오늘날의 카르타헤나)를 기습하여 함락이후 카르타고 군대를 스페인에서 점차 밀어내며 한니발의 후방을 차단하였다스키피오는 단순히 스페인을 장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카르타고 본국을 직접 위협하는 전략으로 전환한다그는 원로원을 설득해 북아프리카 침공 허가를 받아내고 카르타고 본토 공격을 준비한더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뒤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와 동맹을 맺어 기병 지원을 확보이에 카르타고는 한니발을 본국으로 소환했고한니발은 로마가 육안으로 보이는곳까지 다다르지만철수할수밖에없었다.마침내 BC 202년 북아프리카의 자마 평원에서 결정적인 대회전이 벌어진다한니발의 눈앞에 나타난 상대는 바로 스키피오. 트라시메노에서, 칸나에에서 수많은 로마인들이 피를 흘릴 때 어린 소년이었던 스키피오. 이제는 장군이 되어 그것도 한니발을 무찌르러 북아프리카까지 쳐들어온 사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껏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일을 했다. 로마와 100년 넘게 동맹을 맺었던 누미디아 왕국과 손을 잡은 것이다. 누미디아는 원래 카르타고의 전통적 우방이었지만 말이다한니발은 전투 코끼리로 돌파구를 내려 했지만스키피오는 병사들 간 간격을 벌려 이 거대한 짐승들의 돌격을 허무하게 무력화시켰다. 그 거대한 몸집들은 오히려 후방에 있는 카르타고군을 혼란에 빠뜨렸다.이윽고 본격적인 보병전이 벌어졌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을 때부터 함께했던 정예 보병들이 맹렬히 싸웠고 로마군은 잠시 밀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침착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누미디아 기병을 측면으로 투입했다. 드디어 한니발의 군대가 포위되었다. 이것은 칸나이에서 로마가 당했던 그 포위, 그 복수였다.자마에서 카르타고는 완전히 패배했다. 한니발은 살아남았지만 카르타고는 로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쟁을 일으킬 수도, 동맹을 맺을 수도 없게 되었고막대한 배상금과 군사적 무장을 해제당했다. 사실상 카르타고는 국가로서의 자율권을 잃었다.한니발은 전쟁 후, 정치인이 되었다. 타락한 귀족층을 견제하고, 조세 개혁을 단행하는 등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로마는 그를 두려워했다. 로마는 카르타고 원로원에 압력을 넣었고한니발은 결국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는 동방의 왕국들을 떠돌며 로마에 저항할 새로운 힘을 찾아다녔지만점점 세상은 그를 좁게 만들었다.기원전 183년, 한니발은 로마의 추격을 피해 어느 이국의 궁전에서 스스로 독을 마시고 생을 마감한다.그는 마지막 순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로마인들이 내가 죽는 것조차 참지 못하는구나.”그렇게,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끝이 났고로마는 지중해의 지배자가 되었으며한니발이라는 이름은 영원한 숙적이자불멸의 전술가로 역사에 남게 된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네거티장애고정닉
"2만원 거린데 5만원?"...울릉도, 이번엔 택시요금 바가지 논란
https://n.news.naver.com/article/052/0002227146?cds=news_edit "2만원 거린데 5만원?"...울릉도, 이번엔 택시요금 바가지 논란최근 '비계 삼겹살'로 논란의 중심에 선 울릉도가 이번엔 택시요금 바가지 의혹이 제기됐다. 30일 구독자 73만 명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A씨는 울릉도를 처음 방문한 여행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 속에서 An.news.naver.com신안도 그렇고 나거한 + 섬이 결합되면 더한 엑기스가 나오는거 같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조선인의안락사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