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게임동아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추가한 갤러리가 없습니다.
0/0
타 갤러리 게임동아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추가한 갤러리가 없습니다.
0/0
개념글 리스트
1/3
- 버튜버 역사상 기이한 행동력 1등 ㅇㅇ
- 韓, 美에 4000억달러 투자카드 꺼냈다 ㅇㅇ
- 유럽은 관세 협상에서 왜 트럼프에 굴복했나 ㅇㅇ
- 트황상 ‘관세배급견’ 무한복사 입갤 ㅋㅋㅋㅋㅋㅋ 세티르
- 그랑콜레오스.. 시트가 이렇게 불편한건 처음이에요.. ㅇㅇ
- 최다 엑스트라 동원 영화 탑 파이브 ㅇㅇ
- 싱글벙글 이미 계획이 다 있었던 논리왕 전기 아카식레코드
- 위쇼리) 2025 서울 바앤스피릿쇼 Day 1 A'Bunadh
- 남편 군대갔을 때가 상팔자였다는 한가인 ㅇㅇ
- 금감원 "빠른시간 내 '주가조작 시 패가망신' 사례 보여주겠다" ㅇㅇ
- 영웅설화 같네…코브라 물어 죽인 2살 아기 ㅇㅇ
- [스압] 캣맘 문제에 이해와 공감을 보이는 캣맘들의 아름다운 마음씨 냥갤러
- 대전 흉기 살인범 도주 끝에 검거 ㅁㅇㄴ
- 한국의 ‘2000억 달러+α’ 투자제안까지 걷어찬 미국 00
- 속보) 삼성 이재용 강판...정의선 워싱턴행.jpg ㅎㅎ
송언석 "방송3법 본회의 강행하면.. '필리버스터' 할 수밖에"
https://n.news.naver.com/article/659/0000035409?sid=100 [속보] 송언석 "방송3법 본회의 강행하면.. '필리버스터' 할 수밖에"송언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더불어민주당에서 추진하고 있는 '방송3법'에 대해 "본회의에 상정하게 되면 '필리버스터'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송언석 비대위원장은 오늘(30일) 당 정책위원회n.news.naver.com- 내달 4일 주요 법안들 강행에 국힘 필리버스터 입갤할듯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작성자 : 헬마존잘고정닉
사자왕에 대하여.jpg
https://youtu.be/fo7MaxhyeXA?si=GxMwdMiPgAPvYZ-A Shadow of the Colossus Remix - For Her SoulVGM REMIX on Spotify: https://open.spotify.com/album/0hiSIeY6lKzA7lKtu24GNhAlso available on: iTunes, Amazon, Google Play, Pandora, DeezerBandcamp (including...youtu.be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흔히 리처드 사자심왕(Richard the Lionheart) 으로 알려진 영국 국왕은 중세 유럽사와 십자군 전쟁의 역사 속에서 전설적인 전사 군주로 자리 잡은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종종 단순히 ‘사자왕’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그의 실제 별명인 Lionheart는 문자 그대로 사자의 심장을 지닌 자라는 뜻으로 단순한 왕권보다는 전장에서의 탁월한 용맹함과 기사도의 상징으로 불린 것이다.리처드는 1157년 플랜태저넷 왕가의 왕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출생부터 프랑스 남부의 아키텐 공작령(귀족 지역)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젊은 시절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다. 영어보다 프랑스어와 오크어(Occitan)에 더 능숙했다가장 먼저 태어난 장남 윌리엄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차남 헨리는 젊은 왕(Young King)이라는 별칭으로 아버지와 공동 즉위했으나 1183년에 급사한다. 이어 넷째 아들 제프리도 브르타뉴 공작으로 유망했지만 1186년 말 타고 있던 말에 깔리는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이렇게 형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헨리 2세의 아들 중 리처드와 막내 존만이 생존자로 남게 된다. 결국 리처드는 형들의 죽음과 치열한 왕위 경쟁 끝에 부친 사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게 되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대표적 전사 군주로 성장하게 된다.리처드 1세는 형들의 연이은 죽음 속에서 플랜태저넷 왕가의 실질적 후계자로 떠올랐으며그의 아버지 헨리 2세는 방대한 영토플랜태저넷 도메인(The Plantagenet Dominions)을손에 쥔 유럽 최강 군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강대한 권력은 내부의 불화로 와해되기 시작한다.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 영지를 분배했으나 실권은 자신이 유지했고 이는 자식들의 불만을 키웠다. 특히 왕비 엘레오노르가 아들들을 선동하여 헨리에 대항하게 만들었고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그의 후계자 필리프 2세(존엄왕)가 이를 지원했다. 1173년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은 단 3주 만에 진압됐지만 헨리는 왕비를 감금하고도 아들들을 사면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것이 훗날 리처드의 반란을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영국 국회의사당 옆 동상)리처드는 젊은 나이부터 군사적 수완을 드러냈고특히 자신이 11세 때부터 통치해온 아키텐(Aquitaine)에 강한 애착을 가졌다. 그러나 헨리 2세는 막내 아들 존을 편애하며 이 아키텐을 존에게 넘기라 명령했고이는 리처드의 마지막 반기를 촉발시킨다. 결국 그는 부친을 무너뜨리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한다.하지만 리처드는 잉글랜드보다는 프랑스를 고향으로 여겼고 프랑스어를 쓰며 프랑스 문화 속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앙주 제국 귀족이었다. 그가 잉글랜드에 머문 기간은 통산 6개월 남짓에 불과하며잉글랜드는 그의 십자군 원정을 위한 군자금 조달지에 지나지 않았다.그가 남긴 유명한 말,“만약 그것을 살 수 있는 자가 있다면나는 런던마저 팔아넘기겠다.”그의 실용적 통치관과 잉글랜드에 대한 거리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한편 기독교와 이슬람은 유대교와 같이같은 신을 믿고있었기에이 세종교의 공통된 성지 예루살렘은 엄청난 대격변을 겪고있었다.1099년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이 건국되었으나 그 이후 수십 년간 이슬람 세력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내부 분열로 점차 약화되었고1180년대 중반 예루살렘 왕국은 외교,군사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지배계층 간 권력 다툼으로 제대로된 정치가 이루어지고있지 않았다.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4세(Baldwin IV)는 문둥병에 걸린 채로 통치를 했으며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외교적 재능과 군사적 역량은 매우 뛰어났으나 체력적으로는 점점 병세가 짙어지며 쇠약해지고있었다.그는 살라딘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나날이 죽음이다가오고있었고 후계자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고있었다.이 혼란을 틈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일한 살라딘은 1187년 대규모 십자군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바로 하틴 전투(Battle of Hattin, 1187년 7월 4일)이다.이 전투에서 십자군은 거의 전멸에 가깝게 패배했고성전 기사단과 병력 대부분이 살해 또는 포로로 잡히게된다보두앵을 이은 예루살렘의 무능한 왕 가이 드 뤼지냥도 생포되고 이후 십자군은 사실상 궤멸된다같은 해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기독교 세계는 큰 충격에 빠진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내부 권력 다툼과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비교적 평화롭게 점령하며 명성을 높였고, 이 사건은 유럽 전역에서 성지 탈환을 요구하는 여론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제3차 십자군을 소집한다.이 소식을 처음들었을 때 리처드 1세는 즉위 직후 십자군 원정 준비에 전력을 기울이며 왕국 내 자산을 대대적으로 처분했다. 관직과 작위는 물론, 공공재산과 왕권의 일부까지 매각하며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판다”는 태도로 전쟁 자금을 마련했고그 결연한 결단은 곧바로 원정으로 이어졌다.그러나 원정의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동맹이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원정 도중 익사하며 독일군은 붕괴되었고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 역시 리처드와의 불화 끝에 십자군에서 이탈해버렸다. 결과적으로 십자군의 주력은 사실상 잉글랜드군 단독이 되었고 리처드는 홀로 전선에 남게 된다.“신이 우리를 인도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신으로 전세를 뒤집는 전투 능력과 전략적 통찰로 십자군 전체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다. 아크 공성전, 야파 전투 등에서 그의 활약은 군사적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었고이슬람 측에서도 “전장을 집어삼키는 괴력의 기사”“사자의 심장을 가진 자”라 부를 정도였다.리처드에 대한 기록의 상당수는 그의 적이었던 살라딘의 서기관들에 의해 남겨진 것으로적군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용맹과 기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전설이나 과장된 무용담이 아니라당대 이슬람 세계조차 인정한 사실적 평가에 가깝다.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그가 얻은 별명‘사자심왕(The Lionheart)’이 영국이나 유럽 기독교권에서가 아니라전장에서 그를 직접 마주한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리처드의 전투력이 단순한 과시나 신화가 아니라 적군에게조차 실감나게 각인되었음을 보여준다.1191년 8월 30일, 제3차 십자군 원정 중 벌어진 케사레아 전투(Battle of Kesarea)는 리처드 1세의 전장에서의 명성을 굳건히 한 대표적 사례다.이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던 리처드의 군대는 팔레스타인 해안 도시 케사레아 인근에서 살라딘이 보낸 정찰대 및 매복 병력과 조우하게 된다. 살라딘은 곳곳에 병력을 배치해 포위 공격을 시도했지만리처드는 일체의 주저 없이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는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진했고매복한 투르크 병력들을 하나씩 베어넘기며 진형을 흐트러뜨렸다.특히 위기가 닥친 순간은 후위에 있던 브루고뉴 공작의 프랑스군이 투르크 기병대의 급습에 고립되었을 때였다. 이 상황에서 리처드는 혈혈단신으로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 혼자 돌파전을 감행적을 향해 돌진하며 순식간에 수 명을 베어넘겼다.당시 십자군 연대기(편력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리처드는 벼락 같은 고함을 지르며 투르크 군에게 달려들었다. 좌우에서 그들을 칼로 찔러 죽였고투르크 군은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마카비를 보고 도망쳤듯 혼비백산했다. 리처드 왕의 얼굴을 보자 그들은 산꼭대기까지 줄행랑쳤고머리 없는 시체 몇 구만 남겼다.”이는 단순한 과장된 무용담이 아니라당시 십자군 병사들과 서기관들이 남긴 생생한 기록으로 리처드가 전투 중 얼마나 선봉에 서서 실제 무력으로 전세를 돌파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결국 이 날의 승리로 십자군 본대는 적의 방해 없이 안전하게 진군할 수 있었고리처드는 단순한 명목상의 왕이 아니라실질적인 전장 지휘관이자 ‘사자심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전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아르수프 전투 (1191년 9월 7일)은 제3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과 아이유브 술탄 살라딘 군 사이에서 벌어진 대표적 전투로리처드 1세의 전술적 수완과 지휘력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다.십자군은 케사레아 전투 직후팔레스타인 지역을 넘기라는 리처드의 협상 제안이 거절되자 아르수프로 진격했다. 리처드는 약 2만의 병력을 밀집 대형으로 해안선을 따라 이동시키고기병은 전위·후위에 배치하여 방어를 유지하며 진군했다. 살라딘은 약 3만의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했으나리처드는 유리한 반격 시점을 끝까지 기다리며 병력을 통제했다.결정적 순간 구호기사단이 붕괴 위기에 몰리자 리처드는 반격 명령을 내렸다. 십자군은 일제히 돌격했고 리처드 자신도 직접 돌진하며 중앙을 돌파해 전열을 붕괴시켰다. 그는 단 15명의 기병과 함께 후속 공격을 지휘하며 아르수프 숲까지 적을 몰아붙였고살라딘은 7,000명 이상을 잃고 퇴각했다.이 전투는 살라딘의 기록관 바하 앗 딘이 “전장에 악마가 나타났다”고 묘사할 만큼 리처드의 압도적인 전투력이 부각된 사례로십자군이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는 전환점이 되었다.이쯤되면 살라딘의 능력에 의문이 들수도있겠지만그 역시 이슬람을 하나로 통일시킨 제왕중 제왕이다종파 부족간의 분열이 심했던 커뮤니티 사이트들보다더 말안듣는 작자들을 통합한 위대한 술탄이었다는 점이다“너희들의 전능한 술탄은 도대체 뭘하고 있느냐?”1192년 7월, 제3차 십자군 말기살라딘은 전략적 요충지인 야파(자파) 요새를 공격했다. 십자군 수비대는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도시 대부분이 점령당했고일부 병력만이 성채 안에 고립된 채 항복을 고려하고 있었다.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 1세는 해상으로 병력을 이끌고 즉각 출동했다. 그는 작은 함대를 타고 급히 상륙병력 규모는 적었으나 기민하게 작전을 전개해 요새에 진입 남은 수비대와 함께 도시를 탈환했다. 살라딘군은 리처드의 예상치 못한 기습과 강한 저항에 밀려 철수했다.전투 중 리처드는 갑옷 없이 선박용 복장을 한 채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그의 돌발적이고 과감한 행동은 당시 무슬림과 기독교 연대기자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바하 앗딘 같은 무슬림 역사가도 리처드의 용맹함을 솔직히 기술했다.이 전투 이후 살라딘은 리처드의 전투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결국 십자군과 이슬람 군 사이의 휴전 협상이 시작되어 람라 조약(1192)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십자군은 해안 도시들의 통제권을 확보했고예루살렘 순례는 허용되었다.리처드 1세는 십자군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말년은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루살렘 탈환은 끝내 이루지 못했고고국에서는 동생 존과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그의 영토를 차지하려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는 예루살렘 진격을 포기하고순례자의 통행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맺고 귀환을 결정한다.배멀미가 심했던 그는 바닷길을 피하고 육로로 귀국하던 중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붙잡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진다. 과거 원정 도중 리처드가 레오폴드의 깃발을 모욕한 일이 화근이었다. 그는 엄청난 몸값을 요구받았고잉글랜드 국민들의 세금으로 풀려난다. 이때 프랑스 왕은 리처드의 복귀를 두고 “사탄이 돌아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귀국 후 반란을 진압한 리처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농부가 파뭍힌 귀족 영지에서의 황금 보물을 발견했는데 해당 자작(작위명)은이 황금과 보물을 내놓으라는 리처드의명을 거역했고 이를 토벌하기위해리모주 지역의 성을 공격하다가 세뇌(돌맹이를 쏘는 쇠뇌)에 맞아 부상을 입는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 상처가 곪아 결국 42세의 나이로 요절하게디ㅗㄴ다그의 최후는 전쟁터의 영웅으로서는 치명적이지 않았지만왕으로서는 다소 허무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리처드는 말도 안되게 뛰어난 무장이었지만내정에는 무관심했고 재위 대부분을 전쟁에 바쳐 국가 운영에는 소홀했다이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사자의 심장은 가졌지만, 사자의 영혼은 가지지 못한 군주”로 평가한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네거티장애고정닉
4편) 한국 중소기업의 고립과 새로운 기회
"3편) 한국 경제가 낙수 효과에 실패한 이유" 에서 수출 중심 경제 구조 속 대기업의 수출이 국내 투자, 고용, 가계 소득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가 무너진 이유를 크게 네 가지 이유로 설명했음. 4편에서는 그 네가지 이유 중 중소 기업이 고립된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설명 해 볼 예정임.일반적으로 제조업은 전방 산업과 후방 산업으로 나뉘어져 있음. 최종적으로 물건을 파는 역할이 전방산업이라면, 물건을 만들기 위한 원재료와 설계, 부품(흔히 말하는 소부장)을 제공하는 것이 후방산업임. 독일과 일본의 산업 생태계로 예를 들어보자면 소부장이 강하다고 알려진 독일과 일본의 경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제조업 전반에서 수직적 분업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상호 보완적인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음. 중소기업도 유의미한 설계, 제조, 후공정 역할에 참여하며 성장하고, 생태계 속에서 단순 납품자 수준을 넘어 부가가치 있는 파트너로 함께 발전한다는 거.이렇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수직적 분업과 기술 협력에 기반한 유기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산업 생태계 구조임. 과거 한국 정부도 정책과 제도를 통해 이렇게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수직적 분업과 유기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려 했지만 여러 이유들로 실패했는데,1. IMF로 인한 후유증imf 당시 외환 위기로 인해 대외 신인도가 급락하면서 기업들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한국 기업들에게 여러 압력으로 작용했음. 특히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인력 감축, 임금 동결, 부실 자산 매각 등 여러 조치들을 취했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대기업들은 비핵심산업은 최대한 외주화하고 특히 하청 기업들에게 고강도 원가 절감 압력을 가함.이렇게 고강도의 원가 절감 압력을 받은 하청 기업들은 당연히 인력 감축, 숙련공 해고 등의 조치를 취했고 당연히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 여력 약화로 이어짐. 대기업들은 점점 소재/부품/장비 에서 수입 비중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한국 중소기업들은 돈이 없어서 연구를 못하고 생산성이 저하되는 악순환이 지속됨.2. 해외 기술 도입의 명과 암이런 저런 이유들로 한국 대기업들은 빠른 성장을 위해 핵심 설계와 장비를 해외에서 수입하는 전략을 택했는데, 실제로 이러한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 덕분에 한국 대기업들은 빠르게 고부가가치 산업 구조로 전환하고 한국이 중진국 함정을 돌파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음.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한국 중소기업들은 소외되었고 독일, 일본처럼 전후방산업이 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낙수효과는 상당히 적었다는거임.(3편에 누가 댓글로 "이 빨갱이 시키야. 니는 재벌분들이 꼭 조질거다. 그나마 대기업에 몰아줬으니 이정도라도 한거야." 라고 말씀하셨는데 부정한 적 없습니다. 저도 동의해요.)3. 대기업의 승자 독식 형태전편에서 다룬 것처럼 대기업은 최종재 생산 수출, 중소기업은 부품 소재 공급자 역할에 고착되면서 발생한 대기업의 '승자 독식' 형태는 소위 말하는 대기업의 갑질로 이어짐.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탈취하기도 하고 그 기술을 다른 하청한테 주고 해당 기업과 원가 경쟁을 시키기도 함. 애써 기술 개발에 성공 하더라도 이런 요소들 때문에 중소 기업들의 투자 유인이 약화되고 인건비 놀음이나 하게 되는것.이런건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있어야 하는데 도움을 받더라도 힘 없고 돈 없는 중소기업들은 이 과정 자체가 매우 피곤한 일임.4. 중소기업의 글로벌 밸류체인 진입 실패(세계산업연관표(WIOD)에는 대기업, 중소기업간 구분이 없어서 중소 기업만을 대상으로 한 정량 분석이 없기에 적절한 사진을 못 찾았습니다.)중소기업의 매출의 90% 이상이 내수시장에서 발생하고 있고, 내수시장 매출의 80% 이상이 다른 기업에 대한 납품을 통해 발생함. 중소 기업이 글로벌 밸류체인(GVC)로의 진입과 완제품 중심의 부가가치 창출에 실패 했다는 뜻.이런 저런 이유들로 한국 중소기업은 여러모로 답이 없었음. 근데 제목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고립과 새로운 기회] 라고 적은 것처럼 지금은 4차 산업 혁명과 맞물린 다양한 산업 생태계가 새로운 구조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한국 중소기업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쉽게 설명하자면 새로운 기술이 요구되는 전환기이기 때문에 누구나 동일한 출발선에서 경쟁하게 되며, 한국의 경우 과거처럼 대기업 중심의 수입 의존적 생산 전략에서 벗어나, 국내 중소기업의 기술 내재화 역량을 강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함으로써, 독일 일본식의 수직적 분업 네트워크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결정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건데, 대표적으로 자동차 산업이 내연기관에서 전기 동력으로 변하는 것임.실제로 현재 자동차 산업 내 제품별 투입계수 표를 보면 전기차 수입 비율이 내연기관 수입 비율보다 현저히 적음. 국산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거. 이는 기존에 고립되었던 국내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보다 유기적인 기술 협력과 수직적 분업을 통해 보완적인 공급망 생태계를 재구축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수 있음. 왜냐하면 아예 새로운 시장이기 때문.세줄 요약1. 독일, 일본처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수직적 분업과 기술 협력에 기반한 유기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산업 생태계 구조임.2. 한국 정부도 그렇게 하려 했지만 여러 변수들로 실패.3. 4차산업혁명에 따른 기술적 리셋으로 기회가 찾아옴. 한국과 중소기업은 체질 개선 할 수 있는 기회이니 정부 지원 필요함.
작성자 : 앵무새죽이기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