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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훌쩍 1999년 일어난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1999년 05월 20일학원을 가기 위해 집에서 나선 6살의 김태완 군에게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다가왔다.그는 김태완 군을 붙잡고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황산을 김태완 군의 얼굴에 부었다.그 뒤 그는 현장에서 달아났고,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다. 공소 시효는 만료됐다.김태완 군은 사고 이후 투병하다 49일 만에 숨을 거뒀다.당시 김태완 군은 병원에서 49일간 생존했다.김태완 군의 부모는 아들과 함께한 병상에서의 대화를 영상으로 담았다.이 대화에서 김태완 군은 치킨집 아저씨를 범인으로 지목하였다.그리고 당시 사건을 목격했던 또래의 어린 아이 역시 같은 진술을 하였다.그러나 경찰은 김태완 군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 하고,진술 역시 부모의 유도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여 무시했다.또한 목격자 어린이의 진술은 그 아이가 농아(청각장애)였기 때문에,사고가 힘든 저능아라 단정 짓고 인정하지 않았다.이 사건은 2014년 07월 07일부로 공소 시효가 만료되었고,유가족의 재정 신청이 2015년 07월 10일에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끝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엄마, 언제쯤 볼 수 있는데? 너무 깜깜하다.”아이가 묻는다. 병원에 오고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눈에 대해 꺼낸 말이다.“으응 태완아, 조금만 있음 다 나아. 그러면 우리 태완이 잘 볼 수 있어.”“엄마, 그래도 답답하다.”“태완아, 병원에 오면 전부 이렇게 불 끄고 깜깜하게 해놓고 있단다. 엄마 아빠도 깜깜하게 해놓고 있거든. 눈은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보면 돼. 생각을 하면 다 볼 수 있단다.”아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엄마의 아픈 마음을 알았을까? 아이는 말이 없다.6월 아침, 치료가 시작되었다. 아이 눈에 감긴 붕대를 떼는 순간 심장이 일순간에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힌다. 붕대와 함께 떨어져나온 건 아이 눈에 있던 ‘각막의 조각’이었다.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처참한 모습이 눈앞에 놓여 있다. 우리의 작은 바람은 그렇게 나뭇가지 꺾이듯 꺾어지고 있었다. 그보다 더한 것이 기다린다는 것도 모른 채 엄마는 각막이 떨어져나간 아이의 두 눈을 두려움에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아이는 형아에게 골드런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한다. 형아는 울음 가득 찬 소리를 참고 동생에게 골드런을 불러준다.“무지개 다리 놓고 가고 싶어도, 지금은 갈 수 없는 저 먼 우주는 아름답고 신비한 별들의 고향, 우리들이 꿈꾸는 미지의 세계….”아이가 형아랑 통화를 하며 집에서 못다 배운 썬가드 만화 주제곡을 배운다. 형아 목소리가 떨린다. 울음 섞인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눈물에 젖어….-태완이 어머님의 병상일지태완이는 얼굴을 비롯한 전신의 40~45%에 3도 화상을 입고 두 눈을 잃었으며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면서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다 49일 만인 1999년 7월 8일 오전 8시 15분 패혈증으로 사망 했습니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싱글벙글 산울림의 탄생
https://www.youtube.com/watch?v=aseVa1H8eUY 대마초 사건으로 씹창나버린 70년대 한국 록씬을 멱살 부여잡고 끌어올린 GOAT 밴드 산울림 기타리스트이자 메인보컬인 김창완, 베이시스트이자 서브보컬인 김창훈, 드러머 김창익 총 삼형제가 이룬 가족 밴드로서 현재도 청춘, 너의 의미, 회상, 나 어떡해 등 많은 곡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 산울림의 결성 과정은 참으로 드라마틱했다 때는 1971년, 당시 대학교에 막 입학했던 김창완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통기타와 교본을 사 오게 된다 양희은의 통기타 사운드가 전국의 캠퍼스에 울려 퍼지던 년도였으니 아마 그러한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고등학생이던 둘째 김창훈은 창완의 기타를 보며 신기해하다가 이내 자기도 고물상에서 싸구려 기타를 사와서 형과 합주를 하게 되었고 형들의 기타를 보고 흥미가 돋친 중학생 막내 김창익은 어머니가 아끼시던 은수저를 몰래 꺼내들고 교과서에 내리치며 드럼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설프지만 어느 정도 밴드의 형상이 갖춰졌으며 1974년까지 3년동안 거의 4백 곡에 달하는 매우 많은 자작곡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1974년까지 삼형제들의 음악 장비는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1975년 대격변이 일어나는데 바로 둘째 김창훈이 대학교에 입학하자 부모님이 원하는 선물을 사준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김창훈은 형과 합심하여 밴드 악기를 사달라고 부탁했고 지출이 너무 커 일단 부모님께 돈을 빌린 다음 일렉기타, 베이스, 드럼, 앰프를 구매하여 밴드로서의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자 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동네에서 시끄럽다고 난리가 난 것이다. 삼형제들의 집은 흑석동 주택가에 있었는데 이전까지는 통기타 퉁퉁 튀기는 소리라 별로 말이 안 나왔지만 일렉기타에 앰프, 드럼까지 갖추니 달동네 수준의 집집마다 삼형제들의 합주 소리가 울려퍼진 것이었다. 그러자 삼형제들은 방을 계란판으로 덮어 방음 시설을 만들었고 그래도 여전히 시끄러운 록음악이 새어나왔지만 동네 사람들은 이 삼형제들을 마냥 나쁘게만은 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김창완이 서울대학교 잠사학과 김창훈이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였기 때문이다 당시 삼형제들은 동네에서 공부를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고 동네 주민들이 삼형제들을 "공부를 하면서 음악도 잘한다" 는 점 때문에 별로 터치를 안 했던 것이다. 이후 막내 김창익마저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자 동네에서 삼형제들의 음악 소리로 불평하는 목소리는 크게 줄어들었다. 1977년 대학가요제 1회가 개최되었을 때 삼형제들은 "무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여 예선 대상에 올랐으나 김창완이 졸업생 신분이라 자격이 박탈되어 엎어지게 된다. 그러나 예선 2위였던 서울대 밴드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는 김창훈이 쓴 곡이었고 "나 어떡해"가 대학가요제 1위에 입상하게 되면서 삼형제들의 음악 생활은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당시 예선 1,2위가 모두 자기들의 곡이라는 걸 본 김창완은 취업 전에 음반이나 하나 만들자는 다짐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라벌레코드에 찾아간 후 사장 이흥주에게 녹음한 테이프를 들려주며 음반 하나만 제작해달라고 말했는데 테이프를 들은 이흥주는 깜짝 놀라며 음반 제작비는 전부 지원할테니 당장 녹음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웬 떡이냐 생각하며 바로 콜한 김창완은 창훈과 창익을 데리고 스튜디오에서 첫 녹음을 진행하였는데 그렇게 1977년 12월에 출시된 음반이 바로 산울림 1집이다 이후 산울림은 드러머 김창익의 사망으로 2008년 해체되기 전까지 13집의 정규앨범, 4집의 동요앨범, 기타 20장이 넘는 음반들을 출반하였는데 만약 삼형제가 SKY에 입학하지 않았다면 시끄럽게 합주하는 삼형제들을 동네 주민들이 가만 두지 않았을 테고 대학가요제에 참가하지 않았으면 예선 1위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고 서라벌레코드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퇴짜를 맞았을지도 모르니 어찌 보면 우연의 연속이라 할 수 있겠다 여담으로 삼형제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자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학생 신분으로 하는 음악"이라 사람들이 좋게 봐주었지만 학교를 졸업하니 "딴따라"로 시선이 바뀐 것이다. 때문에 음반사 문예부장에 취직했던 김창완을 제외하고 김창훈과 김창익은 자신의 전공을 따라서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해태식품,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동생들의 회사생활로 녹음이 힘들자 김창완은 산울림을 1인 밴드 형식으로 운영했으며 그 시기 산울림 11,12집이 나왔고 때문에 이 음반들은 이전 음반들과 달리 김창완의 스타일이 제일 잘 드러나는 음반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b5h3cVk09o
작성자 : DDII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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