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빛의 이중성: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에 나타난 아름다움과 몰락
책의 표지에서부터 느껴지는 푸르스름한 기운. 민음사 세계시인선도 그렇지만, 트라클의 시에서 파란색은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이 파란색은 우수 어리면서 아름다운 색채이기도 하고, 죽은지 얼마 안 돼 "부드러운 시체"가 서서히 푸르딩딩하게 변해가는 끔찍한 색채이기도 하다. 푸른색에 대한 트라클의 이런 이중적인 시각은, 사실 전반적으로 트라클의 시상 전체를 요약하는 듯하다. 트라클이 그리는 아름다운 자연과 이를 둘러싼 스산한 몰락의 예감이 그러한데, 자연 속의 푸른빛이 노발리스의 <푸른 꽃>처럼 불가능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를 상징하기도 하는 반면, 자연 속을 뚫고 나온 푸른빛은 이 부드럽고 따스한 세상을 에워싼 채 언제든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 불길한, 세상이 이미 멸망했다는 암시처럼 보인다.
트라클의 시에 나타나는 이러한 이중성은 그의 혼란스러운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는 못한 채 살았고, 누이동생에게 강한 친연성을 느꼈으며, 학창 시절부터 늘 상징주의 시인과 관념적인 것에 빠져 사는 괴짜였다. 트라클은 소위 저주받은 시인poète maudit이 되고 싶어 반쯤은 과시적으로 부르주아의 삶에서 일탈해 약물에 빠지고 시인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트라클의 시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누이동생을 범했다는 죄책감은 그의 시에 나타나는 멸망과 쇠락에 대한 감정에 크게 일조했다.
트라클의 시 중 <헬리안>은 그의 시적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트라클 본인에게도 꽤나 뜻 깊은 시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는 이 시는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영적으로 황폐해진 세계를 돌아보고 있다. 풍요는 곧 찾아올 멸망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고, 죽음과 나병으로 가득한 쇠락한 세상에서 영적인 구원 혹은 힘을 상징하는 헬리안은 그저 힘 없는 영혼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다가, 죽은 시체의 눈을 감겨줄 뿐이다. 이 정도의 영적 개입조차 다른 시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음울한 짐승이 노니는 와중에 들리는 초자연적인 누이의 목소리는 대체로 힘없기 그지없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이미 없거나, 있더래도 완전히 무력할 뿐이라는 현실 감각이 작용한 탓이리라.
그 현실 감각은 약물 중독이 더 심해지고 자살하는 해쯤에 쓴 <죽음의 일곱 노래>에서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 아름다운 자연은 하나씩 죽어가며, 그를 보호해주는 것은 하나씩 점차 해체된다. 이미 스스로를 걸어다니는 시체로 여겨 집을 나서는 "시체 하나"는 "은결 반짝이는 강물"을 내려가는데, 그 정체는 시의 마지막 행에서야 드러난다. "은빛 구름으로 이루어진 양귀비". 그는 약물 이외에 자신과 함께 해줄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고, 이후 세계대전 중 의무병으로 90명 가량의 병사의 사지를-사망을 막기 위해-잘라야 할 상황을 앞두고 도저히 이를 버티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자살한다.
트라클의 비극적인 삶은 그의 시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아름다움과 몰락, 구원과 절망이 교차하는 그의 시는 20세기 초 유럽의 정신적 황폐함을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트라클의 시에서 우리는 세계대전의 참화를 예감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단순히 개인적인 고뇌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예민하게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트라클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난 푸른빛의 이중성은 우리 삶의 모순과 아이러니를 환기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대충 감상 던져주고
한번 영어로 비평해보라고 하고 고치는 정도...
짧고 단순한 글이라 그건 그냥 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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