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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여는 부분이 진짜 돌이킬 수 없이 망했는데

몰?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2.04.30 15:50:20
조회 79 추천 0 댓글 11

12.

 

  형과 헤어진 다음의 새벽, 고시원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친 나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적어나갔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고 싶다는 욕망과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기억해야만 한다는 의무에 대해서. 그 욕망과 의무는 물론 둘 다 진실이었지만 전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욕망으로만 남았다. 억지스럽게 사회생활의 규칙과 코드를 주입한 뒤에도 내게는 타인을 존중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으니까.

 

  가볍게 스쳐 가는 사이라면 나 역시도 착실한 인간 행세를 할 수 있었다. 피상적인 관계에서라면 나는 좋은 이웃과 착한 동생과 성실한 학생 역할을 그럭저럭 해냈다. 그러나 일단 한 번 깊게 얽혀버리게 되면 타인을 관찰과 조종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되었고, 그건 의도적인 사악함이라기보다는 외부를 대하는 방식에서의 천성에 가까웠다. 겉으로 고친 척을 하더라도 언제나 내 내면에서 불쑥 솟아나고 마는 천성.

 

  그렇다면 나 같은 건 어떻게 평범해질 수 있을까. 자신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을 바꿔야만 하는 걸까? 그런 인간 역시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할 것도 연대할 것도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공존과 배려를 지향하는 사회가 오도록? 한때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품었던 적도 있지만 어느샌가 해방에 대한 욕망은 잔불처럼 사그라들고 말았다. 해방이 구태가 된 시대라는 걸 어렴풋하게 알아버리고 말아서.

 

  마르크스를 읽고 물신숭배의 본질적 모순을 말하는 사람조차도,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주식을 사고 HTS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리스크와 리턴의 관점에서 현실을 얘기하는 시대였다. 역사라는 단어는 한순간에 웃음거리가 된 채 시대의 저편으로 밀려나버린 듯했다. 최루액 냄새가 너무 짙게 배서 눈가를 비비려면 실명을 각오해야만 하는 역사, 아름다운 은백양 숲의 나뭇잎조차도 무기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역사. 사람들은 더이상 그런 역사 속에서 살지 않았고 그걸 원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모두가 알아버린 것이다. 모든 종류의 권력은 또 다른 권력으로 대체될 뿐 극복될 수는 없다는 걸.

 

  노트 위로 일기가 되지 못하는 단어들을 나열하던 나는 책장에서 블랑쇼의 저서 <문학의 공간>을 꺼냈다. 심심풀이로 겉표지를 벗기고 나면 검은 단색의 패브릭 표지에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 불어로 박혀 있었다. 그 책은 나를 매료시켰던 다음의 잠언과 함께 시작되었다. ‘비록 단편적이라 하더라도 한 권의 책은 책을 이끄는 중심을 지니고 있다....... 책을 쓰는 자는 이 중심에 대한 욕망과 무지에서 책을 쓴다. 거기에 닿았다는 감정은 거기에 이르렀다는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한 권의 책이 무엇인가를 밝혀 줄 때, 그 책은 어떤 지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방법상의 충실함이 있다. 이 책에서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이라 불리는 페이지들을 향하여.’**

 

  잠언이 있는 페이지에서 묵상한 나는 계속해서 다음 부분을 읽어나갔다. 블랑쇼의 비의적이고 현학적인 글쓰기가 그러나 흐릿한 중심을 향해 주제들을 펼쳐놓고 있었다. 작가의 추방과 고독. 시간의 부재로서의 매혹과 시간을 붙잡기 위한 일기 쓰기. 그리고 말라르메와 카프카를 다루는 길고 긴 비평. ‘제때에 죽어라라고 하는 니체의 말***. 제때 죽는다는 것,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작가는 언제나 작품의 바깥에 선다는 것. 사람은 지나치게 빨리 죽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살지만 죽음은 늘 빠르거나 느리다는 사실. 자기를 단념한다는 것으로서의 문학과 단념하지 않기 위한 붙잡음으로서의 기억.

 

  독서는 종이 위에 새겨진 글씨들이 파편화된 잉크자국의 더미로 인식될 때까지 이어졌다. 새벽이 깊어진 시간은 밤새조차 울지 않아 고요했고 그 고요 속에서 문자는 흐트러지다가 모이기를 반복했다. 마치 꿈결처럼, 내려다보던 사물들의 경계가 지워지며 흰 것과 검은 것이 서로 뒤섞일 때, 그때 불현듯 각성의 순간이 찾아왔다가 영영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런 깨달음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잔상만을 남겨두고서.

 

 

* 기형도, <대학시절>에서.

 

**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역, <문학의 공간>에서.

 

*** <문학의 공간>에서 재인용,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이기 머고


근데 퇴고할 여유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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