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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어주실 분(만칠천자임)앱에서 작성

무아야x5(219.255) 2022.04.12 07: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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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비는 내리고

~

더운 거품비가 내린다.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평생 비라는 것과는 연이 없어보였던 눈 덮힌 가릉메기 산에도 그것은 예외가 없었다.

난생 처음 만나는 비라는 것에 순록들이 고개를 들어 입을 벌려 목을 축였고 늑대들은 겨울잠을 청했다.

자고 있던 곰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천천히 숨을 죽여나갔다.

결코 녹지 않는다 자랑하던 가릉메기 산의 만년설은 거품비에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 시대의 망조일지니.

~

녹아버린 눈이 흘러내리는 방향을 따라, 한 소녀와 늙은 노새 한 마리가 길을 걷고 있었다.

질척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산의 고요함을 찔러 추한 신음을 이어나갔다.

“금일 내로 하산하기는 마땅치 않아 보이는 구나, 발부르가.”

소녀는 정교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노새는 그저 푸르릉 거리며 울었을 뿐이지만, 소녀는 ‘사려 깊은 아이구나.’ 하며 노새를 칭찬해주었다.

지루한 발걸음이 익숙한 듯 소녀는 말 없는 길을 끈기 있게 걸어내려갔지만 노새는 눈 녹은 길이 어색해 종종 발굽을 비틀거렸다. 그럴 때면 소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노새가 다시금 제대로 자리 잡기를 기다려주었다.

작은 소녀의 발걸음과 비틀거리는 노새의 발굽은 분명히 산길을 걷는데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지지부진한 속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소녀는 불평 한마디 없었다. 그 얼굴은 평온했고 단지 작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무작정 계속해서 걸어갈 수는 없었다. 설산에 따뜻한 비가 내리는 이 전대미문의 이상기후 덕분에 당장은 아무런 문제 없이 길을 갈 수 있었지만 이 비가 그치고 다시 추위가 돌아온다면 젖은 몸은 꼼짝없이 얼어붙고 말 것이다.

소녀도 바보는 아닌 듯 점차 주위를 둘러보는 시간이 늘었다. 오랜 시간 걸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런 설산에서 하루 꼬박을 그대로 걸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쉴 곳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못한다면 목숨을 잃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발걸음에 조급함은 섞이지 않았고 속도가 늦춰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늙은 노새만이 가끔 투레질을 할 뿐이었다.

소녀가 발걸음을 멈춘 것은 산 중턱에 다다라서야였다. 그것은 그곳이 목적했던 곳이었기 때문도 아니고 힘이 들어 휴식을 청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다. 그저 내리는 거품비에 눈이 녹아 질척질척해진 땅에 늙은 노새의 발이 더는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녀와 노새는 계속해서 나아가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너무나 질척해진 땅은 그 걸음을 노련히 막아냈고 결국 소녀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한 것이다.

“어찌해야할꼬? 발부르가야, 너는 알고 있느냐?”

노새는 그저 여전히 움직이기 힘든 발을 구르며 푸르릉 댈 뿐이었다. 소녀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었고,

“너에게도 모르는 일이 있구나.”

그럼에도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노새에게 다시 말을 걸어주었다.

소녀는 이내 주위를 둘러보며 쉴만한 곳이라도 찾아보려고 눈을 흘겼다. 물론 이런 곳에서 시기 좋게 그런 곳이 발견될 리가 없었다. 소녀는 결국 커다란 나무 하나를 찾아 질척거리는 땅 위에 자리를 잡았다. 노새는 질척이는 땅과는 거리를 두고 싶다는 듯 계속 서있는 것을 고수했다.

“배가 고프니? 발부르가.”

소녀가 노새에게 당근을 하나 꺼내 입에 물려주었다. 노새는 입을 내밀어 한 입 씩 당근을 씹어먹었고 당근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소녀 역시 배가 고픈 듯 등에 매고 있던, 소녀의 몸에는 조금 커다래 보이는 가방에서 말린 풀쪼가리들을 꺼내 입에 넣었다. 소녀는 우물우물 풀쪼가리들을 씹어넘겼다. 전혀 먹음직스럽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소녀의 표정은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누가 노새인지 알 수 없을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소녀의 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고 노새는 그보다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고 소녀는 조용히 그 방향을 응시했다. 이윽고 풀숲을 가르고 튀어나온 것은 한 명의 성인 남성이었다.

“…뭐야, 어린애? 넌 누구지?”

소녀는 조용히 자신의 가방을 움켜쥐고 노새를 향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만약 남자가 위험한 인물일지라도 발이 이런 상황에서야 도망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심리적 안정감만큼은 얻을 수 있을지라.

“아, 미안하구나. 나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란다.”

“허나, 진짜 위험한 사람 역시 같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겠소?”

소녀의 특이한 말투는 남자를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은 듯, 남자는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조금 이해가 늦었을 수도 있고. 곧 남자는 다시금 입을 열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했다.

“그래, 분명 그렇겠구나. 하지만 난 정말로 위험한 사람이 아니란다. 나는 벨파스트 영지의 기사 툼 아르민 알레르토라고 한다. 이건 내 신분증이고.”

남자는 자신의 얼굴이 달려있는 확실한 증표를 가리켰다. 분명히 그곳에는 툼이라는 이름의 기사 작위를 증명하는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소녀는 잠시 눈을 게슴츠레 뜨어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를 보고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경계는 풀지 않았다.

“그대가 기사임을 알겠소. 그러나 부디 그대가 명예를 아는 기사라면 지금 이 자리를 지나쳐 떠나주도록 하시오. 발 끝에 칼날을 지닌 짐승의 걸음에 도라지꽃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나니. 어린 소녀에게는 그것이 지나친 공포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확실히 소녀의 말은 어린 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예스럽고 고풍스러웠다. 소녀가 주장하는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으나 기사인 툼에게도 역시 그것을 그대로 행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이곳은 위험한 설산이었고 지금은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리기에는 어린 소녀의 몸이 걱정되었다.

소녀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는 명예를 아는 기사였기에 소녀를 지나칠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나로서는 차마 너를 이곳에 두고 그대로 떠나갈 수 없단 걸 이해해줬으면 한다. 너 같이 어린 아이를 이런 곳에 혼자 두고 떠나는 것은 진정한 기사가 할 일이 아니지.”

그의 마지막 말은 소녀에게 으릅는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되뇌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원숙한 기사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의 신성함을 떠올리는 풋내기와도 같았다.

물론 그것이 소녀에게는 더할 것 없는 민폐였음은 분명해보였다. 그가 기사라는 것이 분명 거짓은 아닌 것 같았지만, 오히려 기사이기에 더욱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

“어린 기사여, 마지막으로 간청하오. 부디 이 어린 도라지꽃을 못본 척 넘어갈 수 없겠소? 아직 여린 도라지꽃은 그 곁에 물과 바람, 나무가 주는 그늘만이 있으면 충분하다 생각해본 적이 있지 않소? 부디 내게도 그러한 관용을 베풀어주길 소망하오.”

이번에도 그는 꽤 긴 시간을 멈칫한 채 생각을 굴렸다. 소녀의 말은 어려웠지만, 뜻하는 바는 간단하였다. 아까와 같이, 자신을 두고 사라지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째서 소녀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 무시를 바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평범한 소녀였다면 응당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짧은 상상력이 잠깐 사이에 먼 곳을 왔다갔다. 혹시나, 이 소녀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걸까? 아니라면 이 소녀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기에 기사를 꺼리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이 소녀는 마녀라도 되는 것일까?

적어도 이런 곳에 혼자서, 아니 노새와 같이 있다는 시점에서 소녀가 평범한 마을 아이일 확률은 없었다. 마녀는 아닐지라도 평범한 아이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소녀의 품새에는 익숙한 여행자의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의혹은 의혹일 뿐이었고, 그 앞에 놓여있는 것은 작고 여린 소녀일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저 지켜야할 아이에 불과했다. 모든 근거 없는 이야기들은 가능성일 뿐이었고 지금와서 고려할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꾸나. 나는 지금 이 산을 내려가고 있단다. 지금 이 산에 어째서 비가 내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은 너도 동의할 거라고 생각한단다. 그러니 비가 그치고 산이 안전해질 때까지만 동행을 하는 거로 하자.”

이쯤되면 소녀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 소녀 역시 쉽사리 산을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다면 그 상황이 쉽게 해결되리란 것은 분명해보였다. 결국 소녀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그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툼 아르민 알레르토. 툼이라고 불러주면 좋겠구나.”

“…밝힐 이름은 없소. 도라지꽃이라고 부르시오.”

두 사람의 짧은 산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옆에서는 자신도 잊지 말라는 듯, 발부르가가 푸르릉거렸다.

~

완전 진창이 되어 걷는 것조차 힘든 지대에서, 툼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도라지꽃과 발부르가는 그저 조용히 툼의 뒤를 따라갔다. 비록 수다스럽지는 않았지만 종종 발부르가에게 말을 걸었던 도라지꽃을 생각해보면 툼의 영향은 작지 않았다.

이렇게 조용한 상황이 되니 툼은 난감해졌다. 어떻게 대화를 하다보면 도라지꽃이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까,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과묵한 것은 그의 성미에는 맞지 않았다.

툼 역시 말주변이 뛰어난 친구는 아니었기에 또한 그러했다. 비가 슬슬 그치기 시작할 즈음이 되어서야 두 사람의 첫 대화는 이루어졌다. 특별한 가림막도 없이 그대로 비를 맞아 흠뻑 젖은, 노새를 보고 문득 꺼내버린 한 마디였다.

“노새가 많이 젖었구나.”

“감기에 걸리면 안되는데….”

짧은 대화였다. 그 뒤로 둘은 한동안 다시금 조용해졌다. 툼은 다시 자신이 말을 꺼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노새에 관한 이야기에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노새가 감기에 걸리면, 이 아랫 마을에 있는 마장에서 새 말을 구할 수 있을 거란다. 비에스고 영지의 말들은 건강하고 튼튼하다고 소문이 나있지. 노새나 버새도 취급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발부르가는 파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이크, 아무래도 툼의 얘기는 도라지꽃에게 결코 좋게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어린 소녀였으니 자신이 타던 말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이 영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툼은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말실수를 했군.”

“다음부터는 용서하지 않겠소.”

이 어린 소녀가 용서하지 않는 것이 무슨 큰 일이나 되는 것처럼, 도라지꽃은 엄숙하게 용서를 선언했다. 툼 역시 그에 맞춰 연극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크게 숙여 자세를 취하고 그 용서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과도 같아 멀리서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웠으나,

역시 가까이서 보아도 우스꽝스러웠다.

물론 한참 젖은 두 사람에게는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그 일련의 과정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작은 벽을 풀어주기라도 한 걸까. 분위기는 되려 조금 풀려있었고 도라지꽃도 조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친구의 이름은 발부르가라고 하오.”

“고풍스러운 이름이구나.”

툼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이름이었지만, 그 감상을 그대로 입에 꺼내지는 아니하였다. 툼은 돌려말해, 어찌보면 칭찬인 것 같은 듣기에 따라서는 비꼬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는 어휘를 골랐다. 다행히도 도라지꽃은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듯 하였다.

도라지꽃은 마치 자기 자신이 칭찬 받은 것 마냥 작은 미소를 지었다. 툼이 도라지꽃과 만난 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확실히 도라지꽃이라는 이 소녀는 노새를 매우 아끼는 듯 하였다.

“그렇지, 아주 영특한 친구라오. 똑똑하고 튼튼하고, 인내심도 깊소. 아주 착한 아이야.”

“오래 같이 지냈나보구나.”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같이 있었으니 오래 지냈다고도 할 수 있지.”

도라지꽃은 발부르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정이 듬뿍 담긴 손길이었다. 확실히 아까의 말은 큰 실언이었다고 툼은 생각했다. 반성이란 좋은 것이었다.

“아가씨는 어디로 가고 있나?”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있었소.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선택했고, 가지 않은 길을 향해 가고 있다네.”

아리송한 말이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물었더니 철학적인, 툼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오는 도라지꽃은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아까의 천진난만한 미소와는 다른, 무언가 의미심장한 의미가 담긴 듯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시인을 찾고 있단 말이네.”

“시인을? 어째서?”

도라지꽃이 손을 작게 움켜쥐고 가슴에 대었다. 그리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고 선언했다.

“잃어버린 그들의 노래를 되찾기 위해서.”

툼은 그러한 말을 비웃거나, 혹은 되묻지 않았다. 조금 이상한 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걸 입으로 꺼내거나 티를 낼만큼 생각이 짧은 이는 아니었기에.

분명 시작했을 때는 짧은 산행이라 했을 것이나 두 사람의 동행은 생각보다 오래 가게 되었다. 부슬부슬 쏟아지던 비가 점점 거칠어져 더 나아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도 두 사람은 비어있는 동굴, 정확히는 살짝 깊이가 있는 토굴을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금세 토굴은 끝을 드러냈으나 비를 피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툼은 노력했다. 최대한 덜 젖은 나뭇가지를 찾아왔고 불을 지피기 위해 부싯돌을 몇 번이나 튕겼다. 그러나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상황에 젖은 나뭇가지들로 불을 피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툼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신은 버틸만했지만 도라지꽃이 걱정이었다. 숨기려고 하는 것이 명백했지만 도라지꽃은 떨고 있었다. 체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툼은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도라지꽃아, 옷을 벗으렴.”

그러자 도라지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크게 떨었다. 무언갈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이런 오해를 사버린 걸까.

“아니, 미안하구나. 오해하지 마렴. 지금 상황에서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가는 위험해질거야. 네가 걱정이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란다. 겉옷만큼이라도 벗어보렴.”

“나는… 괜찮소.”

“고집 부릴 문제가 아니란다. 불도 못피웠는데 그런 걸 계속 입고 있다간….”

“괜찮대도!”

도라지꽃은 소리쳤다. 그 격렬한 반응에 툼도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 아이의 목숨이 걱정되는 건 맞았지만, 저렇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 여자아이의 옷을 강제로 벗길만한 배짱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툼이 고민하는 사이였다. 발부르가가 푸헹하며 기침을 냈고 그 힘찬 기침에 부싯돌이 튕기더니 모아놓은 나뭇가지에 불똥이 튀었다. 곧 연기가 나기 시작했고 나뭇가지가 밝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기묘한 광경에 툼은 놀랐지만 좋은 게 좋은거지, 하면서 도라지꽃을 불렀다.

“다행히 불이 붙었으니 옷을 벗지 않아도 되겠구나. 물론 벗어서 말리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여기서 도라지꽃은 명백한 질책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자, 최대한 가까이서 몸을 말리렴.”

도라지꽃은 불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 모습에서 툼은 작은 위화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녀의 케이프의 왼쪽 어깨 부분이 두툼하게 부풀어올라 있는 것이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걸까 싶을 정도로 티가 났지만, 툼은 역시 그러려니 하면서 넘겼다. 무언가 넣어두기라도 한 것이겠지. 그건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간에 옷을 벗고 말고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이미 깨진 분위기는 어쩔 수 없어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 일은 더는 없었다. 툼 역시 여자아이에게 자신의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특별한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비가 그칠 때까지 토굴에 있었고 그 후에는 나와서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여전히 녹은 눈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지만, 툼이 발부르가를 잡고 도와준 덕에 어떻게든 내려갈 수 있었다.

산을 내려가자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보였다. 다시금 꽤나 걸음을 옮겨야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도라지꽃이 안전해진 것은 확실한 듯 했다.

“자… 이제 곧 헤어질 때가 됐구나.”

“그대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오.”

“너무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는 없단다. 아무튼 나는 아직도 널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러고보니 그대는 벨파스트 영지의 기사라고 하였지.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 먼 곳까지 길을 찾아 온 것인가?”

“아…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줄 수 없겠구나. 기사에게도 나름의 비밀이란 것이 있는 법인지라.”

“그렇군. 충분히 이해하였소.”

도라지꽃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못할 만한 얘기는 물론 아니었으니.

둘은 곧 마을의 앞에 도달했다. 작은 마을이었기에 딱히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여행 조심히 다니렴. 내가 너를 더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아무튼 감사했소. 이만.”

마을에 들어서자 도라지꽃은 고개도 돌아보지 않은 채 툼을 떠나갔다. 툼은 어째 그 모습에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매정한 아이로구나. 하지만 쉬고 있을 틈은 없었다.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다행히 작은 마을이었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곳이었다. 툼은 주점으로 들어가서 유리잔을 닦고 있는 주인장에게 신분증을 들이밀며 물었다.

“기사, 툼 아르민 알레르토요. 혹시 내 이름으로 이곳에 온 편지가 있소?”

주인장은 조금 힐끗 신분증을 들여보더니 곧 찬장에 깔려있는 편지를 한 봉투 꺼내 건네주었다.

“여깄소.”

“고맙군.”

툼은 편지를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주문한 뒤, 편지 봉투를 뜯었다. 안에서 나온 편지는 자신의 임무에 관한 이야기가 써져있었다. 툼은 꼼꼼히 편지를 읽어내려갔는데 다 읽었을 즘이 되어서야 그 밑에 편지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편지를 읽자 툼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곧 툼은 당장 주점에서 뛰쳐나와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케이프를 쓰고 있는 작은 소녀 한 명을 보지 못했소? 하얗게 샌 머리칼에 늙은 노새를 데리고 다니고 있는 아이요.”

그러나 기이하게도 분명 같이 마을에 들어왔을 소녀를 보았다는 이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리 찾아도 도라지꽃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편지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자신을 꽃 이름으로 부르는 하얗게 샌 머리의 회색 눈을 가진 소녀를 발견한다면 반드시 살아있는 채로, 상처를 입히지 않고 생포하라. 생포에 성공하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임무는 무시한 채, 아르미온 영지로 가라. 소녀와 같이 있는 노새는 죽여도 상관없다. 노새의 정체는 발부르가, 마녀 발부르가다. 이 모든 사항은 기사가 아닌 이에게는 함구하라.’

그러나 도라지꽃은 이미 마을을 떠난 듯, 아니, 애초에 마을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듯 사라져버렸다.

툼은 쉴 틈을 가질 새도 없이, 소녀의 발자취를 찾아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는 한 소녀와 노새가 숨어서 작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

그들의 등에는 한 쌍의 날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추하게 썩은 고깃덩이 같은 날개를, 어떤 것은 아름답게 반짝이는 나비의 날개를, 어떤 것은 천사처럼 신성한 백조의 날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날개가 달린 인간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모습을 한 새와 같이 살았습니다.

때론 벌레고, 때론 박쥐며, 때론 물고기입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들은 시가 되지 않는 말은 꺼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은 시로 이루어져 있고 시로 시작해 시로 끝납니다.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시인일 수록 천박한 시를 부르고, 추한 날개를 가진 시인일 수록 아름다운 시를 부른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을 하지 않게 된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되었고요.

그들은 입을 닫았을 때부터 천천히 야위어 갔습니다.

모두가 그들의 입을 열려고 애를 썼지만 효과는 없었습니다.

천박하게 남자를 유혹하는 노래를 부르던 백조 날개의 세이렌도,

긍지 높은 기사들의 찬가를 부르던 뼈 날개의 루드밀라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시인‘이라고.

~

왕국 프랑셴의 아르튀르 아르미온 백작은 깊은 시름에 빠져있었다. 아내가 딸아이를 낳고 죽은지 3년, 그 3년 동안 백작은 지극정성을 다해 딸아이를 키웠다. 딸아이의 이름은 르네, 아내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이제 남은 하나뿐인, 유일한 피붙이였다. 백작은 르네를 아버지로서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주는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얄궂게도 백작의 기대를 배신했다.

처음에는 그저 말을 배우는 것이 조금 느린 줄 알았다. 그러나 3년이 되도록 아이가 말을 하지 않자 초조해진 백작은 각지의 내로라 하는 의사들을 모두 불러모아 아이가 말을 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마치 인형처럼 행동했다. 언제나 늘 가만히 있고 아무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용한 아이었다.

결국 모든 의사들은 결론내렸다.

르네는 벙어리였고, 자폐아였다.

의사들은 말했다.

백작의 따님께서는 아마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길면 5년, 짧으면 2년… 안타깝지만 따님을 구할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백작은 절망했다. 아직 어린 르네를 부여잡고 아이가 울 것을 대신 울어주기라도 하듯이 아기처럼 울어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여전히 르네를 사랑했다.

매일같이 방에 들러서 말을 걸고 직접 동화책을 읽어주며 직접 밥을 먹여주었다. 백작은 인형 같은 자신의 딸 아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르네는 5살이 되었다.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나 살아있었다. 살아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백작이 르네를 계속 사랑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 백작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백작은 아직 아내를 잊지 못했건만, 가문의 신하들이 그에게 재혼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백작가를 이을 후계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딸아이는 백치였고, 백작에게는 따로 가까운 친척도 없으니 아이를 데려와 수양아들 삼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백작도 언제까지고 재혼을 미룰 수는 없었다.

르네가 6살이 되기 전, 백작은 베를렌느 후작 가문의 둘째 영애 플로렌스 베를렌느와 재혼했다. 후작가의 열렬한 구애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 자리에는 사랑스럽게 단장한 르네도 앉아 있었다. 르네는 초점 없는 눈으로 아버지의 재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이제는 백작 부인이 된 플로렌스는 대놓고 백작이 르네를 돌보는 걸 불쾌하게 여겼다. 처음에는 플로렌스도 르네를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백치에 벙어리라니.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존재였다. 자신이 아이를 낳게 되면 무조건 그 아이가 아르미온 백작가를 이을 것이다. 백치에 벙어리에 여자아이인 르네는 사실상 승계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운좋게도 플로렌스는 백작과의 첫날 밤에 바로 아이가 들어섰다. 이제 모든 것이 플로렌스의 것이었다.

단 하나 백작의 사랑만 빼고.

백작은 임신한 자신의 새 아내 플로렌스를 그리 기껍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정치적으로 후작가와 연을 맺는 것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첫날 밤에 바로 아이가 들어섰으니 그 후로 플로렌스를 찾는 일도 없었다.

플로렌스는 사랑 받지 못하는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한 증오를 모두 르네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르네를 괴롭히는 것은 힘들었다. 백작은 하루도 빠짐 없이 르네의 방에 들렀고 자신의 비는 시간을 모두 르네에게 투자했으니 무언가 낌새가 있다면 백작이 바로 눈치챌 것이었다.

게다가 백치에 벙어리인 아이를 시기하여 아이를 해하는 것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그야말로 추문이 따로 없을 것이었다. 안그래도 불쌍한 아이에게 어찌 그런 투기를 하느냐고 비난이 쏟아지겠지.

백작과 플로렌스의 사이는 멀어져만 갔다. 아니, 애초에 가까웠던 적도 없었다. 백작은 처음부터 플로렌스를 멀리하였으니까. 플로렌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아이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르네가 일곱 살이 되는 해, 아이가 태어났다. 남자아이였다. 이름은 샤를이라고 지었다. 샤를 베를렌느 아르미온, 장차 이 백작가를 손에 쥘 아이였다.

하지만 백작은 샤를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르네를 향한 백작의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으나 그럼에도 다른 아이에게까지 주기에는 너무 적었나 보다. 플로렌스는 더욱 악착같이 샤를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완벽해야 했다. 그래야만 백작의 관심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플로렌스는 벌써부터 아이가 큰 후를 상상하고 있었다.

반면 백작은 1년 후를 상상하고 있었다. 의사들이 말한 르네의 수명까지 남은 것은 1년이었다. 지극정성으로 돌본 탓에 르네는 예전보다 상태가 좋아진 것도 같았지만 여전히 표정은 무표정했고 말은커녕 옹알이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일 조차 없었다.

르네는 여전히 인형이었다.

샤를이 한 살이 되고 르네가 8살이 된 해였다. 의사들의 말처럼 르네의 상태는 시시각각으로 안좋아지고 있었다. 다시금 의사들을 불렀지만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의사들은 말했다.

따님이 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것이…. 저희도 이런 말씀을 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백작은 다시금 르네를 껴안고 울었다. 나의 사랑하는 딸아. 너무 빠르지 않느냐. 너무나도, 지독히도. 아직 아빠라는 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어찌 이리도 세상은 매정하단 말인가.

백작은 정무조차 내팽겨친 채 르네를 돌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백작은 르네에게 붙어있고, 백작 부인은 샤를에게만 붙어있으니 모든 일들은 백작의 가신들이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폭풍이 부는 밤이었다. 어느샌가부터 부쩍 늘어난 비가 거세게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번개가 내리치고 곧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거센 날씨도 백작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백작은 그저 점차 숨이 약해지는 르네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그녀의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것은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의 고행이었으나 백작은 결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르네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러가라.”

“하지만 백작님.”

“물러가라 하지 않았는가? 내 말이 그리 우습게 들리는가? 르네가 잠을 자고 있지 않느냐.”

물론 백작도 르네가 정말로 지금 자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있는 르네를 보며 그리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나 백작이 축객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의 목소리는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백작의 목조차 돌리지 못한 그 목소리의 이어지는 말에 백작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 밖에서 르네님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백작을 만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백작은 이런 사람들을 여럿 만나왔다. 의사인 적도 있었고 마법사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있게 들어와서 호언장담을 하던 그들은 이내 곧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단 한 번도 르네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찾아오는 이들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르네는 정말로 곧 죽을 상황이었다. 백작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손님을 마주했다. 손님은 자신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떠돌이 의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백작의 앞에서도 그것을 벗지 않고 있었다.

“백작님의 앞이다. 후드를 벗어라.”

“죄송합니다. 저는 얼굴에 굉장히 심한 상처가 있어 차마 백작님에게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없습니다. 부디 선처를.”

“그런…!”

기사의 말을 물리고는 백작이 물었다.

“후드 같은 것은 상관 없소. 르네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쇠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성별을 구분하기 쉬운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꽤나 노인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르네를 살려주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들어주겠소. 영지를 전부 달라고 해도 좋소. 제발 살려만 주시오.”

백작의 말에 옆에서 그를 듣고 있던 기사들은 기겁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얼빠진 이는 없었던 모양이다.

“우선 따님의 방으로 가시지요. 가신들과 기사들을 전부 물리고 저와 백작님, 그리고 따님만이 있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소.”

의심스러운 얘기였지만 백작은 단 한 순간의 고민도 하지 않고 말을 들었다. 모두가 백작의 안전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백작의 고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르네의 방 안에 오직 백작과 르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떠돌이 의사만이 남았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이오? 내가 무엇을 하면 되오?”

“네가 무슨 일을 할 필요는 없단다, 아이야.”

백작은 놀랐다. 분명 기분 나쁜 쇠구슬 긁는 듯한 소리의 목소리가 아주 아름답고 교태스러운 목소리로 바뀐 것이었다. 놀라서 떠돌이 의사를 바라보자 떠돌이 의사가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나타난 것은 화상을 입은 끔찍한 모습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 순간 천둥 번개가 내리쳤고 그녀의 흑단처럼 검은 머리가 빛이 났다. 그 얼굴은 흑요석처럼 단단한 눈동자를 가진 아주 아름다운 미녀의 얼굴이었다.

“당신은 대체…!”

“나는 대마녀 발부르가, 종말의 마녀 발부르가다.”

“마녀라고?!”

“그래, 두려우냐? 몸이 떨고 있구나.”

그러나 백작의 얼굴은 결코 두려움에 젖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열이었다. 백작은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딸을 살릴 가능성을. 마법사도 의사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모두가 가망이 없다고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녀가 하지 못할거라고는 누가 말했던가?

“두려움 같은 것은 없소. 당신이 마녀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소. 당신은 분명 르네를 살릴 수 있다고 말했으니, 르네를 살려주기만 한다면 나는 여전히 약속을 지킬거요.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가게 해주겠소. 마녀임을 고발하지도 않을테고 당신을 쫓아 구속하지도 않을테요. 부디… 르네를 구해주십시오.”

“현명한 아이로구나.”

발부르가는 르네가 누워있는 침대 한쪽 구석에 앉아서 르네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르네의 머리칼은 허리춤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자라 있었다.

“이 아이가 어째서 말을 못하고, 백치이고, 죽어가는지 알고 있느냐?”

“…모르오.”

“이 아이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래서 그런 것이야.”

“영혼이 없다고…?”

“이 아이가 응당 가져야 할 영혼이 아직 몸에 찾아오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아이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야.”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이오?”

발부르가가 아주 멍청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로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혼을 데려와야지.”

그리고는 발부르가는 소매품에서 길다란 나무 지팡이를 꺼냈다. 그 작은 소매품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고 긴 지팡이였다.

백작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발부르가는 지팡이를 들고 천천히 르네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는


하고 르네의 머리를 지팡이로 살짝 쳤다.

“끝이다.”

“끝…이라고?”

“그래, 뭐 거창한 의식이라도 할 줄 알았더냐? 아쉽지만 그런 건 필요없단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의 길을 뚫어주는 것 뿐이니까.”

“정말로 이걸로 끝이오? 르네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오?”

“내일이면 일어날 것이다. 이만 나가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발부르가는 다시 소매품에 지팡이를 집어넣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발부르가는 곧 큼큼대며 헛기침을 하였는데 그 목소리는 다시 쇠구슬 긁는 듯 기분 나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백작이 밖으로 나가려는 발부르가를 보며 물었다.

“잠깐, 르네를 살려주는 것에 대한 대가는 무엇이오?”

“그것은 따님께서 일어나신 뒤에 얘기하도록 하죠. 저는 이만 한 숨 자야겠으니 방을 안내해주시겠습니까? 마구간이라도 좋습니다.”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백작은 그대로 사람들을 불러 마녀를 가장 좋은 손님용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 기사들을 대기시켰다. 물론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백작은 밤새 르네의 곁을 지켰다. 처음 변화는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작은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르네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예전처럼 가늘고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작은 숨소리가 아니었다. 백작은 자기도 모르게 르네의 손을 부여잡았다.

밤은 길었다. 백작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그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르네의 볼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고 숨소리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정말이었다. 르네가 정말로 살아난 것이었다.

아직 안심하긴 일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기쁜 맘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아, 르네….”

그리고 수시간이 지났다.

떠오른 태양이 르네의 방 창문을 통해서 햇살을 내비췄다.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한 백작은 그저 계속해서 르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부스럭… 소리를 내며 르네의 손이 떨렸다. 그리고 르네의 눈이 떠졌다. 백작은 당장에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르네는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르네….”

그리고 백작은 자기도 모르게 르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르네가 아주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돌린 것이다. 공허한 눈이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초점을 잡고 있었다. 르네는,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아, 돌아온 것이었다. 아주 먼 길을 돌아왔지만 결국 돌아온 것이었다.

“르네…!”

백작이 울며 르네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그리고 르네의 손을 붙잡았다.

“드디어 네가 날 바라보는구나. 날 봐주는 구나. 얼마나 이런 날을 기다렸는지,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마녀 발부르가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할 길 밖에 없습니다. 저에게 딸을 돌려줘서 감사합니다. 아아!”

백작의 기쁨은 그렇게 말 몇 마디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작이 태어난 이래, 그는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한 날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기쁨에 빠져있었기에 백작은 르네의 입이 조금씩 꿈틀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잠깐의 시간이 흘러 르네가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생 처음으로 르네의 목소리를 듣는 백작은 생각했다. 어리고 작고 연약한 목소리였으나 어쩐지 그 안에는 깊은 심지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백작에게는 불행히도 그 말은 백작이 듣고 싶어하던 말, 아빠라는 말은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오?”

르네는 아주 또박또박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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