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3일차 파트 2 : 부나하벤, 쿨일라
3일차 파트 1(아드나호)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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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나호 증류소에서 25분 정도를 걸어 마침내 아일라의 북동쪽 끝 증류소, 부나하벤 증류소에 도착했다.
비지터 센터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공간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점도 한 몫 한 것 같았다.
카운터에 가 캐스크 스트렝스 테이스팅 투어 예약을 했다는 사실과 이름을 알려주자 잔들이 미리 세팅된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였는데, 어제 여기를 다녀온 한국인 친구가 부나하벤이 그렇게도 좋았다고 했던 이유가 한번에 납득될 정도였다.
테이스팅을 시작하기 전 투어 담당인 '케일'이 각 잔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설명 이후 케일에게 아일라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가 여기에 다녀갔는데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문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침 어제 케일이 웨어하우스 테이스팅 투어를 담당했었는지라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한테도 브리젠드 호텔 근처에 있는 '아일라 위스키 볼트' 바에 가보라며 몇 번이고 추천을 해 주었다.
첫 잔으로는 모이네 올로로소 와인 캐스크 피티드 제품을 선택했다. 53.9도지만 그나마 넷 중 가장 도수가 낮은 잔이기 때문인 동시에 어제 밤 숙소에서 한국인 친구가 아마로네 캐스크 피니쉬 제품을 바이알에 담아와 한모금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더 좋았던 점은 짐을 봐줄테니 잔을 들고 발코니나 해안가 등 어디에서나 마셔도 된단 이야기였다.
약한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잔을 들고 전망대 겸 발코니에 나가자 주라 섬의 끝자락과 바다가 보였다.
2004년 모이네 올로로소 캐스크 피티드, 53.9도
잔을 들고 전망대 겸 발코니에 나가자 주라 섬의 끝자락과 바다가 보였다. 저 멀리 걸어오면서부터 틈틈히 보였던 큰 배도 한 척 보였다.
위치 상 포트 아스케이그로 향하는 배일테니 장소는 다르지만 금요일에 내가 타게 될 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장인가 사진을 찍고 있자 활기찬 4인조가 테라스로 들어왔다.
이 네명은 잉글랜드에서 여행을 왔다고 했다. 이제는 루틴화가 된 한국에서 온 이야기와 비행 시간 등을 얘기하며 30분 정도를 떠들었다.
넷은 웨어하우스 투어를 예약했는지라 헤어지기 전에 서로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멤버 중 둘이 자기도 한국 드라마 좀 봤다며, 손 하트를 들고 사진을 찍게 되었다.
텐션 높고 유쾌한 친구들. 대화가 엄청 즐거웠다.
다시 실내로 들어와 두 번째 잔을 선택했다. 솔직히 가장 궁금했던 녀석, 브랜디 캐스크 피니쉬 제품이다.
2002년 스패니쉬 오크 브랜디 캐스크 5년 피니쉬, 58.2도
향이 엄청 독특하다. 약간의 황냄새가 느껴졌다. 정말 위스키보다 브랜디에 가깝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느낌. 화이트 와인 같이 드라이한 단맛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스파이시함이 튀었는데 점차 달달함이 늘어났다.
노즈부터 피니쉬까지 위스키에서 처음 느낀 맛이 한가득이라 혼란스러운 동시에 긍정적으로 재밌는 한 잔이었다.
두 번째 잔을 마시고 있을 즈음, 방문객 센터에는 나를 포함해 세 팀, 합 5명 정도만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부나하벤은 방문객 센터에 있는 직원이 많은 편이었는데, 그렇다 보니 한가해진 틈을 타 직원 Mark 가 어디선가 기타를 챙겨와 연주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창밖엔 바다, 옆에서는 기타 연주, 맛있는 위스키까지. 그저 즐거운 시간이었다.
20분 정도 비지터 센터를 돌아다니며 기타를 연주했던 Mark.
기타 소리 사이로 낮게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와 창 밖의 파돗소리가 들려왔다.
아일라는 증류소부터 펍까지 많은 장소에 반려동물 동반 입장이 가능했다. 부나하벤 증류소도 마찬가지라 친근한 녀석과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부나하벤 비지터 센터 내부 모습.
지금 생각해보니 바이알이라도 몇 개 살걸 그랬나 싶다.
그렇게 잉글랜드에서 온 친구들을 보내고 혼자 술을 홀짝이고 있자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미국에서 온 부부로, 페페씨와 스타씨였다. 한국인 기준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이 독특한 편이라 곧장 외울 수 있었다. 두명은 텍사스에서 살고 있으며 2주의 휴가를 내고 왔다고 했다. 간만에 듣는 스코틀랜드 억양 없는 미국식 영어에 반가움을 느끼며 인사를 나눴다.
어떻게 왔는지부터 좋아하는 위스키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부나하벤 증류소에 도착한지 약 1시간 45분 정도가 지났다. 페페씨 일행은 둘 다 술을 마시고 싶었기 때문에 일일 택시를 대여했다고 했다.
차를 타고도 짧은 길이 아니었는데 히치하이킹을 포함하더라고 그 거리를 걸어왔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그들은 점심을 먹은 다음 쿨일라 증류소 투어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같이 이동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담아온 잔들
2009년 아마로네 캐스크 피니쉬 3년, 59.7도
2023년 올로로소 및 아메리칸 오크 캐스크 블렌딩 12년, 60.1도 (2023 12년 CS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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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저 거리를 걸어 돌아갈 생각에 이미 막막했던지라 너무나 감사히 동행을 부탁드리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과 떠드느라 절반인 두 잔에는 손도 대지 못 한 상태였기에 케일에게 부탁하여 남은 잔들을 바이알에 담아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예쁜 부나하벤 상자에 담긴 바이알을 받고 페페씨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택시 기사님에게 동행을 알려드리고 함께 이동하던 중 잠시 아드나호 증류소에 들를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2회차 방문을 하게 된 덕분에 아침에는 마시지 못했던 위스키를 이번에야 말로 주문할 수 있었다.
돌아온 아드나호 증류소. (사진은 오전에 찍은 사진으로 대체)
독립병입자 헌터랭의 더 올드 몰트 캐스크 시리즈, 부나하벤 27년 싱글캐스크
달달한 과일의 향이 훅 올라온다. 높은 도수에 비해 굉장히 부드럽고 장미 같은 꽃의 느낌이 난다. 장미와 오이 향으로 유명한 헨드릭스 진이 장미향만을 살려 위스키를 만든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피니쉬는 중간 정도의 길이로 마지막에 약한 스파이시함이 느껴졌다. 오프노트 하나 없는 굉장히 재미있고 달달한 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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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페씨도 같은 부나하벤 27년을 시켰는데, 둘 다 살면서 이정도 고숙성 위스키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방금까지 있었던 부나하벤 증류소 제품이었던 만큼 약간의 비교가 가능하였기에 마치 투어의 연장 같은 기분이었다.
아드나호에서 짧은 구경을 마치고 식사를 위해 포트 아스케이그 호텔 식당으로 향했다.
포트 아스케이그 부근의 작은 항구.
날이 본격적으로 개기 시작해 모든 것이 정말 아름다웠다.
식당은 작은 편이었는데도 아일라 답게 온갖 귀한 위스키가 백 바에 가득했다. 페페씨와 우리는 햄버거를 하나씩 시켰는데, 나는 소고기 버거를, 페페씨는 사슴 버거를 시켰다. 물어보니 미국에서도 사슴 고기를 먹어본적이 있었다고 했다.
버거 자체도 맛있었는데 그보다도 감자가 굉장히 맛있었다. 유럽쪽 감자가 상대적으로 맛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차이가 느껴져서 신기했다.
감자튀김을 함께 부워서 먹는 문화나 소스에 두 번 이상 찍어먹는 더블 딥(Double-dip) 등 문화적 차이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짧은 식사를 마친 뒤 다시 택시에 올라 쿨일라 증류소로 향했다.
쿨일라 증류소 또한 바닷가에 지어져 있다.
다른 두 증류소와의 차이점이라면 부나하벤 증류소는 거의 해수면과 가까운 곳에 증류소가 있고 아드나호와 쿨일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 높이의 차이가 자연스럽게 방문객 센터의 전망 차이를 만드는데, 각 증류소별로 보이는 주라 섬 및 해안선의 방향이 달라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력이 있었다.
부나하벤에서부터 함께한 페페씨와 스타씨는 쿨일라 투어를 예약한 상태였다. 그렇게 우리 또한 다시 보자는 말과 함께 헤어졌다.
쿨일라의 방문객 센터는 다른 두 증류소 센터를 합친 것 이상으로 굉장히 크다.
굿즈와 위스키를 판매하는 코너 넘어로 기다란 바가 있는데, 그 뒤로 넓게 유리창이 있어 빛이 들어오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었다. 쿨일라에서 보모어까지 가는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바에서 한 잔을 시켰다.
쿨일라 13년 페스아일 2023, 퍼스트필 PX + 올로로소 쉐리 캐스크
쿨일라 특유의 피트함과 소금기, PX 캐스크의 다크 초콜릿, 특성이 굉장히 잘 느껴졌다. 적당히 맛있는 한 잔.
술잔을 비운 다음 바 뒤로 이어지는 바닷가 경치를 구경하러 내려갔다.
정말 가까이 보이는 주라 섬.
소설가 조지 오웰이 1984를 적었던 주라 섬에는 아일라 섬 인구만큼이나 사슴이 산다고 한다.
포트아스케이그에서 출발하여 당일치기로 짧게 주라 섬과 주라 증류소 투어도 가능하다고 한다. 다음에 아일라에 방문하게 된다면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버스를 타기 위해 증류소를 빠져나왔다.
아일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란색 꽃이 길의 양옆에 한가득 핀 길을 15분 정도 걷자 버스 증류소가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발견한 한글 낙서에 반가워하고 있자, 조금 더 반가운 얼굴을 곧 마주할 수 있었다.
바로 버스 기사 John이었다. 포트 아스케이그로 가는 반대편 차선에서 나를 발견하더니 다시 돌아오니까 기다리라며 엄지를 척 치켜 올려줬다.
15시 21분,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는지라 한국인 친구와 부나하벤 증류소에서 추천을 받은 Islay whisky vault 로 다음 목적지를 잡으려는 순간 카카오톡이 울렸다.
바로 어제 라프로익에서 보모어로 오가는 길에 만났던 일본인, 히데씨 부부였다.
지금 보모어에 도착했는데, 시간 괜찮으면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이야기였다. 마침 뒤에서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는지라 아주 짧은 고민 끝에 '에라 모르겠다, 아일라는 또 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버스에 올라타 목적지로 보모어를 불렀다.
도착한 보모어. 작은 동네의 중심부에 증류소가 위치해 있다.
보모어에 도착해 카톡을 보내자 히데씨 부부가 마중을 나왔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함께 보모어에 있는 적당한 펍으로 이동하여 맥주를 시켰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장난끼 가득한 녀석
펍에 강아지가 총 2마리 있었다.
엄천난 양의 옥토모어. 아일라 아니랄까봐 어떤 펍에 가도 어마어마한 위스키들이 널려있다.
벌써 세 번째 본 사이라고 친숙함마저 느껴지는 히데씨 부부와 다양한 대화를 나눴다. 히데씨는 도쿄에서 15년 째 해산물 이자카야와 바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 이름인 '히데'를 영어로 적으면 hide 가 되어 바를 스피크 이지 바 형태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게다가 6월 이후에 치치부 증류소에서 구입한 바 한정 캐스크 제품이 나온다며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오니 일러스트가 그려진 라벨과 병 디자인을 구경시켜 주셨다.
한국에 바를 소개해도 괜찮냐는 물음에 흔쾌히 좋다고, 영어도 약간의 한국어도 아시니 편하게 말을 걸어달라고 하셨다.
히데 바 위치 (구 를 go로 변경)
히데씨와 아내분.
히데씨의 옷을 자세히 보면 치치부 증류소 옷이다. 치치부 사장님과 친구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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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하는 것에 대해 서로서로 질문을 나눴는데, 히데씨는 과거 미국에 방문한 적 있었으나 영어를 몰라 고생을 했다고 하셨다. 사실 고생 이상으로 대화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이후 영어를 정말 열심히 배웠다고 하셨다.
아일라에는 지속적으로 방문하고 있는데, 보모어 호텔의 사장님과 친구 사이라고 했다. 방문할 때 마다 숙박하는 것은 물론 종종 보모어 호텔 사장님이 아일라 한정 위스키들을 택배로 보내는 방식으로 제품을 받기도 한다고 했다.
어제 이야기한대로 한국만 20번을 넘게 방문했다 하셨는데, 세상에서 대창 구이가 제일 맛있는 곳은 한국에 있다며 구글맵을 보여주거나 한국에서 방문하셨던 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렇게 맥주 3잔치 대화를 나누었을 무렵 아쉽게도 포트샬롯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기 위해 자리를 떠야만 했다.
아일라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그랬듯, 우리 또한 곧 다시 보자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래도 기왕이면 6월 이후가 되어야 히데 바 한정 보틀이 있을테니 여름이 끝날 즈음에 도쿄행 일정을 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역시 작은 동네가 아니랄까, 보모어에서 포트샬롯으로 가는 버스 기사님은 아침 포트샬롯에서 브리젠드 호텔로 태워주신 버스 기사님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포트샬롯. 마치 집에 도착한 것만 같은 반가운 따스함이 느껴졌다.
아일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3일차 : 부나하벤, 쿨일라 끝
4일차 : 브룩라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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