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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은과 김태촌 누가 사시미칼 도입의 선구자인가

ktm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1.03.29 23: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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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기사중 발췌)

 

“빛이 어둠에 비취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장 5절)

김태촌(58)과 조양은(57). 한때 국내 조직폭력계 대부로 군림했던 두 사람의 이름이 새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화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 사건 때문이다.

한화측 요청을 받고 폭력배들을 끌어들인 혐의를 받고 있는 전 맘보파 두목 오모씨는 김태촌씨가 이끌던 범서방파(혹은 서방파)의 행동대장 노릇을 했다. 1980년대 후반 김씨가 인천 유흥가를 접수하는 데 길잡이를 한 그는 OB파 두목 이동재 습격 사건, 인천 뉴송도호텔 사건 등에 개입한 전력이 있다.

사건 당일 저녁 한화측 관계자가 들른 것으로 알려진 P음식점의 사장 나모씨는 김태촌씨의 직계 부하였다. 몇 년 전에도 구속된 적이 있다. P음식점은 김승연 회장이 종종 들르던 강남의 유명한 고깃집이다.

한편 일부 언론은 이 사건에 양은이파 전 조직원도 관련됐다고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사건의 발단이 된 청담동 G가라오케의 지분 소유자로, 한화측 요청으로 폭력배를 동원한 혐의를 받고 있는 권투선수 출신 장모씨를 지목해서였다. 하지만 경찰이 관리하는 조직 계보에 장씨의 이름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양은이파의 전 간부도 기자에게 “전혀 못 들어본 이름”이라며 “웬만한 동생들은 다 아는데, 그런 애는 없다”고 부인했다.

김태촌씨와 조양은씨의 라이벌 의식은 정치권의 김영삼-김대중씨의 관계에 비견된다. 서로 자신이 최고임을 내세우는 두 사람은 쫓고 쫓기는 ‘전쟁’을 치르며 경쟁이라도 하듯 대형사고를 터뜨려 왔다. 교도소에서 만나 화해했다가도 출소하면 또 등지고 원수가 됐다. 그러면서도 결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곤 했다.

현재 수감 중인 두 사람은 이 사건이 재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우려하고 있다. 그들은 지난해 11월과 올해 4월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속됐다. 김씨는 뇌물 혐의, 조씨는 폭력 혐의다. 김씨는 생애 10번째, 조씨는 7번째 구속이다. 소년원까지 포함하면 각각 13번째, 9번째다. 김씨는 모두 합해 약 33년, 조씨는 약 20년의 징역을 살았다.

애초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던 김씨는 심근경색, 심장관상동맥 폐쇄, 폐결핵 등으로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현재 경남 진주의 경상대병원에 입원해 있다. 조씨는 경기도 의왕의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다.

 

서방파 두목이라는 ‘주홍글씨’

두 사람의 구속에 대해 주변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구속당할 짓을 했다며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름값’ 때문에 혐의가 과장됐으며 억울한 면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경상대병원 병실에서 기자를 맞은 김태촌씨는 “서방파 두목이라는 주홍글씨가 평생 따라 다닌다”며 “국민에게 ‘또 김태촌이네’ 하는 인식을 심어준 게 억울하고 한스럽다”고 호소했다.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조양은씨의 부인 김모씨는 “무리한 수사”라며 “이미 갈취 혐의는 빠졌고 폭행 부분도 본인은 억울하다고 한다.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국내 조직폭력계의 산 증인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조직폭력의 세계는 어둠의 세계다. 조직폭력의 역사는 곧 우리 사회의 이면사다. 그 이면사에는 인간의 속성인 폭력이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과 결합해 다양한 형태로 표출돼 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재조명하는 것은 우리 사회 이면사의 단면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암흑가의 제왕이던 두 사람이 빛의 세계인 신앙의 길을 지향하다 다시 어둠의 거리로 내몰린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신조를 갖고 있는 강력부(현 마약조직범죄수사부) 검사들은 주먹의 ‘개과천선’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과연 두 사람은 검사들의 그런 신조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여생을 바칠 것인가.

김승연 회장 사건을 맞아 수사기관과 언론에서는 범서방파나 양은이파 앞에 ‘전(前)’자를 붙이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두 조직이 건재한 것처럼 얘기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두 조직은 오래 전에 와해됐다. ‘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대부분 사업가로 탈바꿈했다. 다만 명불허전이라고, 과거에 양은이파와 범서방파 식구였다고 하면 건달세계에서 족보를 인정해주는 정도다. 그들 중 일부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언론이나 수사기관에서 보는 것과 달리 현재 주먹계에서 두 사람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전북 출신으로 서울에서 100명 동원이 가능하다는 주먹계 실력자 백모씨는 “현재 서방파와 양은이파라는 조직은 없다. 옛날 브랜드일 뿐이다”고 잘라 말했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의 옛 동생들은 다 ‘개인 플레이’를 하고 있다. 형-동생 관계로 지낼 뿐 조직 활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 지방 중소도시에서 20여 명의 동생을 이끌고 있는 Y씨도 “양은이형과 태촌이형 시대는 끝났다.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며 “개념 없는 기자가 많다”고 언론을 비판했다.

두 사람이 여전히 주목을 받는 것은 과거에 화려했던 명성 때문이다. 그 이름값으로 두 사람은 지금 양지와 음지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그 이름값은 또 수사기관의 실적 쌓기에 변함없이 매력적인 소재다.

 

“김태촌, 조양은은 주먹사회 패잔병”

두 사람이 조직폭력계의 대부였다고 해서 국내 주먹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정통 주먹계에서는 두 사람을 보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표선수’도 아닌데 수사기관과 언론이 키웠다는 것이다. 이리 배차장파에 뿌리를 둔 모 조직의 간부 J씨는 “3대 패밀리는 언론이 키운 ‘매스컴 주먹’”이라고 깎아내렸다. 두 사람은 노출된 주먹이고 실제로 암흑가를 움직이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주먹이라는 점에서 일리 있는 지적이다. Y씨는 “진짜 주먹들은 따로 있다”고 귀띔했다.

드러나지 않은 주먹은 ‘실세 주먹’ ‘귀족 주먹’으로 불린다. 안정된 지역 기반을 갖춘 이들은 대부분 재력가이고 사업가다. 권력층과의 친분도 두텁다. 웬만해선 교도소에 가지 않으며 가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전국 어디에서나 통하는 명성과 탄탄한 재력을 바탕으로 장막 뒤에서 주먹계를 좌지우지한다. 따로 조직을 거느리고 있지는 않지만 유사시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후배 보스’를 통해 수백명을 동원할 능력을 갖고 있다.

“김태촌, 조양은 두 사람은 만날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통에 뿌리가 없어졌다. 현재 아무런 조직이 없다. 내가 보기엔 김태촌이나 조양은이나 주먹사회에서 패잔병이다. 그런데도 계속 수사기관의 표적이 되니 답답한 일이다.”

원로 전국구 주먹 조일○씨의 진단이다. 조양은씨와 김태촌씨의 선배 주먹들은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사시미칼 시대’를 열고 선배를 공격하는 등 주먹계 위계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정통 계보에 끼워주지 않는다. 건달이 아니라 양아치라는 시각이다. 상당수 주먹이 건달이라는 표현을 즐긴다.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건달은 싸움을 하되 일정한 룰을 지키고 약자를 괴롭히지 않는 주먹이다.

경기 지역의 실세 주먹인 이모씨는 예전에 기자 앞에서 “조양은, 김태촌은 건달이 아니라 불한당”이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

그렇긴 해도 두 사람이 주먹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한때 서울의 암흑가를 장악했고, 선배 주먹들을 거침없이 공격하는 등 계보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데다, 전국적으로 따르는 주먹이 많았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태촌씨의 어릴 적 친구로 S파 두목으로 활동하다 은퇴한 김용○씨. 조양은씨와도 친구라는 그는 “당시 주먹계에서 김태촌, 조양은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전 안토니파 보스로 양은이파, 서방파와 두루 통했던 안상○씨도 “두 사람은 싫거나 좋거나 주먹계 오야붕(우두머리)이고 대선배”라며 그들의 위상을 인정했다.

두 사람의 옛 동생들은 자신이 모신 보스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김태촌씨의 한 동생은 “건달 중에서 가장 야문 사람이 김태촌”이라며 “기질과 깡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 그 앞에선 조양은도, 선배들도 꼬리를 내렸다”고 평했다. 그에 따르면 김씨는 싸움을 하면 늘 앞장을 섰고 조씨는 뒤에서 폼만 잡는 스타일이었다는 것. 반면 조양은씨의 옛 심복은 “김태촌은 조양은보다 한 수 아래”라며 “조양은은 김태촌을 아기로 생각했다”고 완전히 다른 얘기를 했다. 또 다른 동생은 “당시 서울 중심부의 유흥가는 우리가 다 장악했다. 안 되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두 사람은 1970~80년대 OB파의 이동재씨와 더불어 이른바 3대 패밀리 시대를 열었다. 그 시절 3대 패밀리는 국내 조직폭력의 상징이었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무대에서 사라진 사람은 이씨. 1988년 양은이파 방계조직인 순천시민파로부터 온몸을 난자당한 이후 주먹계를 떠났다. 그의 퇴장으로 3대 패밀리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김씨와 조씨는 교도소에서 황제처럼 군림하며 꾸준히 세력을 키웠다.

 

어머니 괴롭힌 깡패들에 복수한 김태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출소 직후 조직생활 청산과 신앙인의 길을 선언했다. 먼저 사회에 나간 사람은 조씨. 1995년 3월, 15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이후 자서전 출간, 영화 출연, TV 토크쇼 출연 등 갖가지 화제를 뿌리다 이듬해 사기, 폭행 등의 혐의로 재구속돼 2년 실형을 살았다. 2001년에는 해외원정도박 혐의로 다시 구속, 10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2005년 8월, 17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김씨는 “조양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기독교 신앙인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였다. 신앙간증과 청소년 선도 강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으나, 진주교도소 복역 시절 보안과장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1년여 만에 재구속됐다. 검찰은 지난 2월 탤런트 권상우씨 협박사건(강요 미수)으로 그를 추가기소했다.

같은 호남 출신인 두 사람의 운명적인 대결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서울에서다. 먼저 서울에 터를 닦은 사람은 조양은씨. 광주 지산동에서 태어난 조씨는 중학교 시절에 이미 소년원을 구경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는 화신8인조를 만들어 광주 시내 조직 간 전쟁에 개입했다. 당시 광주 조직폭력계의 양대 산맥은 충장로파와 대호파(OB파의 전신)였다. 조씨는 충장로파 두목 전희○씨의 행동대장 노릇을 하다 1960년대 후반 자신을 따르는 후배들과 함께 서울로 진출했다.

조씨가 성인이 되어 처음 구속된 것은 1970년 2월. 명동 캠퍼스다방에서 벌어진 패싸움으로 8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출소 직후 소공동의 명소이던 조선호텔의 고고클럽 투모로우 관리를 맡았다. 이듬해 8월엔 중앙정보부 간부로 호남주먹의 후견인 노릇을 하던 문모씨에게 대들었다가 괘씸죄로 구속돼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사건 당시 조씨를 질책했던 선배 주먹들은 출소할 때는 구치소로 마중을 나가 환영했다.

그 무렵 김태촌씨는 광주에서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김씨의 상경은 조씨보다 늦었다. 1973년 주먹계 대선배인 송태○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서울 유흥업계에 자리를 잡은 조양은씨와 달리 1976년까지 서울과 광주를 왔다갔다했다.

김씨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 서방면에서 자라났다. 열일곱 살에 처음으로 구속돼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소년원을 세 차례 들락거렸다. 김씨와 함께 광주에서 학생 깡패로 활동했던 김용○씨는 “조양은은 징역을 살면서 유명해졌지만, 김태촌은 싸움을 통해 전국적인 보스가 됐다”고 두 사람을 비교했다.

“태촌이는 어린 시절 공부를 잘했고 무척 야물었다. 고교 때 김태촌과 나를 포함해 11명이 서클을 조직했다. 하루에 몇 차례나 싸움질을 했다. 태촌이는 고2 때 퇴학당했던 걸로 기억되는데, 이후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광주를 완전히 평정했다.”

김태촌씨가 주먹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어린 시절 행상을 하던 어머니가 깡패들에게 행패를 당한 사건이었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그의 어머니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 깡패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빌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김씨는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로 달려가 유리창을 깨뜨렸다. ‘아무런 힘도 없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 섞인 분풀이였다. 이 사건 직후 김씨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고 뜻이 맞는 아이들을 모아 나중에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린 깡패들에게 복수했다고 한다.

김태촌씨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성인이 된 후 1976년까지 폭력사건으로 다섯 차례 구속됐다. 1976년은 그의 주먹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해다. 양은이파와의 3년 전쟁에 불을 지른 오종○씨 난자 사건, 1970년대 정치폭력의 상징인 신민당 전당대회 난입사건이 다 그해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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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집행정지로 풀려나 경상대병원에 입원 중인 김태촌.

1970년대 중반 서울 중심가에는 호남 주먹이 많이 진출해 있었다. 당시 호남 주먹의 대부는 송깡이라는 별명을 가진 송태○씨였다. 북창동에 터잡고 있던 송씨는 호남 출신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했다. 송씨의 왼팔, 오른팔이 정학○씨와 박종○씨였다. 두 사람 다 목포 출신.

 

사보이호텔의 오인 가격



경희대 태권도 선수 출신인 정씨는 서울역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진로그룹 후계 싸움에 개입한 것을 계기로 진로에 입사한 후 계열사 사장에까지 올랐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모 스포츠구단 사장을 지내며 정치권의 숨은 실력자로 통했다. DJ의 장남인 김홍일 의원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당시 주먹계에서는 “정학○가 최고 실세 주먹”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03년 5월 나라종금 로비의혹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번개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박씨 역시 ‘태권도 주먹’이다. 1988년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씨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야쿠자와 결연의식을 치러 물의를 빚었다. 1990년엔 김태촌씨가 조직한 신우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태권도협회 고위직을 역임한 그는 2003년 12월 태권도협회 폭력사태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달아나 기소중지됐다.

박종○씨의 아래로 박영○, 그 다음이 오기○씨였다. 전 국회의원 신모씨의 사위인 박영○씨는 광주 동아파 출신. 김태촌씨를 신민당 전당대회 폭력사건에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김태촌씨의 직계 선배인 오씨는 뒷날 신우회 부회장을 맡을 정도로 김씨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정현준 게이트에 연루돼 해외로 도피했으나 나중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무교동에는 목포 출신의 오종○씨가 자리잡고 있었다. 양장점을 운영하던 오씨는 신사 주먹으로 통했다. 서울로 올라온 조양은씨를 친동생처럼 돌봐주고 이끌어준 사람이 바로 오씨였다. 오씨는 박종○씨와 더불어 서울 호남 주먹계의 양대 산맥이었다.

주로 전남 출신인 이들 호남 주먹들은 주먹사에서 범호남파로 분류된다. 범호남파에는 걸출한 주먹이 많았지만, 전통의 서울 조직인 신상사파에는 밀렸다. 신상사파 두목 신상○씨는 1950년대 명동을 장악하고 이정재의 동대문사단에 맞섰던 이화룡씨의 행동대장 출신이다. 조양은씨가 호남 주먹계의 샛별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 신상사파를 공격하고 나서였다.

1975년 1월2일, 서울의 주먹 판도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 터졌다. 그 유명한 사보이호텔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1974년 연말에 정학○씨의 직계 후배인 이모씨가 신상사파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었다. 이씨는 노모씨의 이권(利權)과 관련해 사보이호텔에 있는 신상사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신상사의 측근 정모씨 등에게 각목으로 구타당해 만신창이가 됐다.

노씨는 대구 출신 주먹 조창○씨의 친구였다. 당대 최고의 주먹으로 꼽히던 조씨는 특별한 조직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면서 호남 주먹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조양은씨의 측근이던 모씨는 “창○ 형은 의협심이 강해 존경하는 동생이 많았다”며 “당시 맞장 떠서 창○형을 당할 사람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사건 직후 정학○씨는 후배인 오종○씨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다. 오씨는 심복인 조양은씨를 불렀다. 조씨는 동생들과 함께 1월2일 낮 1시 사보이호텔 커피숍을 급습했다. 이들은 닥치는 대로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커피숍에는 신상사 식구들 외에 조씨의 호남 선배들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다. 싸움은 불과 1~2분 만에 끝났고 조씨 일행은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하지만 정작 주 표적인 정모씨와 신상사는 현장에 없어 해를 입지 않았다.

사보이호텔 사건 내용은 실제보다 많이 부풀려졌다는 게 주먹계 정설이다. 내막을 잘 아는 주먹 출신 사업가 김모씨에 따르면 그날 다친 사람은 신상사파 실세인 김수○씨와 조씨의 호남 선배인 박모씨 두 사람 정도였다. 나머지는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있어 별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박씨의 경우 오인(誤認) 가격이었다. 신상사의 후원자로 야쿠자 동생을 둔 니시야마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장발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박씨가 장발이었다. 니시야마의 얼굴을 잘 모르는 조씨의 동생들이 박씨를 니시야마로 잘못 알고 때렸다는 것이다.

 

“늘 칼 차고 다녔고, 만나면 싸웠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서울 주먹계의 절대 강자이던 신상사파의 아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행동대장급에 지나지 않던 조양은씨를 일약 차세대 주먹의 선두주자로 부각시킨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그의 숙적인 김태촌씨가 중앙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신상사파와 가까웠던 박종○, 오기○씨 등 호남파 주먹들이 후배인 김씨에게 보복 명령을 내린 것. 김씨는 당시 신상사를 큰형님으로 받들고 있었다.

김씨는 특공대를 조직해 조씨를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두 사람 간에 벌어진 이른바 ‘3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한동안 조씨를 찾아다니던 김씨는 어느 순간 표적을 조씨의 보호막인 오종○씨로 바꿨다. 오씨를 제거하면 조씨가 설 땅이 없어지리라는 계산에서였다.



1976년 3월, 김씨의 특공대원 7~8명이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주차장 부근에서 오종○씨를 습격했다. 오씨의 아우가 몇 명 있었지만 대검과 도끼, 낫으로 무장한 특공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특공대는 오씨의 하체를 난도질했다. 오종○이라는 호남 주먹의 거목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김태촌씨는 공격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고 현장 지휘만 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오씨는 사실상 주먹계에서 은퇴했고, 조양은씨와 김태촌씨는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서로 상대방의 영역을 기습해 ‘연장질’을 하는 사건이 수시로 발생했다.

김씨측이 조씨측을 친 사건 중 대표적인 것이 퍼시픽호텔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씨측이 퍼시픽호텔에 있던 박모씨 등 조씨의 부하들을 급습해 여러 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김씨의 옛 아우는 “당시는 항상 칼을 차고 다녔다. (조양은 식구들과) 만나면 싸울 때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4년을 살았다.

김씨측이 당한 대표적인 사건은 최모씨가 칼을 맞은 사건이다. 당시 조양은씨와 부하들은 모 호텔 커피숍에 김씨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커피숍에는 김씨 대신 최씨가 앉아 있었다. 조씨의 아우들은 이날 최씨에게 10여 차례 칼을 ‘먹였다’. 그밖에 서로의 아지트를 공격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당시 두 조직의 싸움은 용호상박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조씨측은 자신들의 세력이 더 강했다고 주장한다. 김씨측보다 먼저 서울에 진출한 데다 조직의 위세를 가늠하는 척도인 호텔나이트클럽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게 주요 이유다. 과거 조씨 핵심 측근의 증언.

“당시엔 호텔을 나와바리(구역)로 삼았다. 조선을 비롯해 도쿄, 센추럴, 반도, 코리아나, 백남 등 시내 주요 호텔의 나이트클럽을 우리 식구들이 다 장악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서방의 나와바리는 이태원 해밀턴호텔 등 매우 제한돼 있었다.”

 

“동생들 손가락 잘라오라”

김씨의 옛 아우 한 사람도 객관적인 판도에서 조씨 측이 우위에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두 조직 간 전쟁에서는 자신들이 우세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양은이 잘나가긴 했다. 주요 호텔나이트클럽을 다 그쪽 식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무교동 다운타운의 경우 전주 식구들이 잡고 있었는데 이들도 조씨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거의 서울의 절반을 장악했다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태촌이 형이 올라온 뒤로는 세력 판도가 바뀌었다. 그쪽에서 잡고 있던 주요 호텔 나이트클럽들에 우리 특공대 30명이 순차적으로 쳐들어가 사장들을 협박하기도 했다.”

그 즈음 김씨는 정치폭력사건에 휘말렸다. 1976년 5월에 발생한 신민당사 난입 및 전당대회 각목 사건이다. 당시 김씨는 폭력배 수백명을 이끌고 신민당 당사를 점거해 김영삼 총재 등 주류측 의원들을 폭행한 데 이어 3일 뒤에는 전당대회장에 난입해 각목을 휘둘렀다. 이 사건으로 김씨는 그해 6개월간 실형을 살았다.

하극상 사건인 사보이호텔 사건과 오종○ 난자 사건 이후 주먹계의 위계질서는 급격히 무너졌다. 급기야 호남 주먹의 대부인 송태○씨가 김태촌씨의 아우들에게 맞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원래 표적은 송씨가 아니라 김씨의 광주 선배인 조모씨였다. 조씨가 OB파와 가까워진 후 자신의 구역을 침범한다고 판단한 김씨가 동생들에게 응징을 지시한 것. 김씨의 아우 7, 8명은 치안본부 옆 주차장에서 조씨를 집단폭행했다. 그런데 현장에 있던 송씨가 덩달아 봉변을 당한 것이다. 사건 직후 김씨는 송씨를 찾아가 사과했다. 김씨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송 선배한테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더니, (폭행에 가담한) 아우들의 손가락을 잘라오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했다. 결국 아우들이 송씨한테 야구방망이로 맞는 것으로 화해했다.”

김태촌과 조양은의 전쟁은 서울 주먹계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주먹계 선배들도 그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1977년 어느 날 전북 주먹의 대부 이승○씨가 조씨를 불러냈다. 태권도 전국체전 우승자로 해병대 태권도 감독을 맡는 등 태권도계 실력자이던 이씨는 당시 주류도매업을 하면서 주먹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씨가 약속장소에 가보니 서로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김씨가 나와 있었다. 이씨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한 방에 앉았다. 하지만 화해하기에는 감정의 골이 너무 깊었다. 대화는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일어서면서 잠시 서로의 몸이 스쳤는데, 각자 몸에 지니고 있던 칼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보다 어린데 무슨 형님이냐”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1977년 11월 서울구치소에서였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구속됐다. 둘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당시 체포과정을 봐도 알 수 있다. 사보이호텔 사건 등으로 수배자 신분이던 조씨는 광주로 내려가 있다가 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반대로 김씨는 광주에서 사고를 치고 서울로 올라와 있다가 잡혔다. 김씨의 죄목은 교도관 상해였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자신에게 혹독하게 대했던 교도관을 출소 후 칼로 난자한 사건이었다. 거기에 명동 꽃다방 폭력 사건 등이 보태졌다.

두 사람은 서울구치소에서 한 방을 쓰면서 화해했다. 조씨는 자서전(‘어둠 속에 솟구치는 불꽃’)에서 당시 김씨가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 형님으로 불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씨는 이를 부인한다.

“나이가 나보다 어린데 무슨 형님이냐. 서로 ‘어이’ 하고 불렀다. 지난 일은 화해하고 먼저 나가는 사람이 옥 수발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집행유예로 먼저 출소한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나가 그의 아지트로 쳐들어가 ‘전쟁 계속하자는 거냐’고 따지자 ‘선배가 칼을 맞았는데 어떻게 쉽게 화해하겠냐’고 둘러댔다.”

조씨가 출소한 것은 1978년 6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받고 풀려났다. 김씨는 2년 실형을 살았다.

그 시기 양은이파는 내분을 겪었다. 2인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어난 것. 원래 조씨의 바로 아랫동생은 사촌매제인 백영○씨였다. 그런데 백씨가 1976년 대구 수성호텔 살인사건으로 구속된 후 박수○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박씨는 1976년과 1977년 조씨가 두 차례 구속돼 있는 동안 바로 아래인 강영○씨와 더불어 양은이파를 이끌었다. 퍼시픽호텔 사건 때는 서방파의 집중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양은이파의 내분

1979년 박씨가 자신을 따르는 동생들을 이끌고 조씨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얼마 후 강씨가 박씨를 칼로 찌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씨의 증언.

“조양은은 출소한 후 나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주변에서는 내가 너무 컸기 때문에 내친 것이라고들 했다. 당시 나는 열심히 싸웠다. 시경에서 ‘박수○만 잡으면 양은이파는 끝난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김태촌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수○만큼은 용서 못한다’고 했다고 들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 충성을 다했는데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다. 그래서 반기를 들었다. 조양은의 세력권인 호텔 나이트클럽들을 돌며 돗자리를 팔면서 대립했다. 어느 날 내가 강영○을 다방으로 불렀다. 나는 공격할 의사가 없었는데, 내가 ‘조양은은 나쁜 놈’이라고 하자 강영○이 칼을 꺼내 나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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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월 조양은씨와 동생들은 사보이호텔 커피숍에 있는 신상사파를 기습했다. 사진은 조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보스’의 장면.

강씨의 얘기는 다르다. 박씨를 찌른 것은 그가 먼저 칼을 꺼내 공격하려 한 데 따른 정당방위였다는 것. 조씨의 자서전에도 그렇게 표현돼 있다. 박씨는 그 후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조씨 일행에게 미리 구입해둔 낫으로 맞서다 서울대병원 공터로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했다.

“두 번째로 칼을 맞을 때 조양은에게 ‘당신은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아마도 ‘잘못했다’고 빌었다면 그토록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깡패가 좋아 깡패를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이다. 18세에 건달 생활을 시작한 이래 적에게는 한 번도 칼을 안 맞았는데 내부에서 칼을 맞았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던 동생한테. 지금도 강영○한테는 감정이 없다. 강영○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조양은을 증오할 뿐이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 계엄령을 선포한 신군부는 깡패 소탕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양은씨가 다시 구속된 것은 1980년 2월. 순천시민파 반란사건이 빌미가 됐다. 사건의 발단은 순천시민파 두목 오상○씨가 서울에 올라와 있는 동안 부두목인 이창○씨가 반기를 든 것이었다. 이에 조씨는 동생들을 보내 반란 진압을 시도했는데, 일이 잘못돼 순천 시내에서 큰 패싸움이 벌어졌다. 2월9일 조씨와 동생들은 한 맨션에 숨어 지내다 경찰의 급습을 받고 체포됐다.

 

거목 조일○에 도전한 김태촌

김태촌씨가 구속된 것은 그보다 석 달 뒤인 그해 5월. 범단(범죄단체구성) 혐의였다. 그때쯤 김씨는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김두한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주먹계의 거봉 조일○씨에 맞선 일화는 당시 그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구속되기 한 달쯤 전 김씨는 충남 천안의 조일○씨 집을 예고도 없이 방문했다. 자신이 형님으로 받들던 박충○씨와 조씨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박씨는 원래 조씨의 직계 동생으로 조직의 2인자였다. 그런데 조씨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느라 ‘은퇴’를 선언한 이후 조씨의 친구인 모경○씨와 갈등을 빚었다. 갈등 끝에 박씨의 부하들이 술집에서 조씨와 모씨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모씨가 칼에 찔려 죽었다.

사건 직후 박씨는 천안을 떴는데, 조씨와 화해하고 싶어 했다. 김태촌씨가 그 중재역을 자임한 것이다. 박씨는 김씨의 대선배인 박종○씨의 친구이기도 했다. 당시 조씨 집에는 부하 수십명이 기숙하고 있었다. 대담하게도 김씨는 혼자 찾아갔다. 두 사람은 초면이었다. 주먹계 서열로 김씨는 조씨의 한참 후배였다. 조씨는 박씨와 화해해달라는 김씨의 부탁을 일축하고 돌려보냈다.

며칠 뒤 김씨는 또 한 차례 찾아왔다. 이번엔 동생 10명을 데리고 왔다. 1차 방문 때와 같은 용건이었다. 조씨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의 요청을 묵살했다. 충돌이 있을 법도 했건만 김씨 일행은 유유히 돌아갔다.

그 사정에 대해선 두 사람의 얘기가 다르다. 조일○씨는 자서전 ‘불의 아들’에서 당시 부하들이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다”며 김씨 일행의 귀로를 가로막았으나 자신이 포위망을 풀어줬다고 주장했다. 김씨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그때는 겁나는 게 없었다. 조씨의 집을 밤에 찾아간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조씨 주변에 수십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알려진 대로 언변이 뛰어났다. 내가 자제한 것이다.”

조일○씨는 뒷날 청송교도소에 장기 수감 중인 김태촌씨를 돌봐줬다. 현재 김씨는 조씨를 형님으로 깍듯이 대하고 있다. 조일○씨는 조양은씨와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94년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조씨에게 지금의 부인 김모씨를 소개한 사람이 바로 그다. 김씨는 그의 친구 딸이다. 당시 그는 뒷날 조씨의 장모가 된, 김씨의 어머니에게 조씨를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민주투사”라고 소개했다.

조일○씨는 1980년 초 계엄치하에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두 달간 수감된 적이 있다. 그때 조양은씨를 처음 만났다.

“양은이가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해서 둘이서만 한 방을 썼다. 나는 정치범이니 오래 있을 테고 자기는 단순 폭력이니 곧 나갈 것 같다면서 출소하면 수발을 들겠다고 했다. 그런데 양은이가 어느 날 밤 육군본부 헌병대로 끌려가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 직후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결국 내가 먼저 나가 면회를 다녔다.”

조양은씨와 강영○씨는 1심인 보통군법회의에서 범단 및 서방파 조직원 최모씨 살인미수 혐의 등으로 각각 징역 15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항소와 상고는 기각당했다. 청춘을 묻는 기나긴 수감생활의 시작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OB파

김태촌씨도 1심에서는 1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 계엄령이 해제돼 항소심 재판이 민간법원에서 열리게 된 것. 2심 재판부는 5년 6개월을 선고했다.

김씨가 출소한 것은 1986년 1월. 나와 보니 이동재씨가 이끄는 OB파 천하였다. 호남 선배들도 이씨를 보스로 인정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이동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이동재를 잡으러 갔다가 경찰에 쫓기기도 했다.”

김씨는 자신이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OB파에 난자당한 친구 이석○씨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이동재씨의 사무실을 급습했으나 실패했다. 김씨에 따르면, OB파와의 전쟁은 이동재씨가 이석○씨를 찌른 자신의 동생들을 김씨측에 보내 야구방망이로 맞게 함으로써 종결됐다.

얼마 후 김씨는 화해의 표시로 건달 단합 체육대회를 구상했고 이씨도 적극 찬성했다. 그해 6월 한강 둔치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을축구대회가 그것이다. 이 행사에는 유지광, 정종○, 신상사를 비롯한 주먹계 원로들과 송태○, 박종○, 정학○씨 등 호남 주먹계의 선배 다수가 참석했다. 또한 구속된 조양은씨를 대신해 양은이파를 이끌던 백영○씨도 동생들을 거느리고 동참했다.

백씨에게 당시 행사에 참여하게 된 사정을 묻자, 김씨의 얘기와는 달리 자신이 먼저 제안해 성사된 것이라 주장했다. “동생들끼리 자꾸 싸우니 얼굴이라도 익히자”는 뜻에서 마련했다는 것이다. 백씨는 그날 미기(美技)상을 받았다. 대회 최우수상은 정학○씨에게 돌아갔다.

김태촌씨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한 달 뒤인 그해 7월 인천 뉴송도호텔 사건을 일으킨 것. 김씨의 부하들이 뉴송도호텔 사장 황익○씨를 폭행한 이 사건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당시 서울고검 소속 박남○ 부장검사의 이권과 관련된 청부폭력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해 9월 구속된 김씨는 징역 5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고 청송교도소에 수감됐고, 박 검사는 옷을 벗었다.

김씨가 조양은씨와 다시 만난 것은 1989년 5월 충남 아산의 도고호텔에서였다. 당시 공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조씨는 3차 귀휴를 나왔다. 김씨는 그에 앞서 그해 1월 폐암 선고를 받고 형집행정지로 석방,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폐암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김씨가 밤에 몰래 병원을 빠져나와 조씨가 묵고 있는 도고호텔을 찾아감으로써 성사됐다. 김씨의 동생 30여 명이 동행했다. 호텔엔 조씨의 아우 100여 명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조씨의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할 것을 다짐하고 조씨가 이동재씨까지 포함해 세 사람의 서열을 정했다고 한다. 조양은-이동재-김태촌 순으로. 그런데 당시 세 사람 간 서열을 정했다는 조씨의 주장에 대해 김씨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이가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자기 동생이 되나. 동재는 51년생으로 가장 어렸고.”

 

“내 형님이니 큰절 올려라”

1970년대 중반 이후 10여 년간 세 조직 간에 벌어진 칼부림 사건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조씨와 김씨가 수감돼 있는 동안 날로 세력을 확장하던 OB파는 두목 이씨가 1988년 9월 조씨의 방계 아우들인 순천시민파 특공대에 의해 재기 불능의 중상을 입은 후 급속히 약화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3대 패밀리의 피 튀기는 전쟁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오랜 수감생활은 조양은씨를 밖에 있을 때보다 더 유명한 주먹으로 만들었다. 교도소에서 전국 각지의 주먹들과 두루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주교도소에서는 지도반장으로서 무소불위의 특권을 누렸다. 조씨가 지도반장을 맡게 된 것은 조일○씨 덕분이었다. 조일○씨가 오랜 지기인 공주교도소장에게 조양은씨에 대한 특별 배려를 부탁한 것이다.

당시 공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천안 출신 주먹 강모씨는 최근 펴낸 자서전에서 조씨의 위력에 대해 “회장으로 불렸으며, 교도소에서 황제 같은 존재였다”고 표현했다.

김태촌씨의 수감생활도 그 못지 않았다. 2002년 진주교도소에서의 호화 수감생활이 문제가 돼 청송교도소로 되돌아간 것이 단적인 예다. 그는 교도소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소내에서 술, 담배는 물론 휴대전화도 자유롭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주먹계 선배 한 사람은 면회를 갔다가 당혹스러운 일을 겪기도 했다. 김씨가 교도소 모 간부에게 “내 형님이니 큰절을 하라”고 시켰다는 것.

“김태촌이 가는 데마다 공무원 여러 명의 목이 날아간다. 교도관들이 다 코가 꿰어서 꼼짝 못했다. 교도소장들 중에는 도둑놈이 많다.”

1989년 6월 조씨는 순천교도소로 이감됐다. 순천교도소는 그가 가장 아끼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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