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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 조선시대에 있던 페미니즘(?) 기록을 알아보자
[시리즈] [역사역사?] · [역사역사] 고양이를 활용한 펠루시움 전투를 알아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NlI7ji7KSrc* 작성저는 페미니즘 사상/철학에 대해서 긍정 및 찬성 및 찬동 및 지지 등 우호적 입장에서 작성한 것이 아니며, 본 글은 실제 성리학 중심의 조선시대 역사에서 고증적/역사적 측면에 입각하여 페미니즘적, 여성우대적 면모를 보인 사례를 분석하여 기술하는 데 있음을 알림 * 조선 사회는 근본적으로 성리학적 윤리를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삼은 남성 중심 질서였다. 『경국대전』에 반영된 재혼자 자손의 과거시험 금지법이나 내외법은 여성의 재혼·공적 활동을 제도적으로 막고있고, 『주자가례』를 수용한 혼인·상속 체제는 부계 혈통을 절대적으로 중시하였다. 이처럼 사실상 조선시대는 막강한 성리학 교리 아래 남성을 하늘로 보는 철학과 관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각 외로(?) 조선시대에서는 남성 중심의 질서를 부분적으로 흔들거나 여성 인권에 대해 부분적으로 개화하는 작업을 통해 여성의 주체적 공간을 만든 적도 꽤 있었는데, 아래에서는 그 기록들을 실제 사례를 통해 알아보겠다. (물론 당시엔 페미니즘적 사고관이 아니었을 수 있지만, 현대 시점에선 그러한 것으로 보이는 사례들도 포함) 『태종실록』에는 제생원에 의녀를 처음으로 설치했으며, 나아가, 1418년(태종 6)에는 “의녀가 7명뿐이라 부족하니 각사 비자 가운데 13세 이하 10명을 추가 선발”을 명함. 물론 의사가 지금에서야 TOP 사회계층이지만, 저 당시로서는 사실상 관비 출신의 천민이기 때문에, 연산군 때는 기생으로도 쓰여 의녀가 아니라 의기라고도 불렸을 정도였음. 즉, 저때는 여성 직업선택의 신장 측면은 당연히 아니고, (물론 관비들은 내의원과 혜민서 들어가는 걸 바라지만) 오히려 성리학 관점에서 여성 환자가 남성 의사에게 신체 접촉 당하는 걸 불편해하는 풍조로 인해 여성 환자 전용 여성 의사를 만든 꼴이지만, 아무튼 현대 관점에서 보면 나름 직업의 폭(?)이 넓어진 사례. 또한, 조선에서는 개인 사이의 문제, 즉 지금으로 따지면 민사소송인 사송이라는 제도가 있었음. 가장 많은 사례가 아무래도 지금처럼 토지에 관한 문제인데, 이 소송 개시를 위해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형식을 지닌 소장과 같은 소지를 제출해야함.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생각보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소지를 썼음이 확인이 되고 있음. 대표적인 사례가 장소사 VS 고첨지 상주지역 토지소송. 상주 지역의 전답(논밭) 소유권을 둘러싼 민사 소송인데, 평민 여성인 장소사가 지금으로 따지면 원고, 양반 남성인 고첨지가 피고였다는 점이 유의미한 구조임. 나아가, 1752년부터 1910년까지 왕의 일기와도 같은 『일성록』에는 정조 재위기 왕에게 상언한 사례 중 여성들이 제기한 내용은 405건에 달한다고 함. 이는 정조 재위기간인 25년 생각하면 한 해에 16건 정도. 실제, 영조 때도 한 여인이 당쟁에 휘말려 뒤지기 직전인 자기 손자 살리기 위해 상언을 올린 것인데, 한글로 쓰였단 점에서 역사성도 있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임. 다음으로, 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긴 문서는 이이 남매 화회문기(李珥 男妹 和會文記)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 유명한 율곡 이이가 죽은 후, 그 자녀 및 형제자매가 모여 유산 상속에 관해 적은 일종의 합의문이자 계약서임. 1566년(명종 21)이기 때문에, 남녀의 사회적 신분 차가 조선 후기에 비하면 비교적 문턱이 낮던 시즌이긴하지만, 아무튼 해당 문서에는 4남 3녀인 자녀 중 아들에게만 상속분을 준 것도 아니고, 딸에게도 물리적으로 균등하게 배분을 모두 했으며, 심지어 서모, 즉 첩이었던 여인에게도 그 몫을 남김. 재산권 측면에서는 상당히 선진적이었던 사례. 나아가, 조선시대에는 입후라는 게 있었는데, 입후란 쉽게 말해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었음. 조선시대에서는 종법상 당연하게도 집안의 제사를 잇고, 재산·호적을 이어갈 남자 후계자를 반드시 정해야 했음. 그렇기에 자손이 없으면 양자를 따로 들이기까지도 했고, 특히 평민가는 알빠노? 라고 하더라도 양반 사대부가에서는 매우매우 중요하고, 중요했던 일. 당연히 원래는 종친, 즉 가족 내 남성들이 이를 정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남성들이 많이 줄기도 하는 등 이 이후로부터 양반가 여성들이 입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사례가 매우 많아졌음이 『일성록』에 나옴. 심지어 과부까지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아무튼 이러한 법적 참여는 당시 꽤 의미있었던 것. 끝으로, 조선시대에는 과부들의 재가(재혼)을 엄격히 막음. 이는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양반가 집안의 여성들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되었으며, 이러한 과부 재가 금지법은 1477년(성종 8)에 시행되어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서야 풀림. 즉, 근 400여 년을 사실상 여성은 재혼이 막혔던 것. 그런데, 이 법을 만들던 시기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당연히 여자는 재혼 못하는거지 알빠노 ㅋㅋ 법 땅땅땅 한 게 아니라, 나름 왕과 신하들 간 격렬한 토론이 있었음. 대표적으로 처음에는 처벌도 하지 말자는 얘기도 나옴. 조정은 과부 재혼 자체가 삼강오륜에 어긋나는 건 맞지만, 직접 처벌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재가를 실행한 부녀의 자손에게 과거 응시·관직 진출을 막거나 그냥 얘 재혼했어요~ 얘 재혼한 애 자식임~ 같은 기록만 하자는 녹안형 등이 거론되었음. 실제로 성종도 약간은 유보적이었다고도 하고, 당시 나온 얘기 중 또 한 가지는 삼가녀, 즉 3번 결혼한 사람만 엄벌하고, 재가는 사정에 따라 용인하자고도 나옴. 이처럼 사실 어떻게든 보장하려고 했던 현실 측면도 있긴 했지만, 임기 초반 때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재가 자체도 막을 뿐만 아니라 관직 자체를 아예 봉쇄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힘. 사실 이처럼 찾고, 찾고, 또 찾아야 나올 정도로 성리학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 제도권적 측면에서 여성 인권(?)에 관한 사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함. 그도 그럴것이 한반도 역사상 사실상 여성으로서는 권력 씹GOAT였던 문정왕후가 섭정에 올라서 전횡을 일삼을 때조차 서경에 나온 빈계지신 구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를 차용해서 대놓고 '여자가 나라 다스리니 좆망하지 ㅉㅉ'로 디스를 한 사례가 유명함 ㅇㅇ..
작성자 : 영단어봇고정닉
해밀턴은 어떻게 14등에서 우승했을까?
[시리즈] 해밀턴은 어떻게 14등에서 우승했을까 · 해밀턴은 어떻게 14등에서 우승했을까?(1) · 해밀턴은 어떻게 14등에서 우승했을까?(2) 18년 독일 GP 퀄리파잉베텔이 8포인트 차이로 드챔 리드를 먹은 상황에서해밀턴의 W09는 유압계통이 뻗으면서 변속이 먹히지 않았고그대로 세션을 중단함반면 베텔은 영국까지 단 한 번의 경기도 리타하지 않은 상태였고해밀턴의 홈 영국 GP에서 우승+자국에서 트랙 레코드 수립을 달성하며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음드컨챔 상황 모두 치열했던 메르는 정석적인 전략을 짬첫 스틴트를 아주 오랫동안 버티는 전략이었음해밀턴은 울트라소프트로 시작한 다수를 상대로 14랩 만에 14위>5위로 뛰어올랐지만 다소 빠듯한 상황페라리의 라이코넨은 피트스탑을 하고도 해밀턴 앞인 4위로 나올 수 있었기 때문16랩 시점에서 인터벌은 이 정도 수준이었음1위 베텔2위 보타스(+3.5)3위 막스(+5.4)4위 라이코넨(+14.3)5위 해밀턴(+2.6)한편 파워유닛 페널티로 19등으로 시작한 리카도는 12위까지 올라오던 중이었다탑 3는 울트라소프트, 첫 핏스탑을 마친 키미는 소프트인 상황날씨에서 소나기 예보가 있었기에 일찌감치 투스탑으로 가려던 키미를 제외한 다수의 드라이버들은 타이어 전략에서 고민하고 있었음27랩에서 베텔이 소프트로 갈아끼자 보타스가 선두를 먹었고,그 시점에서 인터벌은 이렇게 형성됨1위 보타스2위 막스(+5.8)3위 라이코넨(+2.4)4위 베텔(+1.4)5위 해밀턴(3.4)29랩에서 리카도의 새 PU가 또 뻗으면서 VSC가 나올 뻔했지만마셜들이 60초 만에 차체를 빼내면서 그것까지는 가지 않음33랩쯤에선 라이코넨과 베텔이 약 1초 간격으로 원투를 먹은 상태였고, 해밀턴은 막스와 보타스가 피트인한 사이 3위로 올라옴라이코넨 뒤에서 더티 에어를 맞으며 손해를 보던 베텔은 팀 오더를 요구함“이거 너무 바보같아…시간은 잃고 타이어는 망가지고 있다고…”결국 40랩에서 키미는 팀 오더를 받고 베텔을 보내줌한편 좀처럼 비가 오지 않자 메르는 43랩에서 해밀턴을 핏스탑시킴울트라소프트로 갈아낀 해밀턴은 베텔 상대로는 26초, 키미 상대로 24초, 보타스 대비 20초 뒤처진 채 5위로 나옴하지만…- 해밀턴은 어떻게 14등에서 우승했을까?(2)44랩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가슬리는 풀 웻, 알론소는 인터로 갈아끼기 시작함이때까지만 해도 메르는 망한 것처럼 보였지만…50랩쯤에서 금세 빗방울이 그치고 가슬리는 트랙을 벗어나는 등 아직 완전한 레인 컨디션까진 가지 않았었음문제는 52랩이 되자 다시 비가 거세지면서 페레즈가 스핀했고해밀턴은 그새 베텔보다 랩당 2초를 빠르게 돌면서 8랩 만에 26초에 달하던 갭을 10초대로 줄여 놨음마음이 급해진 베텔은 엔지니어의 페이스를 낮추라는 말에도 속도를 높이다가…결국 브레이크가 잠기며 조향에 실패, 그대로 12번 코너에서 그래블에 빠지며 벽과 충돌해 리타이어함메르의 핏 개러지는 혼돈에 빠졌음세이프티카가 나온 시점에서 보타스는 15번 코너를 돌고 있던 차라 2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타이어를 결정해야 했음처음에는 인터미디어트를 끼려고 했지만 세이프티카 상황이 끝나면 다시 드라이 컨디션으로 돌아갈 거라는 판단에 타이어를 새로 꺼내면서 보타스는 상당한 시간을 잃음해밀턴 역시 그 다음 랩에서 피트인하라는 라디오를 들었지만, 해밀턴은 핏스탑을 했다간 어차피 3위로 끝날 거라는 판단에 그대로 핏 레인을 나가서 기존 타이어를 그대로 쓰기로 함58랩에서 세이프티 카가 들어가자 해밀턴은 15랩 동안 사용했던 울트라소프트 타이어를 가지고 새 울트라소프트를 낀 보타스와 라이코넨을 막아내야 했음그리고 보타스가 바로 해밀턴을 공격했지만 해밀턴은 방어에 성공햤고, 그걸 본 보울즈가 보타스에게 순위를 지키라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보타스는 더 이상 추월 시도를 하지 않음그렇게 해밀턴은 홈에서 우승을 빼앗아 간 베텔에게 복수 성공+드챔 리드 복귀라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함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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