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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강준고정닉
진지빨고 쓰는 레데리 시리즈181 - 아서의 유능함이 지닌 아이러니 편
안녕, 레붕이들. 이번 181번째 시간에는 아서의 유능함이 지닌 아이러니에 대한 개인적 고찰을 해 볼까 함.https://youtu.be/gCIvqQnswUMBGM: 젤리 롤 - Liar다들 아서가 설정상 1887년부터 본편 시점인 1899년까지 지난 12년간 북미대륙 전역 방방곡곡을 돌며 (발렌타인, 로도스, 생 드니를 포함) 자그마치 총 40번의 은행 강도질을 성공시킨 희대의 대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임. 예나 지금이나 은행 강도질은 초대형 범죄이자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일생일대의 도박인데, 그걸 4번도 아니고 40번이나 반복했다는 것은 곧 단순히 많이 했다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로 플레이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봐도 무방함.그도 그럴 게, 처음 한 번의 성공은 우연이나 행운일 수 있고, 그 다음 두세 번, 이후 몇 번의 성공까진 실력일 수 있다지만, 40번의 성공은 현실성이나 상식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함. 그 근거로 반 더 린드 갱단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된, 서부개척시대에 실존했던 가장 악명높은 전설적인 전국구 은행강도단 제임스-영거 연합 갱단의 우두머리 '제시 제임스'마저도 공식적으로 기록된 은행 강도질은 1866년부터 1876년까지 10년간 고작(?) 9건 남짓인데, 그 목록을 나열하자면 아래와 같음.1. 1866년 2월 14일, 미주리 주 리버티. '클레이 카운티 저축 은행'(Clay County Savings Bank)에서 60,000달러 강도질. 2025년 본글 작성일 기준, 현재 원화 가치로 약 17억 2,500만 원.2. 1866년 10월 30일, 미주리 주 렉싱턴. '알렉산더 미첼 앤 컴퍼니'(Alexander Mitchell and Company) 은행에서 2,011달러 강도질. 2025년 본글 작성일 기준, 현재 원화 가치로 약 5,800만 원.3. 1867년 5월 23일, 미주리 주 리치몬드. '휴즈 앤 왓슨'(Hughes and Wasson Bank) 은행에서 3,500달러 강도질. 2025년 본글 작성일 기준, 현재 원화 가치로 약 1억 800만 원.4. 1868년 3월, 켄터키 러셀빌. '님로드 앤 컴퍼니'(Nimrod & Co.) 은행에서 12,000달러 강도질. 2025년 본글 작성일 기준, 현재 원화 가치로 약 3억 8,600만 원.5. 1871년 6월 3일, 아이오와 주 코리던. 명칭 미상의 은행에서 40,000달러 강도질. 2025년 본글 작성일 기준, 현재 원화 가치로 약 14억 9,900만 원.6. 1872년 4월 29일, 켄터키 주 컬럼비아. 명칭 미상의 은행에서 15,000달러 강도질. 2025년 본글 작성일 기준, 현재 원화 가치로 약 5억 6,200만 원.7. 1873년 5월 27일, 미주리 주 세인트 제네비브. 명칭 미상의 은행에서 4,000달러 강도질. 2025년 본글 작성일 기준, 현재 원화 가치로 약 1억 5,200만 원.8. 1874년 12월 7일, 미시시피 주 코린스. '티시밍고 저축 은행'(Tishimingo Saving Bank)에서 5,000달러의 현금과 5,000달러 상당의 보석 강도질. 2025년 본글 작성일 기준, 현재 원화 가치로 약 4억 원.9. 1875년 9월 1일, 웨스트버지니아 주 헌팅턴. 명칭 미상의 은행에서 10,000달러 강도질. 2025년 본글 작성일 기준, 현재 원화 가치로 약 4억 1,500만 원.고로 1887년부터 1899년까지 12년간 최소 5,000달러에서 최대 150,000달러에 이르는 은행 강도질을 자그마치 40건이나 저지른 아서는 제시 제임스를 액수 면에서나 빈도 면에서나 압도적으로 상회하는데, 이는 자연히 현실적인 범죄자 수준이 아니라 일종의 신화적 상징, 이른바 아서는 무법자 시대의 은유(메타포)이자 그 시대를 지배했던 가치인 폭력의 화신 격으로 읽힐 수 있으며, 그의 보스인 더치가 제아무리 정신병적 과대망상에 가까운 자살행위를 '비전'이랍시고 장광설을 늘어놓으면, "더치, 그건 또 뭔 개소리야?" 하면서 핀잔을 주다가도, 더치가 품은 야망의 구현자로서 막상 실행에 옮기면 반드시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또 아서임. 더치의 도를 넘는 망상은 아서의 유능함 덕분에 매번 현실이 되고, 그러니 더치는 더욱더 거대하고, 더욱더 위험하고, 더욱더 파격적인 도박성의 범죄를 계획하고, 아서는 그걸 언제나처럼 또 다시 연거푸 성공시키고, 이걸 무수히 반복해 낸 결과가 바로 앞서 말한 40번의 은행 강도질 되겠음.이는 전형적인 신화적 영웅 서사 구조와 맞닿아 있음. 가령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처럼 신탁이나 지도자가 불가능한 도전을 강요하면,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영웅인 것처럼, 헤라클레스가 결국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듯, 아서 또한 해당 설정을 통해 인간이 아니라 일종의 신화적 존재로서, 락스타 게임즈는 아서를 서부극이란 장르가 옛부터 지녀온 특유의 정체성인 미국식 신화적 무용(武勇)의 상징이자, 과장된 폭력의 화신으로서 플레이어들에게 단단히 각인을 시켰다고 볼 수 있겠음.거듭 말하지만, 작중에서 더치가 점점 더 무모하고 위험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아서가 그걸 매번 성공시켰기 때문임. 더치가 망상하면, 아서가 실현하고, 그렇게 성공이 반복되니 더치는 그 성공에 취해 자신이 옳다고 착각, 결국 더치의 야망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종극에는 현실 감각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게 되는 지경까지 가는데, 이러한 더치의 극단으로 치닫는 광기와 아서의 지나친 유능함이 빚어낸 대환장의 콜라보가 바로 챕터6에서의 미 육군 수송열차 습격 장면임.현상금 사냥꾼, 보안관, 경찰, 핑커톤, 연방보안관 등을 거쳐 더치의 광기가 끝내 향한 최종점은 바로 군대, 그것도 연방군을 표적으로 한 정면 도전은 더 이상 단순 강력범죄 차원이 아니라 내전 혹은 역란의 영역에 들어가는 행위로서, 그 죄질의 무게가 아예 차원이 다름. 제아무리 오늘만 사는 파천황적 무법자들이라 해도 이런 정신나간 발상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함. 그도 그럴 게, 세계관 내 기라성 같은 천하의 오드리스콜 갱단, 델 로보 갱단, 에타 갱단, 레드 벤 갱단, 이탈리아 마피아도 최소한 연방군의 공식 자금을 건드리지는 않았음. 따라서 플레이어들도 그간 오락가락하던 더치가 이 시점에선 완전히 갈 때까지 가버린 광인으로 변모해 있음을 재차 실감함.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때 아서가 난생 처음으로 더치에게 버럭 역정을 내며 반항한다는 점인데, 그 동안 아서는 자신의 능력에 기반한 신랄하고 냉소적인 독설가로서, 더치에게 그게 되겠냐며 비꼼 섞인 핀잔들을 서슴없이 퍼붓긴 했어도, 조직 내 제1의 충신으로서 그의 리더십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음. 그러나 연방군의 수송열차를 턴다는 정신나간 개또라이 같은 발상 앞에서는, 그 아서조차도 부아가 치밀어 분노를 참지 못하는데, 이는 곧 플레이어들에게 더치가 설파하는 비전이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으며, 아서의 유능함이 더치의 광기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변질되었음을 시사하는 순간이자, 더치의 꼭두각시로서 그에게 종속된 삶을 살던 아서가 점차 독자적인 자의식을 형성하고 끝내 각성하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함.여기서 아서가 "좋아, 이번에도 너의 그 말 같지도 않은 병신짓에 가담해 주지. 하지만 그 대신 내 말대로 존과 그의 가족은 자유로이 풀어줘야 해ㅇㅇ" 라며 '조건부'로 충성하는 장면은 필자가 보기에 서사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분기점이라 할 수 있겠음. 인게임상에서 쭉 관찰되어 온 바 그간 아서는 더치를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사내'라고 평할 만큼 동경에 가까운 충성심을 품은 그저 무조건적인 장기말이었을 뿐인데, 처음으로 조건부 충성으로 태도를 바꾸며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기 때문임.이러한 아서의 태도에 더치가 삔또가 상한 건,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위협하고 도전하는 목소리가 갱단 내부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고, 또 그 목소리가 하필이면, 가장 강하고, 가장 유능하고, 그만큼 자신이 가장 아끼고 전적으로 신뢰해 마지않던 완벽한 집행자 아서에게서 나왔으니, 자신을 항상 '갱단의 아버지'로 규정하며 단원들을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길들여 온 가부장의 화신인 더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그야말로 개박살나버린 꼴이 되겠음.사실 더치는 평소에는 형제애를 강조하며 수평적이고 탈권위적인 지도자의 면모들을 보이다가도, 정작 중요한 순간엔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며 무척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으로 돌변하는 이중적인 면모가 있는 인물로서, 이는 겉으론 유사가족 공동체를 가장한 자유주의적인 가면을 쓰지만, 그 내면은 전형적인 가부장 독재자의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가령 더치가 매번 아서를 '내 아들'(My Son)이라고 부르는데, 다들 알다시피 더치와 아서는 나이차가 고작 5살밖에 안 나는 동년배로서,(더치는 1858년생, 아서는 1863년생.) 잘 봐줘도 큰형 정도 느낌인데, 그럼에도 더치가 굳이 아서를 내 아들이라고 꾸역꾸역 고집해 부르는 건, 상기한 아서의 신화적 유능함에 대한 찬사인 동시에, 그런 신화적인 힘의 화신도 내 말이라면 꼼짝 못한다, 나는 그런 신화적인 존재에게 명령하며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가부장적 도취감에서 나온 거라고 해석될 수 있겠음. 물론 더치도 분명 세계관 최상위권의 엄청난 실력자이고, 괴수 같은 단원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괴수 위의 괴수지만, 그런 오야붕 더치마저도 세계관 최강자인 아서에 비한다면야 보잘것없는 수준이고, 그래서 아서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한 거고, 그렇기에 자신조차 두려움을 품는 아서가 자신의 말이라면 하늘처럼 받드는 것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극상의 도취감을 느꼈는데, '이 놈은 나보다 강하다. 하지만 다행히, 내 말이라면 철썩같이 따른다' 라고 확신하며 늘 자기 밑이라고 생각되어 온 아서가 자신에게 반항하고, 성을 내며 명령하고, 내 말 안 들으면 가만 안 놔둔다는 식으로 강하게 나가니까 그 순간 벙쪄서 긴 정적이 흐르는 장면이 있지.아서는 내가 손떼 묻혀 길러낸 아이, 즉 나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종속된 존재인데, 그런 아서가 난생 처음으로 아들이 아닌 동등한 성인 남성으로서 자신에게 도끼눈을 뜨고 반기를 드니까, 자신의 정체성과 권위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사실에 여기서 삔또가 존나게 상해버린 것임.다시 돌아와서, 문제는 그 무모한 계획도 막상 실행에 옮기니까 아서는 그것마저도 보란듯이 성공시켜버렸다는 점임. 결국 연방군의 수송열차도 아서의 손에 탈취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아서의 분노와 반항도 자기 자신의 지나친 유능함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고, 더치의 광기에 유의미한 제동을 걸지 못했음. 이에 플레이어들은 아서가 천하무적의 화신임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천하무적의 힘이 아이러니하게도 조직을 파멸로 이끄는 원인임을 깨닫게 됨.만약 아서가 좀 적당히 유능해서, 더치의 계획을 몇 번 실패했더라면, 더치도 어느 정도 선에서 그만 현실을 파악하고, 무모한 도전을 멈췄을지도 몰랐을 일임. 근데 아서가 너무 유능하다 보니까, 더치 입장에서도 내심 "이건 좀 빡셀 것도 같은데...? 아 이건 좀 그런가..." 싶다가도, 아서가 그걸 매번 보증수표마냥 해내니까, "어? 이게 된다고?" 하면서 더 무모한 걸 강행하고, 그걸 또 해내니까 더 무모하게, 더더 무모하게, 더더더 무모하게, 제아무리 터무니없는 과대망상도 아서만 있으면 어떻게든 다 성공하니까, '우리는 상상 이상으로 큰 걸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쌓일 대로 쌓이면서, 더치는 '역시 내 비전은 완벽하다'는 오만한 자기 확신이 아예 갱단의 기본 철학으로 자리잡음.그렇게 더치는 점점 현실적 근거 대신,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존하며 거기에 갱단의 운명을 걸어버림.거듭 말하지만, 이는 아서가 어떻게든 해낼 거라는 광기에 가까운 확신이 있기에 가능했음. 아서가 있는 한, "봐라, 아무리 무모해 보여도 결국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쟁취할 거다. 아서가 증명하고 있다." 라며 더치는 그 어떤 미친 또라이 짓도 다 정당화할 수 있었고, 상기했듯이 실패를 상정하지 않는 아서의 유능함은 갱단의 번영을 가져온 동시에, 더치의 광기를 제동 없이 치솟게 만들어 갱단의 파멸을 불러오는 자충수가 되어버렸음. 그래서 블랙워터 페리 강도질이 사상 첫 실패로 되돌아왔을 때, 그 충격은 곧 몰락이라는 치명적인 연쇄효과로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겠음.사실 그 블랙워터 페리 강도질의 실패도, 마침 아서가 부재한 상태에서, 더치의 과대망상과 마이카의 무모함이 결합해 폭주했고, 존, 하비에르, 빌, 레니, 캘린더 형제 같은 실행 단원들은 걍 "일단 질러라!"에 가까운 방식으로 걍 무턱대고 덤벼든 결과였음을 고려하면, 더치가 뭔 일만 있다 하면, 아서, 아서, 아서 하면서 걍 닥치고 아서부터 찾고 하는 게 실로 이해가 됨.이번 시간에 내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임. 신화 속의 영웅들은 언제나 초월적인 과업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그 힘 때문에 파멸에 이르기도 하는데, 이는 아서도 마찬가지임. 아서의 힘은 갱단을 영광스럽게 만든 동시에, 파멸로 몰아넣는 양날의 검이었고, 이는 플레이어가 실제 게임 플레이 속에서 아서의 무적성을 피부로 체감하는 데드아이와 스토리의 비극이 딱 맞아떨어지는 지점이기도 하겠음. 자, 다들 이 늦은 시간에 긴글 읽느라고 수고했고, 다음 시간에도 또 재밌는 주제로 찾아오도록 할게. 또 보자, 게이들아!
작성자 : badassbilly고정닉
알렉산더 알레킨 2부 - 카파블랑카와의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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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킨의 체스 세계 챔피언십이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목적에 맞아떨어졌던 것이다.알레킨이 1만 달러를 모아오자 카파블랑카는 런던 규칙에 따라 공식적으로 도전을 수락하였고, 1927년 9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경기 개최에 양측이 최종 합의하였다.그리고 챔피언십 개최 몇 달 전, 1927년 봄의 뉴욕.오늘날 1927 뉴욕 슈퍼토너먼트라고 불리는, "Six Masters Tournament"가 개최되었다.참가선수는 카파블랑카, 알레킨, 비드마르, 마샬, 님조비치, 슈필만. 말 그대로 세계 최정상들만 모인 쿼드러플 라운드 로빈 대회.세계 챔피언십을 앞둔 카파블랑카와 알레킨이 모두 참가한다는 점에서 이 대회는 큰 주목을 받았고, 팬들은 이 대회의 결과를 통해 챔피언 자리의 향후 향방을 가늠하고자 하였다.그리고 그 결과는 몹시 충격적이었다.카파블랑카 우승, 14/20, 무패. 카파블랑카는 세계 최정상들을 상대로 단 한 게임도 내주지 않고 1위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우위를 과시하였다.알레킨은 2위를 차지하며 도전자격을 다시 한번 확고히 증명했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카파블랑카와의 승부 결과는 이미 뻔해보였다.이때까지의 알레킨-카파블랑카 사이의 상대전적은 총합 0승 7무 5패.알레킨은 지금까지의 커리어 전체에서 카파블랑카로부터 단 한 번의 게임조차 따내지 못했던 것이다.체스계 인사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아, 슈필만은 곧 펼쳐질 챔피언십에서도 알레킨이 단 한 경기도 따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였고, 카파블랑카 본인도 1927년 2월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칼럼에 이러한 말을 남겼다."매치 플레이어로서의 알레킨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하기 어렵다. 그는 최정상급 선수와 매치를 치러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가장 가까운 사례라면, 최근 네덜란드의 막스 오이베 박사와의 10연전인데, 알레킨은 3승 2패 5무로 이겼다. 필자는 그가 매치 플레이에 알맞은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투쟁심이 충분치 않으며, 더구나 매우 신경질적인 성향이어서, 침착하고 수완 좋은 상대와 벌이는 길고 지루한 접전에서는 이 두 성향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그러나 단 한 명, 1924년에 카파블랑카의 연승을 끊어놓았던 리하르트 레티만큼은, 공개적으로 알레킨의 승리 가능성을 논하고 있었다."마로치처럼 승리가 카파블랑카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점쟁이 노릇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경력에 어떠한 실패도 없었다는 점에서 카파블랑카가 우리 시대의 탁월한 마스터라고 말할 이유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각 선수의 특징을 철저히 연구하고, 매치에서 작용할 심리적 요인들을 고려하며, 더 중요하게는 팬들 사이에서 현실이 되어버린 '카파블랑카 무적 신화'를 걷어낸다면, 쿠바의 그랜드마스터가 재능 있는 슬라브 선수를 반드시 꺾을 것이라고 그토록 확신할 근본적인 이유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카파블랑카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기질을 가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의 야망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자체를 성가셔하기에 이런 종류의 매치를 위해 집중적으로 준비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타고난 재능 덕분에 지금의 위치에 올랐지만, 체스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천부적인 감각은 경탄스러울 정도지만, 혹독한 훈련을 감당할 에너지가 부족합니다.""반면에 알레킨은 비범하고 왕성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승부에 돌입하면 그는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고귀한 열망에 이끌리며, 앞으로 치를 매치의 중요성에 걸맞은 훈련에 자신을 몰두시켜 왔습니다..."레티의 올바른 지적대로, 알레킨과 카파블랑카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카파블랑카는 노력하지 않았지만, 알레킨에게는 체스가 삶의 전부였다.당시의 카파블랑카는 알레킨에 대해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다. "매치 플레이에 알맞은 기질", 그것이야말로 알레킨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며,전쟁과 혁명을 헤쳐나온 알레킨은 더이상 카파블랑카가 알던 이전의 조용한 아이 '티샤'가 아니었던 것이다.1927년 9월 15일, 남반구의 봄을 맞이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온 체스계가 주목하는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개막식은 아르헨티나 대통령 알베아르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고, 추첨을 통해 첫 경기에서는 카파블랑카가 백을 잡게 되었다. 첫 경기의 오프닝은 프렌치 디펜스.그리고 바로 이 첫 경기에서, 카파블랑카는 사상 처음으로 알레킨에게 패배를 당했다.그것도 백을 잡고서.모두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알레킨은 카파블랑카와의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무기를 활용했다. 병적인 기억력, 그리고 분석가로서의 능력.알레킨은 근 10여 년간의 모든 주요 체스마스터들 간의 경기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은 두 챔피언, 라스커와 카파블랑카였다.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카파블랑카가 얼마나 강한지,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그러나 동시에 카파블랑카가 신화대로 완벽한 플레이어는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카파블랑카의 체스상의 약점은, 사실 크지 않고 내가 그것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은 뿌리 뽑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인간적인—너무나 인간적인—결점들과 지나치게 긴밀한 유기적 연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알레킨이 볼 때 카파블랑카의 너무나도 뛰어난 재능은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그 재능이 카파블랑카의 한계를 결정짓고 있었던 것이다.첫째, 오프닝 신수(novelty)는 통하지 않는다.예나 지금이나 체스에서 오프닝 신수는 약자가 강자를 쓰러뜨리는 비장의 무기다. 새로운 오프닝 라인을 개발하여 내가 알고 있는 유리한 전장에서 상대를 맞이하는 것.그러나 알레킨은 과감하게 이것을 포기했다. 알레킨은 카파블랑카의 직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고 있었다.처음 보는 오프닝에서도 최선의 방어수를 찾아내는 마법 같은 능력, 마셜과의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그 천재성을 말이다.그래서 알레킨은 익숙하디 익숙한 QGD를 선택했다. 도박수를 던지지 않고, 건조하고 장기적인 포지션 싸움에서 천천히 이점을 쌓아올리겠다는 전략이었다.카파블랑카 또한 오프닝에서 우위를 취하려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이 매치는 전체 34경기 중 32경기가 QGD로 진행되었다.둘째, 포지션 판단에 부정확성이 있다.카파블랑카는 자신의 직관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애써 계산하여 최선수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직관으로 적당히 플레이함에도 그것만으로 연전연승을 이뤄왔기에.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도리어 카파블랑카의 약점이 되었다.알레킨이 볼 때 커리어 초기의 카파블랑카는 뛰어난 전술가이자 전략가였지만, 커리어 후기로 갈수록 전술가의 면모는 점차 약화되었다. 단순화를 선호하고 직관에 의존하는 카파블랑카의 스타일은 종종 철저한 계산을 통한 포지션 평가를 게을리 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여기서 나타나는 사소한 이점들을 서서히 축적하여 엔드게임까지 이어간다면 카파블랑카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카파블랑카의 강점은 엔드게임 그 자체가 아니라 유리한 엔드게임을 만드는 미들게임 실력에 있었으니까.셋째, 견고하게 버티는 상대로 점차 자신감을 잃기 시작한다.모든 상대가 그의 앞에서 손쉽게 무너져 왔기에 가지고 있는 결점.끈질기게 버티다보면 카파블랑카는 자신이 유리한 포지션에서도 점차 실수를 보이다가 무력하게 무승부를 내주곤 했으며,알레킨은 이를 이용해 불리한 경기를 여러 차례 무승부로 지켜낼 수 있었다.그렇게 철저히 대비하고 임한 챔피언십이었지만 사실 컨디션조차 알레킨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경기 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몸 상태가 완벽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던 카파블랑카와 달리, 알레킨은 경기 중 심각한 골막염을 앓았다.의사는 치료를 위해 경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치아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고, 알레킨은 단호히 치아를 포기했다.알레킨은 챔피언십 도중 여섯 개의 치아를 발치하면서도 꿋꿋이 경기를 이어나갔다. 경기는 가히 용호상박이라 할만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1경기는 알레킨이 따냈지만 3경기·7경기에서 카파블랑카가 승리하며 리드를 잡았고, 또 11경기·12경기를 알레킨이 연달아 가져가며 다시 역전했다.13경기부터 20경기는 전부 무승부가 나올 정도로 치열한 경기양상이었지만, 심리적 압박에서 점차 무너져갔던 것은 카파블랑카쪽이었다.치열한 승부가 34경기에 이르렀을 때, 알레킨이 5승, 카파블랑카가 3승을 각각 차지하고 있었고,카파블랑카가 마지막 경기에서 수세에 몰리자, 그는 경기에 출석하지 않고 편지를 남겼다."친애하는 알레킨 박사에게. 저는 경기를 포기합니다. 당신이 세계 챔피언이며, 당신의 성공을 축하합니다. J. R. 카파블랑카"알렉산더 알레킨이 제4대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알레킨 6승, 카파블랑카 3승, 무승부 25회. 총 34경기.이 경기는 먼 훗날 카르포프-카스파로프가 갱신할 때까지 역사상 최장경기 기록으로 남았다.카파블랑카는 이 패배로 큰 충격을 받아 알레킨을 위한 축하연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체스계 역시 무적이라 불리던 카파블랑카의 갑작스러운 패배에 크게 술렁였고, 카파블랑카의 일시적인 기량 저하로 인한 패배가 아닌지 의심하는 팬들도 더러 있었다.카파블랑카는 곧 재도전 의사를 밝혔고, 알레킨도 런던 규칙에 부합하는 한 카파블랑카와의 재대결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기에,알레킨과 카파블랑카의 재경기는 체스계에서 가장 기대되는 이벤트로 떠올랐으며, 다음 승부는 머지 않은 시일 내에 성사될 것으로 보였다.그러나 이들의 사이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1928년 2월, 카파블랑카는 FIDE를 끌어들여 챔피언십 규정의 개정을 시도했다. 무제한 대국이 선수들의 체력에 부담을 주며, 장기간의 경기 일정이 후원자들에게도 부담스러우니 전체 대국을 16국으로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본인이 도입했던 각 40수당 2시간 반의 시간제한 역시 각 30수당 2시간으로 바꾸자고 주장하였다.(1928년 3월 18일 뉴욕타임즈 기사)알레킨은 즉시 강력히 항의했다. "경기가 끝난 후 저는 당신에게 첫 경기과 정확히 같은 조건에서만 재경기를 할 의사가 있다고 분명히 밝혔고, 당신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은 마음을 바꾸어 세계 챔피언전 규칙을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경쟁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경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스스로 만든 규칙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저는 당신을 상대로 6승을 거두었으며, 앞으로도 제가 우월하다고 인정할 선수는 저를 상대로 6승을 거두는 선수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챔피언이라는 이유로 경쟁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만들어 놓고, 패배 후에는 도전자에게 더 쉬운 조건과 우연성을 도입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체스계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는 점을 확신합니다."카파블랑카는 예상치 못한 강한 반발에 맞닥뜨리자 이후의 챔피언십에 대해 말했을 뿐이라며 한발 물러섰고, 자신은 런던 규칙에 따라 도전할 것임을 다시 한 번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두고두고 둘 사이의 앙금으로 남았다.알레킨은 이후 FIDE와의 협의 과정에서, 챔피언십의 규정을 바꿀 의향이 있지만 카파블랑카와의 재경기만큼은 런던 규칙에 의거하여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피력하였다.FIDE 역시 이러한 알레킨의 요구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알레킨은 사실 줄곧 카파블랑카에게 묵은 감정이 있었다. 알레킨은 1만 달러라는 막대한 후원금을 모으며 정말 갖은 고생을 다했고,카파블랑카가 무리한 조건을 계속 고수했던 것은 손쉽게 챔피언 자리를 지키려는 방책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그런 생각을 하던 터에, 챔피언 자리를 빼앗기고 나니 자신이 만든 규칙을 바꾸겠다고 하는 것은 알레킨의 눈에는 폭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알레킨은 카파블랑카와 함께 출전하는 토너먼트에는 고액의 출전료를 요구하며 사실상의 출전 거부 선언을 했다.사실 그럼에도 여전히 재경기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카파블랑카는 팬이 많아 후원금 1만 달러쯤은 금방 동원할 수 있었으니까.그러나 카파블랑카의 복귀전, 1928년의 바트 키싱겐 토너먼트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당연히 카파블랑카의 우승을 기대했지만, 놀랍게도 알레킨의 오랜 지인 보골류보프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며 깜짝 우승을 차지했던 것이다. (보골 8/11, 카파 7/11)보골류보프도 오래전부터 세계챔피언 후보로 거론되던 최상위권 플레이어 중 하나였고, 이 승리는 알레킨이 보골류보프의 도전을 먼저 받아들일 충분한 명분이 되어주었다.1929년 9월, 알레킨은 11승 5패 9무로 보골류보프에게 승리를 거뒀고, 성공적으로 챔피언 자리를 지켜냈다. 그 다음 차례였던 카파블랑카는 즉시 알레킨에게 공식적으로 도전장을 던졌고, 알레킨은 도전을 수락했으며, 1930년 가을로 경기 날짜가 잡혔다.그러나 이번에는 또다른 사건이 전세계를 뒤흔들었다.1929년 말,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후원자가 차고 넘치던 카파블랑카조차도 이 상황에서는 적시에 1만 달러를 조달할 수 없었다. 후원을 약속했던 재력가들도 곧 말이 바뀌기 일쑤였다.제때 자금을 모으지 못한 카파블랑카는 1931년 초로 연기를 요청했고, 알레킨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카파블랑카는 얼마 안 가 자신의 이전 요청이 “행정적 착오”였다며, 1931년 말로 경기를 연기하고자 한다고 또다시 요청하였다. 알레킨은 거듭된 연기 요청에 질려 "앞으로는 연맹이나 체스계에서 인정받는 후원자의 공식적인 재정 보증 하에서만" 카파블랑카의 도전을 고려할 것이라는 통보를 날렸다. 이때를 기점으로 카파블랑카와 알레킨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져 말조차 섞지 않는 사이가 되었고,챔피언 자리를 탈환할 희망이 사라진 카파블랑카는 크게 좌절하여 몇 년간 체스계의 경쟁에서 떠나기까지 하였다.알레킨과 카파블랑카와의 재경기는 이렇게 일시적으로 좌초되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알렉산더 알레킨의 챔피언 자격을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1930년대 초, 알렉산더 알레킨의 선수로서의 전성기가 찾아왔던 것이다.1930년 산레모 토너먼트, 13승 2무(14/15), 우승. 2위 님조비치는 10.5/15. (*알레킨의 총이 탄생한 대회.)1931년 블레드 토너먼트, 15승 11무(20.5/26), 우승. 2위 보골류보프는 15/26.알레킨은 프랑스 국가대표(1927년 국적 취득)로 출전한 두 차례의 체스 올림피아드에서도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며,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렸다.세계 챔피언의 지위와 커리어 정점을 달린 퍼포먼스는 알레킨에게 막대한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세계일주까지 다녀오며 삶의 가장 행복한 한때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앞선 챔피언들에게도 그랬듯이, 누구에게나 끝은 찾아온다.새로운 세대, 새로운 라이벌들.1930년대 중반, 체스계의 세대교체 물결이 닥쳐오고 있었다.
작성자 : 김첨G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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