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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ㅇㅇ고정닉
북한산성입구-북한산 백운대-한강 다녀옴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climbing&no=256467 햄들 북한산 등산코스 평가좀 - 등산 갤러리북한산 탐방센터에서 백운대 올라가서 우이동으로내려와서 시내좀 걷고 경복궁 쯤에서 산책 끝낼건데 어떰? 우이동으로 내려오지말고 바로 경복궁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있나?gall.dcinside.com저번주에 북한산 올라가는 루트 물어봤는데 댓글을 생각보다 많이 달아 주셔서 후기 남김. 초록 보행 빨강 대중교통지도상으로는 총 16km정도 걸은 것으로 나옴.집에서 땅콩버터 한숟가락, 물 한잔 마셨음. 게토레이 한 병 들고 출발. 이때 주변에서 물 한 병 더 사서 올라갔어야했다...11:30(사진은 장축 3000, 품질은 1mb 정도로 줄여서 화질이 많이 떨어졌음.)천길 끝나고 산으로 들어오는데 바로 보이는 나무 위에 벌집아줌마들 테이블에서 간식 먹고 있는거 뒤에서 쳐다보는 들개들.13:00 게토레이 진작에 다 마시고 목말라 죽기 직전.나는 올라갈때 반병 마시고 내려갈때 반병 마시면 되겠지? 했는데 날씨를 생각 못했음.이때쯤 부터 전해질이 부족해진건지 다리가 지치기 시작함. 북한산에는 이렇게 생긴 돌 통로들이 있는데 여기가 바람 통로인지 엄청나게 시원함. 한 70%쯤 올라왔을때 보인 표지판.북한산성에서 다리를 앞에 두고 백운대 가는 길이 두가지 있다. 왼쪽, 가파른길 2km 코스랑 오른쪽, 완만한길 4km코스가 있다. (위 표지판 사진과는 무관함)오른쪽길로 올라왔는데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한다. 아 이제 쭉 올라가나? 싶으면 다시 내리막.오히려 4km 코스가 2km 코스보다 더 힘든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 가파른길은 가본적 없어서 모름.한편으로는 코스에 변칙성 때문에 재미가 풍부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그나저나 아래 둘레길에서는 사람이 그나마 있었는데 올라올때는 백운대 올라가기 바로 직전 돌문 전까지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14:30 백운대 정상. 생각보다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올라오면서 한 세명 내려오고 내가 올라갔을때도 두명인가 밖에 없었다. 평일이라 그런듯?그리고 백운대 정상 냄새 왜 이럼? 무슨 구리구리한 똥냄새 남. 돌바닥에 이상한 때가 잔뜩 끼어있음.러브버그 시체들. 구석구석에 잔뜩잔뜩 쌓여있었다. 날라다니는건 없었음.물도 없는데 이제 어떻게 내려가지? 라는 생각만 들었다.이 날 먹은게 땅콩버터 한숟가락, 물 한잔, 게토레이 한 병밖에 없어선지, 다리는 이미 털려있고 탈수는 확실.밧줄 잡고 올라올때 조금만 빠르게 올라갈려고 하면 심장이 조이면서 적당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백운대 바로 밑 돌담에 돌문. 바람이 통하는 길이라 엄청 시원하다.우이동 백운대탐방지원센터 쪽으로 하산.하산하자마자 바로 물이나 사 마셔야지 벼르면서 내려가는데 인수암이라는 사찰이 있었다. 물과 식혜를 주신단다.일단 들어가서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청소를 하시면서 똑같이 내 눈치를 보고 계셨던 아저씨가 알아서 떠 마시라고 안내를 해주셨다. 잘 마시겠습니다.안내대로 식혜를 잘 저어서 마시고 있는데 또 다른 분이 내 밥알 하나 없는 식혜를 보시곤 "잘 저서야 하는데..."라고 말하시면서 가신다. 밍밍한게 내가 잘 못 저어서 그랬나 보다.근데 국자가 너무 짧아서 땀에 절여지고 산 타느라 더러워진 손이 식혜랑 닿을까봐 팍팍 젓지를 못했다.날씨 탓인지 켜지지 않은 온육수통에 든 물은 뜨거우리만치 미지근하고, 날씨 탓인지 냉육수통 안에서 식혀진 식혜는 얼음장 같았다.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에서 중도를 찾아 열반에 다다르라는 불교의 깊은 뜻인가? 사람을 보면 짖는 인수.인수암 정면. 4000만화소16:30 하산 완료.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지만 북한산 처음 올라 가본것 치고는 별 탈 없이 마무리 했다.사람들이 이 우이동 백운대 코스를 많이 가는 이유를 알겠다.내가 올라온 반대편 북한산성 코스에 비하면 정말로 좆밥임... 길이도 짧고 발 디디는것도 어렵지도 않고 오로지 계단만 있어서 난이도랄것도 없다.유일한 문제는 우이동 시내에서 여기까지 올라오고 내려오는게 귀찮다는거. 주말에는 택시 올라오는 방향 인당2천원 내려가는 방향 1500원 받고 사람 다 차면 태워준다고 한다. 여기는 작은 마을버스 한대가 시급하다. 이때부터 허벅지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내리막이라 더 했다.17:20 허벅지, 종아리가 한걸음마다 뭉쳐서 포장길 내려오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처음 와 본 우이동 시내는 요즘 차들이 돌아다니는 20년전 시골이었다.북한산우이동 우이신경전철-신설동 2호선-건대입구 7호선-자양역-뚝섬18:30. 편의점에서 요거트 하나 사먹었다.한강 동쪽 북단에 너구리 많이 보이더라.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도 않음. 뚝섬에서 옥수역까지 걸음.체력적으로는 반포한강공원까지도 걸을 수 있었는데 다리 근육이 뭉친 관계로 지하철 탐.옥수역 3호선- 을지로 3가 2호선- 신촌신촌 로터리 이마트에서 물 한병 사 마시면서 밑으로 내려와, 경의선 숲길을 걸어 홍대, 연남동에서 잠깐 걷다가 마무리. 22:30딱히 뭐가 먹고싶지도 않아서 물 마시고 잠.북한산 백운대 파노라마. 서쪽방향. 사진 중심부에 고양 스타필드가 보인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사회주의 밑바닥에서 자본주의 꼭대기까지
중국의 워렌 버핏 리 루 (Li Lu) 리루는 1966년 4월 중국 탕산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교육 받은 공학자, 어머니는 부유한 지주의 딸로 식물학자였음. 원래라면 부유한 집안의 귀한 자식으로 컸겠지만 태어난지 한달만에 그의 운명이 뒤바뀌게 됨. 문화대혁명이었음. 리 루의 부모는 부르주아 지식인이라 무산계급의 적으로 매도되어 먼저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어머니가 노동수용소로, 이후에는 해외 라디오 채널을 듣던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려 "재교육"을 위해 탄광으로 보내짐. 다행히 부모님이 끌려가기 전 리 루의 양육자를 구할 돈을 친지에게 건낼 수 있었고 아버지의 친구인 다파라는 문맹의 광부가 리 루를 맡아줌. 다파는 리 루가 8살이 될 때 탄광사고로 사망함, 홀로 된 다파의 아내 다마가 6명의 아이들을 부양해야 했음. 15살이었던 광부의 어린 아들인 라오다가 아버지를 대신해 탄광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감. 리 루의 부모는 "재교육"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 왔고 어색한 재회를 하게 됨. 탕산대지진 마오쩌둥(모택동)이 죽기 몇달 전의 새벽, 탕산에 진도 7.6의 대지진이 발생함. 사람들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줄 알았다고 함. 운 좋게도 리 루의 가족은 모두 살아남았지만 그를 맡아주었던 양어머니인 다마와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음. 리 루는 현장으로 달려감. 집은 무너져 있었고 여섯 아이들의 숨이 붙어있었지만 도움을 주지 못해 세상을 떠남. 오직 장남인 라오다만이 살아남았으나 하반신이 전부 뭉개졌음. 탕산 대지진은 역사상 세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됨. 라디오 선전으로 마오쩌둥 정권이 폐허가 된 마을을 돕고 있다 했으나 실제 군인과 당의 간부가 아니면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걸 보고 정부에 대한 혐오감이 생김. 리 루는 다시 혈육과 살면서 할머니의 지도를 받게 됨. 할머니는 그 도시에서 최초로 대학교육을 받은 여성들 중 하나로 그에게 정부를 이기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많이 읽고 많이 배우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음. 천안문 항쟁을 주도하다 1985년 리 루는 난징대학에 입학해 반도체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함. 난징은 중국 동부 장쑤성의 성도로, 수도 베이징에서 1000km 떨어져 있음. 난징 대학에서 리 루는 사실 공산당원이었다고 함. 종교적 숭배는 싫었으나 세상을 바꾸려면 공산당에 들어가 내부에서 개혁을 해야한다고 여겼기 때문임. 곧 환멸을 느끼고 당을 탈퇴하게 되지만 개혁이 가능할지 여전히 궁금했음. 몇년 후인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호요방)이 사망함. 후야오방은 정치개혁을 주장하며 마오쩌둥, 덩샤오핑(등소평)과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을 함께한 사람이었음. 그의 죽음은 전국적으로 추모의 물결을 일으킴. 난징대학에는 후야오방 생전 업적을 찬양하는 대자보가 붙음. 그러다 다음 날부터 추모 구호와 대자보는 교육과 경제의 위기, 도덕성의 결여, 만연한 부패, 개혁에 반발하는 지도층, 덩샤오핑의 독재, 언론의 자유 억압 등 시국에 대한 비판으로 바뀌기 시작함. 천안문 광장은 수도 베이징에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시위 장소가 됨. 난징에 있던 리 루는 주머니에 속옷만 넣고 기차를 타서 4월 27일 베이징에 도착함. 공산당이 인민일보에 학생 운동을 반당, 반정부 반란으로 낙인 찍은 4월 26일 사설이 나온 지 하루 만이었음. 신분증도 없고 난징 출신이던 그는 다른 이들에게 프락치로 오해를 받았는데 다행히 천안문 시위의 정신적 지도자로 알려진 차이링이 리 루를 믿어주었고 옹호 해줌. 시위 도중 난징에서 올라온 여자 친구 자오밍을 천안문 광장에서 만나자 둘은 즉석으로 결혼을 결정함. 시위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음. 마침내 탱크가 천안문 광장을 습격함. 리 루는 지명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다 밀수꾼들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홍콩으로 밀항한 뒤 프랑스로 망명하였음. 홍콩에서 천안문 시위 참여 학생들을 국외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던 "옐로 버드 작전"의 도움을 받음. 이들은 총 400명이 넘는 반체제 인사들의 비자 신청을 대행하고 홍콩을 거쳐서 서방 국가로 밀입국 시킴. 원래는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하였지만 미국측에서 거절함. 그들을 받아준 유일한 나라는 프랑스 뿐이었음. 결국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고 운 좋게도 메리 데일리라는 사람을 만나 숙식할 곳을 구할 수 있었음. "내가 천안문 광장에서 탈출하자 모든 이가 나에게 '중국의 민주주의 전망은 어떻게 되는가'와 같은 심오한 질문을 던졌어. 메리는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게 머물곳은 있는지, 갈아입을 옷은 있는지 묻더라고. 당연히 'No'. 미국에서 처음 발을 디딘 6개월 동안 12명이 공유하는 타운하우스인 메리의 집 거실에서 신세를 졌어." 매일 밤 다른 사람들이 각자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실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고 함. 밤에 천장을 보며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이 낯선 땅에서 영어 한마디 못하는데 어떻게 살까 생각했음. 이전에 난징 대학에서 3년 반 정도를 공부했지만, 당연히 이전 성적표를 찾을 수 없었음. 다시 공부의 원점으로 돌아간 셈. 이제 그의 할아버지가 등장할 차례임. 그의 외할아버지 주치산 (Zhu Qi Xan)은 컬럼비아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음. 리 루가 한 살일 때 (문화대혁명 기간에) 감옥에서 돌아가셔서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출판하지 않은 많은 원고를 남겼고 그걸 보고 컸다고 함. 할아버지를 존경했던 리 루는 컬럼비아 대학의 어학 프로그램에 등록해 영어를 배움. 여름 동안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영어 수업을 듣고 가을이 되자 그는 일반 학부에 배정되어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음. "뉴욕은 내게 완전히 낯선 곳이었어. 전에는 이런 경험을 한번도 못해봤지. 여긴 모든 종류의 자유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생기더라고. 처음 왔을 땐 영어를 모르니까 외로웠는데 운 좋게도 메리 데일리를 만나고, 메리를 통해 트루디 스타일러(배우, 가수 스팅의 아내)와도 만났어. 어느 날 트루디가 집에 찾아와 소개를 받았는데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몰랐지. 나중에 스팅(가수)을 만났는데 들어본 적도 없어. 그냥 둘 다 참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트루디 스타일러는 리 루와 만났을 때 스팅의 옷으로 가득 찬 가방을 선물하고, 리 루가 책을 쓰고 런던의 출판사를 방문하는 걸 도왔으며, 후에 리루의 책에 대한 영화 판권을 사서 <산을 옮기다 (Moving the Mountain)> 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등 그의 인생의 중요한 역할을 함. 리 루는 책의 인세와 강연료로 번 돈을 주식에 투자. 불장을 타고 생활비와 등록금에 필요한 12만 5000달러(약 1억 7000)를 마련할 수 있었음. 버핏과의 만남 "항상 마음 한구석에 여기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 됐는데 당시에는 성공해야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저 먹고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했어. 난 공산주의 중국에서 자라서 내 이름으로 된 돈이 없는데 갑자기 거액의 학자금 대출이 생긴 거야.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두 푼이라도 벌어보려고 노력했어. 미국에 온 지 2년쯤 됐을 때, 사정을 아는 친구가 [진짜 돈 벌고 싶으면 이 사람이 돈 버는 법을 잘 아니까 가서 들어봐]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어. 그냥 '뷔페 (buffet)'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 그래서 공짜 점심과 함께 하는 일종의 강연이라고 생각했지! 점심도 공짜로 주는 돈 버는 강의라니 좋네 싶어서 갔죠. 그런데 점심은 없고 "버핏 (Buffett)"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만 있더라고." 공짜 뷔페가 없어서 실망했지만 가치투자라는 개념은 리 루한테 큰 충격을 주었는데 눈 앞에서 불이 번쩍 켜지는 것 같았다고 함. 열심히 읽고 계산해 잘 판단하면 틀렸다고 해도 크게 손해 보지 않으면서, 맞으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부분이 매력적이었다고. 버핏의 강의를 듣고 리 루는 학자금 대출을 활용해 주식에 투자해 1996년 졸업할 무렵에는 100만달러(약 13억 5000만원)를 손에 쥐게 됨. 그러면서 컬럼비아 대학 최초로 경제, 경영, 법학의 3개 학위를 한번에 취득하며 졸업함. 졸업한지 1년도 안되서 헤지펀드인 히말라야 캐피털을 설립하는데 1997년 설립 첫 해 아시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19% 손실을 입게 됨. 얼마 안 가 최대 출자자 중 한 명은 자금을 빼버림.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폭락한 한국과 일본의 회사에 투자를 해 손실을 회복했고, 2000년대 중반 운용자산 규모가 1억 달러(1400억원)가 됨. 리 루의 배경은 서구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큰 돈을 버는 중국의 반체제 인사라는 독특한 인물상을 만들어 냄. '자유의 투사'에서 '맨하튼의 여피족'이 된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음. 2003년 리 루는 인권활동을 통해 알게 된 여성의 초대를 받아 점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성의 남편이 버크셔 해서웨이의 이사였음. 거기서 버핏의 오른 팔 찰리 멍거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 마오타이주, BYD의 주가가 오르기 전 투자에 성공해 엄청난 성공을 거둠. (버핏에게 BYD 투자를 권유한 게 리 루) 지금은 19년동안 연간 평균 19%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180억 달러(약 25조)를 굴리는 회사의 수장임. 이제는 혁명가가 아닌 2002년 당시 리 루는 BYD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했어도 공장에 방문할 수가 없었음. 2008년 리 루는 중국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사의 지분을 친정부인사에게 팔아 넘기며 친정부 행보를 시작함. 그리고 2010년 천안문 사태와 관련된 지명 수배한 21명 중 재입국을 허용한 첫번째 인물이 됨. 이후에도 여러 번 중국에 방문해 베이징 대학교 같은 명문대에서 강의를 하고 기업탐방을 함. 2014년 웨이보에 중국의 전례 없는 경제 성장은 '비범한 재능과 실행력'을 갖춘 정부 덕이라고 찬양함. 그렇게 천안문 시위 주동자라는 경력에도 불구하고 리 루는 중국과 미국 두 나라 모두에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로 책을 내고 강연을 다니며 "셀러브리티"가 됨. 천안문 시위의 주역이자 그의 두번째 결혼식에 주례를 선 왕단은 그와 연락한지 오래 되었다며 리 루가 중국에 들어갈 수 있게된 뒤부터 중국 정부에 협조하기로 마음 먹었고 이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이라고 비난함. 또한 그가 이룬 부는 천안문 시위의 경력으로 얻은 것이고 중국 정부가 그를 천안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게 실수였다고 인정한다는 증거로 선전한다 말함. 이 취재에 응한 뒤 왕단은 성추행 미투 나와서 국립 타이완 대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남. (본인은 부인) 리 루는 자서전에 혁명가 동지들과 천안문 50주년에 다시 그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썼음. 서로 손주들을 데려와 소개하고 그간 쓴 일기장도 돌려보자 약속했다고. https://www.youtube.com/watch?v=L6kQmoAke2A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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